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과수] 도플갱어

1 by 빼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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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변 621 상태 : 팔다리 잘 움직임, 의사소통가능.

뭔루트임? : 글쓴놈도 잘 모르겠음 ㅠㅠ;;

지층 속에 파묻힌 옛 연구소의 잔해로 향하기 전, 막간의 휴식시간이었다.

간단하게 621이라고 불리는 4세대 강화 인간은 수리와 탄약보급이 끝날 때 까지 코어 안에서 대기하라는 핸들러의 지시를 어겼다. 의식 속을 유영하는 붉은빛의 목소리도 두고 온 채로 오롯이 홀로, 참으로 오래간만에 발바닥에 무게감과 땅의 질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몇 발자국 걸어본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압통이 느껴지는 게 어색하다. 아주 오랫동안 이 감각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히 자기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현실감이 없다. 허리부터 골반을 지나 순서대로 허벅지, 무릎, 종아리, 발. 피부로 포장된 다리를 뜯어보면 근육과 뼈, 코랄에 절여진 신경, 그런 것 따위가 보기 좋게 들어있을 것이다. 621은 자신의 다리로 걷고 있음에도 기름과 쇠로 이루어진 다리의 부재를 느꼈다.

조금 더 걸어본다. 약 108걸음. 몸의 부재가 느껴진 다음에는 정신의 부재가 느껴졌다. AC에 영혼이 있다는 둥 정신 나간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621의 몸은 2체가 맞았지만 정신은 하나다. 물처럼 어떤 그릇에 담기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뿐이다. AC에 담긴 621의 정신은 물렁한 유기체의 몸에서 한 단계 높은 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치판단은 없다. 그 간극이 지금 AC에 타지 않은 621에겐 부재로 느껴졌다. 목표가 없다. AC에서 멀어질수록 선택지들이 하나둘씩 좁아진다.

목성 영웅은 죽었다.

그 사실이 621의 빈 머리에 들어찼다.

누가 그를 죽였냐 하면.

……

그 후에 핸들러가 무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흐릿하다.

메아리처럼 돌고도는 말들이 621의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621은 도망치듯이, 아니면 이끌리듯이 AC로 향했다. AC에 타지 않고서는 무너져내리는 자아도 온전히 받칠 수 없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서 땅을 밟은 걸까. 아니, 죽어서도 땅을 밟아선 안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자신이 죽는다면 관은 조종석이 되어야 했기에.

“이딴 곳에 혼자서 어슬렁거리는 건 죽여달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지.”

돌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으르렁대는 목소리는 곧 통증으로 변해 621의 명치에 내리꽂혔다. 그다음은 뒤통수에. 621의 머리는 퍼석한 흙바닥에 처박혔다. 반사적으로 상대를 떨치려고 꿈틀거렸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습격자는 이런 종류의 훈련을 받아왔음이 분명했다.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습격자는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아주 머리를 땅속으로 묻어버리려는 듯이 기세가 강해졌다. 짓눌린 입에서 모래와 흙의 감촉과 맛을 느낀다.

습격자는 이대로 한 마디도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래도 621은 습격자의 이름을 말해야만 했다. 생존자의 이름을.

“이…구아수….”

“입 다물어 들개. 한 마디만 더 하면 지금 당장 죽여버릴 테니까.”

살기등등한 이구아수의 목소리는 621이 무엇을 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대체…….”

여기에 왜 온 거지.

입을 뗄 수 없었다. 이구아수의 질문은 아까까지 621이 자신에게 반문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 영감탱이를… 왜 죽인 거지….”

손에 들어간 힘이 느슨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621은 이구아수를 쳐냈다. 이구아수는 뒤늦게 621을 놓친 것에 대해서 아차 싶었지만 곧 다시 자세를 잡았다. 몰아붙이는 입장에 있지만 어쩐지 궁지에 몰린 것 같은 모양새다. 레드건의 절멸은 이구아수의 행동에 대한 완벽한 정당성을 보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어떤 절박함이었다.

이구아수는 알고 있다. 621이 악마, 구원자, 희망, 불, 기계장치의 신, 자유의 상징이 아닌 것을. 어떤 인간이라도 지금 621의 꼬락서니를 보자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AC에 탄 621은 그 자체로 코랄 쟁탈전의 신성(神聖), 혹은 인간 백정이었다. 그것과 눈앞에 있는 모습의 간극에 대해서 놀란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구아수는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피해자의 몰골을 하고 있는 녀석이, 죄책감 따위를 느끼는 모습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를 하는 쓰레기가 만인의 괴물인 그 녀석임을.

“미시간을 죽이는 건 나였어야 했다. 너 따위가 아니라.”

말 사이사이에 균열이 느껴진다. 자신이 했어야 했던 막연한 목표를 먼저 달성해버린 621에 대해 아주 오래되고 극렬한 혐오가 묻어났다.

621은 이구아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 거울도 자신을 바라보듯이 시선의 끝없는 반사를 담은 눈이 마주쳤다. 이구아수는 섬찟함을 느꼈다. 621이 어떤 놈인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도 알고 있었다. 저 말이 나오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다음 순간에는 그대로 621의 목을 잡고 있었다. 이구아수는 더 이상 621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저 펄떡이는 동맥과 뜨뜻미지근한 체온을 손끝으로 느끼며 죽으라고 되뇔 뿐이었다.

너만 죽으면 끝난다. 모든 것이. 이 모든 끔찍한 일의 시작과 끝을 맺는 건 오로지 나뿐이며. 살아서 일어난 모든 불상사와 절망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니 제발 죽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이구아수는 손목에 다른 것이 얹히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621을 쳐다보고야 말았다.

621은 저항하고 있었다. 졸도하기 직전의 얼굴로 혼신의 힘을 짜내어 사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벌레처럼 바르작대고 있었다. 이게 그저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것 같은 아무런 의미 없는 움직임 일지래도, 살아있는 것처럼 구는 것만으로 의욕을 꺾기에 충분했다.

불운하게도 두 사람은 그런 피와 살로 이루어진 덩어리였다.

이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이.

“역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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