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fashioned

탄산수 1/2

암실몽몽 by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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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E. 라이 위스키. 라이. 모로보시 다이의 코드네임이었다. 그의 본명은 아카이 슈이치. 그의 입에서 직접 전해들은 이름은 아니었다. 그가 그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남자와 같이 조직에서 몸을 빼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뒤, 간부 사이에 알려진 이름이었다. 그를 추적하기 위해서, 말살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아카이 슈이치이며, FBI의 잠입 조사관이었음을 알린 것은 진이었다. 스카치의 말살 명령 때처럼 그랬다. 진은 나를 신뢰했고, 나 역시도 진을 신뢰했다.

조직의 포위망은 조밀했다. 라이가 아주 뛰어난 인물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 멍청한 남자는 명백히 라이의 걸림돌이었다. 그를 버린다면, 라이가 혼자서 몸을 빼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 남자를 버리지를 못했다. 이 년 전,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이미 말살 처분이 내려진 스카치를 빼돌릴 수 있다고 장담했던 남자였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대단한 남자임을 말하기도 했으나, 제게 의지하는 이들을 버릴 수 없는 인간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라이는 조직의 중추에 접근했었고, 만약 실수한 그 남자를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면, 그는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들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만큼 비정하질 못했다. 그 때, 그 국면에서 그가 조직에 더 깊게 스며들 수 있는 방법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대단히 유능한 인간이었고, 그건 비단 저격수로서의 능력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마도 그 순간, 순식간에 모든 가능성을 파악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제가 조직에 남을 수 있는 방법 정도는 바로 알아차렸겠지. 그는 우둔하지 않았고, 그가 선택한 것이 그 남자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그 남자를 버린다면, 조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남자를 버린다면 그건 정말로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일이었다. 라이가 제 모든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을 할 리 없었다. 그는 차마 그렇게 비정하지도 못했고, 그렇게 셈에 약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 남자를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지금 그의 상황은, 동행자가 코드 네임을 부여받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고 하더라도, 어렵기만 했다. 그의 능력을 좀먹는 짐을 데리고서는, 결국 조직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테지. 그 짐을 버린다면, 모든 게 무의미해졌고, 그렇다고 짐을 진 채로는, 타개책이 없었다. 하물며 버본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진 역시도. 사면초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게는 아주 구미에 맞는 상황이기도 했다.

라이에게 손을 뻗었다. 무거운 짐을 껴안고, 몰이사냥으로 행로의 가짓수가 줄어든 라이와 마주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오랫동안 조직에 몸을 담았고, 조직에서 배신자를 처리하기 위해 몰이사냥을 할 때 만드는 길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건 라이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그러나 조직의 사냥루트는 그가 도주를 시작한 그 순간 변모했으니, 그가 갖고 있는 지식은 동시에 함정이기도 했다. 조직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그는 그를 잠입시켰던 FBI의 영역 안까지 도달해야만 했다. 적어도 FBI의 요원들이 그를 지원해줄 수 있는 곳까지. 그러려면, 조직이 풀어놓은 수없이 많은 번견들과 덫들을 피해 몰이사냥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나는 그 함정 중 하나였다. 나는 라이와 조우했다. 라이의 표정은 일순 암담해졌으나, 그건 체념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는 나를 죽이고 달아나는 것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을 터였고, 그는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나를 처리할 수 있을지 정도나 생각해볼 터였다. 나는 라이에게 제안했다. 총구를 겨눈 채였다. 그가 누군가의 손에 처리되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버본일 가능성이 있다면, 나 역시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렇다면 다시 또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진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버본이 풍기는 그 달콤한 냄새를 나의 고약한 냄새로 덮어 가린 채.

“라이.”

“아직도 라이인가?”

“우리가 서로 알고 있는 이름은 그 정도니까.”

“한담을 나눌 상황은 아닌 것 같군. 목적이 뭐지?”

그래. 한담을 나눌 상황도, 그럴 사이도 아니기는 했다. 나는 그 ‘목적’을 묻는 질문이 내심 기꺼워, 입매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이가 드러나 보이도록 웃어버렸다. 총구는 그의 코끝을 겨눈 채였다.

“네가 스카치에게 했던 말처럼, 자신만만하게 너를 빼돌려주겠다는 말은 못하지만. 아주 작은 틈 정도는 만들어주지. 그 틈을 비집고, 빠져나가느냐는 네 재량이다.”

그 정도의 틈이라면, 라이는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그 무게를 짊어지고서도. 아주 작은 오차들을 여럿 겹쳐서, 만들어내는 그 작은 사각으로. 실제로 그것을 믿고 편승할지 어떨지는 라이가 선택할 문제였다. 나는 라이를 설득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처럼 ‘스파이’도 아니었고, 그가 믿지 못하는 게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근 몇 년 동안 같이 일을 해왔다고 하더라도 그랬다. 오히려 그 몇 년으로 인해서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그에게 사각을 만들어주겠다고만 이야기했고, 그게 전부였다. 실제로 그가 그것을 빌어 도망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 사각을 비집고, 조직의 포위망을 떨쳐냈다. 완전히 떨쳐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당장 바로 그 목덜미까지 뻗었던 손을 피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조직은 헛손질을 했고, 라이, 그러니까 아카이 슈이치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너무 많은 것을 들여서, 좀처럼 바로 다음 수를 쓸 수가 없었다. 조직이 태세를 가다듬고 다시 손을 뻗는데 필요한 시일은 그래도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 잠시의 틈이면 충분했다.

태세를 다잡은 조직은, 몇 개의 오차와, 그로 인해 아주 작게 만들어진 사각을 깨달았다. 고의는커녕, 실수로도 보기 힘든 아주 작은 오차였으나, 조직이 그로 인해 영영 잃어버린 기회는 너무나도 뼈아픈 것이었다. 손속이 냉혹한 진에게서 처분 명령이 내려지기에는 충분했다. 조직의 말살 제재가 공표될 때는, 이미 누군가 움직이기 시작한 뒤다. 그게 버본일 것임을 알았다. 진은 팀이었던 기간이 길었던 인물에게 시말 처리를 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설령 그것이 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팀이며, 내가 그의 감시역할에 불과했음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랬다. 나는 조직의 손을 피해 도망쳤다. 아니, 사실은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했다. 조직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그렇다고해서 목덜미가 붙잡히지도 않을 거리를.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짐을 껴안은 라이가 완전히 FBI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까지, 조직의 시선을 끌고, 손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미끼가.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하간 라이는 유능했고, 조직은 그 유능한 남자 역시도 뒤쫓고 있는 와중이었으므로 그랬다. 내가 시간 끌기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충분했다. 조직은 라이의 뒤를 완전히 놓을 수도 없었으므로, 그를 쫓을 이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도주 중인 내 쪽을 먼저 처리한 뒤, 전력을 쏟을 예정인 듯 했으나, 그것이야말로 바라는 일이었다.

조직의 추적은 점점 혹독해졌다. 나는 그 혹독함에서, 라이가 완전히 조직의 영역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길고 긴 술래잡기였다. 술래잡기가 끝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너무 늦기 전에 술래에게 잡히는 것으로 끝나야 할 놀이였다.

라이를 놓친 조직은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하다못해 오랫동안 간부로, 조직의 중추에 있었던 배신자를 처리하기 위해서 전력을 쏟아 부었다. 간부도 여럿 동원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나를 잡을 술래는 정해져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기다리는 술래가 올 때까지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라이가 추적을 완전히 뿌리치고, 삼 개월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겨울 날씨가 쌀쌀했다. 도주 중이라고 할지언정, 제법 두꺼운 외투를 입었는데도, 몸을 옹송그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윽고. 술래가 왔다.

항구의 컨테이너 박스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아마 조직에서는, 내가 이 항구에서 밀항선을 타고 도망칠 예정이었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계획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니까, 이 컨테이너 박스 사이에서 술래에게 잡혀 게임을 끝내는 게 전부였다.

“버본.”

“오랜만이네요. 배신자.”

“배신자라. 진에게는 조금 미안하기는 하군.”

그래, 나는 그를 신뢰했고, 그건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리고 나는 그 전부를 이용했다. 게걸스럽게 탐하고 싶은 그 달콤한 향기를 위해서.

“당신이, 라이를, 아니, 그 FBI의 개를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요. 당신은 완전히 조직의 인간, 진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당신이, FBI의 개 따위를 도와줄 생각을 할 줄이야.”

“2년 전의 시말처리였을 뿐이야.”

“2년 전?”

“스카치를 죽이는 일은, 원래 내 일이었거든. 그런데 라이의 손을 빌려버렸지. 그 결과라고만 해두지.”

“무슨 뜻이야.”

사실 정말로 방아쇠를 당긴 건, 스카치 본인이며, 라이는 그 때 그를 빼돌려주겠다고 호언장담했었지만 말이야. 나는 이 모든 말들을 입안으로 삼켰다.

“글쎄. 그 때 스카치를 죽이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라이를 죽이지 못했다고.”

스카치의 일이라면 몰라도, 이번만큼은 실수가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마지막 말을 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온기를 갈구하여 움츠러들려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겨눠진 총구를 응시했다. 이 거리에서 심장이나 뇌간을 놓치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까지 들먹인 마당에는 더더욱. 설령 아주 어두운 밤이라고 해도 그랬다. 나는 흘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이 어둑했다.

어찌됐든 나는 조직의 배신자였다. 아주 작은 오차였더라도, 나는 사각을 만들어냈고, 그게 고의가 아니었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조직이 배신자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는 지금 여기서, 그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그 향긋한 냄새를 감출 수 있을 터였다.

아주 작은 총성이 울렸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장렬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주 가까이 있는 내가 듣기에는 충분했다. 강렬한 통증이 엄습했다. 술래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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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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