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량의 3원칙

웹소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연성 / 200화대의 스포일러 주의

단편 by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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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원칙주의자다.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어릴 적은 이미 까마득하고 잔잔한 추억에 매달려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도 지난했으므로.

 

인생 앞에서 사람들은 여러 부류로 나뉜다. 대개는 ‘이 거지 같은 인생!’ 하고 한탄하며 주저앉는다. 몇몇은 이 악물고 아득바득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러다가 지치면 결국 울거나 한다. 어느 쪽이건 그렇게 현명한 일은 아니었다. 인생이 그 꼴이 됐든 지구는 돌고 바다는 흐르며, 우리는 그렇게 희망차지 않은 지구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므로.

 

뭐. 총알에 눈이 어디 달려 있겠나. 인생 타령하면서 운다고 봐주는 놈은 아니다. 멈추면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고, 도망치면 등짝이 벌집이 된다. 그러니까 방법은 쏘는 놈을 먼저 잡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는 제 이름 신해량 석 자만을 새긴 채, 우직하게 인생의 풍파를 견뎌 나가는 부류에 속했다.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는 사람들은 거의 그랬다. 어떤 광경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지금 그가 발 딛고 있는 이 바다와 관련된 것에 비유하자면, ‘닻’ 다운 사람.

 

남자는 자신을 닻으로 정의 내렸다.

 

 

제1원칙. 대한민국 국적자를 조건 없이 보호한다.

제2원칙. 대한민국 국적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그는 원칙주의자고, 이 해저 기지에 ‘실내 디자이너’ 특기를 내세워 입사하면서 혼자 그런 원칙을 세웠다. 여러 국가가 물 밑에서 숨죽여 싸우는 곳이 북태평양 해저 기지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들이 다른 나라에 털리는 건 그로서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종종 서 모 팀원이 그더러 ‘지나치게 무른 바보 근육 인간’ 하는 둥 괴상망측한 별명을 지어주긴 하지만, 그는 이 원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민간인의 희생은 줄이는 것이 전쟁의 승기를 잡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 팀장님은 너무 사람이 고지식하다니까요?”

 

남자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래로 약 0.3mm 정도 움직였다가 돌아왔기에 웬만큼 눈치가 빠르지 않다면 모를 것이다. 앞에선 서 모 팀원이 쩔쩔매는 민간인 하나를 붙잡고 하소연해대고 있었다. 비상계단 한복판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민간인 - 자기를 치과의사라고 소개한 – 박무현은 어색한 웃음만 흘린 채 바쁘게 남자와 서 모 팀원을 흘깃거렸다.

 

“서지혁.”

“아니, 생각해봐. 사람이 어떻게 조건 없이 사람을 도울 수 있냐고요. 뒤통수 맞으면 어떡해? 나는 그런 게 참 이해가 안 가요. 요즘 세상 얼마나 야박한데, 어? ‘대한민국 사람이면 도와줘.’ (이쯤에서 녀석은 미간을 굳힌 채 남자의 성대모사를 했다.) 한담. 무슨, 원칙이 있다는데. 난 솔직히 이해 못해요.”

“서지혁.”

 

남자의 목소리는 한 번 더 낮아졌다. 박무현도, 서지혁도 찔끔! 하는 게 보였지만 그는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말 한마디라도 아끼는 것이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필수적이다. 물론 민간인의 긴장을 풀어 주고자 하는 의도겠지만, 이 상황에서 긴장이 풀어질 리 없다는 걸 남자는 알고 있다.

 

“그,”

 

박무현이 입을 열었다.

 

“서지혁 씨, 사람을 돕는 건 원래,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겁니다.”

 

서지혁의 턱이 빠질 듯 아래로 툭 떨어졌다. 녀석은 한동안 입을 벌린 채 박무현을 바라보고 있다가, 남자를 돌아봤다.

 

“이렇게 사람이 둘이나 있다니, 이렇게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이 지혁이는 걱정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남자는 한숨을 쉰 채 고개를 돌렸다. 대화 주제에서 자발적으로 소외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의사 선생이 웃었다. 그 후로 대화는 ‘해저 기지 퇴사, 퇴사 후 소주 한 잔,’ 하는 둥의 주제로 한참 이어지다가 사그라들었다.

 

 

*

 

 

여기가 어디였더라? 머리가 뒤늦게 움직였다. 남자는 느리게 생각했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이 침전물 일어난 바닷속처럼 부옇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에게 늘 몇 번이고 강조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예컨대 발버둥을 치지 않는 것이다. 바다든 호수든 저수지든, 아래엔 두껍고 질척거리는 흙이 가득 차 있다. 발버둥을 치거나 섣부르게 건드려서 시야를 흐리는 것은 곧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침전물. 그래. 침전물.

 

이것은 그의 발버둥이다. 그는 하염없이 팔다리를 움직이며 주위를 부옇게 만들고 있었다. 왜? 왜라고 묻는다면, 글쎄, 답하기가 어렵다. 그가 아주 멍청해졌거나 무모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호흡이 모자란 탓에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큿-”

 

잇새로 짧은 신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잘라 삼키고 남자가 다시 움직였다. 차라리 많이 움직이자. 그렇게 하면 나도 못 보지만, 상대 또한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혀는 굳어가고 머리는 간헐적으로 점멸했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근 10년의 경험 덕이다. 남자는 그것이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9mm 탄환, .45 ACP, 종류별로 많이도 가져왔군. 무뎌가는 입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로 단단히 바닥을 디딘 채 도움닫기 했다. 탄피 떨어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는 남은 총알을 모두 쏟아붓고, 때로 그것을 휘두르고 막으며 전투를 이어갔다. 문득 아래에서 ‘캑!’ 하고 납작한 비명이 들렸다. 아. 미안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목소리를 내었다가는 폐 속에 겨우 붙잡아두고 있던 그의 숨이 빠져나갈까 걱정되었던 탓이다. 남자는 조금 더 삶을 붙이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민간인의 목숨을 유지할 의무가 있었다.

 

남자의 상대는 아무래도 얼굴에 철 가면이라도 뒤집어쓴 모양인지, 몇 번이고 움직이며 발에 채이는 사람들을 밟고 있었다. 이쯤 되면 고의로 느껴지기도 했다. 저들의 구원자라더니. 실제로는 대접이 박하지 않은가.

 

제일 먼저 덤볐던 놈 중 덩치 큰 녀석은 이제 완전히 숨통이 끊여졌다. 하지만 아주 훌륭한 방패 노릇을 해 준다. 사람의 몸은 의외로 쓸모가 많고 무수히 많은 뼈와 근육 장기 지방이 쏟아지는 총알의 속도를 느리게 만든다. 고마운 일이다. 관통력이 좋은 소총 총알까지 막기엔 무리지만, 그래도 치명상을 피하는 덴 도움이 됐다. 간 쪽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병원에 가도 이제는 늦은 몸이 되었다는 것을, 남자는 무심코 깨달았던 것 같다.

 

 

백업은 필수적이다. 둘은 하나고 하나는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유 장비를 둘 것. 그리고 나를 보조할 사람이 있을 것. 사람의 감각은 한정적이고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리면 쉽게 소모된다. 그것을 위해 서로의 사각지대를 보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는 항상 후방에 서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에게는 좌우와 전방을 경계할 사람이 필요하다.

 

4분.

 

그러나 여기엔 이제 고인이 된 두 명의 남성과 제게 소총을 갈겨대는 여자뿐이다. 여자도 그렇게 생각했던 게 틀림없다. 발목이 붙들렸을 때 그가 보인 표정은 아마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몸뚱이가 넘어간다. 심장이 아주 느리게 뛰고 있다.

 

3분 10초.

 

남자가 생각했다. 바닥에 닿았군.

 

시야가 흐려진다.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제 몸 안에서 나는 소리인지 아닐지는 몰랐다. 위에선 여전히 튀는 듯한 총성이 퍼부어지는데, 무엇인가가 기어 오더니 제 몸을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다. 도망치든 숨든, 혹은 시체인 척하든, 선택지는 많았음에도 그 ‘누군가’는 신해량을 붙들었다.

 

20초.

 

“-신팀장님? - 씨, 정신 - ”

 

모스 부호처럼 둑둑 끊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졸음을 이겨내고 ‘예’하려던 남자는 감각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낀다.

 

…….

 

심장이 짓눌렸다가 다시 순환한다. 부질없는 것을 알고 있다. 심장이 멈추고 4분이 지나면 뇌세포는 파괴된다. 되돌릴 수 없다. 지금의 기술력으로도 숨이 끊어진 사람은 되살릴 수 없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고, 불가지론자인 남자는 박무현이 구원자든 아니든 – 실제로 저 무한교라는 종교인들이 말하듯 구원자더라도 – 자신을 살려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폐에서 바람이 새고 있다.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숨을 들이켰으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말초까지 피가 닿았다가 돌아왔다. 그럴 때면 깜박깜박 정신이 들기도 했었다. 서지혁의 팔에 문신이 있었지. 연명의사 없음이던가. 신해량은 자신이 민간인의 발목을 잡게 될 줄 알았다면, 문신이나 그에 준하는 어떤 것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아야 했는가, 하는 생각을 조금 했다. 그만 하셔도 됩니다. 선생님.

 

사람은 죽고서 청각이 가장 마지막에 사라진다. 숫자 세는 소리가 들렸다. 셋.

 

넷.

 

다섯.

 

 

신해량은 닻이다.

닻은 가라앉는 것이 옳다. 그것이 순리다. 언젠가의 말이 신해량의 머릿속을 울렸다.

 

 

 

익사로는 죽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바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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