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fashioned

각설탕 1개

암실몽몽 by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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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밤이었다. 그마저도, 컨테이너 사이는 한참은 더 어두워서, 밤눈이 밝지 못한 사람은 마치 눈이 멀어버렸다고 착각해버린들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버본은 밤눈이 어두운 인간은 아니었다. 특별히 눈이 좋다든지, 아니면 시야가 넓다든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나쁘다고 할 것도 아니었다. 아니, ‘보통’의 사람들에 비하면 그 역시도 충분히 눈이 좋은 편이리라. 시력이 아니라 관찰력이라면 더더욱. 그가 전문으로 하는 분야는 첩자, 그러니까 정보원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일에 소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체로 모든 일에 능했다. 코드 네임은 공으로 부여받은 게 아니라는 소리다. 라이처럼 귀재라고 불릴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어중이떠중이들보다야 당연 나은 실력이었다.

제아무리 어둠이 시야를 가로막는다고 할지언정, 이 정도의 거리에서 빗맞힐 리 없었다. 나는 버본과 오래도록 같이 일했다. 그가 정말로 팀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은, 그의 친구인 스카치 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같이 보냈던 시간들이 증발해버리는 법은 아니었다. 그렇게 손쉽게 증발해버릴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이별로 인해서 괴로워하지 않을 터였다. 혹은 누군가를 강렬히 증오하는 일도 없을 테지. 스카치의 죽음을 떠올렸다. 버본에게 나는 스카치만큼의,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훨씬 가벼운 무게도 될 수 없다. 스카치는커녕, 라이보다도 가볍겠군. 그러나 그 한없이 가벼운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간들은 고스란히 존재했다.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건 그런 법이다. 본인의 삶을 마치 영화의 필름처럼 인위적으로 조각내서 이어붙이는 게 가능하다면 모를까. 그러나 삶의 시간은 필름이 아니었다.

삶을 구성하는 시간은 퇴색되는 일은 있더라도, 잘라낼 수는 없는 법이었고, 그건 버본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공으로 오랜 시간을 같이 한 게 아니었다. 비록 진의 명령에 의해서였다고 할지언정, 아니 사실은 진의 명령이었기에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만큼 유능한 인물이고, 얼마만큼 위험한지. 언제고 지켜봐온 것이다. 그가 풍기는 그 향긋한 냄새에 현혹된 이후로는, 좀처럼 눈을 뗄 수조차 없는 채로.

이 거리에서 빗맞히기에는 그는 너무 뛰어난 인물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상대의 뇌간이나 심장을 적중시키는 것쯤은 그에게는 아주 손쉬운 일이었으리라. 설령 이 어둠 속에서도. 그러니까 그가 옆구리를 쏜 것은 결코 실수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하드보일드 느와르 영화는 전부 다 거짓말이다. 총상은 만만하게 여길 게 아니었다. 총에 맞았는데도, 날고 기는 주인공들은 죄다 말도 안 되는 이들이었다. 처음으로 겪는 고통도 아니었으나, 다시 또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버본에게 처리될 생각을 했을 때, 나는 내가 이 고통을 다시 느끼게 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질 못했다. 그만큼 그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단번에 숨이 끊어질 것이라고.

그게 내가 바란 일이기도 했다. 그 단호하고 냉정한 손속이 그의 보드라운 실체 위를 덮을 터였다. 그렇게 그가 풍기고 있는 그 달콤하고 향긋한, 아주 ‘인간’다운 냄새를 가릴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나를 죽이기 위해서 방아쇠를 당기는데 망설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소중한 친구를 죽인 것이 라이라고 생각했다. 라이는 마치 제가 죽인 것처럼 행동했고, 버본은 그에 대해서 이견을 낸 적이 없었다. 라이가 스카치의 죽음을 빌어 조직의 중구로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내가 버본의 옆에서 지켜보며, 알게 된 게 있다면, 그의 증오였다. 그는 라이를 증오했다. 애석하게도.

그리고 나는 그 증오를 빌미로 삼았지. 라이의 도주에 협력했다면, 그것이 설령 아주 작은 틈에 불과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빠져나갈 빌미를 만들었다면 그는 그 증오로 말미암아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놓쳐버린 라이를 겹쳐보든 어쩌든 상관없었다. 사실, 겹쳐보기를 바라고 늘어놓은 말들이었다. 가령, “라이의 손을 빌려버려서”, “라이를 죽이지 못했다”든지. 그가 어떻게 생각해도 좋았다.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내가 라이를 좋아해서, 죽일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계기가 스카치를 라이가 사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착각하기를 바라고 길게 둔 행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심장도, 뇌간도 맞추지 않았다.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차마 심장을 노릴 수 없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의 친구, 스카치의 죽음은 그에게 큰 상처였으리라. 당시, 조직원이라고 생각했던 라이의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살리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그 때 스카치의 흉부를 짓눌렀다. 도무지 막을 수 없는 출혈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 스카치의 그 총상으로 인해, 그는 도무지 심장을 노릴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버본 스스로는 모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구태여 심장이 아니더라도, 머리를 노리면 단번에 죽일 수 있었으니,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서 ‘꼭’ 심장을 쏴야할 필요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의식중에 단번에 숨을 앗을 수 있는 다른 급소들을 노려왔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여태 그래왔듯 다른 급소를 노리면 될 일이었다. 옆구리 따위가 아니라. 가령 뇌간. 아니면, 미간이나, 머리.

“버, 본….”

“나도 참 곤란한 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라이처럼은 되지 못하다니.”

버본의 단정한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 일견 비참하고, 참담하기까지 한 표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는 이다지도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나는 그의 친구, 스카치도 아니었고, 정진정명으로, 그가 혐오해야 마땅할 조직원이었다. 내가 아무리 이 밑바닥과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일생을 음화의 세계에서 살아왔다고 했을지언정,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속해있는 조직은 분명한 악이었다. 나는 그리고 악인이었다. 나는 조직의 명령에 따라 방아쇠를 당기는데, 어떠한 도덕적인 고뇌도 품지 않았다. 요컨대,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의 형상을 한 짐승이거나. 그는 양지의 인간이었고, 지금은 잠시 그림자를 두른 것뿐이었다. 오랫동안 같이 행동을 해온 만큼, 그는 내가 얼마나 혐오스러운 종인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의 동료도, 친구도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버본은….

“옆구리는 그다지 급소는 아니지만, 앞으로 십 분 정도만 지나도 당신은 과다출혈로 죽게 되겠죠.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무언가를 할 거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군요.”

“그으…, 래.”

“그러니까, 제발 이대로, 가만히.”

잠자코, 죽어주세요. 버본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가 아주 작게, 마치 참회라도 하듯, 어느 영화에서 보았던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는, 도무지 당신의 심장도, 얼굴도 쏘질 못하겠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라이처럼 당신에게 권총을 쥐어줄 정도의 배짱도 없지.”

숨이 헐떡거렸다. 고통 때문에 숨을 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무언가를 물어본다는 것, 말을 내뱉는다는 것은 그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간신히, 아주 간신히, 다잡고 다잡아 한마디를 내뱉는 게 고작이었다.

“왜?”

숨이 밭아졌다. 나는 버본을 주시했다. 시야가 명멸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버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애썼다. 내가, 내게 인간의 아주 향긋한 냄새를 맡게 해준 그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그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맡아보고자.

“그야, 당신과 오래도록, 같이 있었으니까. 당신을, 그래도 조금은 좋아했으니까.”

그가 등을 돌렸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간신히 컨테이너에 몸을 기댔다. 다리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대로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생각했던 계획은 분명 끝을 맞이했다. 심장이나, 뇌간을 쏘진 못했지만, 버본은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는 불을 뿜었고, 내 옆구리를 꿰뚫었다. 버본이 제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한들, 정보원인 그가, 도망치려는 간부의 심장이나 뇌간을 깔끔하게 꿰뚫는 쪽보다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딱 이 쯤이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근처에 총상을 치료할 수준의 병원은 없었다. 옆구리가 꿰뚫린 상태에서 운전 따위를 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도보로 가는 것은 더욱 무리였다. 조직은 그가 나를 이곳에 버려두고 물러난 것에 납득할 터였다. 밀항선의 시간이 가까웠고, 사람이 오가기 시작한다면, 누군가가 올 확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면, 밀항을 시도하던 이들 사이의 분쟁으로 죽었다는 것으로 끝내버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아주 잘 굴러간 일이었다. 버본은 이것으로, 조직의 신뢰를 살 테고.

그렇지만, 문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입매가 느슨해졌다. 웃음이 샜다. 아주 작은 웃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반동으로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 살고 싶다니. 나는 여태까지의 내 생을 회고했다. 주마등은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까지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지 더듬어보았을 뿐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렇게 강렬한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삶을 아주 유의미하게 여긴 적도 없었다. 싸구려 느와르 속의, 수없이 많은 엑스트라만도 못한 삶이었다. 무의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와서, 의미가 생길 줄이야. 나는 어느 누군가가, 인생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둘 중 하나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희극이라고 했나. 아니면 비극이라고 했나. 도무지 분명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게 다, 이 빌어먹을 고통 때문이다. 품속에서 지혈제를 꺼냈다. 정말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주 작은 시도일 뿐이다.

버본이 내게 줬던 그 일말의 인간성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그가 차마 얼굴이든, 심장이든 쏠 수 없었다고, 아주 고통스럽게 토로한 것도 끝이었다. 나와 오래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좋아했었기 때문에. 그건 사랑이나, 혹은 우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구태여 무엇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아주 작은 호의라고 해야 옳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내게 주는 그 작은 호의로도, 충분히 의미가 되었다. 여기서 끝난다면, 나는 그 작은 호의를 영영 잃어버릴 터였다.

정말로 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향기를 그렇게 게걸스레 훔쳐 맡던 인간이었다. 간신히 손에 쥔 그 작은 호의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정도로 성미가 좋질 못했다. 정말로 살아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적어도 아주 작은 조치를 취할 정도는 되었다. 옆구리의 상처에 지혈제를 주사했다. 혹여,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총에 맞아, 계획을 이루지 못할까 우려하여 준비해놓은 것이었다. 지혈제의 내용물은 아주 작게 자른 특수한 스펀지였다. 아주 작게 자른 스펀지를 주사하면, 열 몇 배의 크기까지 불어나, 몇 시간은 상처를 막아줄 테고, 나는 그 시간동안 좀 더, 그 달콤함을 맛볼 수 있을 테지. 끔찍하게 고통스럽더라도 말이야. 이미 출혈량이 제법 되었으니,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희미하게,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진인가? 버본의 처리를 믿지 못하고, 진이 확인하기 위해 왔는가? 아니면, 그저 우연인가. 컨테이너 사이로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머리카락이 아주 긴 남자였다.

“상당한 꼴이군.”

맡아본 적이 있는 담배 냄새였다. 어둑하고,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명멸하는 시야였으나, 그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기는 충분했다.

“…라이.”

버본이, 자신은 차마 될 수 없다고 했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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