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맹목

인물 이름은 알파벳 처리

단편 by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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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변절자들 말이오?"

A는 이때쯤 신뢰와 충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쌓아온 긴 역사와 살 아래에서 혈관이 흐르듯 자명하게 이루어진 그 계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문. 가문이란 무엇인가? 이름의 모임, 같은 피와 살을 공유하는 이들의 집단의식, 혹은 상징. 그 중에서 A의 가문 사람들은 기묘하게도 타고나기를 반항아로 났다. 어느 한 가지에 미쳐 있었고,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맹목을 타고 났더란 말이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자유! 그것만이 그들을 위한 것이라 했다. 그것이 B - 스태프의 첫 번째 소유자 - 가 미쳐있던 것이었다. 그는 자유를 쫓아야만 했다. 그랬기에 신분제가 있던 제국을 떠나, 공화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후대로 내려오며 그 피에 섞인 맹목은 진해지면 진해졌지, 결코 희석되지 않았다. 못했다. 그것은 A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주제를 모르고서 튀어나오는 말들이 A의 성질을 긁는 것은 자명했다. 의연하게 허리를 펴고, 턱을 살짝 치켜든다. 시선은 아래로 내리되 굴종의 의미는 아니었고, 오히려 상대를 멸시하는 것을 숨기지 않아 오만했다.

우스운 일이다. 다만 신랄한 생각과 냉소만큼은 능히 감출 수 있었다.

우스운 일이야, 입 밖으로 뱉은 중얼거림은 사그라들고, 숨길을 따라 들숨을 삼켰다. 허공을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느리게 스태프의 대를 훑는다. 악기를 다루는 것처럼 매끄러운 손길이다.

물론 정말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곳에 다른 변절자를 지키기 위해 왔을 뿐이지, 전 식민지인 출신으로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스태프를 드는 것은 모욕을 두고보지 않겠다는 엄포였다. 그 짙은 잉크빛 머리카락이 조명 아래 붉게 달아올랐다. 무감한 얼굴이 좌중을 훑었다.

 

A는 타고나기를 반항아 기질이 강했고, 그것을 숨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살갗 밑에 붉은 피가 흐르는 한 기질은 이어질 것이었다. A는 다시금 생각한다.

자신의 피에도 맹목과 광기가 있다면, 그 대상은 무엇일까?

 

 

 

 

 

가끔은 무엇이 학습된 것인지, 무엇이 본래부터 타고난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A가 열 살 무렵부터 M가 저택의 전권을 쥐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지대한 불행이었다고, 열아홉의 그는 생각했다. 어머니의 자매인 그는 좋게 말해 엄격했지만 나쁘게 말하면 확고한 원칙주의자였다. 해서 이 영지의 모든 사람이 칼 같이 움직이며 품위 있게 굴기를 바라곤 했는데, 그 대상에는 A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M의 맹목이 '고귀함'을 향한 모양이라고, A가 보내는 편지에 어머니 답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 한때 그들이 귀족이었던 것은 100년도 더 전의 일인데. 이곳이 공화제를 택해서 얼마나 다행이던가?

지독한 맹목을 말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불현듯 미쳐버린 것을 어떻게 짐작했겠나? 맹목을 피하는 것이 가능했더라면 진작에 M도, O도, C도 그 피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가문에 규율이 내려온다거나, 가계도 같은 것들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은 귀족이 아니었다. 제 발로 제국을 걷어차고 그들의 무리에서 이름을 지운 것이 가문의 광기였다. 그저, 그렇지. 지금은 속되게 말하는 '족보' 있는 집안. 그거밖에 안 되는 셈이다. 다 똑같이 사는데 저들만 별세계에 사는 줄 아는 그런 머저리들. A는 자신의 가문이 변질되는 것을 제법 서글퍼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걸음걸이를 고쳐야 했으며, 입을 다무는 법을 배웠고, 호불호를 숨기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거부하지는 않는다. 물 흘러가듯 몸을 맡기기만 했다. 고집을 부린다고 쉬이 끝날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그런 조기 교육들이 마냥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성장기 때의 과도한 교육은 종종 아이들을 망치곤 했는데 A가 가진 생물체 - 사전적 의미로 살아있는 모든 것 - 혐오의 기원 또한 그 이른 교육 탓이었다. 이제 와 타인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지만, A는 종종 10살 이후로 자신의 어딘가가 고장 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검은 저택 내부에서 살며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게 아닐까?

A는 다시 생각했다. 무릇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데 그는 그렇지 못했다. 타인이 내리는 평가를 들으면서도 그랬나? 싶었고. 단 한 번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쉬이 증명을 내려본 적이 없었다. 이상하네. 다들 그렇게 자기 자신에 확신을 가진단 말인가? A는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들과 M의 교육으로 배운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좋고 싫음은 무의미한 것, 그런 생각을 통해 좋아하는 것을 싫어한다 착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떻게 이 맛을 몰라?"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 한동안 들은 말이라면 이것이겠다. A는 자신이 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애초부터 짜고, 맵고, 달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고기는 마른 고무를 씹는 것 같이 느껴졌고, 향료들은 입에 껄끄러웠다.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입에 넣어봤자 즐거움이 있을리 없다. 그는 대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만 음식을 먹었다. 미뢰가 쪼그라들 정도로 자극적인 신맛 정도가 혀에 감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렸다. 이가 빠질 정도로 단맛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러니까, 완전한 상실은 아니구나. A는 안심한다. 그냥 둔할 뿐이구나. 그래서, 먹는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에 기함하는 아이들을 향해 A는 늘 짓던 온화한 표정을 걸고 '원래 그랬어.' 하곤 했다. 그러다 문득 말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원래?

"상담을 받자."

그 얘기가 흐르고 흘러 그렇게 돌아왔다. 물이 순환하듯 그의 증상이 입을 타고 돌았다. 담당 교수가 그런 권유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인간이란 족속은 타인을 걱정하는 데 도가 텄지 않은가. A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문항들에 답변하고, 자기 생각을 줄줄이 쓰고 난 이후 들은 진단은 A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극심한 울증을 앓는다고? 자신이? 이 무기력함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장 충격적이었고, 그다음은 어쩌다 자신이 이 꼴이 됐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A는 스스로가 제법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무기력함과 종종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 것 정도는 다 그런 줄 알고 살았다. 당연히 여기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마다 그는 혼란을 조금씩 느꼈고, 동시에 불안감이 뼈마디를 갉작이는 것을 느꼈다.

쓸모를 증명하는 일은 진작에 끝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는 가문을 돌려받기 위해, 저택을 돌려받기 위해 몸을 숙인 채 기회를 보고 있었다. 타인의 재단을 피하고자 감춰온 세월의 햇수가 8년이었다. 그런데 이따위 종잇조각들과 거기 새긴 글줄 몇 가지로 자신의 상태를 진단한다니, 말이 되는가? 될 리 없다. 타인의 기준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그렇게 여겼다.

그 와중에도 A는 가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A가 근 몇 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단 하루만에 저택을 죄 뒤집어 엎어 놓았다.

"그만 내려오십시오."

그 말에 M의 가는 뺨이 꿈틀거렸다. 조카가 반항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했던 그로서는 당황스러운 말임에 분명했다.

"A, 네가 감히-"

저 입에서 나오는 노호성을 그렇게 두려워하던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마냥 거대한 줄 알았던 사람이 저와 눈높이가 맞았다. A는 그 무기질적인 얼굴로 상대를 응시했고, 주변의 고용인들은 바짝 긴장하며 두 집안 사람의 충돌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라도 무기를 꺼내 들 수 있는 상태였다. M이 분개했다.

"네가 감히 이 이모에게,"

"감히?"

그 말을 반복하는 A의 눈동자가 푸르게, 더 나아가 붉게 발광했다. 감히라고 했습니까, 나의 앞에서? 당신이 가문을 망치는 것을, 내가 알고 영지 사람들이 아는데? 속삭이는 목소리는 선뜩하리만치 날카로웠다. 제게 했던 짓을 그대로 제 사촌에게 해 대는 것을 묵인할 것이로 생각했다면 그것이 더욱더 오산이었다. A는 냉소했다.

"애초에 가주는 어머니였습니다. 당신이 가진 그 반지는 어머니의 아들인 내게 와야 했고,"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지금, 이 저택의 주인은 납니다. 당신이 좋을 대로 휘두르던 짓도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날 것입니다. M이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A의 광기는 섭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반항아 기질이 광기에 섞이니 그야말로 방법이 없었다. 그랬기에 아마론은 이 과정이 매우 고될 것이라 생각했고, 싸울 각오까지 마친 채 집무실에 들이닥친 셈이었다.

벽난로의 탁탁 튀는 불똥이 집무실의 대리석 바닥에 닿자마자 픽 꺼졌다. 자리를 박찬 몰리나라가 다가왔고, 그는 이후에 일어날 일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어금니를 악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혀를 깨물거나, 입 안쪽을 잘못 깨물어 피를 보기에 좋았다. 좋은 타이밍에 이를 악문 A는 고개에 들어간 힘을 뺐다.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헉! 하고 숨을 참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귀가 잠시 멍했기에, A는 그것이 제가 낸 신음인가 잠시간 고민했었다. M의 비서가 황급히 '의원님,' 하고 만류했기에 그것이 그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무표정한 조카의 얼굴에 M가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들었다. 아, 반지는 좀 빼시지. 어쩐지 뺨이 뭔가에 긁혀 홧홧했다. 그렇지만 A는 굽힐 생각이 없었으며, 기꺼이 몇 대라도 더 맞아줄 의양이 있었더란 말이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M는 무어라 말하기 힘든 얼굴로 제 조카를 보더니, 가주의 반지를 빼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분을 삭이는 목소리가 울린다.

 

 

"내가 너를 잘못 봤구나."

 

 

잘못 보셨지요. A는 속으로 대답했다. 그는 심지가 무르지도 않았고, 나약한 성질머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를 빼닮았고, 모든 이들이 그에게서 어머니를 보았지만, 그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곤 그 냉엄한 얼굴과 머리칼뿐이었다. 그의 기질은 오히려 가문 그 자체였다. 나아가선 B의 자유로움과 아버지 A의 진득함을 닮았었다. 그러니까, 약 9년의 세월 간 한 번도 M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오히려 이 일에 뺨 한 대면 싸게 먹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으니. 고요한 눈동자를 내려다본 M가 짓씹듯 내뱉었다.

 

 

"가문을 이어받는 건 스스로 해라."

 

 

그럼요. A가 웃었다. 항상 스스로 해 온 것을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자리를 비운 이래로 계속. 그리고 검지에 은반지를 꼈다. M가 정치에 몸담느라 책상 한쪽으로 미루어 두었던 '가업'을 이을 때였다...

 

 

그리고 문득, 자신만 남은 검은 집무실을 돌아보며 A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내가 무엇에 맹목을 가지게 될지 항상 궁금해 해왔는데, 사실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게 아닐까?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말이다! 삼촌 O는 어느 순간 미쳐버렸다. 멀쩡하게 살다가 단 한 사람에게 미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게 되었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까지도 당신의 맹목을 알지 못했다. 이모 M는 열여섯 살에 가문의 역사를 알게 된 순간, 고귀함에 미쳐버렸다.

 

그럼 나는? 차라리 미리 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것도 만나지 않는다면 내 맹목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 고민에 C는 항상 조급할 이유는 없다고 다독였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란다, A. 혹시 모르는 일이라고 속삭인다. 차분한 V의 피가 섞였으니, 네가 이모나 삼촌처럼 될 일은 적을 거야. A는 되묻는다. 그때가 올까요? C가 웃었다. 자연스럽게, 당연히.

 

우레 후에는 뇌명(雷鳴)이 울리듯, 강이 바다로 흐르듯, 내가 너와 네 아버지를 사랑하듯.

 

 

어머니가 옳았다. 그의 맹목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깨닫는 시기가 정해졌을 뿐이었다. 그것은 한 집단이었고, 나아가 그들의 의식이었으며, 다르게는 이름 뒷글자에 존재했다. 그들의 광기는 섭리에 구애받지 않았기에 가문의 사람들은 개념에도 미칠 수가 있었고. 아, 친애하는 나의 가문.

 

 

그것이 그의 맹목이요, 그의 광기의 증거였다. 하마터면 A는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실제로, 조금 웃은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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