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없는 세계
크리주나
저는 무신론자 무교입니돵 ^__^
신이 없는 세계는 외롭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이건 약간 포켓몬 없는 세계는 외롭고 영령이 없는 세계는 외롭다 같은 감각이라…… 대충 그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길
“오늘 저잣거리에 이상한 이야기가 떠돌더군요.”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가지런한 손이 말판 위의 기물을 움직인다. 탁, 가벼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지고, 이어 고민 어린 한숨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래? 대체 어떤 이야기가 너의 흥미를 끌었을까?”
한편 맞은편의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다. 한쪽 귀에는 공작의 깃을 꽂고 있고, 양쪽 눈에 언뜻 고혹적으로도 보이는 푸른 빛의 화장을 하고 있는 이 미남자의 이름은 크리슈나다. 그는 처음 말을 꺼낸 이, 즉 반대편에 앉아 있는 판다바의 셋째 왕자 아르주나의 사촌이자 드와르카의 왕이었으며, 위대한 신 비슈누의 화신이기도 했다. 아르주나는 곧 제가 꺼낼 이야기가 제 소중한 벗이자 친우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을까 잠시 고민했다. 크리슈나는 그 잠시간의 간극을 읽기라도 한 듯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내 귀여운 사촌, 네가 어떤 말을 하든 나는 즐겁게 들을 거란다. 궁금해서 애가 타게 만들려는 속셈이 아니라면 슬슬 이야기해 주련?”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가 속삭이자 아르주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슈나의 앞에서는 무엇을 숨기든 발가벗겨지듯 드러나곤 했다. 모두 그의 의도대로 움직일 뿐인 것을 알면서도, 아르주나는 언제고 저항하지 않고 따랐다.
“저 멀리 서역에서 온 자의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떠나온 곳에서는 이미 신들이 자취를 감추고, 인간들만이 남아 살아가고 있다더군요.”
아르주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면서도 흘끔 제 벗의 심기를 살폈지만, 크리슈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턱을 괴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하라는 듯한 그의 고갯짓에 아르주나는 말을 이었다.
“신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거나 인간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오래 전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여전히 신의 이름을 찬미하지만, 그 찬미에도 더 이상은 응답하지 않는다고요.”
“그래. 그런 곳도 있겠지.”
크리슈나는 마치 오늘 날씨가 유독 좋다는 정도의 말을 들은 것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그의 언행에서는 한치의 주저함도, 의아함도 비치지 않았다.
“그 이야기의 어떤 점이 그리도 이상해 보였니? 내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자연스러운, 건가요.”
“그렇지.”
크리슈나가 말판의 기물을 움직였다. 아르주나는 가만히 그가 움직인 기물을 바라보더니, 맞서 기물을 움직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곳도……언젠가는 그렇게 될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확언은 할 수 없지만 말이야.”
탁. 크리슈나가 기물을 움직여 아르주나의 말을 잡았다. 그의 가지런한 손이 백색의 기물을 쥐고 말판 바깥으로 옮겼다. 크리슈나는 다시 아르주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런데, 너의 표정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구나. 그 변화가 기껍지 않은 것이니?”
“기껍지 않다고 할까요. 그것은……저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운 것이라.”
“뭐어, 그렇겠지. 인드라의 아들인 네가 아니냐. 신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살고 있는데 그들이 사라진다니, 나라도 당혹스럽겠구나.”
“그도 그렇지만요, 크리슈나.”
아르주나가 잠시 주저하는 듯 보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신들이 사라지고 남은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건, 제게는 더없이 외롭고도 두렵게 느껴집니다. 저 지고한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이가 없고, 인도하는 이가 없고, 징벌하는 이가 없다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리를 낳아준 어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 자신을 지켜보고, 인도하고, 징벌하게 되겠지. 언젠가는 모두 어버이를 떠나보내고 독립하게 되는 것이 섭리 아니겠느냐. 그리 슬퍼할 것 없다.”
하지만 아르주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크리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러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곤 물었다.
“이런,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구나. 무엇이 그리도 안타까운 거니?”
“당신이…….”
“응?”
“그렇다면 당신을 만나는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비슈누의 화신인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곧 비슈누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태어나는 일도, 저와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몹시도 슬퍼져서…….”
아르주나의 말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크리슈나는, 비슈누의 화신에게 감히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바보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아르주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르주나는 그와 같은 반응이 민망했는지 점차 얼굴이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어린애 같은 말을…….”
“아, 아하하, 하하!”
“크리슈나?”
아르주나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크리슈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한참을 소리내어 웃었다. 제 사촌은 유달리 섬세하고 예민한 데가 있었다. 그러한 기질이 저 애로 하여금 어두운 생각을 불러일으킨 줄 알았더니, 다름아닌 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니! 크리슈나는 귀여운 마음 반, 환희어린 마음 반으로 웃어제꼈다. 그에게 이 정도의 감정을 선사하는 것은 오로지 제 소중한 사촌이자 제자, 친우인 아르주나뿐이었다. 과연 저 애는 이 사실을 알고나 있을런지.
숨이 가쁠 정도로 웃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르주나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아, 미안하구나, 아르주나. 으응, 그래, 그래. 내가 너무 차가운 이야기만 했구나.”
여전히 웃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그는 쿡쿡대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원. 그렇게 따지면 인드라의 아들인 너는 어떻고? 그리고 네 형제들은 어떻느냐? 나를 걱정하기 이전에 너희들을 걱정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
“그것은…….”
아르주나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양 어물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크리슈나는 손을 뻗어 아르주나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농담이다. 그래. 언젠가는 이곳의 신들도 저 먼 서역의 신들처럼 자취를 감출지 모르지. 비슈누 님의 말씀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칼키 이전까지 더 이상의 화신도 내려보내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먼 이야기야. 네가 벌써부터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다.”
어느새 크리슈나의 말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아르주나는 몸을 바르게 하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삼라만상은 모두 변하기 마련인 것이니, 네가 아무리 열심히 붙잡으려 해도 손틈 사이로 전부 빠져나갈 따름이다. 영원이란 헛된 것에 마음을 기울일 바에야 지금 당장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게 여겨지는구나. 다르마와 모크샤에 충실한 삶도 좋지만, 아르타를 잊지 말아라, 파르타.”
“예, 크리슈나. 오늘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아, 오늘은 기분이 좋구나. 말판으로 하는 놀이는 이쯤 해두고, 바깥으로 나가지 않겠느냐?”
“예? 하지만 곧 발라라마 님이…….”
“뭐, 괜찮지 않으냐. 형에게는 내가 말을 해두마. 자아, 가자꾸나. 아르주나.”
그렇게 비슈누의 화신은 인드라의 아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시간의 실랑이 끝에 두 사람이 바깥에 나서자 수리야의 광채가 휘황찬란하게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바유의 바람이 뺨을 간질이고, 바루나의 연못이 빛을 반사해 눈부시게 빛났다. 아마도 영원하지 않을, 그러나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신이 없는 세계는, 적어도 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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