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주나 단문 모음
1. 부고
아르주나가 죽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영웅의 죽음이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매하던 법륜왕 유디스티라도, 용맹하던 비마도, 누구보다 아름답던 사하데바와 나쿨라도 이젠 없다. 판두의 아들들은 모두 영산 히말라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탄식했다. 크리슈나도, 판다바도 떠나버렸다! 이제 이 세상에는 신도, 영웅도 없다. 바야흐로 칼리 유가의 시작이었다! 하스티나푸라에서 시작된 비탄과 애도의 물결은 순식간에 나라 전역으로 퍼졌다. 단 몇 명만이 살고 있는 마을에도, 고행하는 현자들의 처소에도, 심지어는 아무도 오가지 않는 깊디 깊은 숲속까지도. 그러니 자신이 그 소식을 알게 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우연히 길을 잃고 흘러들어온 현자가 전해주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으리라.
그래, 판다바가 죽었단 말이지…….
자신의 표정을 본 현자는 사색이 되어 꾸벅 인사를 남긴 뒤 곧바로 떠나버렸다. 거울을 보지 못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그 때 제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턱이 없다. 설령 물가에 비친 모습을 본대도 보이는 것은 추한 몰골뿐. 그 이상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한때는 누구보다 증오하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먼 이야기다. 모든 이들이 죽어버렸다. 한때 열렬히 사랑하던 사람들도, 증오하던 사람들도, 영원히 살 것만 같았던 크리슈나조차도. 판다바의 죽음은 그 모든 죽음의 마침표일 뿐이다. 그들의 죽음은 자신에게 그만큼의 무게를 지닐 뿐이다. 사랑도, 증오도 퇴색되고 분노만이 남은 자신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 날은 아르주나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오래 전, 아주 오래 전의 기억.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아르주나와 나, 그리고 아버지가 있었다. 세 사람은 티 없이 맑게 웃고 있었다. 누가 더 멀리까지, 정확히 화살을 쏠 수 있을까. 그것만이 중요하던 시절. 아르주나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고마워요, 아슈바타만. 무엇이? 미처 묻지 못한 채 꿈은 끝나버렸다. 깨어나보니 온몸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구역질이 났다.
몇 번이나 빈 속을 게워내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얼굴을 씻고자 다가선 물가에 비친 몰골은 여전히 추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우리는 분명히 행복했다. 그렇기에 끔찍했다. 아르주나.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답하는 목소리는 없다.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알던 모든 것들이 떠나버렸다. 신과 영웅들이 떠난 세계에 남은 것은 자신뿐이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눈물인가. 어쩌면 단지 이 세계에 홀로 남겨졌다는 그 사실이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버겁게 느껴졌을 뿐일지도 모른다…….
2. 주종
성배전쟁 AU
“적 측의 동향은 안정적입니다. 캐스터, 세이버 모두 전초전을 치렀을 뿐 본격적으로 전투에 돌입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다른 진영 역시 움직임 없음. 어떡할까요, 마스터.”
“일단 그렇게 부르는 것부터 그만두지 그래.”
콜록, 기침 사이로 탁한 목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궁병다운 천리안으로 수백 리 바깥을 탐지하던 영령 아르주나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말이 다소 불만스럽기라도 한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 채로.
“저는 성배전쟁의 규율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무언가 문제라도?”
“성배에서 비롯된 지식이라는 건가. 하긴 나보다야 네가 더 잘 알고 있겠군. 그래. 그러면 말이다.”
마스터라고 불린 남자는 답답할 정도로 몸에 감긴 붕대와 망토를 살짝 헐겁게 만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 같잖은 시선도 성배전쟁의 규율에서 비롯된 거냐?”
“무슨…….”
“모르는 척 하지 마. 아르주나. 연민하는 표정으로 보는 건 그만둬라. 이 영주인지 뭔지 하는 걸 쓰기 전에.”
그리곤 소매의 옷감과 붕대를 들춰내 손목을 보였다. 그곳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글자글한 주름과 함께 새빨간 염료로 만든 헤나처럼 보이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활과 화살처럼 보이는 문양. 그것을 본 아르주나는 순간 표정을 일그러뜨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다시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와 같은 용도로 영주를 사용하는 건 권장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스터-마술사 적성과 저의 영령의 격으로 미루어 볼 때, 해당 명령은 수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영주는 총 3획으로 한정되어 있으니 보다 중요한 때에 사용하시길 권합니다.”
그러냐. 남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본래의 목적을 이룬 이상 굳이 이 녀석과 껄끄러운 대화를 이어갈 이유는 없다. 아르주나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 듯 하늘 너머로 다시금 시선을 돌린다.
남자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짓씹는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분명 얼마 전 제가 몸을 숨기고 있던 숲으로 한 여성이 다가와서는 성배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했던 것은 기억한다. 자신은 여러 고민 끝에 그것에 참가하겠다고 결정했다. 만능의 원망기, 성배. 어떻게 그것이 작용하는지, 마술이라는 게 뭔지, 심지어는 영령이라는 게 뭔지조차 몰랐지만 무엇이든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말에 덥썩 미끼를 물었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 녀석이 소환된 거냐. 차라리 카르나나 두료다나 나리였다면……아니, 그것도 끔찍하다. 역시 아무런 연이 없는 영령이 소환되는 것이 가장 나았다. 그 여자는 제게 무촉매소환의 맹점을 말해주지 않았다. 인연이 있는 영령이 소환된다니.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하는 말이 “아쉬워라. 그 저주 때문에라도 스리 크리슈나가 소환될 줄 알았는데요.” 라고. 크리슈나 놈이 소환되었다면 당장이라도 그 육신을 찢어발기고 성배전쟁이라는 소꿉장난은 그만뒀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지 않는 것은 그저, 성배에 대한 욕심과 아르주나의 간절한 호소 때문이다. 녀석은 분노를 토해내는 자신의 팔을 겨우 붙잡고는 말했다. “비자야의 이름을 걸고, 당신에게 반드시 승리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이름이, 그 말이 지닌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자야. 승리하는 자. 아르주나는 그 이명에 걸맞게 언제나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 아르주나가 자신의 편에서 싸운다면 정말로 승리를 거머쥘지도 모른다. 아니—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복수와 승리 중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마도 수백 년 전이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자의 선택은 승리였다. 중요한 것은 그뿐이었다.
남자는 힐끗 눈앞의 영령을 바라보았다. 전성기의 모습으로 소환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아르주나는 티없이 멀끔한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소환된 채다. 한 손에는 염신 아그니로부터 받은 신궁 간디바를 들고 있고, 허리춤에는 영원히 동이 나지 않는 그의 화살을 보관하는 화살통이 묶여있다. 어느 모로 보나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다. 남자는 천여 년 전 어느 평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순백색의 망토를 나부끼며 전차를 타고 전장을 가로지르던 영웅을. 그에 호응하던 병사들의 함성소리를.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기억이다. 다시 시선을 돌리니 아르주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만 같다.
“뭐야.”
“……송구합니다만, 마력의 공급을 요합니다. 장기적인 천리안 사용과 일전의 전투로 인해 마력이 유의미하게 감소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저는? 고개를 까닥여 뒷말을 채근하자 아르주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연비가 그리 좋지는 못한 터라.”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묘하게 낯을 붉히는 게 아닌가. 남자는 기침 사이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녀석이었던가.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아득한 옛날의 기억이 다시금 뇌리를 잠식할세라 남자는 연거푸 머리를 흔들었다. 알았다. 입가에 감긴 붕대를 풀며 말하자 아르주나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알아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 아르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흰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남자의 뺨을 조심히 감쌌다. 이어 남자의 입에 제 입을 포개고 혀를 섞었다. 고요한 숲 속에 물기 어린 소리가 울려퍼졌다. 다분히 외설적인 소리였으나 누구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달콤한 콧소리도, 애정 어린 애무도 없는 기계적인 마력 공급. 그러기를 몇 분,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남자는 긴 입맞춤이 끝나자마자 연거푸 기침을 쏟아냈다. 잠시간 호흡을 고르곤 충동적으로 말을 던졌다.
“……넌 이런 더러운 몸과 살을 맞대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드냐?”
“예에, 물론. 이 아르주나, 마스터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르주나는 망설임 없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무엇이든, 말이지. 그 말대로였다. 제가 자해를 명하든, 그 몸을 원하든 아르주나는 따를 수밖에 없다. 절로 입꼬리가 비틀렸다. 함께 전장에 있었던 다른 누군가가 이 모습을 봤더라면 필시 조소했으리라. 서로를 죽이고 싶어해 마지않을 두 남자가 주종으로 묶여 함께 싸워야 한다니, 이 무슨 우화인가.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다. 아니, 어쩌면 죽임을 당하고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끔찍한 악몽임에 틀림없다. 허나, 실상은 꿈 아닌 현실이기에 더욱 끔찍했다.
이것은 잠시나마 구원을 바랐던 죄인에 대한 형벌인가, 만능의 원망기라는 것에 현혹되었던 자에 대한 조롱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이미 시작된 이상 뒤로 무를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승리를 추구한다. 그뿐이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군. 마지막으로 가볍게 정탐을 다녀와. 합류는 예의 그곳에서 한다.”
“알겠습니다.”
아르주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떠났다. 홀로 남은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빽빽이 자라난 나무 사이로 붉은 하늘이 보인다.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다.
성배전쟁이 시작된 지는 겨우 하루.
반면, 제게 부여된 3000년의 시간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성배전쟁에서 패배하더라도 죽을 일은 없다. 제게는 그런 안식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달라질 일은 없다. 만능의 원망기라는 것을 얻는다면 또 다를지도 모를 일이지만—
“…….”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사람과 살갗을 맞댄 것은 얼마만인지, 사람과 대화를 한 것은 또 대체 얼마만인지……. 천여 년의 세월 동안 고독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 고독을 부여한 자도, 그 고독을 잠시나마 끝낸 자도 같은 자였다. 아르주나. 남자는 여전히 그를 어떤 낯으로 보아야 할지 몰랐다.
3. 애칭
“마스터께서는 또 다른 나를 주나오라고 부르시더군요.”
아르주나가 운을 뗐다. 한참을 무언가 생각하는 양 보이더니 저 말을 하려고 한 건가. 싱거운 녀석이구만. 그리 생각하며 말을 받았다.
“아르주나 얼터라서 주나오라고 하는 거 아냐?”
“예에.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일종의 애칭이라는 거겠죠.”
“질투 나냐?”
“설마요!”
아르주나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게 반응할 건 또 뭐냐. 시큰둥하게 반응하니 지레 찔렸는지 손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질투라니요. 그런 부덕의 소치를! 이 제가 보일리 없잖습니까! 누가 뭐래도 저는 마스터의 넘버원 서번트입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설령 소환된 지 수 년 동안 제게는 애칭 한 번 불러주신 적 없다 하더라도!”
질투는 몰라도 뭔가 쌓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설마 매번 얼터가 그런 호칭으로 불릴 때마다 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건가? 어쨌든. 아르주나가 큼큼 소리를 내며 목을 가다듬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제가 하려던 말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르주나는 힐끔 이쪽을 바라보더니 말을 잇는다.
“저도 애칭이란 걸 불러보고 싶어요. 예에. 사실은 꽤나 오래 전부터 생각하던 거예요. 아슈라든가, 아슈와라든가……어때요?”
눈을 빛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본론은 이거였나? 애칭으로 불리고 싶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반대로 노선을 틀 줄은. 신선하다고 박수라도 쳐 줘야 하나. 실없는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아르주나는 여전히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래. 대답은 해 줘야겠지.
“싫어.”
“왜죠?!”
예상대로의 반응이다. 살짝 붉어진 뺨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하는 나도 중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만.
“왜긴 왜야. 시커먼 사내 자식들끼리 민망하게 애칭은 무슨 애칭이냐?”
“우린 연인이잖아요!”
“연인이라도 예외는 없어.”
“말도 안 돼요.”
아르주나는 한껏 질린 표정을 짓더니 생각이 바뀐 듯 이쪽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쩐지 불안한데.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 제대로 된 말을 들었던 기억이 없다. 역시나라면 역시나일까. 제정신으로는 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그런데 제가 애칭을 부르고 싶다면 저를 어떻게 저지할 생각이시죠? 가령, 제가 복도에서 당신을 나의 작은 아슈와라고…….”
“젠장, 그 입 좀 다물어!”
곧장 입을 틀어막자 우물거리는 음색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손에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놀라 비명을 지르고 손을 떼자 혀를 내민 상태의 아르주나의 얼굴이 보인다.
“핥았어?!”
“핥았어요.”
“너 원래 이런 녀석이었냐?!”
“연인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내가 되는 것……그것이 바로 크샤트리아입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 하지 마!”
그런 다르마는 들어 본 기억도 없다. 설령 실재하는 규율이래도ㅡ그럴 리가 없겠지만ㅡ 브라만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르주나는 끄떡도 없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고집을 꺾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애초에, 네 눈엔 내가 작아 보이냐? 뭐 그런 토 나오는 애칭이 다 있어?”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든 작고 소중하게 보이는 법이죠. 귀엽지 않나요? 영어로 옮기자면 마이 리틀 포니ㅡ가 되겠군요. 무난한 애칭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토 나와!”
아르주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곤 말했다.
“그럼 한 발 양보해서 아슈로 하죠. 어때요?”
“결국은 애칭을 부르겠다는 거잖아…….”
“남들 앞에서는 부르지 않을게요. 우리 둘만 있을 때만 부르는 거예요. 당신도 절 애칭으로 불러도 좋아요. 음, 이를테면 파르타라거나.”
“크리슈나 녀석 생각나서 싫어.”
한숨이 절로 터져나온다. 젠장, 저놈의 고집. 어린 시절부터 녀석의 고집은 알아줘야 했다. 한 번 밀어붙인 일은 원하는 바를 얻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런 부분을 아버지도 좋아했던 거지만. 그리고, 나 또한. 결국 이 모든 건 녀석이 처음 내게 말을 건넸을 때부터 예견되어 있던 일이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아까 말했던 징그러운 애칭은 그만두고, 아슈라고 불러.”
“정말이죠? 아슈.”
막상 애칭으로 불리니 묘한 기분이 든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가슴이 간질거린다고 할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요동치는 건 그리 유쾌한 감각은 아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다.
“아슈.”
“왜.”
“재림 상태가 변했어요.”
뭐? 손가락이 향하는 대로 시선을 돌려 몸을 바라보니 그 말대로다. 아무래도 3재림의 상태로 변한 모양이다. 이유야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의 분노 때문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젠장, 이게 다 무슨 꼴이냐. 한심한 제 모습에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눈 앞의 남자는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인지 만면에 미소가 떠오른 채다.
“당신이 나로 인해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그리 말하며 돌연 안겨오는 탓에 침대 위로 몸이 쓰러졌다. 가슴팍에서 작게 쿡쿡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젠 아무래도 좋나. 손을 옮겨 녀석의 등을 끌어안았다. 에테르로 만들어진 몸이지만 따뜻함이 느껴진다. 36.5도의 체온이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한 손은 처음 보는 검은 머리 소년의 어깨를 짚고, 나머지 한 손은 내게로 흔들던 아버지. 아슈, 여기다. 다가온 제게 소년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구루의 아들, 아슈바타만. 저는 아르주나라고 합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것이 변했다.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그만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4. 절대 BL이 되는 세계
어느 날 아침 아슈바타만이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사는 세계가 절대 BL이 되는 세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른바 그런 이야기다.
아니,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수상할 정도로 여자들의 인상이 잘 기억에 남지 않는다거나, 치정싸움 중에 남자끼리 눈이 맞는 비율이 높다거나, 기타 등등. 이 모든 증거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세계는 뭔가 이상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세계는 절대 BL이 되는 세계임에 틀림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당장 BL이라는 것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취향은 당연히 없었을 뿐더러 뭔갈 파고들며 조사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았지만 이 세계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몰래 방에 틀어박혀 구글에 BL을 검색하는 제 꼴이 처량했다. 심지어 검색 결과는 살색의 향연. 눈을 찌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가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조사를 이어나갔다.
3시간 만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BL의 세계는 아주 심오하다는 것. 세부 분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BL은 곱상하고 여린 소년과 청년(때로는 중년과 노년까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자신 같은 근육질 남자가 끼어들 일은 없을 것이다. 첫 날은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 속에 잠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자마자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헬스장을 다니던 근육질 친구로부터 그렇고 그런 관계의 동성이 생겨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다시금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알아낸 것은 바라물이라는 것의 존재. 일반 BL이 여성향의 그것이라면 이쪽은 남성향, 그 중에서도 남성 동성애자(이른바 게이)들이 향유하는 문화로 대개 근육질 남성들의 사랑을 다룬다고 한다.
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그렇고 그런 쪽의 수요가 있다는 건 너무하지 않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진지하게 따지고 드는 건 포기한지 오래다. 이 세계부터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이상하게 생겨먹었으니까.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도 BL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동성 간의 사랑을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진실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성별이 어찌됐든 응원한다. 하지만 난 남자랑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 세계가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이유로 BL 전개가 된다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다. 심지어 검색 결과에 따르면 하드한 전개도 있다는 모양인데, 그런 인권 유린에 당하고 싶은 녀석이 존재하겠는가?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방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절망한 채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우선은 내 주변에 대해 파악해두는 것이 급선무였다. 즉, 위험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주의해둬야 할 녀석들에는 누가 있는가. 가장 처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친구들이었다. 특히나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들이 위험했다. 소꿉친구란 건 BL에서 필승속성, 적어도 서브속성이나 다름없다. 엮일 위험도가 아주 높다는 뜻이다. 나는 유명한 가정교사였던 아버지를 둔 덕에 소꿉친구를 여럿 두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두료다나 나리와 그 형제들, 카르나, 그리고……아르주나와 그 형제들까지. 다행히도 그 중에서 아직까지 저를 좋아하는 녀석은 없는 것 같았다. 물론 BL의 세계에선 좋아하는 감정만이 중요하진 않고, ‘혐관’이라는 것 또한 애정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측면에서도 자신은 비교적 안전범위라고 할 수 있었다. 두료다나 나리에게는 죽고 못사는 원수인 비마 녀석이 있었고, 카르나와 아르주나는 서로가 최대의 라이벌이었다. 제게 보이는 감정의 최대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나왔다. 어느 녀석들과도 깊게 엮이지 않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것. 그렇다면 일단 가장 위험한 녀석들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를 대비해 호신술을 익혀두고 무술을 연마할 것. 그 이상은 운명의 영역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교우관계를 관리했다. 비마와 두료다나 나리, 카르나와 아르주나는 서로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었고 나는 한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 사이 반에서는 몇 명인가가 맺어졌고, 헬스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성별은 모두 남자-남자. 오오, 두려운 세계의 섭리여. 그들 본인이 행복하다면 다행인 일이지만 진실을 아는 입장에서는 두렵기 그지없다. 그나마 내게는 아직까지 마수가 뻗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날들을 이어가면 된다. 앙숙끼리는 싸우게 두고, 나는 평범하게 녀석들과 친하게 지내면 되는 것이다. 아르주나 녀석과는 몇 년 전부터 영 어색한 데가 있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좋은가. 녀석은 나 같은 놈에게 별다른 관심도 없을 테니 괜히 엮일 일도 없을 것이다. 뭐야, 생각보다 별 거 아니잖아.
ㅡ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르주나가 할 말이 있다며 방과후에 남아달라고 부탁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녀석은 언제나와 같은 사무적인 태도였고, 학생회 업무라도 전하려는 건가 싶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아슈바타만.”
눈앞의 저 녀석은 갑자기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창 밖에서는 석양이 지고 있다. 완벽한 배경 설정이라고 박수라도 쳐 줘야 할까? 지금까지 자료 조사용으로 읽었던 수많은 BL 서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르주나가 석양을 등지고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절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등 뒤로 사물함이 맞닿았다. 더 이상은 도망칠 곳도 없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아니, 어쩌면 연애 상담이 아닐까? 그래. 나는 일개 조연에 불과하고, 녀석은 내게 연애에 대한 조언을 구하러 온 것이다. 모범생이시니 평범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워 양아치나 다름없는 내 앞에 행차하신 거지. 아르주나는 이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들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을 좋아해요.”
나왔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말이 나와버렸다. 나는 질끈 눈을 감고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하필이면 너인 거냐, 아르주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건 분명 화가 났기 때문이다. 무엇에? 아마도 이 빌어먹을 세상에게.
“아르주나.”
“네.”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넌 나를 좋아하는 게 아냐.”
“네?”
아르주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봤다. 여전히 곧은 눈을 가지고 있구나. 절로 떠오르는 생각이 불쾌하기 그지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지. 넌 나를 좋아하는 게 아냐. 못 들은 걸로 칠 테니까 후회할 일 하지 마라.”
아르주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더니 표정을 굳혔다. 치켜뜬 눈이 매섭게 이쪽을 꿰뚫는다. 오랜만에 보는, 아주 화가 났을 때의 표정.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세요. 괜히 내 감정을 걸고 넘어지지 말고.”
“잠깐, 아르주나.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 내가 또 감정을 착각하고 있다고 말할 셈인가요? 당신이 이 정도로 비겁하고 겁쟁이인 줄은 몰랐어요.”
그는 무어라 말을 할 틈도 없이 쏘아붙였다. 설렘으로 보기 좋게 물들었던 뺨은 이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신에겐 실망했습니다. 아슈바타만. 못 들은 걸로 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에게 오랫동안 품어온 마음을 고백했고, 당신은 비겁한 말로 내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똑똑히 기억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잠깐.”
뒤돌아 떠나려는 아르주나의 팔을 붙잡자 반대쪽의 팔이 순식간에 들어올려졌다. 곧 아찔한 통각이 뺨을 감쌌다. 아르주나는 스스로도 놀란 듯 입을 벌리더니 도망치듯 떠났다. 홀로 남은 교실에는 석양만이 자리했다.
젠장. 미처 삼키지 못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쓰러지듯 교실 바닥에 누웠다. 먼지가 굴러다녔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절대 BL이 되는 세계에서 도망치는 것은 성공했지만, 이것을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녀석은 오랫동안 품어온 마음을 전했노라고 말했다. 세계의 개입 같은 건 적어도 녀석에겐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녀석에게 중요했던 건 오로지 나의 대답뿐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