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클로레스

HQ by juj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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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물고기 손질하는 묘사가 짧게 있습니다!


가르그 마크의 새벽 공기에는 물 비린내가 짙게 깔려있다. 학생들이 기숙사로 사용하는 건물 가까이에 저수지가 위치해 있는 탓이다. 당연하게도 팔미라의 것과는 성질도 냄새도 온도도 달랐다. 새벽 명상을 위해 이르게 일어나는 날이면 클로드는 드물게도 향수에 젖었다. 저 멀리서 하늘을 찢을 듯 들려오는 비룡의 울음이나, 그 광활한 대지에서 바람과 함께 실려 오는 흙과 풀내음 같은 것들. 엇차, 조금 어린 애 같았나⋯. 씁쓸한 표정으로 마저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향로의 뚜껑을 이음새에 잘 걸쳐 놓는다. 물 비린내를 지우려 오랜만에 피워둔 향에서 아지랑이 일듯 연기가 피어난다. 적어도 반년은 더 지낼 곳에서 지겨움을 느낄 수는 없는 일이다. 모름지기 야망을 품은 사내라면 자기감정 정돈 갈무리할 줄 아는 법이랬다. ⋯나데르가 그랬다.

숨을 크게 들이켠다. 폐가 부풀어 오르고, 꺼지고, 부풀어 오르는 것을 따라 갈비뼈가 움직이는 걸 느낀다. 나데르가 전사의 소양 따위를 운운하며 강제로 명상을 시키던 것을 떠올린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버거운 어린 아이가 명상을, 가뜩이나 잠이 한참은 부족한 새벽에 일어나기란 어려운 일임을 알면서도 꿀밤을 먹여가며 강행한 보람이 있는 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클로드는 가르그 마크의 사관생도가 된 이후부터는 명상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다. 포드라에서도 너의 뿌릴 잊지 말라며, 용맹한 용기병 민족의 생활 양식을 따르라며 아버지께서 부득불 쥐여준 향로 때문에라도 더 그랬다. ⋯또 팔미라 생각을 하네. 클로드는 가볍게 고개를 휘휘 젓곤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다.

잘 때 걸치는 가벼운 튜닉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클로드는 세이로스교 성가, 또는 생도의 기합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시간을 사랑했다. 떠들썩한 연회도 사랑해마지않지만, 때로는 강한 성조의 팔미라 언어가 그리울 때가 있었다. 아, 또 은연중에 팔미라를 떠올리고 있다. 클로드는 끙 하고 앓는 소릴 냈다가 다시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호흡에 집중한다. 다시 코로 들이 마시고, 입으로 내뱉고를 반복한다. 익숙한 향기가 폐에 들어찬다. 그러나 이내 다시,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 새로 안개처럼 스며드는 물비린내에 클로드는 마지막 남은 인내심 토큰을 잃었다. 으아아. 다 관두고 산책이나 할 요량으로 바닥 어딘가에 벗어 던졌을 바지를 찾아 발을 휘적였다.

정말이지, 첩첩산중에 웬 옹달샘도 아니고 저수지라니. 그것도 씨가 마를 만큼 낚아 올려도 진귀한 물고기가 가득한 저수지. 학생들 사이에서는 저마저도 세이로스 여신의 은혜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클로드는 콧방귀를 뀌었다(물론 몰래). 본인이 여신이었다면 이 클로드를 불쌍히 여기시어 가르그 마크 대수도원을 산꼭대기 아니라 평지에 지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렇도록 불평해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수지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야⋯ 거기는 벨레스가 자주 오는 장소니까. 사실은 그렇다. 클로드가 이때까지 새벽에 부지런을 떨며 일어났던 건, 벨레스가 새벽이면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니까.

클로드는 앞코를 바닥에 비비며 마저 부츠를 고쳐 신는다. 혹시 벨레스를 마주 칠까 봐는 절대 절대 절대 아니지만 거울도 슬쩍 들여다보았다. 까치집이 진 뒷머릴 손가락으로 대강 쓸어내려 보았으나 아버지께 물려 받은 곱슬머리는 결코 정돈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에휴, 모르겠다. 이런다고 나 잘 봐 줄 사람도 아니고. 옆 방 친구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다.

저 멀리 벨레스가 보인다.

햇빛에 비치면 옅게 빛나 초록빛을 띄던 그 머리카락. 해가 뜨지 않은 탓에 아직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팔미라에도 어두운 머리색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클로드는 벨레스의 머리색만큼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제랄트마저도 아예 다른 색깔인 걸. 사춘기 남자애 첫사랑의 각인 효과든 아니든, 클로드는 벨레스라면 용기병 민족의 후예답게 몇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고 자부했다. ⋯라는 것은 클로드의 변명이고, 벨레스의 수업을 듣다가 지루해지면 그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데에만 하루를 다 썼으니까.

클로드는 자신의 기척을 숨긴다. 숨을 들이키고, 두 번 나누어서 뱉고, 무게중심을 발바닥 전체에 고르게 가도록. 전부 당신께 배운 것들. 감히 벨레스를 습격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당신이 놀라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단순하고 교활한 남자애의 장난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무시무시한 이명을 가진 고지식한 선생님은 그 한 번을 받아주는 법이 없다.

"클로드."

"⋯⋯."

"가판대 뒤에 있는 거 알아."

"체엣⋯."

머쓱해져선 뒷덜미를 쓰다듬으며 한껏 웅크렸던 몸을 일으킨다.

"어떻게 알았어?"

"네 냄새."

아. 클로드는 퍼뜩 제 옷소매에 코를 박았다. 분명 어제 세탁한 건데! 당황하며 퍼덕이는 제 제자를 바라보던 벨레스가 입을 연다.

"아니, 향 냄새."

사냥할 때는 사냥감이 바람에 실려 온 네 냄샐 맡지 못하게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다가가는 거야. 벨레스가 낚싯대를 고쳐 쥐며 덧붙인다. 그 정돈 나도 알거든. 불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선생님은 내 사냥감이 아니잖아. 벨레스는 아주 희미한 미소로 답변을 대신했다.

익숙하다는 듯 옆으로 비켜 앉은 벨레스가 만들어 준 자리에 털썩 앉은 클로드의 모습은 퍽 익숙해 보인다. 당연하게도 근 몇 주간 이어진 밀회였으므로, 벨레스는 지금 자릴 비켜주지 않으면 낚시를 하는 내내 클로드가 떼를 써대는 통에 물고기가 다 도망갈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속내를 알 수 없는 소년의 요구에 응해주는 것이 좋겠지. 반장한테 잘 보여서 나쁠 것도 없고 말이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선지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반장은 자리를 내 주기만 하면 의외로 얌전히 있어 주었다. 마치 지금 그 자리에 만족한다는 것처럼. 벨레스도 낚시에 집중하느라 무어라 잡담할 여력은 없었으므로 그 고요한 새벽의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따라서 오늘처럼 벨레스가 먼저 입을 여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향을 피우는 지는 몰랐어."

"세이로스교에선 흔할 텐데~. 예배당에 항상 걸려있잖아."

"클로드는 독실한 신자로는 안 보였는데."

클로드가 작게 키득거린다. 벨레스의 질문이 반가우면서 그렇지 않은 척 구는 데에 도가 튼 소년은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향이 불면증에 좋다더라고."

"그래?"

"응. 그래서 하나 구해다 피워 봤지."

"효과는 그닥 없었나 봐."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벨레스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클로드를 바라본다. 좀 잘 자 둬야 훈련에 따라올 수 있을 텐데, 거기에는 사심 한 톨도 담겨있지 않고 그저 선생의 마음으로. 그리고 그게 바로 클로드가 거짓말을 해대는 이유다. 뻔뻔함으론 어비스 문지기 다음 갈 맹주의 손자는 불면은커녕 악몽도 잘 꾸지 않으면서 선생님 앞에서는 짐짓 불쌍한 체를 했다.

사실 거짓말까지 할 계획은 없었다. 새벽 명상을 끝내고 산책하던 길에 선생님을 만난 게 너무 반가웠는데, 인사를 건네자마자 벨레스가 잠이 잘 오지 않느냐고 걱정해줬던 게 너무 좋아서 그만 그렇다고 답해버리고 말한 것이 이 사단의 시작이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이 교활한 반장은 한술 더 떠서 최근 불면증에 시달리느라 훈련에 집중하기 어려우니 나를 좀 더 신경 써달라고도 말했다. 은근슬쩍 책임을 떠미는 것은 클로드의 오래된 나쁜 버릇이다.

"⋯훈련량이 부족한 걸까?"

"여기서 더 늘리면 쓰러질 걸."

해봐야 아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벨레스의 옆얼굴이 늘 그렇듯 단호했다. 큰일 났군⋯ 오늘 훈련은 진짜 힘들지도. 여기서 더 대응했다가는 거짓말이 들통날 것 같아 대신 클로드는 입을 다물고 턱을 괸 채 벨레스의 낚싯줄이 잠겨 있는 수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물비린내의 근원지는 클로드의 속내만큼 그 안에 있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나 여울지는 물결,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해 덕분에 조금씩 생겨나는 윤슬. 그리고 둘 사이의 불편하지 않은 적막과 파동을 깨는 건 낚싯대의 입질이었다.

"⋯⋯!"

벨레스가 요령 좋게 낚싯대의 릴을 감아 돌린다. 물고기와 힘 씨름을 하며 펄럭이는 옷소매 사이로 언뜻 보이는 벨레스의 팔근육을 클로드는 애써 모르는 척 한다. 대신 익숙하다는 것처럼 재빠르게 일어나 물고기를 담을 양동이를 돌고 왔다. 벨레스가 십 초 이상 힘겨루길 하는 걸 보면 메기 아니면 토타테스 꼬치고기겠군. 역시나 정답은 적중한다. 수면을 힘차게 가르며 튀어 오른 물고기를 뜰채로 건져 올려 클로드에게 들어 보이는 벨레스의 표정이 드물게 밝다.

"클로드, 이거 좋아하잖아."

아니다.

"응. 운이 좋았네."

"점심에 요리해 줄게. 버터에 구우면 진짜 맛있을 거야."

먹을 거 얘기에 저렇게 좋아하는데 저 얼굴을 보고 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여전히 클로드의 변명이 그랬다.

바로 잡은 물고기는 선도가 좋아서 날 것으로도 먹는 요리법이 있다고, 벨레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지만 아무리 도전정신 강한 클로드라도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좋은 말로 애써 포장해 거절한 뒤로부터는 다시 권유하지 않았다. 먹는 게 저렇게 좋나? 그럼 언젠가 팔미라로 함께 가서 "진짜" 맛있는 요리를 대접해야지, 그러면 얼마나 좋아하려나. 원대한 꿈을 꾸며 물고기가 잔뜩 퍼덕이는 양동이를 힘겹게 들고 식량고로 향하는 벨레스의 뒤를 쫓는다.

구이용으로 쓸 물고기는 먹지 못하는 부분, 그리고 쉽게 상하는 부분을 손질해서 필렛 상태로 보관하는 게 가장 좋다는 벨레스의 설명이었다. 클로드는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의 조수처럼 벨레스의 옆에 선 상태로 그녀가 칼을 다루는 모습을 관찰한다. 피도 튀고 비린내도 배길 텐데 슬슬 방으로 돌아가라는 벨레스의 권유는 들은 체도 않았다.

벨레스가 칼, 아니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은 클로드에게 있어서 익숙한 장면이다. 월마다 내려오는 과제수행 때, 아니면 더 멀리 가지 않아도 실습 훈련 때마다 벨레스는 항상 검을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용병의 자식이었다면 도대체 몇 살 때부터 검을 들었던 걸까. 클로드는 아버지가 부득불 쥐여주던 장난감 활을 떠올린다. 본인은 솜이 가득 들어차 푹신한 용 장난감이 좋다고 우기고 떼를 써도 항상 장난감 활이었다. ⋯그녀는 본인이 원했을까?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검에 관해서는 불세출의 재능을 지녔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겠지.

칼을 다룰 때도 검을 다루듯 했다. 도의적으로 물고기의 숨통부터 끊어야 한다는 말이, 꼭 전장에서 하는 말이랑 닮아 있어 클로드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힘차게 퍼덕이는 꼬치고기의 몸통을 붙잡고 아가미 사이의 심장에 칼 끝을 겨눈 다음, 그대로 찔러 넣는 벨레스의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다. 팟 하고 튀긴 피가 벨레스의 얼굴에 핏자국을 남기는 데에도 그랬다. 마른 헝겊에 칼을 대충 문질러 닦아낸 벨레스는 다시 칼을 들고 세게 머리를 쾅 내려쳤다. 그 즈음에서 클로드는 더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뜯겨진 아가미며 심장, 내장들이 우수수 양동이 안으로 쏟아져 내린다. 다른 부위보다 핏빛이 많이 비치는 살점인 혈합육은 비리기만 하다며, 칼 끝으로 슥슥 긁어내며 설명하는 벨레스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각하고 때론 열중한 것처럼도 보였다. 어쩜 그렇지? 벨레스는 고기 손질을 전장의 군인처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살생의 무게는 물고기든 마수든 용병이든 전부 같은 거였다. 클로드는 울렁이는 속을 애써 견뎌낸다.

호전적인 팔미라 민족의 일원으로 살면서, "겁쟁이"의 피가 섞였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클로드에게 언제나 살생은 가장 나중의 선택지였다. 지금 살려두면 나중에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널 암살하러 올 거라는 나데르의 말에도 항상 고개를 저었다. 벨레스는 달랐다. 내가 잠을 못 잔다고 하면 그렇게 걱정하는 얼굴을 하면서, 물고기 한 마릴 잡은 것에 그렇게 기뻐하면서, 그러면서 그 검 끝은 항상 사람을 죽이기 위해 준비되어 있구나.

"⋯⋯클로드? 뭘 그렇게 봐."

어느새 손질을 마친 벨레스가 의아하단 얼굴로 클로드를 바라본다. 클로드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금세 지워내곤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 피가 묻어서. 당겨 잡은 옷소매로 벨레스의 볼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아낸다. 말해주지⋯⋯. 답잖게 머쓱해 하며 클로드의 손이 닿은 자릴 만져본 벨레스가 슬쩍 웃었다. 별거 아닌걸.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주제에, 벨레스가 손질된 물고기를 자루에 담으려 뒤를 돈 사이, 볼에 닿았던 손의 긴장을 풀기 위해 급히 주물렀다. 설렘과 두려움의 그 어드메에 휩싸인 감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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