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기는 언제나 어림

지인 연성교환

단편 by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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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싫으세요?”

강의 시선이 흠칫 떨린다.

마주 앉은 채 롱블랙 커피에 플랫 화이트를 마시고 있던 그들의 사이에서 흐르기에 좋은 대화는 아니었다. 카페의 음악은 조용했고, 피크 타임을 지나 사람은 적었으며, 아주 가끔 근처 사무실의 불쌍한 직장인들이 커피를 사러 들리기는 했지만 대개는 그저 Take-away였다.

그러니까 대개, 이 시간의 카페에 마주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보통은 ‘연인’ 정도로 오해받기 좋다. 여기가 한국이 아닌 외국이라 다행이었다. 이 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지 않은가.

불행하게도 강은 한국인이었고 곽이 한 말을 너무나도 잘 알아듣게 되어버려서, 착잡한 속내를 애써 숨겼다. 대체 왜 이런 걸 물어보지? 당혹과 피로가 섞인 생각이다.

그래서 강은 궁금했다.

…얘 더위 먹었나?

치기는 언제나 어림

솔직히 말하자면 강은 관계의 정립에 그리 많은 목표를 두고 있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인데, 왜 굳이 거기에서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가. 연인이니 영원한 사랑이니 이름 붙여가며 서로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태도, 그 태도가 강은 싫다. 타인에 대한 속박이다. 소유만이, 도장을 찍는 행위만이 관계의 전부는 아니었다.

또 누군가는 강이 이런 적극적인 태도를 피한다고 말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회피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강도 일부는 동의한다. 그래. 그 말이 맞지.

그래서 강은 타인에게 호감이 있더라도, 혹은 일말의 유치한 설렘 같은 것을 느끼더라도 그것이 관계로 이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강은 지금의 적당함이 좋았으므로. 중간. 멀지도 가깝지도 그렇다고 서먹하지도 않은, 어중간하고 미묘한 감정이 들큰하게 오가는 사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하지만 곽에게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어리니까.

그래.

곽은 어리다. 그래. 치기도 어리지만 나이도 어렸다. 이런 젊은이들의 로망은 언제나 폭풍 같은 사랑이었고 번개를 맞은 듯한 인연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드라마 속의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나지는 않을까 조금 기대하는 천진함도 있다.

사랑 때문에 울고, 사랑 때문에 싸우고, 새벽 세 시에 헤어진 여자친구의 집 앞 골목길에서 전화라도 해 보는 그런 구질구질한 경험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강은 곽의 그러한 기대를 알았으나, 뭐라고 할까. 자신은 도무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조금은 외면하고 있었다. 면피하고 싶었나.

“제가 싫으세요?”

곽의 얼굴이 어쩐지 삐죽하다.

강은 묘하게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싫을 리가. 곽은 빛나는 사람이다. 스포츠에 대한 열정만 봐도 알았다. 그에게는 목표로 한 명확한 미래가 있었고, 선수로 활동하며 1군에서 기량을 보이고 싶어하는 욕심도 있었다. 그런 모습이 싫을 리가 없다.

응원하고, 격려하고, 그래서 성공하길 바라지. 사람들이 연호하는 곽의 이름을 들어보고 싶지.

곽은 승부사의 기질이 강했다. 덤덤하고 조용한, 그러면서도 차근차근 제 점수를 쌓아가는 사람다운 성격이었다. 그런 사람이 굳이 강에게, 관계의 정립을 피하고자 드는 강에게 ‘우리 무슨 사이야’라는 의미를 담아 묻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점수를 깎아먹는 일이지 않는가.

“…아뇨.”

강이 차분하게 답한다. 시선은 자기 손아귀의 유리잔에 향한 채였다. 롱블랙에 제 표정이 비친다. 좀 멋쩍어 보이기도, 곤란해 보이기도 하는 묘한 미소.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퍽 유순한 눈으로 곽이 다시 묻는다.

“저 보고 대답해 주세요.”

얘가 이런 걸 어디서 배웠나.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든 강이, 시골 강아지처럼 말뚱 바라보는 곽에 다시금 헛웃음을 참았다.

“안 싫어하는 사람.”

“그러면 왜….”

왜.

사귀자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느냐는 뜻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왜 자신의 직진을 받아주지 않느냐는 말인가. 의도를 되묻고 싶지만 그게 ‘어린’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걸 알아서 강이 잔을 만지작거렸다.

꼭 이런다니까.

배짱 좋게 굴다가도 곽은 갑자기 겁을 먹는 때가 있다. …겁인가? 아니다. 겁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 그 정도로 하자. 제 손아귀를 떠난 공이 원하던 자리에 꽂히지 않는 때처럼, 곽은 가끔 이렇게 직구를 던지고서 말꼬리를 흐리곤 했다. 확신 없는 것처럼.

“저는 저희가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어요.”

강도 동의한다. 강이 이렇게까지 많은 것을 허용한 사람은 앞으로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근데 아닐 것 같다는 느낌도 들더라고요.”

“그래서요?”

관계를 마무리하자는 말인가? 아니면 더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하려나. 하지만 강이 간과한 것은, 곽에게는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동요할지, 어떻게 하면 상대의 방심을 끌어내는지 같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언제나, 곽은 예상을 깨는 플레이를 한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친해지면 안 돼요?”

속상하다고,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강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

“영화도 보러가고, 책도 읽고, 퍼스로 놀러도 가고요.”

“바다도 보고요?”

“바다도.”

강은 애써 감정을 떼고 생각한다.

그래. 놀러 다니는 거니까. 사귀자고 한 게 아니라 친해지자고 한 거니까.

제가 명확한 것을 싫어하고 둥글게 비껴나가고 싶어하는 것을 곽은 잘 안다. 매번 공을 쥐는 사람이라 그런지. 비껴나려고만 하면 눈치를 채고서 붙잡으려 드는 것이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친해지자.

좋은 어감이다. 그러면서도 미끄러지려는 강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으려는 언어 선택이다. 제 욕심과 일부 타협하고서라도 강에게 직진하고 싶은 마음은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맨날 수영장만 다녔잖아요. 여기서 일하면서 놀러도 다녀야지.”

“그래. 영화도 보고요.”

“재밌는 거 많이 개봉했던데요. 좋아할 것 같아서요.”

싫어할 수가 없다니까.

강은 잠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정말이지 곤란하다.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 이렇게 호의적으로 굴면, 정말로 저 또한 감정에 쉽게 흔들리거나 할까 싶어서. 감정에는 유통기한이 있고 모든 관계에도 끝이 있는 걸 알면서 한 번은 속는 셈 치고 어울려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도망칠 수도 없게….

졌다.

그가 하는 스포츠의 용어를 따르자면, 삼구삼진으로.

강이 미처 반박하거나 할 틈도 없이 연달아 세 번이나 훅 치고 들어온 이 청년을 어쩌면 좋을까.

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마한 수락에 곽이 씩 웃고는 플랫 화이트를 마셨다.

“그럼 혹시, 저랑 워—”

“…그래도 워킹데드는 안 볼 거예요.”

“네에….”

곽이 다시금 풀이 죽는다.

강은 조금 웃고 만다.

역시 어리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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