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발링크] 변덕쟁이 바람이 부는 밤에

우리가 무슨 사인데?

노을빛으로 물든 타반타 마을은 추운 날씨와 정반대의 따스한 활기로 가득하다. 

곳곳의 굴뚝에 저녁 시간을 알리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뛰놀던 아이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손을 흔든다. 하루 일과를 마친 장인들이 귀가를 서두르는 한편, 돌아갈 곳 없는 나그네는 당나귀를 이끌고 다시 먼 길을 나선다. 

지붕의 모양이나 그 아래서 살아가는 이들의 용모는 다를지언정 평화로운 풍경만큼은 자신의 고향과 별다를 것 없는 모습에, 리토의 영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년전, 영걸이라 불린 자들이 재앙 가논의 마수로부터 하이랄을 지킨 이야기는 이미 케케묵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누구도 이 평화로움을 의심하지 않고, 특별하다 여기지도 않는다. 그 평화를 목숨을 걸고 지켜낸 장본인으로선 다소 억울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리발은 생각한다. 그는 부나 명예 따위를 위해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저, 하이랄의 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이 경치를 지키고 싶었다. 

라곤 해도, 사실 그가 제 발로 하일리아인의 마을을 찾는 일은 많지 않다. 오늘만 해도 비행훈련장에서 리리토토 호로 돌아가는 길에, 정말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서, 변덕스러운 바람에 이끌려 잠시 들렀을 뿐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녀석은 참으로 기묘해서――――

"리발...?"

이런 때에 한하여 뜻밖의 만남을 부르거나 한다.

감히 제 이름을 격식도 없이 부른 사내의 후드 속을 들여다보면, 하일리아인 중에서도 흔치 않은 푸른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리토의 영걸은 아주 잠시 놀라고, 곧 입가를 비죽 말아 올렸다. 

"이게 누구야. 그 얼굴 보기 힘들다는 하이랄의 용사님이잖아."

"........"

비아냥 담긴 호칭에 알기 쉽게 얼굴을 찌푸린 사내는 되받아치는 말 없이 작게 한숨만을 내쉰다. 정말이지 넌 변함이 없구나, 라고 질린 듯이, 또 안도한 듯이. 


"겔드 비어, 제일 큰 잔으로."

"필로네산 후르츠 주스."

간단히 주문을 마치고 구석자리의 테이블에 착석한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빤히 쳐다본다. 

"....못 본 사이에 술고래가 다 됐군?"

"그러는 리발은, 아직도 술을 못 마시나 보지?"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다!"

발끈한 리발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남자에게만은 어린애 취급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녀석은 키가 마지막에 보았을 때와 그대로이지 않은가. 따지기 위해 리발이 다시 입을 연 그때, 점원이 양손에 커다란 나무잔을 들고 나타났다. 쾅 하고 기세 좋게 테이블 위에 떨어진 그것은 내용물이 튀어 리토의 남색 날개, 그리고 그의 미간의 주름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런 리발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하일리아인 청년은 잔을 들어 보인다. 

"...쯧."

리발도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이 자리에 고론의 영걸이 있었다면 무언가 낯간지러운 건배사를 외쳤을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둘 다 그런 성격이 되지 못한 데다 서로를 치하하거나 건투를 빌 정도로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는 소리는 묘하게 경쾌하고, 마치 오래된 친구와의 재회를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리발이 눈앞의 하일리아인 청년, 링크를 만난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으니, 친구 부분만 빼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겠지만. 

퇴마의 검에 선택받은 기사로서 재앙 가논 봉인의 주역을 맡았던 링크는 현재 왕실의 근위대장도, 공주의 호위 기사도 그만두고 하이랄 전역을 떠도는 여행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결정에는 리발을 포함한 영걸들 모두가 의문 내지는 반발을 가졌지만, 자신이 먼저 제안한 것이라는 공주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정해진 운명이나 역할 따위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공주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굉장한 설득력을 지니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그렇게 링크가 하이랄 성을 떠난지도 벌써 일년. 간간히 조라의 왕녀 등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 나름대로 즐겁게 해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방금전, 드물게도 먼저 술자리를 권해온 링크를 떠올리며 리발은 생각한다. 이 녀석도 혼자 하는 여행에 외로움을 느끼는 게 아닌가, 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안주 삼아 들어주기는 할 테니까." 

"...응."

빈말로도 달변가라고 할 수 없는 링크는, 그러나 신중히 말을 골라 자신의 모험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토를 달거나 과장된 리액션을 취하는 리발 덕분에 대화는 의외로 막힘없이 술술 흐르고, 제법 즐거운 모양새를 띤다. 

――――저번에 데스마운틴 근처에서 다르케르를 만났어. 네 안부도 궁금해하더라. 한번쯤은 만나러 가주는 게 어때?

"너, 내가 거기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하는 소리지?"

――――방패 서핑이라고 알아? 최근 여행가들 사이에서 유행인 모양이야. 그거라면, 어쩌면 리발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을지도. 

"헤에. 대단한 자신감이잖아. 나한테 완패해서 창피한 꼴을 보이는 게 두렵지 않다면, 승부해줘도 상관없다고?" 

――――가끔, 길 위나 절벽, 숲속을 불문하고 마른 나뭇잎이 굴러가는 것처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날 때가 있어. 몬스터는 아닌 거 같은데... 굳이 말하자면, 무언가 요정 같은....

"그 나이에 벌써 환청이라니, 너도 큰일이네." 

잔을 기울이고, 안주에 손을 뻗고. 이따금씩 테이블 아래로 발차기를 주고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간다. 

그런 평화가 비로소 방해받은 것은 가게 앞의 등불이 몇번인가 교체되었을 무렵이다. 

"어엉? 희귀한 손님이 있잖아."

"리토족이다, 리토족!" 

가게의 문을 난폭하게 열고 들어온 사내 서너명이 이미 술에 취해 탁한 눈을 하고 큰소리를 냈다. 겁에 질린 점원과 손님들은 몸을 움츠려 길을 내준다. 

"이런 시간에 싸돌아다니고 있어도 돼? 리토족은 밤이 되면 보이지 않는다면서?"

"아아, 혹시 노래라도 부르러 온 건가? 어디, 우리를 위해서 한 곡 뽑아보시지!" 

"....하아."

리발은 잔을 내려놓고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듯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불량배 무리를 응시한다.

"이 나를 건드리다니... 상당히 질 나쁜 술을 마셨나 봐? 아니면, 그 텅 비어 보이는 머리가 문제일까?" 

"무...뭐?"

"이런. 후자인가 보네."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이죽대면,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겨우 무시 당했다고 깨달은 남자들의 얼굴이 술이 아닌 분노로 붉어졌다. 

"이게 뚫린 입이라고...!"

"시끄러운 건 그쪽이잖아? 아아, 모처럼의 분위기가 엉망이야. 말 상대가 이 녀석인 걸 감안하면, 나도 꽤 즐기고 있었는데 말이지."

리발의 말에 사내들은 그제서야 링크의 존재를 인식한 듯했다. 

"뭐야, 이 꼬맹이는?"

거기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링크가 움찔했다. 푸른 눈을 치켜뜨며 등 뒤의 칼자루에 천천히 손을 올린다.

"하! 그런 장난감 칼로 뭘 하려고?"

"동료가 있다고 건방 떨지마!"

이번에는 리발의 눈이 매섭게 치켜 올라갈 차례였다. 

"잠깐. 지금 발언은 넘어갈 수 없군. 동료? 누가 이 녀석 손을 빌린다는 거야? 너희 따위는 나 하나로 충분해. 그 정도 계산도 안 되다니, 정말이지 불쌍한 머리통이네. 아니, 얼굴도 행동도 천박하기 짝이 없어. 살아있는 게 안타까울 정도다!"

하하하하! 험악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웃음소리가 바람처럼 흩어졌다. 

"이 건방진 새 자식... 다진 고기로 만들어주마!" 

마침내 참다못한 사내 중 한명이 리발을 향해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주위는 끝내 비명을 내지르고――――


쿵!

둔탁한 소리에 이어 한순간 찾아온 정적. 아직 긴장감이 가시지 않은 무거운 공기를 가볍게 하듯이, 리토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울린다.

"나한테 시비를 걸 거면 적어도 낮에 찾아오도록 해. 밤에는 시야 때문에 힘 조절을 못 하니까." 

마룻바닥에 처박힌 남자들을 내려다보며 리발이 날개를 툭툭 털어낸다. 그런 리발을 멍하니 바라보는 주위는 대체 뭐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가게 안에서 리토의 빛보다 빠른 움직임을 쫓은 것은 단 한명, 그야 물론 하이랄의 용사이다. 날개로 목덜미에 촙을 먹인다는, 리발치고는 다소 고상하지 못한 방법이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활을 들 가치도 없었다는 얘기다. 리발이 활을 들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었을 테니, 아무래도 좋다고 링크는 생각했다. 

"와, 와아." 

점원이 작게 탄성을 낸 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갈채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리발은 커튼콜의 연극배우처럼 가슴에 손을 얹어 우아하게 인사해보이고는 쓰러진 남자들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너무 심한 거 아냐?"

잠시 후 리발이 자리에 돌아오자 링크가 물었다.

"뭐가? 경비원에게 발견되기 쉽도록 친히 길가 한복판에 버려줬다구. 아주 상냥하잖아?"

뭐, 그전에 얼어 죽지 않는다면의 이야기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인 리발에게, 아까의 점원이 "리토의 전사님!" 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다가왔다.

"주정뱅이들을 처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건 서비스입니다!"

"아아. 고맙게 받도록 하지."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긴 고기요리는 안주라기엔 부담스러운 양이다. 그러나 하일리아인 청년에게는 그렇지도 않았는지 테이블 반대편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음식에는 사족을 못 쓰는군. 리발은 속으로 웃으며 링크의 앞으로 접시를 들이밀었다. 

아,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었던가.  

리토의 입가가 짓궃게 올라간다. 아까의 복수를 할 절호의 기회였다. 

"많이 먹도록 해. 그 키를 보아하니, 우리 용사님은 아직도 성장기인 모양이니까."

"....저기요- 이거 치킨으로 바꿔주실 수 없나요?"

"........"

"........"

"너... 예전엔 마음 쓰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젠 그런 것도 없나 보지?"


예전, 그러니까 리발이 링크와 술잔을 기울이는 미래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 공주의 명령으로 둘이서 헤브라 산의 몬스터를 토벌하러 간 적이 있다. 긴 여정 내내 리발이 무슨 말을 하건 입을 다물고 있던 링크의 침묵을 깨뜨린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그 스스로가 저녁으로 내온 치킨 카레였다. 뒤늦게 자신의 실례(?)를 깨달은 링크가 진지한 얼굴로 "아, 저기, 미안. 진짜 미안." 이라며 사과해대는 꼴이 퍽이나 웃겼더란다.

"우리가 그럴 사이야?"

그렇기에 지금처럼 유치한 도발에 어울려주며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링크의 모습은, 아직도 리발에게는 영 어색한 광경이었다. 그렇지만, 뭐, 웃기는커녕 싫은 소리에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던 철가면 시절과 비교해 지금이 더 낫다고 하지 못할 것도 없다.

'우리가 무슨 사인데?'

문득 떠오른 의문에 지금이라면 '친구'란 답을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는 기분이 좋은 밤. 이 또한 변덕스런 바람의 탓으로 돌리고, 리토의 영걸은 다시 한번 잔을 기울인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