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랄 호위기사의 우울
링크젤다
좀처럼 요동치는 일이 없는 공주의 호위기사의 기분은 드물게도 요 몇 주 날이 바짝 선 상태를 유지했다. 날이 섰다고 해봐야 당직 기사의 인수인계에 알겠어. 로 답하던 것을 그래. 로 짧게 줄인 것 뿐인데도, 하이랄 근위대장인 링크 휘하의 기사들은 그 변화를 일찍이 감지했다. 이는 오늘 링크가 기사단복의 세 번째 단추를 잠그지 않은 것과 같은 등급의 비상 상황으로, 애꿎은 기사들만 요즈음 자신의 복무상태를 철저히 점검하기에 이르렀다.
성내 오락거리라곤 젤다 공주가 복원 중인 가디언의 움직임의 변화따위라 뜬소문이나 가십거릴 찾아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빠르게 퍼진다. 저마다 이유를 따져댔으나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링크가 거주지를 왕궁으로 옮기며 소유자가 불분명해진 하테노 마을의 주택때문이란 거였다. 아무래도 그렇지, 부동산이라는 큰 재산을 잃게 된다면야 보통의 하이랄인들은 땅을 치고 슬퍼하겠으나 링크는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사실은 단 한 사람만이 알았다. 젤다 공주의 초상화를 그린 궁정 화가.
궁정 화가는 젤다 공주의 실물을 그대로 캔버스 위에 담아내려 애를 썼다. 첫 날엔 이런 일에 면역이 없는 젤다 공주가 자꾸 우울한 표정을 짓는 데에 애를 먹었고, 이틀차엔 젤다 공주의 아름다움이 제 그리 실력의 역치를 훨씬 넘는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는 진땀을 뺐다. 그리고 셋째 날엔, 저를 마주보고 앉아 있는 공주님 어깨 훨씬 너머, 왕궁을 받치는 기둥 중 하나처럼 단단하게 서 있는 호위기사의 잔잔한 분노를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귀족, 그것도 왕의 핏줄이면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논에 맞서 싸워 하이랄을 구원하실 젤다 공주님이다. 하이랄 역사에 길이 남을 테니 이는 귀중한 사료이며 고로 환영해야할 일이었다. 다만 이 초상화는 왕궁 복도에나 걸릴 게 아니었다. 가지고 다니거나 넘겨보기 쉽도록 책 표지 크기에 맞추어 그려내는 이 초상화는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며 공주님 나잇대의 귀족 남성들에게 보여질 것이었다. 곧 17살을 맞이하며 공주가 예언대로 나라를 지켜내어 만백성의 희망이 될 때, 그 때 공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성실히 보좌할 수 있는 국서를 구하기 위해 그리는 초상화인 것이다.
젤다는 소식을 듣고 손에 쥐고 있던 가디언 부품을 당장에라도 부러질 듯 쥐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세 발짝 뒤에 무릎을 꿇고 상황을 관망하던 링크는 왕과의 대화가 끝나면 당장 저 부품을 뺏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아직, 아직은 때가⋯⋯."
"이건 수천 년 역사의 하이랄을 이어야할 왕족의 의무다."
"하지만 아직 가논이 왕국을 위협⋯⋯."
"네가 가논을 봉인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
"네 어께에 달려 있는 의무에 충실해라, 공주여. 이런⋯⋯ 조사는 그만 왕국 조사원들에게 맡기고."
왕은 단 한 번도 젤다가 말을 마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주의 호위가 된 이후로 링크는 젤다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공주의 호위에 있어서 실용적이었기에. 공주님이 행복하실 때는 드물게 덜렁거리는 일이 있으시니 더 철저히 호위에 임할 것. 공주님이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실 때는 되려 보지도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실 수도 있으니 세 발보다 조금 더 뒤에서 따라 붙을 것. 그런 날들의 연속에 이제는 젤다의 감정을 링크는 함께 느낄 수 있다. 공주님은 지금 무척 슬프셔.
그리고 링크는 조금 화가 났다. 그러잖아도 가논 부활의 날에 대비하여 네 신수를 돌보고, 영걸들과 함께 훈련하느라 바쁘신 공주님에게 격려는커녕 의무를 몰아붙이는 왕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링크는 그의 불경함에 깜짝 놀라 생각을 무른다. 기사의 임무는 공주의 안전. 그보다 앞에 놓인 의무는 왕의 명령에 절대복종.
마음이 편치 않은 날들이 지나간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생각해두어야 했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감정을 죽이려 얼마나 노력했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되지. 링크는 사무적으로 공주와 공주의 남편과 공주의 자식들을 호위하기 위한 인원 증대 계획서를 작성한다.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제 신경을 다른 데에 돌리기 위함이었다. 다만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수가 대충 몇이나 될 지 예측하여 작성해야하는 부분에서 그만, 깃펜을 놓고야 말았다.
젤다는 결국 궁정 화가의 앞에 선다. 시녀들이 이리저리 인형놀이하듯 가꾼 공주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화장과 장신구를 걸치고 있었다. 화가의 주문에 따라 짙은 푸른 색의 드레스를 입은 젤다는 배경으로 걸어둔 어두운 천과 어울렸다. 크고 푸른 눈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으나 궁정 화가는 그 정도는 바꿔 그릴 만한 능력이 있었다.
화가는 진땀 흘리며 공주의 머릿결을 세필붓으로 덧칠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기사는 왜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거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공주에게 건넨 인사가 불경하기라도 했는지? 가엾은 화가는 장장 일주일하고도 하루를 더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그림을 완성했다. 다행히도 극한의 환경 속에서 완성된 그림은 링크가 보기에도 실물을 잘 담은 명작이었다. 그게 더 링크의 화를 돋궜지만서도.
링크는 화구를 정리하는 화가에게 다가가 침착하게 묻는다.
"저, 물을 것이 있습니다."
"네, 네, 네...... 무슨 문제라도?"
"이건, 이제 어디로 가나요?"
"듣기로는 몇 부 복제해서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에 보내진다고 들었습... 니... 다만......."
표정을 감추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링크는 말을 끝내지 못하는 화가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언제나 그랬듯 공주의 세발짝 뒤로 가서 선다. 그래, 이게 링크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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