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소년

크리주나

0.

신이 죽었다.

이 한 마디가 대륙 전역에 퍼지기까지는 열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막연한데다 모호하기가 짝이 없는 문장이었음에도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 단박에 그 뜻을 알아차렸다. 의심하는 이도, 화를 내는 이도, 공포에 질린 이도,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신의 현신, 위대한 크리슈나. 바로 그의 죽음이었다.

대부분은 이를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하며 믿으려 들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크리슈나의 위광과 그가 일으킨 기적을 알고 있다. 그가 해치운 락샤사가 몇이며, 복속시킨 신들만 해도 몇이던가? 그는 누구보다 위대했고, 누구보다 강인했다. 그런 그를 감히 누가 해칠 수 있겠는가? 그의 죽음이란 세계의 끝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것일 터였다. 사람들에게 크리슈나의 존재란 그만큼이나 당연했다. 그러나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과거의 저주를 떠올렸다. 대륙을 뒤엎은 전쟁이 일어났던 때, 망국의 왕비는 죽어간 아들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감히 신을 저주했다. 그녀는 삼십 육 년 뒤 신이 파멸하리라고 예언했다. 올해가 바로 그로부터 삼십 육 년이 되는 해였다. 그들은 그저 하늘 위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자신들의 짐작이 틀렸기만을 바랐다.

허나 그들의 짐작은 옳았다. 적어도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지배하던 땅이 폐허로 변한 것을 보았고, 눈을 감은 이들이 줄지어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쫓기듯 도망치며 그의 죽음과 일족의 최후에 대해 일러주었다. 한참을 부정하고 부정한 끝에 나는 결국 인정했다. 그는 죽었다. 이것만이 어찌할 바 없는 진실이었다.

그 후로는 어땠던가. 아마 정신없이 말을 몰아 돌아왔던 걸로 기억한다. 왕께 보고를 올리자마자 이 방으로 들어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몸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방까지 돌아온 게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전에서 쏟을대로 쏟아냈기 때문인지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새 몇 명이 방의 문을 두드렸지만 답하지 않았다. 그럴 기운도 없었거니와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이의 입에서 크리슈나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올 것 같다. 소년처럼 밝게 웃는 그의 손에는 낡은 피리가 들려있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쳐다보는 걸 알면 기다렸다는 듯 피리를 불기 시작할 테지. 그는 언제고 그랬다. 너무나도 쉽게 그려낼 수 있었다. 한 번 물꼬를 트자 그와 함께한 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추억들이 이제는 내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잡아내려 애썼다. 상처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거스르듯 기억을 거슬러간다. 일 년, 십 년, 그리고 수십 년. 그 끝에서 무엇에 다다를지 모르는 채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1.

기억의 가장 머나먼 곳에는 언제나 히마바트가 있다. 신들이 거하는 까마득한 설산이 아닌,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인간들의 거처. 푸르른 나무들이 빼곡하게 우거진 그곳에서 나는 태어났다.

일찍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왕과 왕비로서 왕도에 거하시며 나라를 다스리셨다고 한다. 왕족으로서의 덕목을 지닌 두 분이 다르마에 맞는 통치를 한 덕택에 나라는 번영했고, 사람들은 풍요롭게 살아갔다. 태평성대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좋은 시절이었다. 그 시절을 살아가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언제까지고 오늘과 같은 내일이 이어지기를 바랐으리라. 그러나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니, 영원한 것은 없다. 어느 날 한 현자가 아버지께 저주를 내렸고 아버지께서는 결국 왕위를 제 유일한 동생에게 물려준 뒤 어머니와 함께 숲으로 향하셨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만트라를 외워 신들을 불러내 우리들 다섯 형제를 낳으셨다. 첫째 형은 다르마와 사신死神의 피를, 둘째 형은 풍신風神의 피를, 나는 뇌신雷神의 피를, 쌍둥이 동생들은 의신醫神의 피를 이었다. 대를 이을 자식을, 그것도 신들의 피를 이은 자식을 얻은 두 분은 기쁨에 겨워 주신主神들께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는 아쉬람에 은거하는 현자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반이나마 신의 피를 이었기 때문인지 나와 형제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걷고 뛸 수 있었고, 일 년이 지났을 즈음에는 이미 대여섯 살로 보일 정도였다. 두 분은 이 기이한 모습을 보시면서도 우리들을 꺼리거나 기피하기는 커녕 되레 사랑을 퍼부어주셨다. 아버지께서는 사냥을, 어머니께서는 채집을 가르쳐주셨다. 아쉬람의 현자들에게서는 베다의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내 생에 얼마 없는 오롯이 즐겁고도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신께 기도를 올리고, 사냥에 나가고, 베다를 외우며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중요하던 시절. 그다지 풍요롭지는 않았으나 부족할 것도 없었다. 영산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으므로. 나와 형제들에게 있어서 히마바트는 우리들의 하나뿐인 집이었고, 세상 전부였다. 그러니 그 이상 바랄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 인생에 찾아온 것은 내가 일곱 살 정도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때쯤 나와 형제들은 벌써 열 두어 살 정도로 보였다. 이전에 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아버지를 도와 사냥에 나가거나 장작을 가져오는 오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처음으로 그를 만났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장작이 부족하다는 어머니의 말에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주워오겠노라고 말했다. 체격이 좋은 둘째 형이라면 충분히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팰 수도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줍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 일에는 익숙해진 차였기에 동생들의 도움도 마다하고 홀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나뭇가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도 울창한 숲이라면 몇 걸음만 걸어도 가지가 떨어져있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영 수확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는 별 다른 수가 없었다. 어느새 뒤돌아보아도 집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즈음이었다.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한 번도 듣지 못한, 낭랑한 소년의 목소리였다.

“안녕, 아르주나.”

고개를 돌리자 낯선 소년이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복장이었으나 긴 머리의 한쪽에 공작의 깃털을 꼽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하지만 깃털이 아니더라도 결코 인상이 흐릿하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가 몹시도 보기 좋은 용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름답다고 해야 좋을지, 귀엽다고 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이든 그에게 한눈에 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일듯 싶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넌 누구야? 나를 알아?”

“내 이름은 크리슈나야. 나는 너를 아주 잘 알고 있어, 아르주나.”

그는 다시금 내 이름을 불렀다. 이미 몇 번이나 불러보았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는 이제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기울이고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대체 정체가 뭘까? 우리 가족이 사는 산기슭에도, 아쉬람에도 어린아이는 거의 없었다. 수도와 마을을 떠나온 이들이란 대부분 모크샤를 추구하며 속세와 연을 끊은 노인들이었다. 청년들도 가끔 가다 보이는 수준이었으니 어린아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기실 우리들 다섯 형제를 빼놓고 생각하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내가 아는 한 눈앞의 소년은 결코 이 근처에 사는 아이가 아니었다. 혹 길을 잃기라도 한 것일까? 아주 가끔이지만 주변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양이나 소를 치다가 산으로 흘러드는 경우가 있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렇게 깊은 곳까지 다다르는 일은 흔치 않은데.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나는 길을 잃은 게 아니야. 내 발로 찾아온 거지. 원래는 아직 만날 때가 아니지만, 너를 너무 만나고 싶은 나머지 달려와버렸어.”

크리슈나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년이 말했다.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에 나는 놀라 두 눈을 끔뻑이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는 잠시간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소리내어 웃었다.

“반응이 확실하네. 재밌어서 좋지만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오늘은 우선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들이 걱정할 거야.”

나는 그제야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떠올렸다. 나뭇가지를 찾아 걸어오는 사이에, 그리고 그와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서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산의 밤은 녹록치 않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마음이 급해졌다. 소년은 내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더니 몇 걸음 걸어가서 내게 손짓했다. 홀린 듯 그를 따라가보니 그가 가리킨 곳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한 움큼이 보였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하룻밤 불쏘시개로 쓰기엔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허겁지겁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그동안 몇 번인가 소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기도 했으나 그는 줄곧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나뭇가지를 다 주워들고 고맙다고 인사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도움이 되었을까?”

“응. 덕분에 나뭇가지를 찾았어. 내가 이걸 찾는 줄은 어떻게 안 거야?”

“계속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이던걸. 품에는 몇 개나 나뭇가지를 들고있고. 어련히 그걸 찾고 있겠거니 했지. 그보다, 아르주나. 내가 도움이 됐다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않을래?”

“부탁이 뭔데?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게.”

그즈음 나는 이미 이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숲에서의 생활은 단조롭기 마련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 매일같이 만나는 같은 사람들. 그런 삶을 살아가던 내게 있어 갑작스레 나타난 그의 존재란 예상치도 못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나는 눈앞의 소년이 궁금해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는 누군가 듣기라도 할 세라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내일도 이곳에서 만나자.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아르주나.”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 깊은 곳에서 환희가 우러났다. 태어나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일도 이곳에 찾아올게. 음, 그러니까…….”

“크리슈나라고 부르면 돼.”

“응, 크리슈나. 시간은 언제가 좋을까?”

“네가 편할 때로 하자. 나는 언제든 네가 필요로 할 때 나와있을 거야. 대신, 너도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한 가지만 지켜줘. 나와 만날 때는 아무도 데려오면 안 돼. 나에 대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줘. 너와 내가 만나고, 친구가 된 건 우리들만의 비밀로 하자.”

“어째서?”

“사실 나도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여기 찾아온 거거든.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우리만의 비밀을 만드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가족들에게 비밀을 만들고,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건 꺼려졌지만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그와 나만의 비밀을 가진다는 건 제법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다시금 크리슈나를 훑어보았다. 시종일관 천진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는 어느 모로 보아도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한편으론 락샤사 정도로 악독한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신의 아들인 나를 감히 누가 건드리겠냐는 마음도 있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고민 끝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그러자 그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약속한 거야. 그럼 조심히 돌아가. 나도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등을 떠밀었다. 그를 등지고 걸어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그는 우리가 이야기했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다시 뒤를 돌아보니 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였다.

마을에 돌아갈 때쯤에는 이미 하늘 가득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집에 가까이 다가가니 가족들과 몇 명의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나뭇가지를 한아름 들고 돌아오는 나를 보고는 안색을 밝히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엄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주나! 나를 부르는 둘째 형의 우렁찬 목소리를 시작으로 한참이나 꾸중이 이어졌다.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처럼 어린애가 숲을 나다니면 어떡해! 짐승에게 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내 생애를 통틀어도 그만큼 혼이 났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나는 몇 번이나 제 잘못을 말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크리슈나에 대한 것만은 말하지 않았다. 마땅한 나뭇가지가 보이지 않아 멀리까지 가야만 했다는 나의 말을 가족들은 믿어주었다. 거짓말은 아니었으나 왠지 가족들을 속이는 것만 같아 가슴이 욱신거렸다. 사실대로 말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크리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고, 다시 한 번 그를 만나고 싶었다.

결국 나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잠들었다. 그날 밤에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무섭게 생긴 락샤사들이 나를 에워싸고 위협하는 꿈이었다. 그것들이 다가오는 동안 나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채 막연히 생각했다. 거짓말을 해서 벌을 받는구나! 신들이 벌을 내리신 거야!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나쁘지 않은 꿈이라고 기억한다. 그 꿈의 끝에는 그것들에게 둘러싸여 헤매던 내 손을 잡아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름 아닌 크리슈나였다. 그는 그 전날 본 것과 같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락샤사들의 무리로부터 꺼내주었다. 약속을 지켜주었구나. 고마워. 깨어나기 직전,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이미 깨어있던 첫째 형이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악몽이라도 꾼 게냐?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악몽이라기엔 지나치게 산뜻한 꿈이었다.

그로부터 크리슈나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는 내가 무엇을 했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온종일 그에 대한 것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가족들의 일을 돕고, 현자들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크리슈나만을 생각했다. 언제쯤 그와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정말로 그곳에 나와 있을까? 불안과 기대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기껍게만 느껴졌다. 해가 중천에 뜨고 여분의 시간이 주어지자마자 나는 숲으로 달려 나갔다. 함께 놀자는 형제들의 권유에도 온갖 핑계를 대며 마다하고 온 차였다. 숨이 차도록 달려가는 내내 가슴이 아프도록 뛰었다. 두근대는 박동에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더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흠잡을 데 없이 능숙한 연주였다.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슴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유난히 커다란 나무를 끼고 돌아 나오는 자그만 공터, 그 가운데에 있는 바위 위. 그곳에 크리슈나가 앉아있었다. 그는 내가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피리를 내려놓고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제와 같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어서 와, 아르주나. 기다리고 있었어.”

그는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뒤 내게 다가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데 많이 지쳐 보이네. 설마 마을에서 여기까지 뛰어오기라도 한 거야?”

나는 숨을 고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말로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맙소사, 아르주나! 네가 거북이만큼 느리게 걸어왔다고 해도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그는 눈물이 나도록 웃더니 나를 잡아끌어 조금 전까지 제가 앉아있던 바위 위에 앉혔다. 많이 힘들테니 좀 쉬어. 그리 말하는 그의 낯에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알고 지낸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은 내가 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겠느냐만, 그럼에도 지금 그가 유달리 즐거워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소간 어리둥절하여 그에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내가 웃긴 말을 하기라도 했어?”

“아니, 아니야. 너를 웃음거리로 만들려던 건 아냐. 그저 너무 기뻤을 뿐이야. 네가 나와의 약속을 지켜주었다는 게 기뻤고, 내가 너를 만나고 싶어 했던 만큼 너도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게 기뻤어.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너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그건 아닐 거야. 분명 지금 나도 너만큼이나 기쁘고 즐거워하고 있는걸.”

“그래? 그렇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네.”

그는 또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이번에는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잠시 후, 그는 내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는 두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내가 휘청이며 몸을 일으키자 그는 나와 눈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그럼, 아르주나. 이제부터 같이 놀지 않을래?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을 테지만, 너와 함께라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든 부족하게 느껴질 거야. 너와 하고 싶은 일이 많아."

크리슈나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 같은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같이 숲을 찾았다. 물론 크리슈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가족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크리슈나에 대한 것이 비밀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갖가지 핑계를 떠올려야만 했다. 나뭇가지를 주우러 가는 일은 당연히 나의 몫이었고, 형제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사이 길을 잃은 척 그가 있는 곳으로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온갖 핑계를 대고 숲으로 향하고 나면 이른 아침일 때도 있었고, 정오일 때도 있었고, 늦은 오후일 때도 있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으니, 언제쯤 만나자고 약속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요원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늘 그곳에 크리슈나가 있기만을 바랐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 바람은 항상 이루어졌다. 내가 크리슈나를 찾을 때면 크리슈나는 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때는 바위 위에 앉아 피리를 불면서, 어느 때는 내 뒤에서 나를 놀래키면서, 어느 때는 나무 위에 올라타 새들과 노닐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안녕, 아르주나. 보고 싶었어. 그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도 늘 그가 보고 싶었으니까. 그러니 그저 마주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크리슈나. 그러면 그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크리슈나를 완벽한 이라고 회상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크리슈나는 그렇지 않다. 불손을 감수하고 감히 말하자면, 그는 어느 모로 보아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몹시도 변덕스러웠으며 제멋대로였다. 걸핏하면 크고 작은 장난을 치기 일쑤였으며, 꾀를 내어 사람들을 속이기도 했다. 그가 아무렇잖게 내뱉는 농담에 말을 잇지 못했던 것만 몇 번인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아주 재치 있었고 현명했다. 다르마와 베다에 정통했고, 수많은 것들을 사랑했으며, 그만큼이나 많은 것에게 사랑받았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은 아닐지언정 나의 완벽한 친구였다. 나는 그의 흠결을 비롯해 모든 부분을 사랑했고, 그 또한 내게 그러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크리슈나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 무엇과도 비할 데 없이 즐거웠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도, 현자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시간도 즐거웠지만 그와 함께하는 시간에는 견줄 수 없었다. 무언가 거창한 일을 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함께 들판을 뛰어다니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놀이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크리슈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모든 것들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갖는 듯했다.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이의 삶에 그렇게나 순식간에 녹아들 수 있는지. 아마 크리슈나만이 그럴 수 있으리라. 다른 누구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언젠가 들판에 누운 채 그가 연주하는 피리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이런 친구를 바라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영산 히마바트는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단 하나, 친구를 제외하고. 나는 스스로가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유일하게 주어지지 않았던 단 하나는 바깥에서 찾아왔다.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은 채, 피리 소리를 흘리면서.

이제는 정말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가족들과 크리슈나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어머니께서는 버릇처럼 내게 장차 영웅이 되리라고 격려해 주셨지만, 나로서는 별로 영웅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다. 명예를 얻고 재물을 얻어 가족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야 기쁜 일이겠지만, 영웅들이란 으레 고난과 역경, 상실을 겪기 마련이지 않던가. 나는 무엇도 잃고 싶지 않았다. 명예도 재물도 가족들이나 크리슈나만큼이나 소중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뿐이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물었다. 크리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웃는 그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조금 슬퍼보였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었으니까. 내일, 그 다음 날, 혹은 먼 훗날에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이어지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안이한 것이었는지.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무렵, 크리슈나는 사라졌다. 아니, 그보다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 옳겠다. 숲 속 어디서도 크리슈나를 찾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한 그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를 대수롭잖게 여겼다. 지난 삼 년간 그가 보이지 않았던 날은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개 다음 날이면 아무렇잖게 나타나서는 “너희 형들이 너를 따라왔지 뭐야. 잘못하면 들키겠다 싶어 몸을 숨겼어”라고 푸념하곤 했다. 그러니 분명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크리슈나의 입에서 한 번만 더 그런 말이 나오면 다시는 내 뒤를 밟지 말라고 형제들에게 신신당부를 할 생각이었다. 헌데 다음날에도 크리슈나는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제들을 추궁했지만 그들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네가 요즘 혼자 다니는 일이 잦으니까 걱정되는 마음에 몇 번 뒤를 밟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너는 아무도 없는 숲 속만 뒤적이고 나올 뿐이던걸. 최근에는 따라간 적도 없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며칠간은 핑계도 대지 않고 하루종일 숲을 뒤지고 다녔다. 크리슈나와 매일같이 만났던 공터는 물론이고 이따금 들렀던 산 중턱의 동굴, 뛰어놀던 들판까지. 그와 내가 한 번이라도 들렀던 곳들 중에 찾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크리슈나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흔적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어느 곳에 사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크리슈나는 스스로에 대해 자주 말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나름대로의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독이 되어 돌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이레째가 되는 날에는 비가 쏟아져내렸다.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숲으로 달려나갔다. 빗물이 그의 발자국마저 쓸어가 버릴까봐 두려웠다. 발을 붙잡는 진흙을 짓밟으면서 어떻게든 달려나갔다. 오늘은 그 애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숲을 헤매고 있는지도 몰라. 히마바트는 넓으니까, 길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 애를 찾아내면 다시 한번 나를 보고 웃어줄 거야. 그 애를 찾아내면……. 한참을 달리고 또 달린 끝에 나는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버지와 형들의 모습이 보였던 것 같다. 이후의 기억은 확실치 않다. 열에 들떠 흐릿한 정신으로는 의식을 부여잡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울고 싶은 만큼 울어도 다들 아파서 그렇다고 생각할 테니까. 나는 며칠을 앓는 동안 지칠 때까지 울다 잠들었다. 그리고 겨우 생각했다. 그는 나를 떠났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간신히 사실을 받아들였건만 치고 올라오는 생각들은 정리될 줄을 몰랐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헤집고 지나갔다. 크리슈나는 왜 나를 떠난 걸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어떤 이유에서든, 잠깐이라도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제 없었다.

가족들 중 누구도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폭우 속으로 뛰어든 것인지, 무엇이 그토록 괴롭길래 온종일 울부짖다 잠드는지. 그들은 때로는 침울한 표정으로, 때로는 몹시 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필시 그 모든 것이 걱정과 애정의 소산이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하는 한이 있어도 크리슈나에 대한 것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으니까. 그는 떠났어도 약속은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끝까지 약속을 지키면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며칠을 내리 앓고 일어난 날, 가족들과 함께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기도였다. 기도를 마치기 전, 말미에 몰래 한 가지를 더 붙였다. 크리슈나가 무사하게 해주세요. 언제든 좋으니 그와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속으로 몇 번을 되뇌이고 천천히 눈을 뜨자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이 내 기도를 하늘 높은 곳에 있는 신들에게 전해주기를 바랐다.

그 후 수 년이 지나도록 크리슈나는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종종 크리슈나와 만나던 공터를 찾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횟수도 줄어들었다. 점차로 많은 것이 흐릿해졌다. 그의 목소리도, 얼굴도, 그가 연주하던 피리 소리도.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졌다. 그의 존재 자체가 내 상상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는 내 첫 번째 상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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