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21

진화랑 1개, 진화랑라스 1개. 2024년 4월 14일 연성.

1. 갑자기 몸이 18살로 돌아가버린 화랑을 보던 진이 기묘한 기분을 느끼는 걸로 진화랑.

작고 가볍고... 그리운 느낌. 화랑을 보던 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든 말든 화랑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며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그건 분명... 분노였다. 이내 참을성 없는 화랑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 빌어먹을 보스코노비치 박사! 문제 없을거라며! 한적하고 소박한 진의 집에 화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 것도 잠시 진이 그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자 커다란 손에 허리가 모두 들어왔다. 벌크업으로 체격도 근육도 많이 붙었지만 화랑의 허리는 다른 사람보다 꽤나 가느다란 편이었는데 지금은... 몸이 어려진 지금은 완전... 한품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더 가늘어졌다. 뭐하는데 지금... 한숨이 섞인 말을 내뱉고 손으로 제 목덜미를 매만지던 화랑은 짧아진 머리칼에 자신이 정말... 어려졌다는 걸 실감했다.

" 와, 미친 진짜. 이게 무슨 꿈 같은 일이야... 어려지는 약이라니, 이거 실화냐... "

" ...많이 어려진 것 같지는 않은데. 몇살 때야? "

" 넌 익숙할걸? 너랑 처음 만났던 18살 때 같은데 "

" 18살... "

진이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제 기억 속의 추억을 되살렸다. 어머니가 실종되고 헤이하치에게 제 신변을 의탁하게 되었을 때 오우거의 정보를 쫓아 도착한 한국에서 진은 화랑을 만나게 되었다. 시시한 것들을 바라보던 무감각한 시선이 자신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호기심이 가득한 마치 아이같은 시선이 되었고 싸우는 순간에는 이기고 싶다는 열망과 호승심이 가득한 시선이 되었다. 지금이야 많이 성숙해지고 결과보단 과정을 즐기게 됐지만 그 당시 화랑은 진짜... 길들여지지 않은 한 마리의 야생 호랑이와도 같았다. 싸워서 이길 생각 밖에 하지 않는... 야생아.

" 키는 그대로지만... 제대로 단련하기 전이라 체격이 완전... 하아아아... 근데 넌 언제까지 잡고 있을거야! "

제 허리를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진에게 발차기를 날린 화랑도 그 발차기를 막은 진도 같은 의미로 놀랬다. 놀란 이유는 화랑의 발차기가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노력해서 강해졌는지 화랑은 체감하게 되었고 진은... 제 앞의 18살의 화랑이 얼마나... 연약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진이 말없이 화랑을 낚아채 끌어안았다. 야, 야! 이거 안놔? 좀... 떨어져! 저를 밀치는 힘도 평상시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가볍다. 진이 저를 밀치는 손목을 움켜잡았다. 정말...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러... 지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지금의 자신보다 18살의 화랑이 약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진의 내면 안에 스며든 데빌의 가학심이 스물스물 올라올 때 쯤 하아, 먼저 한숨을 내쉰 건 화랑이었다.

" 너 어디가서 그런 얼굴 보이지 마라. 사람들이 기겁하고 도망칠거다 "

" 지금 내 얼굴이 어떤데? "

" 자각도 없나... 여하튼 잘됐다. 날개 꺼내, 당장 간다 "

" 어딜? "

"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

보스코노비치 박사, 이거 어떻게 된거야! 괜찮을거라고 했잖아! 위그드라실의 본부에 도착해서 보스코노비치 박사의 연구실로 직진, 박사를 보자마자 화랑의 고함이 본부에 울려퍼졌다. 캬아아악! 고양이였다면 분명 털을 잔뜩 세우고 위협하는 모양새였겠지.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 건 진 뿐만이 아니었는지 갑자기 진이 방문했다는 말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연구실에 온 리 차오랑이 화랑을 보다 한마디 내뱉었다. 새끼 고양이가 있군. 뭐? 그 말에 화랑이 리를 째려보며 으르렁 거렸지만 박력은 1도 없었다. 리 뿐만 아니라 운 좋게도 - 화랑의 입장에서는 운 없게도 - 본부에 있었던 라스와 알리사 또한 어려진 화랑을 꽤나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화랑이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사람을 동물원의 동물 보듯이 쳐다보지 말라고 "

" 많이는 아니지만... 어리긴 하군. 몇살 때지? "

" 이 자식 처음 봤던 18살 "

" 왜소하군 "

" 댁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아줄래? 뭐, 이때는 훈련도 진지하게 안하고 그냥 놀 생각 밖에 없던 때니까 "

" 그래서 왜 이렇게 된겁니까? 박사님하고 연관이 있는겁니까? "

알리사의 물음에 화랑이 한숨을 푹 쉬고는 주저리주저리 대답하기 시작했다. 3일 전 위그드라실의 본부에 들려 보고서 제출 후 돌아가려던 중 박사가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이상한 액체를 뒤집어 썼고 별거 아니니 괜찮을거라는 대답에 찝찝해하면서도 그냥 돌아갔는데 오늘 자고 일어나니 18살이 되어있더라 라는 말에 리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갑작스런 재난이군. 차라리 그때 솔직하게 말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화 안냈어. 그러니, 박사! 이거 원래대로 돌아가기는 하는거야? 화랑의 외침에 무언가 열심히 입력 중이던 보스코노비치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걱정 말게. 계산대로라면 이틀 정도 후에는 원래대로 돌아갈테니까 "

" ...그래? 이틀 후라는거지? "

" 그러니 부탁할게 있다만... 실험 데이터 좀 확보해도 되겠나? "

" ...되겠냐! "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도 모자라서 실험체로 쓰겠다는거 아냐, 이 양반이 정말! 뻔뻔할 정도로 연구자로서의 부탁을 하는 박사에 결국 분노 폭발한 화랑이 한 대 때려주겠다고 달려드는 걸 막은 건 가장 가까이 있던 라스였다. 그의 손이 화랑의 뒷덜미를 낚아챘고 18살로 어려진 몸이 너무나도 가볍게 잡혔다. 무게감이 그닥 느껴지지 않는 몸에 라스가 화랑의 허리를 붙잡더니 번쩍 들어올렸다. 우앗! 당장 내려놔, 라스! 이게 무슨 짓인데! 그 말에 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가볍군. 알리사보다 조금 더 무거운 수준인데 "

" 제 무게는 60KG 정도입니다 "

" 뭐? 너 그 안에 전기톱이니 이런거 들어있는데도 무게가 그렇게 밖에 안나가? 대체 경량화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거야! "

" 흐음, 확실히 3년 전이라 그런지 힘도 약해진 것 같네, 새끼 고양이군 "

리가 놀리듯 라스에게 들어올려진 화랑의 머리를 과격하게 쓰다듬었다. 아, 하지말라고. 이 아저씨가 진짜! 팔로 허우적 거리며 제 손을 막으려는 화랑이 재미있는건지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띄운 체 리가 계속해서 화랑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마도 그 거만한 태도의 소악마 같은 화랑에게 나름 쌓인 것이 많을 것이다. 물론 화랑 본인에게 악의 같은 건 없다지만 일적으로는 확실히... 피곤한 스타일이긴 하니까. 리가 화랑을 상대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동안 잠시 그를 들고 있던 라스가 한숨과도 같은 숨을 쉬고는 이제 그만두게 할까 싶어 화랑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 응, 이제 그만 둘까 "

심기가 불편해지다 못해 터진건 화랑이 아니라 진이었다. 입은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발현된 데빌의 힘으로 인해 붉은색을 띄고 있는 진의 눈동자는 웃지 않고 있었다. 노골적이진 않지만 리와 라스의 몸에 와닿을 정도로 은은하게 느껴지는 살기에 화랑이 혀를 찼다. 저거저거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선 그런 얼굴 보이지 말라고 했는데 잊어버렸지, 아주. 그 중얼거리는 말을 용케도 알아들은 리가 어깨를 으쓱 들어보이고는 이내 엄지 손가락으로 화랑을 가리켰다.

" 미안하군. 집사있는 새끼 고양이를 너무 가지고 놀았네. 데리고 가게 "

" 누가 집사야, 진짜 날 고양이로 알고 있나! "

" ...이틀 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다시 오지 "

진이 말없이 라스에게서 화랑을 받아들더니 그대로 날개를 펼쳐 연구실을 나가버렸다. 아마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테지. 잠시 문을 바라보던 리가 아이구야,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너무 놀린 모양이네. 진에게는 마블러스하지 못한 행동으로 보인 것 같군. 그 말에 라스가 다시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저기 너 말이야... 좀 떨어지면 안되냐? "

" ...... "

화랑은 대답없이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체 앉아있는 진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겉옷을 찢듯이 벗긴 진은 말없이 화랑을 뒤에서 끌어안은 체 조용히 그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곳에서 핀트가 끊기는 면이 있단 말이야, 이 자식. 그래도 계속 이렇게 붙잡혀 있으면 안될 것 같고... 화랑의 손이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있잖아, 너. 뭐가 그렇게 심술이 난거야. 난 그렇게 쉽사리 부셔지지 않는데~ 장난기 섞인 말에도 한참을 말이 없던 진이 먹힌 소리를 냈다.

" 그냥... 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

" 이상한 기분? "

" 3년 전의 넌... 지금보다 약하고 작고... 그러니까... "

" 길게 말하려고 하지말고 요점만 말해, 요점만 "

" 널 그렇게 다룰 수 있는건 나뿐이니까, 화랑 "

진의 말에 화랑은... 조금 놀랬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마음대로 다루는게 싫었다는 이야기? 이거... 질투라고 생각해도 되나? 뭐, 확실히 3년 전 몸이 되면서 그런 장난 같은 거 쉽게 뿌리치지 못한 건 사실이긴한데... 조금... 귀엽네...? 화랑이 눈을 반짝 빛내다 결국 큭큭, 작게 웃으며 진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아까 자신이 리에게 당했던 것 처럼.

" 답지않게 귀여운 소리하기는! "

" 자, 잠깐. 화랑... 머리 망가지는데... "

" 3년 전의 나, 그렇게 약한가? 네가 그런 말까지 할 정도면 "

그 말에 진이 화랑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잠깐 힘을 줘 붙잡고 손을 떼니, 손목에 선명하게 손자국이 남았다. 우와, 조금만 더 힘주면 멍들겠다? 그나저나 진짜 이틀 후에는 돌아오는거겠지? 그러다 화랑이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있잖아, 진. 그런 화랑의 미소에 진이 불안감을 느낀 것도 잠시. 화랑의 속삭임에 잠시 말이 없던 진이 번쩍 화랑을 안아올리며 침실로 향했다. 네가 질투하고 불안해한다면... 그걸 달래주는 것도 내가 해야겠지. 화랑이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하루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어야겠지만. 그러나 화랑의 예상은 빗나갔다. 화랑은 하루가 아니라 사흘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지냈고 그 사이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화랑은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진에게 초스카이 콤보를 날려버리고 각방을 선언해버렸다.

" 미안, 화랑... "

" 닥쳐, 당분간 각방이야! 정도를 모르냐, 진짜! "


2. 20-2에서 이어지는 한달 후 열린 철권 대회에서 진과의 시합을 끝으로 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른쪽 눈을 적출한 후 라스의 권유로 위그드라실에 합류하게 된 화랑을 보면서 라스가 자신에게서 화랑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며 적대하는 진으로 진화랑라스.

한달 후 철권 대회가 열렸고 진과 화랑, 두 사람은 4강에서 만났다. 화랑은 여전히 특수 렌즈로 오른쪽 눈의 실명을 감추고 있었고 그걸 아는건 당연하게도 라스와 알리사, 그리고 넓게 생각하면 백두산 뿐이었다. 철권 대회 전 백두산과 대화를 통해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내린 화랑은 속시원하게 진과의 시합에 임했고 그 결과.

" 아, 짜증나. 너 말이야, 왜 갑자기 풍신류 쓰는거야? 거기에 그 처음보는 기술은 뭐야? 데빌의 힘도 아닌것 같은데 "

" 카자마류 고무술이야. 어머니의... 기술이지 "

" 그러니까 풍신류에 카자마류 고무술, 극진 공수도, 데빌의 힘까지 모두 쓴다... 이거지? 혼자만 너무 파워업 한거 아냐? "

" 너니까. 상대가... 너니까 내가 쓸 수 있는걸 모두 쓴거야. 네가 날 이기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널 이기고 싶으니까 "

" 매번 집안 문제로 바쁘다고 상대도 안해주던게 엊그제 같은데 아주 영광이네~ "

" 윽, 그건... "

경기 후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제 말에 안절부절 못하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진에 화랑이 작게 웃었다. 비록 지긴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건 상대가 자신이기에 쓸 수 있는걸 모두 쓴거라는 그 말이 기분 좋았기 때문일거다. 하지만 진건 진거대로 열받으니까 약간의 심술을 부린 화랑이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진을 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덕분에 마지막으로 손색이 없는 경기였어. 그 중얼거림에 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뭐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화랑이 등을 돌리며 가볍게 뒤를 돌아보았다.

" 자, 그럼 패자는 이만 가볼테니까 승자는 빨리 대기실 가서 릴렉스 하고 결승전 준비하라고. 그나저나 하루에 4강전이랑 결승까지 다 하다니, 일정 대체 누가 짠거야? "

" ...화랑 "

" 날 이겼으니까 이왕이면 우승하라고. 우승 못하면... 때려줄테니까 "

씨익, 부드럽게 웃어준 화랑이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발을 움직여 긴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런 화랑의 등을 바라보던 진이 뭔가 할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달싹 거렸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문 체 자신도 발걸음을 옮겼다. 등을 보이며 멀어진 두 사람의 거리만큼이나 서로를 바라보며 평행선과 교차점을 반복하던 길이 갈라졌다는 걸 알아차린 건 화랑과... 복도 끝에서 왼쪽으로 꺾자마자 앞으로 쓰러지는 화랑을 팔로 받치며 지탱한 라스 뿐이었다. 화랑이 손을 들어 제 왼눈을 가리며 쓰게 웃었다.

" 젠장, 마지막에 와서 가오 떨어지게 두통이라니. 덕분에 그 자식한테 때깔 나는 말도 더 못했잖아 "

" 경기 중에 이미 징조가 있었지? "

" 그래, 머리가 지끈거리는 징조. 덕분에 조금 조급해지는 바람에 그 자식한테 진거지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운도 실력이라고 했으니 "

" ...결정은 내렸나? "

라스의 말에 겨우 두통이 가시고 통증에 생리적으로 흐른 눈물을 닦아내며 몸을 바로 세운 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쓸 수 있는 것을 모두 사용하고 혼신의 힘을 다한 경기였다. 패배는 항상 아쉽지만 이제 타임 오버였다. 미련을 버리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신의 길을 가야할 때였다. 그래도 속으로 삼키듯 내뱉은 말에는 아쉬움과 미련이 가득 담겨있었다. 수술 할게, 지금 당장.

기분은? ...전신마취 진심으로 최악이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네. 지금 당장이라는 말에 맞게 화랑의 안구 적출 수술은 바로 진행됐다. 오른쪽 얼굴에 붕대를 감고 아직은 몽롱한 정신으로 병실 침대에 앉아있던 화랑이 작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어차피 오른쪽 시야를 잃어버린 체 오래동안 지내왔기에 어색하지는 않으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신체 일부가 상실 되었다는 충격은 다르기에 적출 수술에서 회복되도 당분간은 심신의 안정은 필요할 것이다. 왼팔에 박혀있는 링거 바늘이 거슬리는 듯 잠시 매달려 있는 링거액을 노려보던 화랑은 이내 포기하고 힘을 빼고 낮은 숨소리를 내뱉고는 오른손으로 붕대가 감긴 오른 얼굴을 매만졌다.

" 그냥 단순히 적출만 한건 아닌 것 같은데 "

" 안구 부분이 비어있으면 얼굴이 무너지니까. 적당히 만든 의안을 넣었다고 알고 있어 "

" 거참 서비스 엄청 나네... 아, 맞다. 그 자식, 이겼어? "

" ...그래 "

" 덕분에 귀찮게 때리러 갈 필요가 없어졌네 "

진이 이겼다는 말에 작게 웃던 화랑이 아이고, 통증이 몰려오는 듯 작게 신음을 내뱉고는 이제 진짜 끝이네. 라며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에 라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전부터 내뱉은 이야기와 지금의 반응으로 봐서는. 격투가는 이제 끝인가? 그 말에 화랑이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얼굴에 이런거 박고는 위험한 격투기 같은거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리고 남아있는 왼쪽 눈도 위험하고... 뭐, 각막 이식 같은 걸 하면 된다지만 댁도 잘 알거 아냐. 격투기라는거 생각보다 눈을 꽤나 혹사한다고. 상대의 움직임을 쫒기 위해 집중하면 눈은 분명 피로해져. 남은 눈은 지켜야하지 않을까... 뭐, 나도 몸이 근질근질하면 한번 쯤은 할 수 있겠지만...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무작정 싸우자고는 할 수 없겠지. 하아, 이제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건 끝났어. 그 동안 나 때문에 사범님이 고생하셨으니까 이젠 사범님의 뒤를 내가 받쳐드려야지.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짓는 화랑을 보던 라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 ...그럼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

" 제안? 댁이? 뭐... 좋아. 들어는 줄게, 말해봐 "

거참. 태도만 봐서는 마치 자기가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군. 하지만 그는 이런 오만한 태도가 어울리는 남자였다. 태도는 오만하지만 그건 겉의 모습일 뿐 속은 그와는 정반대다. 이런 겉과 속이 다른 태도에 진도 그리고 자신도... 끌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 이런 제안도 하지 않았겠지. 라스가 제안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 제안을 들은 화랑의 남아있는 왼쪽 눈이 커졌다. 분명 라스가 내뱉은 제안은 화랑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화랑의 입장에서는 꽤나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니까.

" 그러니까 나보고 위그드라실에 들어와라? 내가 왜? "

" 너의 실력을 보고 스카우트를 하는거다. 넌 나나 진처럼 초인이라 불리는 피가 흐르는 인간도 아니다. 정말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런데도 너는 우리와 대등할 정도로 강해. 난 그 강함에 경의를 표하는거다 "

" ...그래, 강하다라는 칭찬은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어. 근데 그거와 별개로 내가 그 위그드라실에 들어가서 뭘 할 수 있는데? "

" 너에겐 일반 병사들의 훈련 교관을 맡기고 싶다. 이번 G사와의 전쟁을 통해 깨달은게 있다면 병사 하나하나의 실력 상승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자가 누구인가 생각했지. 그리고... "

" 그리고 그게 나다? 근데 굳이 훈련이 필요해? 리씨의 최신형 슈트 같은 거면 충분하지 않나? "

" 정말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

라스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화랑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충분할 리가 없지. 훈련은 뒷전으로 미루고 무기나 병기에만 의존하는 군인은 전장에서 제일 먼저 뒤지니까. 그리고 내가 그런 걸 인정할 것 같냐. 그 말에 라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백두산의 제자. 자신을 극한으로 몰고가는 훈련과 가르침이 강함의 원천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는 남자다. 그런 그가 최신형 슈트면 되지 않냐고 물어봤다는 건 그저 자신의 속마음을 보기 위한 질문이라는 걸 라스는 바로 알아차렸다. 으음... 제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고민하던 화랑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할래 "

" ...이유는? "

" 결국 위그드라실은 군대 집단이잖아? "

" 뭐... 따지고보면 그런 셈이지? "

" 난 군대 따위 다시는 안갈거거든? 억만금을 줘도 갈 생각 없어. 그 답답하고 짜증나는 곳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간다? 어림도 없지. 절대로 안가! "

말하다보니 점점 감정이 격해진 화랑의 일갈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바라보던 라스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줄 알았건만 그저 답답하고 짜증난다는 이유를 들먹이는게 딱...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정말이지, 진짜 분위기가 휙휙 변하는 게 심심할 틈이 없게 만든다. 그런 라스의 반응에 화랑의 눈꼬리가 확 올라갔다. 짜증과 화가 났다는 걸 보여주는 반응. 라스가 바로 수습에 들어갔다. 그럼 정규 소속이 아닌 협력자라는 포지션은 어때? 바로 바뀐 제안에 화랑이 일단 화를 누그러트리고 생각에 잠긴 것도 잠시.

" 아, 피곤해. 아직 전신 마취의 영향도 있어서 머리가 안돌아 가거든? 그리고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닌 것 같고... 서안으로 딱 작성해서 내놔. 누가 이런 중요한 일을 구두로만 해? "

" ...자네는 가끔 허를 찌르는 말을 잘도 한단 말이지 "

그리고 화랑은 그 다음 날 바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적출 수술 후 회복이 그렇게 빠를리가 없는데도 화랑의 고집은 대단했다. 답답하게 병실에 계속 있을 생각 없어. 상태가 악화되면 그땐 얌전히 있을테니까 지금은 돌아간다! 적출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가 들었다면 바로 뒷목 잡고 쓰러질 말을 남기고 돌아간 화랑의 손에는 라스의 제안서가 들려있었고 그는 그걸 바로 제 사범인 백두산에게 전달했다. 그리곤 정확하게 2주 후 화랑은 라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일주일에 2번, 일반 병사들의 훈련을 봐주는 협력자의 역활로 위그드라실에 들어오는 걸 수락한 것이었다. 뭐, 사범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고 근데 훈련 스케쥴은 꽤나 빡셀텐데 나중에 병사들 사이에서 반란 같은 거 발생해도 난 모른다~? 장난기 섞인 그 말에 라스는 오히려 그런 병사들의 싹을 잘라내기에 좋을 것 같다며 가볍게 받아주었다.

이상해. 진이 지긋이 입술을 물었다. 화랑과 그 후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 준결승에서 자신에게 지고 간단한 대화를 나눈 후 진은 단 한번도 화랑을 만나지 못했다. 물론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평화가 찾아온 후 시도 때도 없이 진의 앞에 나타나 심심하니 싸우자며 달려들던 화랑이 그 날 이후로 연락이 딱 끊겨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철권 대회에 화랑이 참가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강한 사람과 싸우는 걸 좋아하던 화랑이, 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는데. 카즈야와의 일전을 끝내고 다시 미시마 재벌의 총수가 되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에 온 힘을 쏟던 진은 어느정도 일단락이 되고 나서야 그제서야 제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고 그 사이에 제 옆을 끈덕지게 지키던 화랑이 더 이상 제 옆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지...? 어째서...? 낮은 한숨을 쉰 진이 제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라스와 알리사가 제 물음에 두리뭉실한 대답만을 남기고 가버렸을 때 회의실의 책상에 남아있던 희미한 혈흔의 흔적. 그 날 이후 그 희미한 혈흔이 진의 머리 속에 박혀서 사라지지 않는다. 무언가 있다. 무언가 있는데... 그 무언가가 도저히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다시 한번 더 라스, 알리사와 대화를 해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안에 녹아든 데빌의 힘으로 날개를 만들어 위그드라실의 대형 비행정인 비도프니르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진은 저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하는 알리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스는? 진의 물음에 잠시 말이 없던 알리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내뱉은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진이었다. 라스는 지금 화랑씨와 대화 중입니다. 화랑이... 라스와 함께 있다고? 알리사의 대답에 이번엔 제가 말이 없던 진이 발을 움직였다. 그런 진의 뒤를 알리사가 쫓았다. 둘은 지금 어디있지? 알리사는 말없이 진을 격납고로 안내했다. 격납고가 내려다 보이는 난간에 선 진의 눈에 라스와 한참 대화 중인 화랑이 들어왔다. 서류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라스와 그런 라스의 정면에 서서는 뭔가 말을 하는 화랑. 화랑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의 눈에 눈가를 가로지르는 검은 무언가가 보였다. 뭐지...? 그리고 동시에 나지막히 웃는 라스와 그런 라스를 보며 짓궂게 웃고 있는 화랑이 보인 순간. 진은 제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그대로 날개를 꺼내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 뭐야, 이 정도 메뉴도 소화 못할 정도라니. 너무 약해 빠진 거 아냐? "

" 아까도 말했지만 일반 병사들이 왜 일반 병사인지 잊어버린 거 아닌가? "

" 이거 우리 사범님이 특별히 짜준 메뉴라고. 일단은 닥치고 체력부터 길러야 되는 법이라고 하시면서 "

"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잖아, 화랑. 첫날부터 병사들이 학을 떼게 하지 말아줘 "

" 무시무시 한거 알려줘?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그 메뉴, 사범님이 짜준 메뉴에서 내가 반으로 줄인거거든? 우리 사범님이 아셨으면 지금쯤 당장 쫓아와서 한소리 하셨을거다 "

" 화랑! "

그 말을 하며 짓궂게 웃는 화랑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은 라스는 순간 들린 고함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건 데빌의 날개를 단 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진이었다. 진. 라스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웃음을 지운 화랑이 쯧, 혀를 차고는 머리를 긁적이다 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린 화랑에 날개를 지운 체 다가오려던 진의 걸음이 멈췄다.

" 여, 오랜만이다? 라스의 반응을 보니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

" 화랑, 너... 오른쪽 눈은 어떻게 된거야 "

" 아, 이거? "

진의 눈에 들어온 건 화랑의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였다. 패션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검정색의 안대. 빈틈없이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매만진 화랑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문제가 좀 있어서... 적출했어. 적... 출 했다고? 화랑의 말이 충격이었던 듯 진의 눈이 커졌다. 하긴 그럴거다. 오랜만에 봤는데 다른 부위도 아니고 눈을 적출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그런 진의 반응에도 화랑은 태연했다.

" 그래, 적출. 무슨 문제인지는 안알려줄거야. 네가 알 필요 없는 문제야 "

" 화랑 "

" 네가 알 필요 없다고 했어, 진. 아, 맞다. 그래도 이건 말해줘야지. 나 이제 더 이상 너랑 안싸울거야 "

" ...뭐? "

" 그렇게 말하면 진이 오해한다. 하아, 일단... 화랑은 돌아갈 시간이니까 나랑 따로 이야기 하지, 진 "

" 아, 그렇네. 그럼 대충 설명 좀 해줘, 라스. 난 피곤해서 먼저 간다 "

" 잠깐, 화랑! "

진의 목소리에도 주저없이 등을 돌린 화랑이 자신에게 다가온 알리사와 대화를 하며 철저하게 진을 무시했다. 그런 화랑에 이를 악문 진이 그를 쫓으려는 걸 막은 건 라스였다. 일단 나랑 이야기 하지, 진.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턱에 힘을 준 진이 결국 화랑을 쫓는 걸 포기하고는 라스를 바라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모두 이야기 해줘야 할거다, 라스. 진의 말에 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 해야 할까... 일단 화랑이 오른쪽 눈을 적출한 이유는 그의 오른쪽 눈이 실명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서 고집으로 적출하지 않으니 왼쪽 눈에도 악영향을 끼쳤고 결국 왼쪽 눈도 실명하기 전 적출을 한 것 뿐이야. 잠시 말이 없던 진이 고집... 이라고 중얼거리더니.

" 언제부터였지? "

" ...... "

" 언제부터였냐고 "

"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너와 아시아 예선에서 싸웠을 때 부터 그의 오른쪽 눈은 이미 실명 상태였다 "

" 아시아 예선... "

" 아마도 너와 싸우기 위해서 고집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한거겠지 "

" 너는 언제부터 그걸 안거지? "

라스는 하나하나 차분하게 진에게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가며 설명했다. 알리사가 그의 오른쪽 눈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아차렸고 그 후 대화를 통해 그의 오른쪽 눈이 실명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실명 시점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진에게 거짓없이 모두 대답한 라스에 태도가 조금은 누그러진 진이었지만... 이내 진의 눈이 다시 사납게 변했다. 근데 왜 위그드라실의 본부에 화랑이 있는거지? 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던데. 그 질문에 라스의 대답은.

" 그래, 말해주는 걸 잊었군. 일주일 전 화랑은 위그드라실 소속이 되었다 "

" 뭐? "

" 물론 정규군은 아니야. 협력자... 의 포지션이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일반 병사들의 훈련 교관을 담당하게 됐다 "

" ...라스, 네가 부탁한건가? "

" 그래. 아, 그리고. 그가 너와 싸우지 않겠다고 한 건 다른 뜻이 아니야. 그는... 더 이상 격투가를 하지 못할테니까 "

" 어째서? "

" 안구 적출 후 그의 얼굴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한 의안을 박아 넣은 것도 있지만... 그의 왼쪽 눈도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이야. 너도 알겠지만 격투기라는 건 생각보다 눈을 혹사하는 일이야. 그는... 제 왼쪽 눈도 실명하는 걸 막기 위해 격투가를 포기한 거다. 그러니 너와 싸우지 않겠다고 한거지 "

" ...... "

" 오해하게 말을 하는 건 그의 특징이지, 안 그래? "

라스의 말에 고개를 숙인 진의 입에서 으득 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명은 충분히 알아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화랑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어.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 진의 눈은 붉은색이었다. 순식간에 날개를 꺼내든 진이 날개를 몇번 퍼덕이더니. 화랑을 잘 안다는 것 처럼 말하지마, 라스. 분노와 적의를 가득 담은 말을 남긴 체 순식간에 비도프니르를 떠났다. 흠, 붉은 잔상만을 남긴 체 사라져 비어진 공간을 보던 라스가 화랑을 배웅하고 돌아온 알리사의 부름에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래, 화랑을 가장 잘 아는 건 너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화랑의 심정을 잘 아는 건... 나일 것 같군, 진. 라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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