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그 가수와 매니저와의 관계

그야말로 캐붕의 절정. 이젠 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버텨주시길 바랍니다. 8보다는 7때 이미지를 많이 투영하면서 연성함. 이것저것 많은 설정이 맥거핀으로 남았음.

진이 시계를 확인했다. 6시 20분. 숙소로 돌아온지 3시간도 되지 않은건 알지만 일어날 시간이었다. 이미 진즉에 일어나 준비를 마친 진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문 앞에 섰다. 그런 진 뒤로 낯선 카메라가 따라붙었다. 어제 말했긴 했는데... 분명 까먹었겠지. 제발 부탁이니 언행만 조심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진이 똑똑 문을 두어번 두드리고는 벌컥 문을 열었다. 화랑, 일어나. 스케쥴 가야지.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캄캄한 방안의 불을 키자 혼자 자기에는 굉장히 큰 퀸 사이즈의 침대와 베개 2개가 보이고 그 속에서 밝은 빛이 싫다는 듯 옆으로 누운 붉은 머리칼이 꾸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화랑. 진이 다시끔 이름을 부르며 이불을 살짝 들추자 그곳에서 얼굴을 내민 건 긴 붉은 머리칼과 중성의 페이스를 가진 진의 담당 연예인인 솔로 댄스 가수 화랑이었다. 끄응... 새끼 고양이가 낑낑거리는 비슷한 소리를 낸 화랑이 살짝 눈을 뜨고는 무언가 보는 듯 하더니 이내 앓아눕는 소리를 내며 다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진이 다시 화랑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 ...나 잠든지 2시간도 안된 것 같은데 "

"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

" ...스케쥴 "

" CF 2건, 잡지 촬영 1건, 그리고 음방. 아, 중간에 인터뷰 2건 잡혀있어 "

" ...스케쥴 잡은거 너야? "

" 그럴 리가 없잖아... 리 팀장님이 잡으셨는데 "

" 내가 그 컴봇 컬렉션 다 부셔버릴거야! "

" 그거 부수면 내 월급도 부셔지니까 그만둘까? "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화랑이 외친 말에 평소처럼 느긋하게 답변한 진은 화랑의 눈이 동그래지자 고개를 갸웃거리다 제 뒤에 따라 붙은 낯선 카메라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화랑이 뭐라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난 어제 말했어. 잊어버렸어? 진의 말에 잠시 가만히 있던 화랑이 아,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 그 매니저의 하루인가 뭔가 하는 프로그램? 그거 녹화 오늘이었어? "

" 그래, 그거 오늘이야. 그래서 오늘 하루종일 카메라랑 스태프 두 분이 스케쥴에 합류 하실거니까... "

" 혹시 이 프로그램 때문에 오늘 스케쥴 빡빡해진거 아냐? "

" ...그럴지도...? "

" 아악! 진짜 컴봇 컬렉션 다 부셔버릴거야! "

다시 한번 더 리의 컴봇 컬렉션을 부셔버린다는 외침과 함께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쓴 화랑을 보던 진이 낮게 숨을 내쉬고는 침대로 다가와 머리가 있을 부분을 톡톡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대신 내일은 스케쥴 일절 없어. 내가 리 팀장님께 말씀 드려서 내일 하루는 온전히 휴식일로 잡았으니까.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힘내자, 라고 말을 끝내려던 진은 이불을 치우며 벌떡 상체를 일으켜 저를 껴안는 화랑에 윽, 소리를 내며 힘을 줘 버텼다.

" 역시 이래야 내 매니저지! 사랑해, 진! "

" 윽... 알았으니까 빨리 준비해. 7시까지 "

" 알았어, 알았어 "

내일 휴식일이라는 소리에 바로 기분이 좋아진 화랑이 침대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는 것 까지 카메라에 담은 스태프들이 진을 따라 화랑의 방을 나오고는 간단하게 진의 인터뷰를 따기 시작했다. 스태프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던 진이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까먹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정말 까먹었을 줄이야... 오늘 스케쥴 듣고 심기가 불편해져서 욕이라도 내뱉는 건 아닐지 내심 긴장했던 진은 생각보다 무난하게 넘어간 아침 기상 시간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그래서 첫 스케쥴은 어디야? "

" 화장품 CF야, 립스틱 "

" ...또 그거야? 요새 이상하게 나한테 오는 화장품 CF가 립스틱이나 아이섀도우 쪽이지 않아? "

" 그게 싫었으면 그런 Shorts 영상 같은 거 찍지 말았어야지 "

" 그거 찍은지가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 Shorts 영상 탓하는 건 너무 하지 않냐, 진~? "

" 그 영상 때문에 경호 인원 늘린 건 생각 안해, 화랑? "

운전석에 앉아 운전하던 진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 방송이라면 이때 쯤에 그 Shorts 영상 들어가겠지. 진이 말하는 그 Shorts 영상이라는 건 18살에 데뷔, 19살에 군대 입대 후 20살에 제대를 한 화랑이 자신이나 리 팀장님, 진의 어머니인 준 실장님에게 말도 안하고 올린 전설로 남은 여성 가수의 노래 커버 영상이었다. 20살 성인이 되어 소녀에서 여자가 되었으니 다가와 달라는 가사와 섹시한 의상, 안무까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노래를... 정말 작정했다고 밖에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퀄리티로 재현해버렸다. 이미지 변신을 해보겠다고 그 전의 짧은 머리가 아닌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기른 머리카락을 붉은 석양처럼 물들이고 역시나 붉은빛의 아이섀도우와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그때 그 노래의 의상까지 - 와중에 색 배합을 생각한건지 의상은 근본인 검은색이었다 - 갖춰입은 화랑이 하이라이트 부분만 커버한 짧은 30초 정도의 영상은 대박이 났다. 촌스러울지도 모를 짙은 화장과 비웃음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로 올라간 입꼬리, 태권도를 전공으로 해 길고 유연한 팔다리가 시너지를 일으켜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대로 저격해버렸다. 지금과 달리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안됐을 때는 몸 선이 가늘었기 때문에 더 대박이 난걸지도 모르겠지만. 농담삼아 그 Shorts 영상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며 그 이후 화랑의 팬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물론 본인은 별 생각없이 저지른 짓 같았지만 그 생각없이 저지른 짓에 진 자신 뿐만 아니라 리까지 거진 일주일을 고생한 걸 생각하면 정말...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나올 일이었다. 참고로 그 Shorts를 처음 본 진의 감상은 당장 위에 이야기해서 경호원을 늘리자였다. 너무 ...잖아, 화랑...

" 팬들이 좋아했으면 된거 아냐? "

" 팬들은 좋아했는데 이상한 쪽으로도 문제가 늘었잖아... "

" 그래서 그때 준 실장님한테 한소리 듣고 뭔가 하려고 할 때 마다 너한테 보고하고 있잖아. 아, 맞다.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남은 CF랑 잡지... 내 단독이야? 아니면... "

" ...화랑 "

" ...설마 "

" 아수세나씨랑 리리씨한테 무례하게 행동하면 안... "

" 캔슬!!! "

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듣자마자 화랑이 기겁을 하며 캔슬을 외쳤지만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교성 좋고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는 자타공인 E 성향의 화랑이지만 그 화랑이 기겁을 하며 가까이 가기를 꺼려하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 명은 아수세나 블렌드로 불리는 커피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업가이자 MMA 격투가인 아수세나 밀라그로스 오르티스 카스티요.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로슈포르 블랜딩으로 불리는 홍차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업가이자 모델 에밀리 드 로슈포르, 통칭 리리였다. 한 명은 커피 퀸, 한 명은 홍차 퀸이라 불리우는 두 사람은 사업적으로 라이벌의 관계였다. 물론 사업적으로 두 사람이 힘을합쳐 한시적으로 내놓았던 신제품이 대히트를 치긴 했지만.

일단 코 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자며 첫번째 CF 촬영 장소에 온 화랑이 메이크업 후 심플한 하얀 와이세츠를 입은 후 의자에 앉는 모습을 진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제 슬슬 립스틱 광고 같은건 제가 아니라 다른 이쁜 여자 연예인 써야되지 않아요? 농담 삼아 던진 화랑의 말에 감독이 아직까진 자네보다 더 화제인 연예인은 없을걸? 라며 껄껄껄 웃더니 CF 구상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흐음... 음... 5분만 주세요. 설명을 다 들은 후 손에 들린 구상도를 가볍게 쫙 훑어본 화랑의 말에 감독이 알겠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사이 화랑이 제 손에 들린 립스틱의 뚜껑을 열지 않은 체 그대로 제 입술에 톡톡 두드렸다. 머리 속에선 아마도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을거다. 화랑이 이쪽 업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시뮬레이션 후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장면을 빠르게 연기하기 때문이었다. 5분 지났다. 시작할게, 스탠바이! 감독의 말에 진이 카메라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진이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여유롭게 립스틱의 뚜껑을 연 화랑이 3트 안에 끝낼까나, 중얼거리곤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촬영장에는 오직 화랑과 진만이 있었다. 카메라가 아닌 카메라 뒤의 진과 눈을 마주친 화랑이 천천히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고는 오른손 약지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지더니 이내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핥고는 마치 진을 도발하듯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진은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아주 짧지만 마치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감독의 만족스러운 컷 소리와 함께 둘만이 있던 공간이 깨졌다. 컷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바로 진에게서 시선을 돌린 화랑이 감독에게 다가와 촬영분을 보는 사이 진이 시간을 확인했다. 이동 시간에 점심 식사 시간까지 대략 2시간은 확보 가능할 것 같네. 진이 시간을 확인하는 동안 감독에게 컷 소리를 듣고 칭찬까지 받은 화랑이 성큼성큼 진에게 다가왔다.

" 봤지? 나한테 걸리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

" 그래서 리 팀장님이 일정 빡세게 잡으시는거 아냐? "

" ...... "

" 농담이야. 여하튼 잘했어. 덕분에 다음 일정까지 2시간은 벌었어. 간만에 차량이 아니라 식당에서 식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먹고 싶은거 있어? "

" 글쎄... 옷 갈아입으면서 생각해볼까나 "

화랑이 오른손을 뻗어 약지로 진의 입술을 부드럽게 훑자 약지에 묻어있던 립스틱이 진의 입술에 묻어났다. 역시 너한테는 안어울리네. 작게 웃은 화랑이 옷 갈아입고 나오겠다며 탈의실로 들어가고 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손으로 제 입술을 훔쳤다. 손에 립스틱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아, 진이 작게 깨달음의 소리를 내며 휙 옆을 바라보았다. 같이 동행했던 스태프 두분이 좋은 장면을 찍었다며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편... 편집 안되죠...? 진씨가 PD라면 이 장면 편집할까요? 그 말에 진이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야호, 화랑! 건강해? 응, 팔다리에 몸 보니까 완전 건강하네! 일단 CF 찍기 전에 커피 한잔 어때? 이번에 나온 신제품인데, 일단 이 커피의 콩은 뭐냐면 우리 농장에서 이번에 심열을 기울여서 키운 커피 콩이야! 그래, 이름을 붙인다면 아수세나 커피콩이라고나 할까나! 그래서 이 커피가 어떻게 만들어지냐면... "

" ...시작부터 기 빨리니까 일단 메이크업이라도 다 끝내고 해주면 안될까? "

" 하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그렇지! 저번에 화랑이 말해준대로 커피의 배합을 바꿔봤더니 신작 아수세나 블렌드가 불티나게 팔리지 말이야! 그러니까 이번에도 시음해주지 않을래? 그래서 이 커피가 어떻게 만들어지냐면... "

립스틱 CF의 촬영을 마치고 식사 후 바로 다음 커피 CF의 촬영 장소로 온 진은 촬영 시작도 아닌 메이크업 단계에서 아수세나의 수다에 벌써 지친 표정을 하고 있는 화랑을 보며 쓰게 웃고는 제 옆에서 촬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왜 이렇게 지쳐보이냐는 방송 스태프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화랑이 아수세나를 꺼려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건 그녀의 엄청난 극 E 성향 때문이었다. 사업가인 그녀의 첫번째 전략은 바로 친근함이었다. 그녀는 제 사업 파트너를 늘리기 위해 그 E 성향을 마음껏 발휘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갔고 그 전략은 그녀의 밝은 모습과 성격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문제는 그 모습이 사업가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그녀의 평소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건지 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소위 기가 다 빨려 종국에는 학을 떼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그녀의 엄청난 E 성향을 끝까지 버티는 극소수의 1인이자 자주 피해를 입는 한 명이 바로 화랑이었다. - 또 다른 주피해자는 그녀에게 후원을 받는 탐험가이자 자신의 탐험 기록을 책으로 발간하여 대히트를 친 레오 클리젠이었다 - 그리고 진 자신은. 자신의 그 엄청난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화랑을 아는지 한참 열심히 떠들던 아수세나가 진을 포착했다. 아,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리를 피하려던 진은 어마무시한 속도로 달려온 - 거의 날아오다시피 한 - 아수세나에게 어깨가 붙잡혔다.

" 진! 진도 오랜만이네. 카즈야씨는 잘 있어? "

" ...아마도요 "

" 하하, 여전히 사이 안좋네! "

그 말에 진이 쓰게 웃었다. 진은 아버지의 성이 아닌 어머니인 카자마 준의 성을 쓰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인 미시마 카즈야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연예계 매니저로 시작해 지금은 가장 유명한 연예 기획사의 대표가 되어 매니저계의 전설이 된 준과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졌다는 미시마 재벌의 카즈야가 결혼 후 하나 밖에 없는 후계자로 태어난 진이 자신이 원하지도 않던 기업의 후계자 교육에 지쳐 제 미래에 깊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준의 회사에서 데뷔를 준비하던 화랑과 만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진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제 생각을 굳힌 진은 그 날로 카즈야와 대판 싸우고 난 뒤 그와 절연을 선포하고 미시마의 성을 버렸다. 처음엔 난색을 표시했던 준도 지금은 진의 뜻을 이해하고 카즈야와의 사이도 중간에서 적절히 봉합을 하며 지금은 그저 조용히 진을 지켜볼 뿐이었다.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아수세나가 카즈야를 아는 이유는 사업적인 인연 때문이었다.

" 뭐, 가정사를 들추지는 않아! 그건 선을 넘는거잖아? 여하튼 진도 건강해 보이네! 진짜 화랑의 매니저만 아니었다면 MMA로 끌어들이고 싶다니까! "

" 그건 참아주세요, 아수세나씨 "

" 하지만 진도 운동하잖아? 무슨 운동한다고 했지? "

" ...공수도를 좀... "

" 실력도 꽤 있지? 그러니까 MMA 관전이라도 해보지 않을래? 분명 진도 끌릴거야! "

" 이봐이봐, 진한테 이상한 거 불어넣지마! "

메이크업이 끝나고 의상을 입던 중이었는지 상반신 나체 상태의 화랑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아수세나를 노려보았다. 하여간에 커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MMA는 인재도 많으면서 왜 자꾸 노려? 다른 사람 알아봐. 휙휙, 마치 모기라도 쫓는 듯한 손짓에 가만히 아수세나가 화랑을 바라보았다. 아, 조금 무례했나? 퍼득 정신을 차린 진이 화랑을 말리려는 순간. 아수세나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 눈빛은 무례함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귀한 보석을 찾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아수세나가 순식간에 다가와 화랑의 탄탄한 복근에 손을 올렸다. 우왓? 놀란 화랑이 진의 허리를 놓고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 화랑도 몸 좋잖아! 운동? 아니면 스포츠? "

" 당신 내 신상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태권도 하는거 알잖아? "

"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냥 취미로 하는줄 알았는데 "

" 나름 4단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승단 도전할... 아, 그만 만져! "

" 화랑, 연예인 관두고 싶을 때 연락 줘! MMA에 도전하자고! "

" 그럴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그만 떨어져! "

질린 표정의 화랑과 훌륭한 인재를 발견한 아주세나의 공방을 말없이 바라보던 진의 시선이 이 모든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며 이건 대박이야,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방송 스태프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가볍게 화랑에게 달라붙은 아수세나를 떼어내자. 피곤해~ 비척비척 탈의실로 걸어가며 화랑이 중얼거린 그 말에 조용히 속으로 동의한 진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직 스케쥴은 2개 밖에 소화하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그러나... 아직 피곤한 일은 남아있었다.

" 자자, 좋아. 시선 좀 더 멀리 보고... 좋아, 이번엔 자세를 좀 바꿔볼까. 리리씨가 화랑씨의 무릎에 옆으로 걸터 앉는 자세로... 음, 좋아! 자, 메이크업 살짝 수정하고 가자! "

진의 눈에 스튜디오 한가운데에 의자에 앉은 화랑과 그의 무릎에 앉아 자세를 잡아보는 리리가 들어왔다. 아수세나와의 피곤한 CF 촬영을 끝내고 휴식 겸 잡지 인터뷰까지 마친 화랑은 다음 공식 스케쥴인 패션 잡지 화보 촬영을 소화 중이었다. 184의 큰 키와 태권도로 단련된 밸런스 맞는 몸 덕분에 자주 패션 화보 일정도 잡히는 화랑이 메이크업 수정을 마치고 스태프들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웃으면서 리리에게 뭐라 속삭였고 질세라 오늘 화보의 파트너인 리리도 작게 속삭였다. 누가보면 참으로 다정한 연인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 또 싸우네 "

" 하아, 매번 만날 때 마다 이러니 진짜 부딪치기 싫다니까... "

" 고생하네, 아스카 "

" 그 쪽도 마찬가지 아이가... "

진의 옆에서 같이 한숨 쉬고 있는 건 리리의 매니저인 카자마 아스카였다. 진과는 거리가 꽤나 있는 친척관계로 진과 같이 매니저의 길을 걷고 있는 그녀는 화랑만큼이나 기가 드세기로 유명한 리리의 매니저를 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도도한 면은 있어도 누구에게나 친절한데 이상하게 화랑만 만나면 그녀의 까칠함은 하늘을 치솟곤 했다. 그건 화랑도 마찬가지라서 그녀와 마주치는 걸 극도로 꺼려하고 있었지만... 공과 사는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는 법. 덕분에 고생하는 건 매니저인 진과 아스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화보 촬영팀의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죽은 눈이 되어 촬영 현장을 지켜보던 진과 아스카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 화랑! "

" 리리씨! "

촬영장에 갑자기 터져나온 큰 소리에 모두가 놀라 진과 아스카를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화랑과 리리에게 향해있었다. 화랑과 리리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란 듯 몸을 움찔 떨더니 이내 서로의 시선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에휴. 동시에 한숨을 쉰 진과 아스카가 또 다시 동시에 촬영 분위기를 흩트려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자 잠시 중단되었던 촬영이 다시 진행되었다. 의자가 치워지고 서서 자세를 잡아보던 두 사람이 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일순간 멈칫했다. 서로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다정하게 손 좀 잡아볼까? 그 말에 아주 한순간 극혐이라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두 사람은... 프로였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두 사람을 알아차린 건 진과 아스카 뿐이었다. 우와... 아스카의 입에서 한숨이 섞인 탄성이 나왔다. 나... 리리씨가 좋아하는 홍차 준비해야겠다... 그 말에 진이 낮게 숨을 내뱉었다.

" 좋아, 수고했습니다! 촬영 컷! "

" 수고하셨습니다 "

" 고생하셨어요, 감독님 "

후, 힘을 풀며 숨을 내뱉은 화랑이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촬영으로 굳은 몸을 풀었다. 으으, 뻐지근해라. 있다 음방인데 적당히 몸 좀 풀어야겠다. 깍지를 끼고 팔을 위로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던 화랑의 눈에 착용한 액세서리를 빼는 리리가 보였다. 자신과 리리가 서로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건 별거 없었다. 그냥 성격이 맞지 않았다. 고상한 아가씨로 자라온 리리와 천방지축의 자유로운,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많은 양아치급 - 나는 인정하지 않지만 - 으로 자라온 자신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1년 전, 잡지 촬영장에서의 첫만남 이후로는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가 으르렁 거리며 말로 신경을 긁기 일수였다. 진은 적당히 하라곤 했지만 말대꾸를 해오는 건 저쪽이란 말이지. 저쪽이 저렇게 나오니 나도 괜시리 긁어보고 싶고 말이지. 후아암, 거짓 하품을 하며 제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다가온 잡지사의 스타일리스트에게 넘긴 화랑이 탈의실로 가기 전 힐끔 리리를 바라보았다.

" 뭐죠? 촬영 끝났는데도 당신이랑 엮이고 싶지 않거든요? "

" 그건 내 쪽도 마찬가지거든. 다만 여기 전 스케쥴이 커피 CF 였거든? "

" 커피 CF... 설마... "

" 커피 퀸과 CF 찍으면서 들은건데... 1분기 매출 밀렸다며? 당분간은 모델보다는 사업 쪽에 집중하는게 어떨까? 모델 퀸 자리도 니나씨한테 슬금슬금 빼앗기는 것 같은데 커피 퀸에게 퀸 칭호도 빼앗기면 어쩌냐, 응? "

" 으으, 그럴리 없으니까 신경 끄시죠! "

" 아, 맞다. 이번에도 커피 퀸의 신작 음료는 맛있더라. 홍차보다 훨씬 더 "

" 화랑씨! "

아스카의 외침과 함께 화랑이 휘파람을 부르며 탈의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리곤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는 진의 손목을 잡고 수고하셨습니다, 잡지 나오면 한 부 보내주세요! 를 외치며 두 사람이 촬영장을 나가자 - 그 뒤를 방송 스태프도 따라붙었다 - 분노에 찬 리리가 화랑의 이름을 크게 외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 화랑, 부탁인데 철 좀 들자... "

" 먼저 시비 건 쪽이 잘못한거라고.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가씨 반응도 재미있고 말이지 "

오늘 마지막 공식 스케쥴을 소화하러 온 화랑이 의상을 입은 체 가볍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본업인 가수로서 음악 방송을 위해 방송국에 온 화랑이 바닥에 앉은 체 그 유연한 몸을 마음껏 뽐내며 스트레칭을 하는 걸 목격한 방송국 스태프들의 감탄성과 사정없이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도 태연하게 행동하는 화랑은 확실히 연예인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천성이 사람들의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며 제 앞길을 스스로 개척하는 걸 즐기는 사람. 그게 진이 보는 화랑이었다. 강제로 주어진 길을 걸을 생각 밖에 못했던 자신과는 다르다. 화랑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음방 스태프가 진을 찾아와 무언가 조용히 말하고는 가버렸다. 음? 뭐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런 진을 포착한 화랑의 말에 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 아니 뭐... 큰 문제는 아닌데 "

" 아닌데? "

" 무대 끝나고 인사가 너무 길다고 짧게 하라는데 "

" 내 팬서비스에 대한 컴플레인 이었냐! 팬들한테 인사하는게 뭐가 나빠서 "

" 다음 가수의 무대 세팅해야 하는데 10분 이상 무대에 머물러 있으면 민폐야, 화랑 "

" 내 팬들은 좋아하던데 "

"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컴플레인이 들어온 이상 어쩔 수 없어. 짧게 하자, 짧게 "

그 말에 작게 투덜거리던 제 머리를 가볍게 만지며 - 세팅이 흩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 달래는 진을 아는지 화랑의 투덜거리는 소리는 금새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이상 무대를 찢어주겠어. 네가 가장 잘하는거네. 당연하지, 오늘 기피 대상 2명과 만나서 피곤하긴 하지만 집중력은 최고조니까. 멋지게 끝내고 내일의 휴식을 즐기고 싶어. 내일 뭐할래, 진?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음방 끝나고 인터뷰 1건 남았으니 그거 끝내고 생각해볼까 "

" 야, 이 재미없는 자식아! "

진의 시선이 무대 위의 화랑에게 향했다. 이번 음방 프로는 녹화 방송이 아닌 라이브 방송이다. 수많은 스태프, 수많은 가수들, 수많은 카메라들. 그리고 수많은 팬들. 그렇게 수많은 모든 것들의 시선을 한번에 받을 수 밖에 없는 무대 위에서 화랑은 그 누구보다 빛나며 넓은 무대를, 카메라 너머의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모은다. 라이브이기에 나올 수 있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모른다는 듯 무대 위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던 몸이 멈춘다. 음악이 끝나고 남은 건 희열에 찬 화랑과 많은 팬들의 환호성 뿐. 오늘도 고마워! 다음 음방 때도 열심히 할테니까 꼭 와줘! 제 차례가 끝나고도 바로 무대를 떠나지 않는 화랑에 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잊어버렸군. 사소한건 금방 잊어버리는 화랑을 잘 아는 진이 슬쩍 PD의 안색을 살피다 결국 성큼성큼 무대 위로 올라갔다. 팬들은 무대에 낯선 사람이 올라오자 고개를 갸웃거렸고 스태프들은 매니저인 진이 올라갔으니 됐다, 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체 팬 서비스에 열중이던 화랑의 정면에 선 진이 그대로... 화랑을 어깨에 들쳐맸다. 말로 해서는 듣지도 않을 그를 잘하는 진의 강경진압이었다. 운동도 해서 나름 무거운 화랑을 너무나도 가볍게 들쳐매고 성큼성큼 무대를 떠나는 진을 보던 주변 사람들과 팬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화랑은 태연하게 그의 어깨 위에서 여전히 손을 흔들며 팬서비스 중이었다. 이내 팬들이 보이지 않을 무대 뒷편으로 온 화랑이 작게 투덜거렸다.

" 진짜 너무하네. 체감 상 1분 정도 밖에 안된 것 같은데 "

" 5분이야. PD님 안색이 서서히 안좋아지시더라 "

" 고작 5분이잖아? "

" 화랑 "

" 알았어, 알았어. 쳇 "

" 근데... 슬슬 내려올까? "

" 싫-어. 이대로 대기실까지 운반해. 내 발로 안걸어도 되니까 편하구만 "

자기 마음대로 안되니 이렇게 심술이다. 뭐, 진의 입장에서 화랑 한 명 옮기는건 일도 아니라 상관없긴 하지만. 경악 + 놀라는 동료 가수들과 음방 스태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의 어깨에 들쳐매져선 편하게 힘까지 뺀 화랑을 대기실 소파에 진이 내팽... 게 치지는 않고 천천히 내려놓기가 무섭게 화랑이 진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또 금쪽이 같은 행동에 진의 상체가 그대로 화랑의 위를 덮치듯 점령했다. 히죽, 그런 자신을 보며 장난기 넘치게 웃고있는 화랑에 진이 오늘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흐읍, 하고 급하게 숨을 멈추는 소리와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방송 나가도 되는걸까. 걱정도 잠시 진이 상체를 일으키며 화랑도 함께 일으켜세웠다.

" 자, 퇴근 빨리 하고 싶으면 얼른 옷 갈아입고 인터뷰 하러 가자 "

" ...누가 음방 다음에 인터뷰를 잡아! 또 리 팀장님이야? "

" 부수는건 안돼, 화랑 "

" ...딱 하나만 부수자, 응? "

" 안.돼."

제 말에 뚱한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고 인터뷰까지 모두 마쳐 오늘의 일정을 끝낸 화랑이 조용했다. 이미 시간은 12시를 지나 새벽 1시에 근접한 시간이었다. 숙소를 향해 차를 운전하던 백미러로 잠든 화랑과 슬슬 촬영을 끝낼 준비를 하는 방송 스태프의 모습을 확인했다. 분명 촬영은 숙소로 들어가면 종료였지... 방송에 쓸만한 분량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진의 이런 걱정과 달리 너무 쓸만한 장면이 많아 어찌 편집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다는건 알 리 없는 진이 운전하던 차는 숙소 바로 앞에 스무스하게 주차를 마쳤다. 후우, 화랑. 일어나.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을 나온 진이 벌컥 연 문으로 마지막 장면을 잡기 위해 카메라와 스태프가 내리고 카메라가 조용히 잠든 화랑을 잡았다. 화랑. 진이 화랑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들어가서 자자, 응? 대답없는 화랑의 어깨를 다시 흔든 진은 화랑이 눈도 뜨지 않은 체 양팔을 뻗자 쓰게 웃었다. 촬영 중이고 뭐고 이미 머리 속에 없구나... 난 모른다, 화랑. 작게 중얼거린 진이 익숙하게... 화랑을 안아들었다. 애도 아니고 매번 이런 식이라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진이 익숙하게 차문을 닫고 숙소의 문을 열고 닫기 전 수고하셨습니다.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숙소 문을 닫았다. 자신들을 바라보던 방송 스태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던데... 취소되는거 아닐지 모르겠네.

진이 침실 문을 열고 그대로 화랑을 침대로 던졌다. 제 담당 연예인을 다루는 방식이 상당히 거칠었지만 진은 신경쓰지 않았다. 던져짐과 동시에 번쩍 눈을 뜬 화랑이 잽싸게 자세를 가다듬어 침대 위에 편하게 엎어졌다. 후아암, 피곤이 가득한 하품을 하는 화랑을 보는 진의 얼굴에도 피곤이 가득했다. 눈가를 비비던 화랑이 진을 보다 씨익 웃었다. 같이 씻을래? 그 말에 진이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냥 씻기만 할거야. 그 말에 화랑이 비죽 웃었다. 네가 참으면. 참으로 기가막힌 대답에 진은 말없이 그저 다시 한번 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리고 새벽에 음방에 왔었던 대포여신을 통해 진이 화랑을 어깨에 들쳐매고 퇴장하는 사진과 영상이 SNS에 빠르게 퍼졌다. 저거 누구임? 누군데 태권도해서 나름 근육도 있는 오빠를 저렇게 가볍게 듬? 뉴비임? 화랑 매니저잖아. 둘이 옛날부터 알던 사이 같던데. 근데 하루이틀 아닌가, 왜 짐짝처럼 들쳐졌는데 아무렇지 않게 팬서비스 하고 있는거임? 화쪽이 - 화랑의 별명 중 하나였다 - 다루는데 도가 튼 모양인데. 그리고 며칠 후 매니저의 하루 예고가 떴다. 본래 1시간 동안 2명의 매니저의 하루를 보는 프로그램이지만... 방송 최초로 단독 출연이라는 자막과 함께 짧은 예고에 팬들은 환호했다. 이런저런 활동은 많이 하지만 브이로그 등은 찍지 않는 화랑의 대기실에서의 모습이라던가 숙소에서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는 찬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영일 당일, 진이 화랑에게 잡혀 TV 앞에 강제로 앉혀졌다.

" 아니, 난 굳이 안봐도... "

" 도망갈 생각말고! 모니터링도 매니저가 할일이잖아? "

" 모니터링 할게 없지 않나? 따로 촬영을 한 것도 아니고 "

" 시끄럽고, 시작하네~ "

꼼짝없이 화랑에게 잡혀 방송을 보게 된 진은 옆에서 시도때도 없이 태클과 - 화랑씨가 그 컴봇인가 뭔가를 자주 부순다고 하시나봐요? 라는 질문에 침묵하면 어쩌냐고 요령없는 놈이라며 태클 당했다 - 아수세나와 리리가 등장할 땐 질렸다는 한숨과 그 이후론 폭소를 고스란히 감당하며 묵묵히 제가 나오는 방송을 시청하는 수치 아닌 수치를 당했다. 역시 난 방송 같은 건 어울리지 않단 말이야... 한참 방송을 보던 화랑이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며 자리를 뜨고 잠시 후 화면에.

" 편하게 이야기 해도 되나? 괜찮아? 좋아, 그럼... 유능한 녀석이지... 연습생 시절부터 알던 사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녀석이야. 그 녀석은 날 자신의 갑갑했던 무언가를 부셔주고 자유를 찾아 준 은인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내 쪽도 마찬가지야. 그 녀석이... 진이 없었으면 난 연예인 따위 진작에 걷어찼을거야. 끼가 있어보인다며 캐스팅되긴 했지만 목표가 없었거든. 가수의 최정점에 오르겠다거나 인기를 많이 얻겠다거나... 그런 거에는 관심없었으니까. 이대로 그저 목표 없이 무감각하게 이 길을 가도 되나 고민하던 차에... 진을 만났어. 그리고 내 세상이 조금 넓어졌지. 진과의 대화를 통해서 목표를 찾았고 그 목표를 옆에서 함께 걸어줄 사람도 찾았어. 누구냐니, 당연히 진이지. 그 녀석은 모르겠지만 나에게 먼저 손을 뻗은건 그 녀석이니까! 절대로 놓지 않을거야! 내가 가수를, 연예인을 계속 하는 한. 아니, 연예인을 그만둬도 넌 영원히 내 매니저야. 잊지마, 알았어? 진! "

자신이 잠이 든 화랑을 안아들고 숙소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방송이 끝나는 줄 알았던 진은 그 이후 이어진 화랑의 영상 편지에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이야기는 못들었는데... 대체 언제 찍은거야, 화랑. 한번도 듣지 못한 자신을 향한 그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보게 된 진이 환하게 웃는 화면 속의 화랑을 뒤로하고 침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간다던 그는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제 얼굴을 묻은 체였다. 화랑. 천천히 다가온 진이 머리 맡에 걸터앉아 화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방송 끝났어? 베게에 먹혀 억눌린 목소리로 묻는 질문에 진이 응, 이라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 소리에 울컥한 화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아무리 나라고 해도 부끄러운건 부끄러운거라고! "

" 평상 시에 그런 말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

" 시끄러워... 자기도 안해주면서 "

" 그럼... 해줄까? "

" 어? "

진이 화랑의 귀에 작게 무언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 속삭임에 화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으으, 너 진짜... 사람들이 나보고 여우 같다던데 실상은 네가 여우 아냐? 내가 누구 매니저인지 잊었어? 연예인과 매니저는 서로 닮아가는 법이라고. 얼씨구, 말도 아주 청산유수네. 어이없다는 듯 웃던 화랑의 팔이 진의 목에 감겼다. 그리고 입술을 마주대려던 순간.

" 옷 갈아 입어, 화랑. 다음 스케쥴 가야해 "

" 이 분위기도 모르는 자식아! "

" 그래서 내가 본방송 포기하고 바로 가자고 했잖아 "

" 그런 이야기는 키스 다음에 해도 되는거 아냐? "

" 너라면 분위기 타서 침대로 끌어들이고는 펑크 낼 것 같은데 "

" 네 안의 내 이미지는 대체 뭐야! 아무리 나라도 그런 짓은... "

" 했었지? "

" ...... "

자자,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착하지, 화랑. 저를 마치 아이 다루듯 하는 진에게 으드득 이를 간 화랑이 며칠 후 음방에서 진에게 공주님 안기로 엔딩 요정을 찍자며 제촉하더니 - 그 방송 나가고 나서 네 팬도 생긴거 알지? 팬서비스야, 팬서비스 - 엔딩 요정 중 기습적으로 진의 멱살을 잡아당겨 그의 입술에 버드 키스를 하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방송을 타면서 또 다시 진과 리, 심지어 준까지 일주일 이상 고생을 하게 되었지만... 화랑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 참고로 방송은 대박이 터졌다고 한다. 여러가지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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