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인 논CP] What I Just Want to Do for Them

악몽 스포일러 주의

#1

루인 마이어는 은하수 밑에서 잠들 때가 많았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였다.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을 때에는 쏟아지는 새파란 별무리를 머리에 이고 차가운 새벽 이슬을 이불 대신 덮고 잤다. 그것이 그에게 쾌적하고도 평온했으므로, 인간이 되고 난 후에도 창가에 기대어 앉아 반짝이는 은하수를 올려다보다가 가만히 눈을 붙이곤 했다.

한두 시간의 짧은 수면 후에 잠에서 깨면 그의 몸 위에 로드의 두툼하고 묵직한 겉옷이 덮여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체온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것쯤은 루인에게 있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것은 필요가 없다고 이미 로드에게 말한 바 있었으나, 로드는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냥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로드는 그렇게 말했다.

‘그냥 내가 해주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는 역사가 기록하지조차 않는 먼 옛날에, 루인은 사람들에게 그냥 해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최초에 선의라기보다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불멸에 가까운 장수종으로서 찰나를 사는 단명종들의 세계에 대해 가진 소소한 관심은 개체 하나하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집요한 애착으로 탈바꿈했다. 꽃에게 이름을 붙여주면 사랑하게 된다는 원리를 따르듯이 루인은 자신이 만난 것들을 가슴에 안았다.

그들을 위해 나라를 세웠다. 실로 푸르른 꿈을 품었다. 애틋할 정도로 짧은 수명을 가진 단명종들이 우렁차게 울음을 토하며 이 세상에 생을 얻은 그 순간부터, 마지막 가냘픈 호흡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후회나 미련 없이 살다 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그들이 땀 흘려 일굴 수 있는 비옥한 토지와, 마음 놓고 잠들 수 있는 따뜻한 집,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과 연인들, 그리고 찬란한 미래를 향한 희망을 주자고.

그 모든 것을 루인 마이어는 해주고 싶었다. 그냥, 해주고 싶었다.

#2

전화가 사그라들고 오랜 시간이 흘러, 자신이 세운 나라라고 할 수 없어진 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청년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루인은 그를 외면했다. 자신이 다시 왕성에 들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좌 옆의 드래곤은 그저 과거의 잔해로만 존재하면 족하다고 믿었다.

사실 자신이 어째서 이곳으로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저버린 땅이 자신을 반겨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으니까. 자신에게는 향수 같은 것을 느낄 자격조차 없었으니까.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렸다고 설명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왕성에 남아 있는 칸나 르 페이의 저주였을까. 이제는 모두 불귀의 객이 된 옛 친우들의 원한이었을까. 여하튼 루인은 불의의 사고처럼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 루인에게 그가 찾아왔다. 외면하려고 했던 앳된 왕.

“루인 마이어.”

오래된 친구를 부르듯 다정한 목소리로 그가 루인을 불렀다. 루인은 책상을 향해 그를 등지고 선 채로 돌아보지 않았다. 목덜미가 따끔따끔했다.

“시초의 건국왕. 태고의 수호룡. 그것이 그대의 이름이지?”

어째서 그 호칭을 알고 있는가. 물어볼 것까지도 없었다. 칸나 르 페이의 소행이다. 루인은 그제야 몸을 돌려 왕을 똑바로 보았다. 얼굴에 배어나오는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실제로 만난 왕이 너무 어렸던 것이다. 갓 성년이 된 용이었던 자신만큼이나 어렸던 것이다. 루인은 사무적인 태도로 물었다.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아발론의 군주시여.”

“딱딱하네. 차 한 잔이라도 권하지 않는 건가?”

왕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느긋한 태도로 물었다. 의아했다. 어린 얼굴과는 달리 기묘한 여유가 있었다. 단명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잠시 뇌리를 스칠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특수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력도 갖추지 않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 루인이 손가락만 튕겨도 목숨을 잃을 수준의 작고 여린 인간이었다. 루인은 미소를 띤 채 답했다.

“불청객에게 낼 차는 없어서요.”

“그래, 내가 불청객이긴 하지.”

왕은 언짢은 기색도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앉는 것 정도는 허락해 주겠지?’라고 물으면서 의자를 당겨 루인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루인은 입을 다물고서 책상에 기대어 섰다. 왕이 루인을 올려다보았다. 물처럼 맑은 눈, 이라고 루인은 생각했다. 바람이 일지 않는 날의 호수면처럼 투명하게 상대의 마음을 비추어내는 눈이다. 오래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용무입니까?”

“날 도와줬으면 해.”

루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예상한 대로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 누가 있을지도 루인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칸나 르 페이가 시키던가요? 저를 다시 끌어들이라고.”

“그녀가 당신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맞아. 하지만 지시받은 것은 아니야. 당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나니까.”

“필요하다고요?”

루인은 입술을 말아올리며 웃었다.

“무엇을 위해? 이제 와서 용의 힘이 무엇에 필요하죠? 침략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입니까? 그거라면 확실히 제 능력이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관두라고 하고 싶군요. 지금의 아발론은 변방의 소국. 제가 타국의 마을과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다 하더라도 그 후에 그 땅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만한 능력이 아발론에는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세요, 아발론의 군주시여. 당신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단명종의 인생은 짧지 않습니까.”

“워, 워. 진정해.”

왕은 손을 저어 보이며 루인을 달랬다. 그제야 루인은 자신이 다소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주어진 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짧다.’ 그것은 루인이 남에게 훈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루인이야말로 주어진 것을 지키는 데에 철저하고 처절하게 실패했으므로. 루인이 침묵하자 왕은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그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대의 파괴적인 마법 때문이 아니야. 아발론을 건국하고 다스렸던 경험 때문이지.”

“경험?”

루인은 그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되풀이했다. 왕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아발론의 관리들은 무능하고 부패해 있어. 그리고 나는 정치와 행정에 있어서는 햇병아리야. 유능하면서도 청렴하고 도덕적인 행정관이 필요해. 이 나라에 대해서 잘 알고 또 이 나라를 사랑하는 행정관 말이야. 그러면서도 욕심이 없어야 해. 아, 일이 몹시 많을 테니까 피로를 잘 느끼지 않는 체질이면 금상첨화겠고. 나는 그대가 적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때?”

루인은 말을 잃고 왕을 바라보았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나라를 버리고 떠난 건국왕이자 수호룡을 찾아와 한다는 말이, 자신의 밑에서 행정관으로 일하라는 것이라니.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치기어리다고 해야 할지. 루인은 한참이나 왕을 응시하다가 가까스로 물었다.

“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왕은 무슨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사랑하잖아?”

루인의 눈이 커졌다.

“이 나라를.”

‘그러니까 돌아온 거잖아?’라고 왕이 덧붙였다. 루인은 오래 침묵했다. 그는 궁금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아발론으로 돌아온 것인지. 둥지를 떠난 새가 귀소하듯이 다시 이곳으로 걸음을 돌린 이유가 무엇인지. 무언가 알 수 없는 모종의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 루인은 믿었다. 그런데 왕은 말하고 있었다. 루인이 이 나라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고. 그래서 돌아온 것이라고. 그런 간단하고 명쾌한 이유라고.

“나도 이 나라를 사랑해. 그러니까 우리는 한 배를 탄 거야.”

왕이 루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은 장갑을 낀 왕의 손을 루인은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잘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서 루인은 질문했다.

“어째서?”

“뭐가?”

“어째서 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겁니까?”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왕은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루인의 눈을 직시하며, 고요하지만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나라를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사람들이 후회나 미련 없이 살다 죽을 수 있는 곳으로 말이야. 그들에게 비옥한 토지와 따뜻한 집, 다정한 가족과 이웃, 친구, 연인을 주고 싶어. 무엇보다 미래를 향한 찬란한 희망을 주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당신이 필요해, 루인 마이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운명, 이었을까.

“…….”

루인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 손으로 왕의 손을 잡았다. 장갑 너머로도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대는 오늘부터 건국왕도, 수호룡도 아니야. 그저 아발론의 행정관이다.”

썩 마음에 드는 호칭이라고 루인은 생각했다. 왕이 활짝 웃었다.

“잘 부탁해, 루인.”

#3

“뭐, 루인이 전투에 나간다고!?”

프라우의 외침에 모두의 이목이 단숨에 루인에게 집중되었다. 루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뺨을 긁었다. 로드가 심각하게 말했다.

“재앙의 경계에 나타나는 괴수가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어. 전보다 더 강력해진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왔잖아. 지금의 기사단의 전력으로는 방어선이 위태롭다는 판단이야. 일단 월요일 한정으로 루인을 함께 출전시키려고 해.”

“그건 레이드 메타가 이번 업데이트로 변경돼서 그런 거긴 한데…….”

“응?”

“아, 아무것도 아냐!”

프라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빠르게 말아넣었다. 프라우가 뜻모를 소리를 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로드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루인, 부탁해.”

“로드의 뜻대로.”

루인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로드는 안쓰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행정 일만으로도 힘들 텐데 전투에까지 내보내게 돼서 미안하네.”

그게 무슨 뜻인지 루인은 알고 있었다. 로드는 루인의 용으로서의 파괴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로드가 루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행정관으로서만이라고 말했었으니까. 그러나 루인은 상냥한 미소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이것도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물론입니다. 아발론의 영광을 위해서니까요.”

로드가 후, 하고 작게 웃었다. 아발론의 영광. 그러나 ‘영광’이라는 말은 거창하다. 루인과 로드가 바라는 것은 그보다는 좀 더 소박한 것들이다. 재앙의 침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일. 이 나라의 사람들의 일상과 미래를 지키는 일. 어린 날의 루인이 꿈꾸었고 로드가 꿈꾸었으며 지금도 함께 꿈꾸고 있는 일.

그것을 위해서라면 루인은 얼마든지 전장에 설 수 있었다. 이번에는 돌아올 곳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러 가는 것이므로. 이 또한 루인이 ‘그냥 해주고 싶은 일’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로드.”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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