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 like you
시드니. 호주의 미항 도시.
최저시급이 높은 대신 시티(city, 여기서는 시골이 아닌 도시를 의미)의 물가 또한 언제나 고점을 찍고 있다. 렌트비는 매주 빠져나가질 않나 집을 볼 때도 한 달 치 금액을 미리 내야 하고. 심지어는 그 좁은 집의 구역을 나누고 나눠 열 명 넘는 유학생들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인 워홀러들 사이에서 이런 곳은 닭장이라 불렸다. 화장실에 누워서 자야 하는 삶이라니, 인권의 추락도 이런 추락이 없다고 볼 수 있겠다.
강은 이런 것들이 제법 불편하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젊은이들의 뒤통수를 쳐서 살살 돈을 빼먹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외국에 나가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한인이라는 말에 딱 맞다.
기존에 머물던 하우스 쉐어에 웬 커플이 들어온 이후로 강은 하루 종일 그들의 소음에 시달려야만 했다. 잔잔한 소리를 화이트노이즈로 부르는데 - '자기야. 나 지퍼 좀 내려죠.' - 그렇다면 저 지랄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핑크노이즈? 레드노이즈? 얇은 벽으로 밀려오는 애정행각을 견디지 못한 강은 이사를 선택했다. 어차피 계약도 끝나가던 참이다. 갱신하지 않겠다고 한들 집주인이 무엇을 말리랴. 어차피 유학생은 많았고, 집을 구하는 사람 또한 많았다.
새집을 알아보기 위해 나온 강이 한낮의 시드니를 견디지 못하고, 근처의 그로서리에서 오렌지 주스 - 돈키호테인지 돈 시몬인지 했다. - 조그마한 것을 사서 막 까고 있을 때였다. 낯설지만, 또 이 이국땅에서는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강의 귀를 파고들었다.
"여기서 뭐 해요?"
한국어였다. 이 시드니에서 강을 알아볼 만한 사람, 그리고 순순히 다가와 동류를 자처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이며 자신이 그 목소리를 알아들을 일은 또 얼마나 있는가. 강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든다. 물 대신 땀에 젖은 남자였다. 곽이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나 적개심 없는 순수한 반가움, 호의 같은 게 담긴, 까만 눈동자…. 그런 것들이 해외라는 수면에서 아등바등 살기 위해 헤엄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를 준다. 강은 자신이 상대를 반가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묘하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부러 이런 생각을 했다. 아, 해외에서 제일 조심해야 하는 건 동향 사람인데.
"…안 더우세요?"
강이 조용하게 묻자, 곽이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인다. 그러다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조금 더운데, 참을 만해요."
마침 강의 손에는 갓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음료가 있었다. 플라스틱병을 타고 물방울이 주르르 흐르는. 곽의 뺨을 타고도 땀이 주르르 흐르고 있다. 강이 그것을 슬쩍 내민 것은 단순히 변덕이었다. 한 입 드실래요. 저 방금 깠어요.
곽은 사양하지 않고 그것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하는 우직한 인사도 함께였다. 곽은 잠시 고민하다가 플라스틱 음료병의 주둥이에 입을 대지 않고 - 그는 아마도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 얌전히 마신 뒤 강에게 돌려주었다.
강이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여기 물가 너무 비싸죠."
외지에 나간 이방인들만 할 수 있는 대화였고, 그들의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저 붉은 피부의 백인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었다. 백인들이 동양인에게 바라는 얌전한 분위기와는 도통 맞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곽은 묘한 후련함을 비슷하게 느꼈던 것 같다.
"비싸요. 외식하면 돈이 깨지니까 집에서만 먹게 되더라고요."
강이 짧게 웃는다. 곽에게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자였는데, 그런 그가 웃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버겁지 않다. 그늘에서 바깥의 햇빛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강이 오렌지 주스를 슬쩍 건넨다.
"물가 비싸잖아요. 나눠 먹어요."
곽은 구태여 거절하지 않았다. 실은 자신도 주스를 하나 살 수 있다거나 그런 말도 하지 않았고. 어째선지 상대가 저를 어리게 취급하고 있는 듯하여 - 어쩌면 이것은 곽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 더욱.
그러다 강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 입술이 스쳤을 때. 곽은 머리 한구석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닿았네.
여름이었다, 이런 서술은 지겨우니 됐고.
그때 곽은 무심코 이렇게 생각했다.
오렌지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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