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숨무쌍] 과거로부터의 축복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날도 조라의 왕자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년전, 하이랄 왕국을 덮친 대재앙에서 목숨을 잃은 왕녀를 기리는 중앙 광장의 조각상. 새벽부터 동이 트기까지의 고요한 시간을 그 앞에서 보내는 왕자의 모습은 조라의 백성들에게 이미 낯이 익었지만, 그 뒷모습이 평소보다도 쓸쓸하다는 사실은 아마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누님.... 그곳에선 잘 지내고 계시죠?"
말을 걸어본들 조각상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허망함에 고개를 떨군 그때, 왕자는 거친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에 뒤돌아 하늘을 올려다보면, 저 멀리서 눈처럼 새하얀 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아니, 저건 새가 아니라――
"리토족이 여긴 무슨 일이지?"
스바바를 비롯한 조라의 경비병들이 웅성거린다. 곧 리토가 등에 진 커다란 활을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지만, 왕자의 쾌활한 목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깨뜨렸다.
"모두, 걱정할 것 없네. 그는 나의 친구야."
친구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보는 스바바에게 시드는 씨익 웃어 보인 후, 조라대교 앞으로 뛰쳐나갔다.
"테바!"
왕자를 발견한 리토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하는 왕자 앞에 사뿐히 착지한 그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해보인다.
"오랜만입니다, 시드 왕자.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라니, 이거 좀 닭살 돋는군."
"하하하!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다."
"그럼, 실례지만 평소처럼 대하도록 하지."
변함없이 기운 넘치는 왕자의 열렬한 환영과 경비들의 호기심 넘치는 시선을 받으며, 테바는 조라의 마을에 들어선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의 리토와 강의 조라.
아주 먼 옛날에는 같은 종족이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종족 간의 공통점도 교류도 없다시피 하다. 그렇기에, 조라의 왕자가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난 리토, 그것도 일개 전사를 '소중한 친구'라 칭하며 직접 대접하는 광경은 백성들의 주목을 받기 충분했다.
정작 당사자들에겐 실로 그리운 재회가 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관 옆의 취사장에 자리를 잡았다.
"오오! 이건 맥스연어 아닌가. 리토 마을의 맥스연어는 일품이라고 들었다."
"마침 제철이다. 조라가 생선을 먹어도 되는지 긴가민가했는데, 기뻐해 주니 다행이군."
시드가 보따리를 풀던 손을 딱 멈춘다. 조라의 왕자로서 얼토당토않은 편견은 바로 잡고 싶었다.
"우리는 분명 어인이지만 물고기가 아니야. 리토도 새고기를 먹지 않는가."
"그건... 그렇지. 실례했다."
사죄의 의미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서론을 깐 테바가 냄비에 타반타밀, 염소버터, 그리고 맥스연어를 차례대로 넣는다. 제법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호오...."
천상 무인으로 보이는 테바가 설마 요리를 할 줄 알다니. 시드는 언제나처럼 칭찬 세례를 퍼붓는 것도 잊고 신기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민망했는지 테바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맥스연어 뫼니에르. 우리 아들이 좋아해서 말이야. 이것만큼은 만들 수 있어."
"그러고 보니 아이가 있다고 했지.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나?"
"아아. 조라의 왕자를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아들이 따라온다고 떼를 쓰는 것을 아내가 겨우 떼어냈어."
"하핫! 데려와도 상관 없었다만."
"그럼, 다음엔 사양않고 데려오도록 하지. 아내와 아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졌어."
그렇게 말하며 테바는 조라의 마을을 둘러본다. 익숙한 바람과 나무 내음과는 또 다른 신선하고 맑은 공기가 코를 간질인다. 소박한 리토 마을과 달리 조라의 마을은 어디를 봐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지붕도, 기둥도, 나선계단도――
테바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
조라의 왕녀의 조각상은 마을의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아름다웠다. 그것은 이 마을이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조라의 왕녀가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증거. 그리고 이쪽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는 가슴 아픈 증거이기도 했다.
"...실은, 조금 기대했었다."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테바를 대신해 시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돌아오면 혹여나 누님이.... 백년 후의 누님이, 날 맞아주지 않을까, 하고...."
그쪽 세계에서의 시드들의 활약이 이쪽 세계를 바꾸었다면, 수명이 긴 조라의 왕녀만은 유일하게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었다.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실망과 상실감은 더 컸을 것이다. 보기 드물게 목멘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린 시드를, 테바는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시드...."
"이거참,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미안하다."
시드가 겨우 이를 드러내며 웃자 테바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니 무슨 그런 말을. 누나를 잃은 너의 상실감은 감히 내가 헤아릴 수 없겠지. ...사실은 나야말로 사과할 게 있어. 너뿐만 아니라 윤돌과 루쥬에게도."
"....?"
"얼마전, 링크와 젤다 공주가 리토의 마을에 찾아왔다. 신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다고."
"아아...."
그 두 사람은 일전에 같은 이유로 조라의 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그것도 벌써 꽤 지난 일이니, 아마 두 사람은 순조롭게 하이랄 각지를 돌고 있는 듯하다.
"그쪽 세계에서 돌아온 후 그들을 만난 건 네가 처음이겠군."
"그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기억하지 못하더군."
"!! 설마 말한 건가?"
"........."
테바, 시드, 윤돌, 그리고 루쥬. 네 사람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이쪽 세계의 링크와 젤다 공주가 저쪽 세계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면,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꼭 그래야만 한다는 확실한 이유나 근거는 없었다. 단지,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백년전의 영걸들을 구하고 왔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는 변함이 없다.
당신들의 동료는 여전히 목숨을 잃은 처지고, 재앙의 상처는 깊이 남아있다.
그런 말을 듣고, 두 사람이 과연 어떤 반응을 할지. 적어도 시드의 상상 속에서 두 사람은 울고 있었다. 그렇기에 테바는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을 사과하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시드는 섣불리 테바를 탓하지 않았다.
"테바. 그대는 용감하고 현명한 전사이다. 분명 이유가 있었겠지."
"나 참. 여전히 지나치게 사람이 좋군."
쓴웃음을 지은 테바가 말을 이어간다.
"나도 처음엔 말할 생각 없었어. 안 그래도 그들은 백년전 동료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 같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그쪽 세계에서의 일들... 그건 분명 공주가 말한 대로 기적이었지만,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해. 그래, 말하자면...."
인연이 만든 필연.
"링크는 날개도 없는 주제에 '젤다를 구하기 위해서' 라는 이유만으로 폭주하는 메도에 맞섰다. 그리곤 보란 듯이 마을을 구해냈지. 링크...아니, 두 사람 덕분에 우리 리토는 구원받은 거야. 그렇기 때문에 작은 가디언이 '링크들이 위험하다'고 도움을 요청해왔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일 터."
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족장님의 앞에서 죄인처럼 사과하는 공주를 도저히 그냥 지켜볼 수 없었어. 꼭 말해주고 싶었다. 그쪽 세계에서의 일을 밝히면서까지 말이야."
당신들이 한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당신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고, 그들이 있는 거라고.
설령 다른 세계일지라도, 무사히 구원받은 그들이.
"....그랬더니 그 공주, 고맙다면서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지 뭐야."
하이랄 공주의 우는 모습은 시드의 기억에도 있었다. 미파를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며,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흘렸던 눈물을 잊을 리 없다.
'...이번엔 기쁨의 눈물이었던가요, 공주.'
"테바. 나에게 사과할 일은 없다. 네 말이 맞아. 무의미한 일은 아무 것도 없어."
시드는 단언한다.
"그야, 이쪽 세계에 변함이 없고 누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프다. 하지만, 그쪽 세계에서 이룬 일은 나 역시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 백년전의 나는 너무 어리고 약했으니까. 누님을 지킨다는 소원을 드디어 이룰 수 있었다. 가논에게 한방 먹일 수 있었다.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이지만, 네가 말한대로 우연 따위가 아니야. ...인연이 만든 필연. 링크와 젤다 공주 덕분이다."
다음에 만났을 땐 나도 꼭 감사의 마음을 전하겠다.
다짐하는 왕자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시게 빛났다.
"....그대는 어떤가?"
"음?"
"링크와 젤다 공주가 어떻고가 아니라, 너 자신 말이야. 그대는 감히 내 상실감을 헤아릴 수 없다 말했지만.... 나야말로, 단지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고 그대와 리발님의 유대를 가벼이 여길 생각은 없다. 그대는 리발님을 누구보다도 존경하잖아."
테바가 벙찐 표정으로 시드를 바라본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그렇네' 라고 운을 띄웠다.
"네 말대로 나는 철이 들기도 전부터 쭉 리발님을 동경해왔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리토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리토의 영걸. 리토의 전사라면 누구나가 목표로 하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구름 위의 신화 같은 존재지. 하지만... 기나긴 동경 중에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을까, 하고 의심한 적도 솔직히 있었어. 전승은 대를 이을수록 과대해지고, 실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는 법이니까."
리토의 영걸을 떠올리듯 먼 곳을 바라보던 테바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놀랐지! 설마 그가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의 청년이었다니. 게다가... 뭐, 나도 그가 완벽한 성인군자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야. 상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어. 너도 봤으니까 알지?"
테바가 부리 끝을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묻는다.
"으음. 리발님은 뭐랄까... 어려운 분이셨지."
시드가 아주 조심스럽게 고른 말에, 테바는 코웃음을 쳤다.
"어려웠다는 말로 되겠어? '리발님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링크는 훌륭한 전사입니다!' 라면서, 한바탕 싸운 주제에."
"윽! 싸, 싸운 게 아니라 작은 의견충돌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일이 있었더랜다. 최종적으로는 링크가 '실력 테스트'라는 이름의 난장판에 휘말려 쓸데없는 고생을 했던가.
당연하지만 테바는 그 일로 시드를 원망하지 않는다. 링크를 얕보던 리발의 태도는, 리발에게 지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는 테바가 보기에도 다소 어떤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단지, 만인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 좋은 시드가 누군가에게 대놓고 반발한 것도, 이제와 그 일에 시무룩해하는 것이 재밌어서 조금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영걸님께 대드는 건 아니었다고 반성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깨달은 거지만, 리발님 역시 링크를 깊게 신뢰하고 있었어."
"아아. 우리는 모르는 그들만의 유대라는 거겠지."
테바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전히 시무룩한 조라의 등을 다독인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리발님은 그 일을 두고 '누나를 닮아서 배짱이 있다'고 오히려 널 칭찬하셨어."
"리발님이....!?"
시드의 얼굴이 그의 지느러미와 같은 색으로 붉어진다. 평소 민망할 정도로 다른 사람의 칭찬을 아끼지 않는 주제에, 본인이 칭찬받는 것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히, 누나와 닮았다는 말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기쁜 듯했다.
'이렇게 기뻐하는데, 칭찬 정도는 본인에게 직접 하시는 게 좋지 않았습니까? 리발님.'
너무 늦어버린 불평이었다. 테바는 새삼 자신의 우상이 솔직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깨닫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리발님은 어디에나 있는 리토 청년이었다. 자존심 세고, 지기 싫어하고, 건방지긴 또 얼마나 건방진지. 내 아들이었다면 한대 콱 쥐어박았을지도. ...그래도 실력만큼은 확실했지.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어. 긴 동경 끝에, 마침내."
내 동경은 틀리지 않았다.
리토의 영걸 리발은 분명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그가 있었다고.
"훨씬 가까이에, 라. ...뛰어넘을 셈인가?"
시드가 씨익 웃으며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테바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했다.
"헤어지기 전에 리발님이 나한테 뭐라고 하신 줄 알아?"
시드가 흥미진진하게 눈을 치켜뜬다. 테바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 한쪽 날개를 촥 폈다.
"결국 참수리의 활을 다루지 못했군! 뭐, 누구든 날 따라오려면 백년은 이르니까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나를 동경한다는 리토의 전사가 링크에게 지는 것만은 용납 못해. 그쪽 세계로 돌아가면 모쪼록 정진하도록!"
리토의 영걸 특유의 화려한 몸동작까지 곁들인, 제법 능숙한 성대모사에 시드는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그거참 리발님답군!"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엄격했다니까! 뭐, 그런 이유로 나는 앞으로도 리토족... 아니, 하이랄 최강의 전사를 목표로 정진할 생각이다. 링크, 그리고 시드 너에게도 지지 않을 거다!"
리토의 전사는 당당히 가슴을 편다.
"아아! 바라던 바다!"
조라의 왕자가 지지않고 파이팅 포즈를 지어보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흐르는 강줄기처럼, 부는 바람처럼 시원한 웃음소리가 조라의 마을에 울려 펴진다. 맑은 하늘은 구름 한점 없어 따스한 햇살이 마음껏 내리쬐고, 물웅덩이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난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광경에, 두 사람은 하이랄 공주의 축복을 떠올렸다.
여러분이 살아갈 미래에도.... 백년후에도 부디 빛이 있기를.
이들이 살아가는 미래는, 애석하게도 그들이 없는 세상. 하지만 분명 빛이 존재한다. 이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희망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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