다시 한 번 건배
우리의 인사는 이 정도면 되었다.
Lost Memory
“또다시, 또! 제대로 풀린 게 하나도 없는데 놓아주라고 하는군. 대체, 대체 언제까지 당신네들이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수고해주시는 만큼이라 생각합니다만.”
눈앞에서 피를 토해내듯 갈라진 목소리로 기함하는 형사의 기세가 무색할 만치 평온하게 답했다. 갈색기가 도는 곱슬 머리칼에 퀭한 눈을 가진 사내, 네이슨 제트윈. 오래 전부터 내 주위를 마크하며 뒤를 캐내던 형사였는데, 어찌 제대로 된 건수를 잡은 적이 없는 자였다. 아니, 잡았다 하면 한 발 먼저 조직에서 처리했기 때문에 일개 형사에 불과한 그가 손을 쓰기란 어려웠을 터였다. 결국 기어코 내 뒤를 밟다가 현장을 목격할 뻔했지만, 후방을 지키고 있던 제 솔다토에게 뒤통수를 맞아 기절했더라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경찰의 목숨은 건드리기 쉬운 게 아니라 놓아줬다지만 이리 애먹이는 자가 또 없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할만도 하건만. 꼭 이런 부류가 있었다. 어떻게든 비리를 잡아서 캐내면 모두 잘 풀릴 거라 착각하는 자들. 희끄무레한 천장의 조명과 철제 책상, 불편한 의자에 앉아있는 상황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수갑조차 풀린 지금, 그의 열불이 들끓도록 보란 듯 다리를 꼬아 앉아있었고.
“네이슨 제트윈.”
“…….”
“이 상황을 당신이 만든 거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건 어디까지나 ISCI의 계획을 방심했던 우리의 실수였다. 그러니 다음부턴 이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명확하게 이르는 말이었다. 그의 얼굴에 큰 분노와 더불어 하관이 안쓰러이 떨리고 있었다. 결국 그가 욕설을 지껄이며 빈 의자를 발로 내쳤고 큰 소음이 울렸다. 시끄러운 사람이란 감상이 스칠 무렵,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열리며 이름이 호명됐다. 살짝 벌려진 사이로 조직원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체사레 델루치 씨.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이제 불편한 의자와도 안녕이었다.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옆을 지나치려는 찰나. 체사레 델루치!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실, 사진과 서류로는 자주 접했으나 제대로 마주하기란 처음인 남자였다. 그의 현란한 표정 변화는 보지 못했던 것이기에 조금 흥미가 더해진 탓도 있었지만 실상 마주하니 퍽이나 집념이 강한 남자였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더는 …도망갈 수 없을 겁니다.”
“부디,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 알량한 목이 떨어지기 전에. 입꼬리를 올려 웃었으나 웃음은 짧았고 그와 좁은 방 안에 함께 있는 시간도 짧았기에 뒤편에서 욕설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밤의 소동이 지나간 밤은 어느덧 새벽의 동녘을 품고 있었다. 시간 참 빠르군. 최근 들어 신경 긁히는 일밖에 없어 이전 밤처럼 자꾸만 입안이 버석하게 말라갔다. 담배가 말렸다. 정말이지, 금연은 꿈도 못 꾸겠다. 하필 갖고 있는 것을 다 털린 마당에 담배갑도 남아있지 않으니 그것이야말로 아쉬울 노릇이었다. 입가를 가벼이 쓸어내며 돌아갈 길을 찾고 있는 도중.
“이거 찾아요?”
돌연 앞에서, 흰 담배 한 개비를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담배는 내가 가장 자주 피는 종류였고, 그걸 들고 있는 사람은… 염색과 펌으로 웨이브진 붉은 머리칼과 스모키한 눈화장, 마른 장미색 립스틱의 강렬한 인상이 잘 어울리는 여자. 이제 도통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얼굴이기에 눈가가 느릿하게 홉뜨였다. 마담.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당황이 어렸으나 정작 본인은 살갑게 눈가를 휘어 웃으며 에잇. 내 입안에 담배를 꽂아넣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멋대로 라이터까지 꺼내서 불을 붙여주는데 가만히 받지 않으면 두 개, 세 개라도 먹여줄 사람이었기에 얌전히 불씨를 건네받았다.
“여행 떠났다며.”
“너나 잘하라길래 본인은 얼마나 잘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서 왔지.”
“타이밍 못 맞추긴.”
그가 짓궂게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가 접는다. 마담의 성격상 막 큰 건물에서 나온 내게 궁금한 점이 많을 법했으나 그런 것치고 제겐 조직의 일을 캐묻는 법은 없으니, 얘기하자면 편한 사람이었다. 반가움도 잠시, 계속해서 한 자리에 있는 취미는 없었기에 가자는 듯 턱짓하며 걸었다. 향하는 목적지는 분명했다. 이제 그가 뉴욕으로 돌아왔으니 아마도 갈 곳은 마담의 술집일 터였다. 그러나…. 제 팔을 잡아끄는 손길에 다시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깨가 끌렸다. 여기로 가요, 여기로. 그가 말갛게 웃으며 데려간 곳은 고즈넉한 구석의 카페였다. 갈색의 나무 인테리어가 어울리는 곳이었고 특유의 커피향이 짙게 배어나는 장소. 그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인슈패너를 주문했고 나는… 딱히 시키고 싶은 게 없었기에 주문을 물렀다. 차라리 술집이 낫지. 그러나 마담이 안 된다며 기어코 아메리카노 한 잔을 더했다. 점원이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 그가 살긋살긋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지냈는지 안 궁금해요?”
“적당히 살아가고 있으려니….”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
대체 뭐하자는 거야. 미간에 그림자가 지자 코미디를 본다는 양 웃어넘긴 그가 여행을 다니며 겪은 여러 이야기를 보따리를 풀 듯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매치기에게 지갑을 뺏길 뻔한 일, 프랑스 억양을 못 알아들어서 한겨울에 아이스커피로 주문한 일, 숙소에서 자다 일어나 석양을 보고 기분이 좋았던 일…. 온갖 파란만장했던 일상과 사소한 즐거움을 내게 전해주려는 듯이, 하루하루의 기록을 꼭꼭 눌러담아 놓은 듯이. 간만의 평화로운 대화라 그런지 혹은 오래도록 본 이가 앞에 있어 그런지 무거웠던 어깨가 조금 느른하게 풀린 느낌이 들었다. 마담은 하릴없이 아인슈패너의 크림을 돌돌 젓다가 커피 한 모금을 쏙 빨아들였다.
“체사레. 난 이제 이 뉴욕에 오지 않을 거예요.”
“역시 그 말 때문에 온 게 아니잖아.”
“후후, 아쉬워요? 세상을 여행하면서 생각했거든요. 더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 뭐, 그런 깨달음이요. 술장사는 그 애한테 완전히 물려주고….”
“완전히 손을 뗀다는 건가…….”
“그렇죠. 그러니까.”
당신 앞에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마담의 목소리가, 아니. 네일리 세너의 목소리가 조금 가벼워진다. 무거운 짐을 덜어낸 사람처럼. 아인슈패너의 커피가 반쯤 닳았을 즈음이었다. 네일리의 헤이즐색 눈동자가 푸스스한 웃음으로 접힌다.
“체사레. 체사레 델루치 씨. 우리 건배 한 잔 할까요?”
“카페에서…?”
“뭐, 어때요. 그날은 술이 있어서 했나.”
그리고 난 지금 완전히 취한 것 같거든요. 네일리가 아인슈패너의 둥그런 잔을 높게 들었다. 그러자 정말로 은은한 조명에 가려 와인잔처럼 보이지 않는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제 앞으로 나온 아메리카노 잔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 마지막이니 어울려주자.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번엔 뭐라고 할까요? 헤이즐향이 듬뿍 묻어날 것 같은 눈으로 내게 눈꺼풀을 깜빡거리다 활짝 웃었다.
“역시 이게 좋겠다.”
우리의 남은 삶을 위하여, 건배!
네일리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둘밖에 없는 카페에 울렸고 이어 얇은 유리잔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커피를 원샷한 네일리가 기분이 좋은 양 와하하 웃었으나, 웃음기가 점점 가라앉았고. 호탕했던 얼굴은 이제 조금씩 열을 잃고 있었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그를 바라본다. 그럼 그렇지. 어쩌면 자신보다 더욱 아쉬워했을 테고, 마담이었을 때도 단골을 잃었을 땐 그들의 생사를 가장 먼저 걱정하던 이였다. 그래, 어쩌면. 이 결정을 했을 때 떠나보내야 했을 많은 인연에 가장 먼저 눈물 흘렸을 이가 아닌가.
“난 이제 정말 갈 거예요. 그러니 당신도 언젠가는….”
“…….”
“아니, 아니다. 너무 참견인가. 난 이미 건배사를 한 걸로 몫을 다했거든요? 이제 당신도 당신 몫을 해야죠.”
가방과 겉옷을 챙겨든 그가 당당하게 일어난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자리는 내 몫인 걸로. 그런 건가.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엔 왠지 모를 애틋함이 담겨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감추려는 듯 환한 웃음으로 뒤바뀐다. 정말로 인사를 하려 온 것이었다. 마지막이라. 굳이 답하지 않으며 그저… 조용히 웃어줄 뿐이었다. 네일리, 당신도 알고 있을 테다. 그와 내 자리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쯤은. 그러니 더는 말하지 않는 거겠지.
“그럼 먼저 갈게요. 체사레. 잘 있어요.”
“……그래, 돌아오지 말고.”
우리의 인사는 이 정도면 되었다.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걸음은 10년 전의 것보다 훨씬 가벼웠기에, 이 정도 인사면 되었지. 그가 카페를 나서고 유리창 너머 인파 속으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 번도 돌아보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며 느른히 눈가를 내리감는다. 양지의 사람들과 섞여서, 그렇게 끝내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더는 쫓지 않았다. 대신 입안이 버석하게 마르니, 역시 커피보다는 술이 당겨온 이유였다. 다만 오늘은 마담의 술집이 아닌 다른 곳을 찾고 싶었다. 어디가 좋을까. 머릿속에서 수년간 들어왔던 네일리의 목소리를 한 편에 묻어두고. 습관이 된 걸음이 어두운 곳을 찾아 들어선다.
그래요, 체사레. 난 이 술집의 마담인 네일리 세너예요.
초면에 죄송하지만 단골이 되어주셨으면 하는데, 어때요?
좋아요. 그럼 죽지 않고 오래오래 보는 거예요.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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