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간

악몽

#한달째_관계캐를_죽이는_꿈을_꾸고있다

자캐 창고 by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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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분명 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네 가슴에 칼을 꽂고 있지는 않을 터이니.

기울어진 칼자루에서 핏방울이 똑- 떨어졌다. 핏방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연인의 입술을 붉게 물들이더니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새하얀 눈밭 위로 퍼지는 새빨간 피. 정말 이상하게도 에린에 오기 전 읽었던 동화책이 생각났다.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가진 공주님의 이야기. 비록 그는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흑단 같은 머리카락도, 공주님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잠들어버린 공주님은 왕자님의 키스로 깨어나던데, 이곳에 누워있는 그는 아무래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아, 그랬다. 심장을 관통했지. 일어날 리가 없다.

꿈속의 자신은 그의 시체를 한참을 내려다보다 말없이 가슴에 꽂힌 칼을 잡아당겼다. 미동도 없던 몸뚱이가 들썩하더니 약간의 피와 함께 칼이 뽑혔다. 거울 같은 칼날엔 연인의 피를 뒤집어쓴, 무표정한 제 얼굴이 비쳤다.

꿈은 거기서 끝났다.

눈을 뜬 시각은 여느 때처럼 새벽이었다. 이 꿈을 꾼 지도 벌써 몇 번째일까? 이제는 외울 지경이 된 악몽을 곱씹으며 몸을 일으킨 필레인은 곁에 누워 잠든 로간을 내려다보았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살며시 뺨을 감싸자 손바닥에 몽글몽글한 따스함이 느껴졌다.

살아있구나. 그제야 새어 나온 안도의 한숨은 어두운 방 안에서 소리 없이 흩어졌다.

"…으음…."

뺨에 닿는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로간이 몸을 뒤척였다. 얼른 손을 떼어냈지만, 로간은 인상을 푹 쓰더니 손가락으로 제 뺨을 벅벅 긁곤 다시 이불을 끌어안고 잠에 빠졌다. 사랑스러운 사람 같으니. 필레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가 금세 사라졌다. 조금 전 꾼 꿈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같은 꿈을 꾼 터라 내용 자체에는 익숙해졌다지만, 사랑하는 연인을 죽이는 꿈이 기분 좋을 리 없다.

사실 익숙해졌다는 느낌 자체부터 끔찍했다. 정말로 말이다.


그 꿈을 처음으로 꾼 날. 잠에서 깬 필레인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토기에 입을 틀어막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한참 동안 변기를 붙잡고 목에서 피 맛이 날 때까지 구역질을 하고 있자, 덩달아 잠에서 깬 로간이 놀란 눈으로 달려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필린! 괜찮아요?"

동그랗게 뜬 밤색 눈동자엔 걱정이 한가득 어려있었다. 무슨 일 입니까. 나쁜 꿈꾸셨어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에게 필레인은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고개를 저었다. 차마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던 탓이다. 

내가. 감히 내가. 이 손으로 당신을 죽이는 꿈을 꾸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필레인은 억지로 속을 게우느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고장 난 축음기처럼 삐걱대는 목소리가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미안해요, 깨워서."

"…하지만."

"괜찮습니다. 세수만 하고 돌아갈 테니 방에 먼저 가 계십시오."

그 한마디에 짙은 갈색빛 굵은 눈썹이 매섭게 일그러졌다. 왜, 어째서 당신은 모든 걸 혼자 감내하려 하는 겁니까?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내리누른 로간은 조용히 한발짝 뒤로 물러서 캄캄한 복도로 나갔다. 그런 연인의 얼굴에서 차마 지우지 못한 씁쓸함을 발견한 필레인은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대신 바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괜히 혼자 계시지 말고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도 로간은 한참을 더 머뭇거리고서야 제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가 떠나고 화장실에 홀로 남은 필레인은 세면대로 가 얼굴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고서야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아주 조금씩 가라앉았다. 두근대는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몇 번이고 세수를 하던 그의 눈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어떤 표정이라고 콕 찍어 말할 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 심장이 가라앉고 나니 이제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체. 어째서. 왜 이런 꿈을.

고개를 떨군 필레인은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세면대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씻기 시작했다. 얼음장 같은 물에 손끝이 발갛게 얼어 곱아들어 갈 때까지 아주, 아주 오랫동안.

끼익-. 나무로 된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작은 등불만이 켜진 어두운 방안,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잠옷 자락을 만지작대던 로간은 고개를 들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창백한 얼굴을 한 필레인이 서 있었다.

“필린.”

두 팔을 벌린 로간이 그를 불렀다. 걱정과 염려, 애정, 그리고 사랑이 담긴 얼굴로. 그에 필레인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모든 것이 담긴 연인의 품에 안겼다. 따스했다.

“좀 어떠세요.”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정말로요?”

“…조금, 이지만 괜찮아졌으니 걱정 마십시오.”

“…….”

로간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몸을 움직여 그가 편히 누울 수 있게 자세를 맞춰주었다. 필레인도 그에 맞춰 넓직한 가슴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뺨을 타고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눈을 감자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도 느껴졌다. 다정하고 따스한 애정. 달아났던 졸음이 다시금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잠들면 안 되는데….’

달콤한 기분으로 눈을 감는다 한들, 잠에 빠진 저를 반기는 것은 아까와 똑같이 피비린내 나는 악몽일 터. 다년간 꿈에 시달린 사람으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목덜미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 손은 어린아이를 얼러 재우는 것처럼 필레인의 너른 등을 토닥였다.

등 뒤는 볼 수 없을 테니…. 그리 생각한 필레인이 연인의 몸에 팔을 두르고 껴안자,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로간 역시 필레인을 마주 안았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그리 길지 않은 손톱을 바짝 세워 손바닥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강하게 힘을 주자 미약한 통증이 퍼졌다.

‘자국 정도라면 1분 안에 사라지겠지.’

그날 필레인은 연인의 품속에서 방 안을 엷게 비추는 등불, 그리고 수많은 손톱자국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꿈은 이번이 끝이길 바라며.

그러나 한번 드리운 먹구름은 거짓말처럼 그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지친 몸을 뉜 채 잠이 들 때마다 똑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는 사실을 당사자인 필레인이 모를 리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깨기를 몇 번, 식은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깨기를 몇 번, 진짜인 양 코끝을 맴도는 비릿한 피비린내에 구토감을 참지 못하고 깨기를 몇 번.

결국 필레인은 무식하게 잠을 참기 시작했다. 잠을 자서 생기는 문제이니 잠을 자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닌가-라는 결론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애초에 악몽을 꾸는 건 그에게 일상인 편이었으니 평소처럼 잠드는 걸 피하면 될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걸까?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몸과 정신이 버티지 못해 잠에 빠질 때면 악몽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꿰뚫게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스물다섯 번, 스물여섯 번, 스물일곱 번……, 그리고 서른, 서른하나.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나았을까? 악몽에서 깨, 울며 로간의 가슴에 매달리는 것도 초반의 몇 번. 열댓 번이 지났을 즈음엔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스무 번이 지나자 별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아아, 또 이 꿈이구나.’라는 생각만 들 뿐.

그 사실이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 비록 현실이 아닌 꿈이라 한들, 연인을 죽이는 그 행동 자체에 익숙해져 간다는 사실이 필레인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두려웠다.


"필…레인?"

잠에 취해 웅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피곤함에 잠긴 새하얀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로간이 이불 속에서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손을 들어 푹 가라앉은 고수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로간은 마치 강아지처럼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아직 새벽이니까 다시 자도록 해요. 일어날 시간은 아직 멀었습니다."

"당신은 왜……."

"잠이 오질 않아 잠시 앉아있었습니다."

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실도 거짓도 아닌, 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또한 최근 필레인이 잠을 통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베개를 뉘고 잠드는 사이인데 그 정도도 모를 리가. 연인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 정도는 금세 눈치챌 수 밖에 없다.

애초에 필레인이 악몽을 꾸는 일은 심심찮을 정도로 잦았다. 오죽하면 연애 초, “저와 함께 자면 피곤할 겁니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당시에는 그 말을 반쯤 농담 정도로 치부했지만 놀랍게도 그 말엔 거짓말이라곤 한 점도 없었다. 자다가 숨을 몰아쉬며 벌떡 일어나는 정도는 양반이었고, 가끔은 고함을 지르며 깰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로간은 졸린 눈을 끔뻑이며 필레인을 끌어안은 채 달래곤 했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새벽마다 깨버리니 낮에 피곤한 건 당연지사. 하품을 하며 몰려오는 졸음을 쫓아내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새벽에 몰래 방을 나가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통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한 적도 있다.

그래도 최근에는 악몽을 좀 덜 꾸게 되어 아침에 곤히 잠들어있는 필레인을 종종 볼 수 있었건만.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무언가 걱정거리라도 있었던 걸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든 로간의 시야에 애써 웃음 짓고 있는 필레인의 모습이 보였다. 안색이 이리 나빠졌으면서. 연인의 앞이라고 애써 웃어줄 필요까진 없는데. 결국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이불을 걷고 일어나 연인에게 기대어 앉았다. 이불 속에서 만들어진 몽글한 체온과 자느라 조금 눌린 고수머리가 팔에 닿자 필레인은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무뚝뚝한 듯 하면서도 다정하고 상냥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당신이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을 담아 로간은 필레인을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화답하듯 구불대는 앞머리가 살짝 걷히고 부드러운 입술이 가벼이 닿았다 떨어졌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려 키득대는 소리를 내자 이번에는 머리카락 위로 몇 번의 키스가 더 이어졌다.

"다시 잠들지 않으면 온종일 피곤할 겁니다."

필레인이 로간의 머리 위로 뺨을 가벼이 얹었다. 보드랍고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만… 이렇게 있겠습니다."

그렇게 답하며 로간은 필레인의 손을 잡았다. 필레인도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어두운 방 안에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서로에게 기대앉아있었다. 짙은 침묵이 흘렀다. 그것이 답답하다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상대와 함께이기 때문이리라. 

필레인이 마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자 로간이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고개를 들어 '왜?'라는 얼굴을 하고 로간을 쳐다보니 그는 "그냥요."라는 싱거운 대답과 함께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그러곤 이어서 작게 하품을 했다.

"슬슬 잡시다. 저도 누울 테니."

졸음이 잔뜩 어린 얼굴을 한 연인을 본 필레인은 엄지로 그의 눈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 눈 밑의 그늘은 필레인 한 사람만 달고 있어도 충분하므로 로간까지 달고 있을 필요성은 없었다. 애초에 그에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고. 

또 짧게 하품을 한 로간은 눈을 느리게 끔뻑이더니 조용히 이불 속으로 들어가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어서 와서 누우라는 뜻이다. 귀여운 재촉에 필레인도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뉘었다. 물론 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다시 침대에 누운 까닭은 자신이 잠들지 않으면 로간 역시 덩달아 깨어있으려고 할 확률이 크니까 다. 자신이 눕자 로간은 팔을 뻗어 필레인을 끌어안고 이마에 가벼이 입술을 부볐다.

"잘 자요."

로간의 인사에 필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을 끌어안고 잠들어버린 연인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며 서른두 번째 꿈이 찾아오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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