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 눈을 떠요.

단편

단편 by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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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도 아름다운 발렌시아 항구가 충분히 내려다 보였다. 수많은 범선들이 돛을 감아 올린 채 먼 바다로 나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우리의 배, 레이디 맥베드 호 또한 저들 중 하나이리라.

백짓장같은 얼굴로 그가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다시 항해할 수 없으리라.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의 선장, 우리의 선장은 이 긴 모험의 끝을 이곳, 낯선 에스파냐의 땅에서 맞게 될 터였다.

"모국이 그리워."

쉰 목소리로 선장이 입을 열었다.

나는 옆에서 그 말을 들으며, 선장의 이마 가득한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의 시체처럼 텅 빈 푸른 눈동자! 나는 선의도 아니었으며 의학에 대해서 무지했으나 선장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리란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보게. 헥스 선생."

내 이름은 헤이스팅스였으나, 선장은 언제나 나를 이렇게 불렀다. 헥스.

"예. 선장님." 내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여 답했다.

"우리 해적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아나?"

나는 몰랐다. 나는 해적이 아니었기에. 애초에 내가 해적선에 오르게 된 일은 불행히도 내가 탄 상선이 지중해 위에서 붙잡혔기 때문이었으니까.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해적들을 대신해서 뭍에 있는 그들의 가족에게 편지를 써보내는 것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내게 밧줄에 타르를 바르도록 윽박지르던 삼등 항해사 핀치 씨도, 고향의 가족들과 편지 몇 번을 주고받자 나를 '선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 별명은 선생이었다. 해적선의 선생.

브루고뉴로 가야했던 젊은 학자는 해적선의 선생이 되었다.

어쩌면 나는 이 일이, 집안이 기대하는 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운명을 선택한 이 해적의 삶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오래 있고 싶었다. 선장의 밑에서. 언젠가는 내가 그를 위해 해도를 읽어줄 날을 그리면서.

나는 배를 사랑했다. 그것을 모는 선장도, 마찬가지로 사랑했었던 것 같다. 선장직을 맡기에는 젊은 사내였다. 젊은이가 명령해대는 것을 고깝게 여기는 늙은 해적들에게 얕보이지 않고자 수염을 무성히 기르기도 했었지. 다만 그 수염을 걷어내면, 꽤나 신사적이고 정중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맨얼굴을 보았다. 아마 이 배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그의 맨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선장이 나를 콕 집어서 면도를 부탁해서였다. 그의 감은 눈과 뒤로 살짝 흘러내리는 우아한 머리카락에 정신을 빼앗겨 내 손을 벨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장에게 떨리는 숨을 들킬까 어찌나 조마조마했던지.

어느 정도까지 자르란 말이 없었기에 나는 그 무성하던 수염을 죄다 밀어버리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면포로 턱을 다듬던 선장이 매끈하게 만져지는 턱에 경악해서 나를 되돌아보던 것이 떠오른다. '헤이스팅스!' 그때 선장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내 또래의 젊은이가 열불을 내는 것처럼 보얐기에, 한참 얼빠지게 바라보다 크게 웃어버리고 만 것이다.

청년에서 사내로 영글어가던 부드러운 턱선이 수염 아래 숨겨져 있었다. 뱃사람치고는 분홍빛인 도톰한 입술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던 선장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때 이후로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드센 해적들이 핏덩이 선장이라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가는데요, 선장?”

“바다로.”

“싱거워요.”

해가 지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내려가는 붉은 태양이 선장의 마른 뺨을 물들였다. 나는 긴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선장의 어깨를 받친 채, 그가 편안하게 일몰을 볼 수 있게끔 앉아 있었다.

그의 배가 다시금 깃발을 펄럭일 일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 잃은 '레이디 멕베드' 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팔리는지, 혹은 다른 이가 선장 행세를 하며 그 자리를 이어 나갈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배에 더이상 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선장이 존재하는 배의 선생이었으니까. 그가 없으면 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그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는 그가 선미에서 선원들을 향해 소리치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내 머릿속은 온통 선장에 대한 생각 뿐인데 말이다. 한참 뒤, 느리게, 선장이 입을 열었다.

"마셜어를 배우고 있었다네."

"그거 멋있군요."

"마셜 제도로 가보고 싶었거든. 미크로네시아와…. 아틀란티스의 유물. 그 소문이."

"알아요. 선장님. 늘 말씀해 주셨잖습니까."

선장이 키득키득 웃음을 짓다 인상을 썼다. 복부를 틀어막은 천이 어느덧 피로 물들어가고 있다. 더 말하다간 그가 밤조차 넘기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다만 선장은 내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짧은 미소를 그렸다.

"진통제."

나는 주위를 둘러본 뒤, 의원이 최후의 수단으로 쥐여줬던 마약성 진통제를 선장의 입술에 한 숟가락 흘려넣었다. 그가 느끼고 있던 고통의 반절이라도 내가 가져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선장의 부상, 그 부상을 겪는 것이 차라리 나였더라면….

"선장을 잃고 싶지 않아요."

내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몸이 다 울리는 지경이었다. 선장의 얼굴이 생각날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항구에 널린 함선을 볼 때도, 그의 눈을 닮은 맑은 날 수평선을 볼 때도, 밤에 등대를 걸을 때도….

왜 선장은 나를 살렸을까?

왜 선장은, 다른 사람에게는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던 곁을 내게만 허락했을까?

왜 선장은, 그날 밤에, 나와….

"그때. 등대에서."

선장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간다. 진통제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것 같다.

이미 썩어가는 그의 장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국 해군이 쏜 총알이 선장의 장기를 찢어발겼다. 내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게 늦어서였다.

차라리, 뱃머릴 돌려서 바다의 마녀에게 공물을 주고 거래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선장이 내 곁에 있었을까? 나는 아직도 모른다.

"등대에서 선생과 함께 걸은 것 말이야."

갑자기 등대 이야기기 나온 영문을 모르겠다. 선장의 손이, 그의 어깨를 받치고 있는 내 손을 덮었다.

"…."

"난 관심없는 사람과는 밤에 안 걸어."

나는 천천히, 경악한 채 선장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덥수룩한 긴 머리가 내 뺨을 간질였다. 선장이 싱긋 웃는다. 흐리던 푸른 눈동자에 어느덧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치 그때를 회상하면, 사람이 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등대에 침대가 있었지."

"그게 왜요?"

"등대를 구경하러 오는 연인을 위한 거라고, 선생."

요컨대 이 뜻이었다. 그 등대는 연인들의….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무리 지금은 해적선에 갇힌 신세라지만 나 또한 알 것은 다 아는 성인이었다. 해적선에 구르고 구르며 그들의 지저분한 농담에 함께 웃을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났다는 뜻이다.

"거기서 자넬 한 번 자빠뜨릴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다 죽어가는 송장이 숭한 소릴 잘도 하십니다."

"왜. 죽기 전에 말은 해 봐야지. 내가 어디 가서 꿀리는 미모도 아닌데, 선생 하나 꼬시겠다고…."

기가 차서 내가 그에게 쏘아붙였다.

"꼬신 겁니까?"

댁이 날 꼬신 거였으면, 한 번이라도 선장실로 불러 옷을 벗으라고 했을 거라고, 그렇게 투덜대자 선장이 짜증스레 답했다.

"그럼 제길, 헤이스팅스. 내가 자넬 공갈협박하려고 데려갔겠나? 지금까지 내가 한 건 뭐야?"

"차라리 작정하고 몸으로 꼬시지 그랬어요?"

"넘어오지도 않았을 거면서."

"그게 어딜 봐서 꼬신 거냐고!"

"…타인의 호의를 얻고 싶으면 개망나니처럼 굴지 말라, 잘 알아서 말이야."

그건 내가 배에 처음 납치되었을 때 한 말이었다.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애꿎은 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선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입술이 한 번 파르르 떨렸다. 그가 가만히 나를 마주하며, 병상에 누운 환자라고는 할 수 없을 정중한 투로 속삭였다.

"죽어가는 사내에게 마지막 키스 한 번은 어떠오. 저번엔 못했는데."

"선장, 진짜 짜증나요."

"그래서 좋아했잖아."

"더 쓰레기같은 말인 거 아시죠."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의 은근한 시선에 약했기에, 나를 바라보는 선장을 거절할 수 없었고 몸을 숙였다. 선장의 입술은 열로 이글거렸다. 아편의 독특한 맛이 느껴졌다.

그의 옷에서는 진통을 위해 억지로 퍼마셨던 싸구려 럼주의 냄새가 났다. 실제론 와인을 더 좋아하는 사내였으나 럼에 익숙해지기 위해 보낸 세월이 있었으니….

선장이 조심스레 내 뺨에 손을 얹는다. 나는 그것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작별인사처럼.

한참 뒤 그가 먼저 이렇게 말헸다.

"헥스. 어두워."

…그리고 다시는 입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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