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츠키] 붉은 것
렌츠키 첫만남
이시카와 렌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서류의 첫 장을 읽고 놀라서 자신의 앞에 앉은 수사4과장을 보았다. 벚꽃이 흐드러진 4월이었고, 과장은 느긋하게 따뜻한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렌은 다시 한번 서류를 보고 또 과장의 얼굴을 보았다. 몇 번을 보아도 서류의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잠입이요?”
“응, 자네가 적격일 것 같아서.”
불곰처럼 큰 덩치에 머리를 짧게 깎은 과장은 그 험상궂은 인상만 보면 야쿠자나 진배없었지만, 지금은 렌을 향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렌은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서류철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서류에는 ‘관서 광역폭력단 나니와회에 장기 잠입하여 정보 입수’라고 쓰여 있었다. 그게 렌에게 내려진 임무였다. 그러나 렌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 제가 적격입니까?”
“이번 잠입은 사카키바라 이츠키……아, 그러니까 사카키바라의 도련님한테 붙는 건이야. 그러니까 비슷한 나이대의 녀석이 필요해. 이미 들어가 있는 우리 쪽 녀석이 널 보좌로 추천해 줄 테니 가서 시중 들어주면서 이츠키에 대한 정보를 캐내 주면 돼. 지금 두목인 카즈히코가 나이가 많으니 앞으로 10년이면 놈이 두목이 될 거다. 그때까지…….”
“10년이요? 10년이나 잠입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나.”
과장은 중국의 고사를 그럴싸하게 인용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잠입이지, 실제로 야쿠자가 되는 일이나 다름없다. 더러운 짓거리도 서슴지 않고 해야만 할 것이다. 잠입한 경찰들 가운데에서는 야쿠자의 단물을 맛보고 정말로 경찰을 그만두고 야쿠자가 되어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어쨌든 명령이니까 자네한테 거부권은 없어. 준비하도록 해.”
“…….”
과장은 여유롭게 녹차를 홀짝였다. 렌은 서류철 위에 붙은 사카키바라 이츠키의 증명사진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정장을 입은 모습이었다. 중성적인 얼굴 생김은 예쁘장하게도 보여서 야쿠자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서류에는 25살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고등학생 같은 인상이다. 렌은 그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앞으로 10년의 인생이 이 야쿠자 도련님에게 묶여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 같았다.
*
나니와회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광역폭력단이지만, 사카키바라의 저택은 교토에 있었다. 본디 사카키바라조는 전전(戰前)부터 교토에서 터를 잡고 있었던 뿌리 깊은 조직이었는데, 전후(戰後) 고도성장기에 오사카 쪽으로 사업을 넓히면서 그곳의 중소 조직들을 흡수, 통합해 나니와회로 성장했던 것이다.
렌을 끌어주기로 한 마츠모토는 나니와회에 잠입한 지 7년이 된 40대의 베테랑 형사였다. 사카키바라 카즈히코의 신임이 두텁다고 했다. 교토의 한 으슥한 다방에서 만난 마츠모토는 담배를 연거푸 피워대며 투덜거렸다.
“자네도 고생길이 열렸군그래. 이츠키는 성질이 더럽거든.”
“그렇습니까?”
“말도 마, 도련님이라고 오냐오냐 컸다 하는 수준이 아니야. 게다가 제 아버지를 싫어해서, 아버지가 붙여주는 보좌역이라고 하면 냅다 재떨이부터 집어던질걸.”
“…….”
렌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폐 속으로 담뿍 머금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마츠모토는 자신의 소매를 걷어 팔뚝에 새긴 커다란 뱀 문신을 보여주었다.
“이런 것도 새기게 될 테지.”
“……꼭 해야 합니까?”
“도련님의 보좌역인데 안 하고 지나갈 수는 없지 않겠나. 이 문신 때문에 온천도 못 가고, 하여튼 귀찮은 일투성이야. 자네를 넣어놓고 나면 나는 곧 경찰로 돌아가겠지만, 완전히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어. 7년이나 야쿠자 노릇을 하면서 끔찍한 꼴을 너무 많이 봤거든.”
마츠모토는 뜨거운 커피를 물처럼 들이켰다. 렌은 침울한 기분으로 담뱃재를 재떨이에 떨었다.
“그래도 용케 견디셨군요.”
렌의 말에 마츠모토는 수염이 난 턱을 쓸며 메마른 소리로 웃었다.
“정의감 하나로 버티는 거지.”
정의감, 정의감이라. 렌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까. 렌에게 있는 것은 야쿠자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야쿠자 때문에 잃었다는 분노, 증오. 부모의 묘는 오사카에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오사카대학으로 진학했고, 오사카부경에 몸담았다. 폭력단을 전담하는 수사4과를 지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 자신이 그저 흉내라 할지라도 야쿠자가 된다는 것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자신을 들여다본다고 한다. 렌은 자신에게 정의감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분노와 증오만으로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물들지 않을 수 있을까.
“갈까.”
마츠모토가 커피잔을 비우고 읏차, 하며 일어났다. 렌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마츠모토가 커피값을 계산했다. 동전을 하나하나 세는 손이 더뎠다. 렌은 양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기다렸다. 눅눅한 세피아빛 다방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기분이 축축 처지는 풍경이었다.
마츠모토는 렌을 조수석에 태우고 사카키바라의 저택으로 향했다. 봄의 교토의 거리는 관광객으로 붐볐다. 소담하게 처마를 맞댄 건물들 앞에서 알록달록한 대여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만개한 벚나무 밑을 오갔다. 그 복잡한 거리를 빠져나와 산기슭 쪽으로 올라가자 놀랍도록 사람이 없었다. 고택들이 늘어선 뻥 뚫린 길을 자동차가 시원하게 달렸다.
이윽고 산기슭 바로 밑에 자리 잡은 한 고택 앞에서 차가 섰다. 마츠모토와 렌은 차에서 내렸다. 고택의 문패에 사카키바라라고 쓰여 있었다. 마츠모토가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누가 봐도 야쿠자다운 면상의 젊은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마츠모토를 보자마자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응, 왔다.”
마츠모토는 가볍게 대꾸하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렌은 침착함을 가장하고 마츠모토를 따랐다.
“회장님은 계시냐?”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어, 그래? 이런.”
마츠모토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난처하게 되었다는 눈치였다. 그가 렌을 힐끔 보고 잠시 고민하더니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도련님은?”
“후원에 계십니다.”
“도련님 먼저 뵈어야겠다.”
“네.”
마츠모토는 몸을 휙 돌려 건물 뒤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렌도 그 뒤를 바짝 쫓아갔다. 사카키바라 카즈히코를 만나기 전에 ‘도련님’, 즉 이츠키부터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츠모토가 렌의 두툼한 등판을 툭 두드렸다.
“긴장하지 마.”
“네.”
건물을 빙 돌아 도착한 후원에는 거대한 왕벚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꽃이 구름처럼 흐드러져 하늘을 뒤덮었다. 그 꽃그늘 아래에 처마를 드리운 툇마루가 있었고, 툇마루 위에 한 남자가 이쪽에 등을 보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가 남자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대담한 꽃무늬가 새겨진 붉은 기모노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기모노에나 쓰는 비단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각으로 벌어진 어깨에서 그가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누구야?”
관서 말씨의 청아한 목소리였다. 마츠모토는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마츠모토입니다, 도련님.”
“같이 온 놈은 누군데?”
걸음 소리만으로 두 명인 것을 알아챘나. 보통은 아닌데. 렌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도련님’, 이츠키에게 마츠모토가 공손하게 말했다.
“이번에 도련님의 시중을 들게 된 놈입니다.”
그러고는 렌을 툭 쳤다.
“인사해.”
렌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이시카와 렌입니다.”
이츠키가 그제야 몸을 틀었다. 렌은 고개를 들어 이츠키를 보았다. 툇마루에 앉은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렌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처럼 티 없이 새하얀 얼굴. 나른하게 쳐진 눈썹과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꼬리. 그 안에 루비처럼 박힌 새빨간 눈동자. 연지를 발라놓은 듯 붉디붉은 입술. 느슨하게 벌어진 기모노 옷깃 사이로 엿보이는 흰 가슴팍의 꽃 문신.
사진과는 전혀 달라.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
“……흐응.”
이츠키는 홀린 듯 자신을 응시하는 렌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데려온다던 보좌역이 너구나.”
“…….”
“조직에서 오래 구른 녀석도 아닌데 마츠모토의 추천을 받아 갑자기 들어오게 되다니…….”
이츠키가 돌연 렌의 목 밑에 손을 들이댔다. 그의 손에는 꽃가위가 날이 벌려진 채 들려 있었다. 이츠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첩자 아냐?”
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마츠모토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첩자라뇨, 도련님. 믿을 만해서 데려온 겁니다.”
“어디서 알게 됐는데?”
“경호회사에서 일하던 놈입니다. 빚이 있어서 이쪽 일을 하게 됐습니다. 실력을 보고 제가 직접 발탁했습니다. 과거도 깨끗합니다.”
렌의 과거는 경호회사 근무로 완벽하게 날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츠키는 여전히 렌을 노려보며 형형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꽃가위가 서슬 퍼렇게 번쩍이고 있었다. 렌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만일 제가 첩자라는 게 밝혀지면 그때 죽이시면 됩니다.”
단호한 렌의 말에도 이츠키는 코웃음을 쳤다.
“무슨 개소리야? 정보 다 새어 나가고 난 다음엔 늦지.”
“그럼 어떻게 하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흐음.”
이츠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말아올려 비릿하게 웃었다.
“사람 하나 가라앉힐래?”
렌의 눈이 흔들렸다.
“……네?”
“나는 아무래도 네가 세이죠회의 첩자 같거든. 그러니까 세이죠회의 간부급을 한 명 가라앉히고 오면 인정해 줄게.”
세이죠회는 나니와회와 대립하고 있는 오사카의 광역폭력단이었다. 마츠모토가 당황해서 외쳤다.
“도련님, 그건 안 됩니다! 항쟁으로 발전할 소지가…….”
“닥쳐!”
이츠키가 벌떡 일어서며 렌의 목에 들이대고 있던 꽃가위를 마츠모토에게 휙 향했다. 그 바람에 렌의 셔츠 목깃이 가위 날 끝에 살짝 긁혔다. 소름이 쭉 끼쳤다. 조금만 더 깊게 들이대고 있었더라면 목이 베일 수도 있었다. 이츠키가 광기 어린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 정도도 못하면서 내 보좌를 하겠다고? 어림도 없지.”
“…….”
“렌이라고 했나? 야, 렌.”
“……네.”
“할 거야, 말 거야?”
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야쿠자에 잠입한다는 것은 야쿠자 노릇을 한다는 것. 야쿠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러운 일에도 손을 물들인다는 것. 각오는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라고는. 이를 악물자 어금니 사이에서 빠득 하는 소리가 났다. 이츠키는 그런 렌의 얼굴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하겠습니다.”
렌의 대답에 이츠키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의 발밑에서 뭉개진 꽃이 진한 향기를 풍겼다. 그는 꽃꽂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화창한 봄날에 벚꽃 흐드러진 후원에 앉아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붉은 기모노를 입고 꽃꽂이를 하던 아리따운 도련님은,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목에 꽃가위를 들이대고 사람을 죽이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렌은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
“하아, 시시해.”
잠옷 홑옷에 실내용 하오리를 어깨에 걸친 이츠키는 창틀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고 불을 댕기며 투덜거렸다. 연기를 후, 내뿜고 나서는 창밖에 대고 재를 아무렇게나 떨었다. 렌은 약간 떨어진 위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영감탱이는 하여튼 재미라는 걸 모르는 인간이라니까.”
이츠키의 아버지, 사카키바라 카즈히코는 이츠키가 렌에게 내린 명령을 듣자마자 노발대발하며 렌이 그 명령을 이행하는 것을 막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렌이 아무 이유도 없이 세이죠회의 간부를 가라앉혔다가는 광역폭력단끼리의 전면 항쟁이 현실화할 수도 있었다. 대신 이츠키를 데려다가 렌은 자신이 선택한 보좌역이니 이러쿵저러쿵 토 달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했다.
렌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이츠키의 예리함은 방심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좋은 두목 감일지도 모르겠다고도.
이츠키는 창틀에 거의 눕다시피 늘어져 앉은 채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렌은 그런 이츠키의 옆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여전히,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이다. 자신에게 그런 잔혹한 명령을 내린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뭘 그렇게 봐?”
이츠키가 퉁명스럽게 렌을 타박했다. 렌은 얼른 시선을 내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계속 쳐다봤잖아.”
“그냥 쳐다본 것뿐입니다.”
“‘그냥 쳐다본 것뿐입니다.’ 으으, 기분 나쁜 도쿄 사투리.”
이츠키는 과장되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도쿄 놈이 왜 여기 와있는 거야?”
“태어난 곳은 오사카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어릴 때는 도쿄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뒤에 오사카로 돌아왔습니다.”
“흐음, 대학은?”
“……안 나왔습니다.”
위험했다. 아슬아슬하게 ‘오사카에서 나왔습니다’라고 대답할 뻔했다. 대학을 나왔는데 고작 경호회사에 다녔다는 건 부자연스러우니까.
이츠키는 빠른 속도로 빡빡 피워서 짧아진 담배를 창틀에 짓이겨 끈 후 꽁초는 창밖에 아무렇게나 휙 버렸다. 한두 번 그렇게 한 게 아닌지 창틀에는 여기저기 담배 자국이 나 있었다. 재떨이는 어디 갖다 버린 건지. 렌이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이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렌에게 다가왔다. 그가 렌 앞에 쪼그려앉더니 렌의 턱을 잡아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빛에 다시금 퍼런 불이 일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고 내가 널 의심하지 않게 된 건 아니니까 말이야.”
렌은 심호흡했다.
“알고 있습니다.”
“잘해.”
“네.”
이츠키는 렌의 턱을 휙 놓고 하오리를 벗어 던지고 잠자리에 들었다. 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불을 껐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서 책상 앞에 앉은 렌은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정보를 요약한 보고서와는 별개로 매일의 일지도 써서 올리라는 것이 지침이었다. 사카키바라 이츠키와 만남. 이츠키가 세이죠회의 간부를 살해할 것을 지시함. 카즈히코의 제지로 무산됨…….
그런 무미건조한 사실들을 기록하는 사이, 렌의 뇌리에는 이츠키의 얼굴이 떠올라 왔다. 그 꿰뚫어 보는 듯한 붉은 눈동자가. 말려 올라간 붉은 입술이. 가슴팍의 붉은 문신이. 몸을 감싼 붉은 기모노가. 모든 꽃처럼, 불처럼, 피처럼 붉은 것들이. 그것들의 기억이 렌의 몸속에 어떤 화염을 일으켰다.
뭐지, 이건.
렌은 묵직해지는 명치 언저리에 손을 얹고 잠시 깊게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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