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소년
9디페 비마주나 신간
1.
아르주나가 죽었다.
어디까지나 서번트의 소멸을 ‘죽음’이라 칭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그는 분명히 죽었다. 제 형의 품에 안긴 채, 피를 토해내면서도 웃는 낯으로, 만족스러운 양 눈을 감으며 사라졌다.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대영웅 아르주나, 모든 영광과 행운을 짊어진 승리자의 죽음이 그러하리라고 과연 누가 예상할 수나 있었을까. 생전의 그를 아는 자라면 모두가 입을 모아 거짓이라 말하리라.
모든 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허수관측기 페이퍼 문이 아프리카 구역에서 미소특이점을 한 군데 관측해냈다. 당장에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장시간 방치할 경우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보고에 마스터는 신속히 특이점의 수복을 위한 부대를 편성했다. 난적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을 대비해 부대원은 심사숙고 끝에 선정되었다. 그 중에는 아르주나와 비마도 포함되었다. 마스터는 그 둘을 신뢰했고, 두 사람의 실력 또한 의심할 바 없는 것이었다. 마스터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수락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풀 수 있겠다며 웃는 그들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절로 흐뭇해질 만한 것이었다.
특이점으로의 레이시프트는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특이점의 상황 또한 생각보다 안정적이어서, 마스터와 서번트들은 간만에 휴양을 즐기듯 긴장을 내려놓고 특이점을 수복해나갔다. 몇 번인가 이종족과의 전투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르주나가 단신으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궁 간디바는 주인의 혈기에 영향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여느 때보다도 빛을 내는 것만 같았다. 몇 개의 화살이 쏘아올려졌고, 그와 동시에 적들이 들판을 나뒹굴었다. 자신의 사냥감을 빼앗긴 서번트들이 원망 아닌 원망을 쏟아내는 모습에도 아르주나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비마는 그 모습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것이 있다면 그림자에 잠식된 서번트들의 존재였다. 이번 특이점의 원흉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인지 서번트들을 괴뢰로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고 서번트들과의 전투는 까다로웠지만, 이성을 잃은 존재와의 싸움은 비교적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방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스터를 보호하며 지지부진한 전투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비마는 피할 수 없는 공격이 저를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야말로 이성을 잃은 존재라야 던질 수 있을 법한 마지막 한 수였다. 기어코 도망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마스터가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순간 아찔한 감각이 엄습했다. 그것은 공포보다도 수치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토록 허무한 끝이라니, 크샤트리아로서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마스터에게 있어서, 동생에게 있어서……. 비마는 적어도 마지막까지 싸우고 싶었다. 그리 하고자 망설임 없이 공격을 향해 돌아설 때였다.
“아르주나?”
희미한 인영이 보였다. 하얀 천이 나부꼈다. 그리고, 시뻘건 혈흔이 눈앞에 흩뿌려졌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인체가 꿰뚫렸다. 너무나도 잘 아는 소리,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소리였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뭉개지는, 피가 솟구쳐오르는 소리. 멀리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말하고 있는 것인지 들리지 않는다. 뇌가 눈앞의 것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거대한 창을 붙잡은 손은 인영 너머의 것을 꿰뚫는다. 그림자가 흩어지며 먼지로 화하는 것과 동시에 쓰러지는 인영을 붙잡았다. 가쁜 숨이 토해진다. 고통 속에 일그러진 그 얼굴은, 아아, 너무도 잘 아는 이의 것이다. 사랑해 마지 않는 이의 것이다.
“아아, 형님.”
아르주나가 속삭였다. 입가에서는 피가 울컥거리며 토해지는 채다. 꿰뚫린 가슴이 허전하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아무리 서번트라도, 이대로는 영기를 유지할 수 없다.
“그렇군요. 저는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거로군요.”
“말하지 말거라. 피가 솟구쳐 올라온다. 마스터가 달려오고 있으니 조금만 버티면…….”
“아니오, 형님. 제 상태는 제가 가장 잘 압니다.”
아르주나가 죽음을 그 입에 담자 비마의 낯은 삽시간에 창백하게 변해간다. 아르주나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비마의 뺨을 쓰다듬었다. 몹시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안타깝다는 듯이. 지금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자신일텐데도 그런 표정을 짓는 동생의 저의를, 비마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동생의 몸을 끌어안은 비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죄송합니다. 멋대로 행동해버려서.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을 지킬 수 있어서……당신이 살아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을 흐리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몸은 빛으로 화하며 사라져갔다. 비마가 흩어지는 아르주나의 몸을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안 돼, 아르주나. 정신 차려라. 눈을 떠, 아르주나. 이윽고 아르주나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비마는 그가 있었던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하지 못한 말들을 곱씹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닿았던 것도 같다. 정처없이 걸음을 옮겼던 것도 같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노움 칼데아로 돌아와 있었다. 그 사이의 기억은 희미하다. 마스터는 하나 둘 해산하는 서번트들 사이에서 홀로 남은 비마를 보고 걱정스러운 낯으로 다가왔다. 그 표정에는 지울 수 없는 참담함이 어려 있어서 어쩐지 조금쯤 정신이 일깨워지는 것도 같았다.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제정신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이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넘기며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지러운 정신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끔찍이도 고통스러웠다. 비마는 생각한다. 아르주나도, 자신도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크샤트리아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그것은 생전에도 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분명 명예롭게 싸우다 죽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상실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형제이기 때문에. 혹은, 그 죽음이 자신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도 아니라면……. 비마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더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동생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고통이 아닌가. 생전에 이어 두 번이나 동생의 죽음을 보아야 하는 형의 심정을 과연 누가 이해하겠는가……. 그는 목놓아 울고 싶은 심경을 애써 억누르며 커다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기를 한참, 서서히 의식이 아득해졌고, 저 멀리 잠들어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i.
비마는 처음으로 아르주나를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말이 좋아 처음으로 그를 만났던 날이지, 사실상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라 하여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신비한 만트라를 외워 다르마와의 사이에서 형 유디스티라를, 바유와의 사이에서 자신을 얻어낸 어머니 쿤티께서는 몇 년 간의 고행 끝에 인드라와의 사이에서 새로운 동생을 얻어내셨다고 했다. 그 애가 태어나는 순간 하늘에서는 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애의 이름을 알리고, 앞으로의 삶을 축복하는 목소리였다. 아르주나. 새로운 동생의 이름은 아르주나였다. 하늘의 목소리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어머니가 계신 집 안에서 목청 좋게 우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장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려는 비마를 유디스티라가 겨우 제지했다.
“진정하거라, 비마. 어머니께서는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해. 아르주나도 마찬가지야. 몇 년을 기다렸는데, 하루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지?”
부드럽지만 엄하게 타이르는 유디스티라의 말에 비마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울음소리가 그친 집 안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울음소리가 우렁찬 걸 보니 건강한 아이가 될 거야. 나만큼은 아니어도 좋은 이름을 가졌어. 어떻게 생겼을까. 어머니를 닮았을까. 두 형제는 밤이 깊도록 동생의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형제는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버지이신 판두가 인자한 미소로 아이들을 맞이하며 문을 열자 어머니 쿤티와 그 품에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이 보였다. 회색 포대기에 감싸인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었다. 유디스티라와 비마가 아이를 감싸고 둘러앉아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쿤티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비마였다.
“바보 같이 생겼어.”
“비마!”
유디스티라가 경악하며 비마의 입을 막았다. 허나 그 노력도 무색하게, 판두와 쿤티는 비마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웃었다. 판두는 커다란 손으로 비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동생이 마음에 안 드느냐, 비마?”
아버지의 물음에 비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동생이 생겨서 기뻐요. 누구보다 그 애를 아껴줄 거예요. 단호한 비마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비마. 동생을 아끼고 사랑해주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너의 동생이란다. 속삭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아르주나가 몸을 뒤척였다. 만져봐도 된단다, 비마. 어머니의 허락 속에 비마는 조심히 아르주나의 볼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에 와닿았다. 불그레한 볼이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아르주나는 얌전히 형의 손길을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자그마한 손을 꼬물거리며 비마의 손가락을 잡고는 꺄르르 웃었다. 비마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형을 알아봤나봐.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그는 그 순간, 제 숨이 꺼지는 날까지 동생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신반인의 몸인 아르주나는 제 형들이 그랬듯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한 달이 지났을 때는 걸음마를 시작했고, 두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형들의 뒤를 쫓아 뛰어다녔다. 어느덧 두 살이 되었을 때는 대여섯 살로 보일 정도였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 아르주나는 아주 건강한 아이였고, 아주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칼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으며 아몬드 모양의 눈은 몹시도 또렷했다. 사슴처럼 길게 뻗은 팔다리는 활과 화살을 움켜쥐고 들판을 내달리기에 걸맞는 체형이었다. 게다가 심성도 착하고 유순했으니, 참으로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비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비마는 제 바로 아랫동생을 몹시 귀여워하며 자주 데리고 다녔다. 가벼운 산책이나 놀이에는 물론이고 아르주나의 나이가 어느 정도 찬 이후로는 사냥에도 데리고 다녔다. 아르주나가 처음으로 토끼를 잡아온 날, 두 형제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나 비마는 아직 어린 동생을 위험한 일에 내보냈다는 이유로 잔뜩 혼이 났더랬다. 풀이 죽어있던 것도 잠시, 집 밖에서 벌을 서고 있는 자신에게 조심히 다가와 구운 생선을 건네주는 동생의 모습에 그는 혼이 났던 것도 까맣게 잊고는 환하게 웃었다. 이후로도 비마는 부모님 몰래 아르주나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유디스티라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은근히 타이르기만 할 뿐 대개 묵인했다. 너무 위험한 곳에는 데려가면 안 돼. 그렇게 덧붙일 뿐이었다.
아르주나 또한 비마를 잘 따랐다. 나이든 현자들이 대부분인 숲의 수행지에서 그들 형제는 얼마 없는 놀이 친구이기도 했다. 특히 바유의 넘치는 힘을 타고난 비마와 인드라의 전사로서의 기질을 타고난 아르주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최고의 놀이 상대였다. 비교적 유약한 유디스티라는 제 동생들이 즐거이 노는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고 심지어는 경악하기도 했다. 언젠가 비마가 아르주나의 몸을 빙글빙글 돌리다 저 멀리 던져버리는 모습을 보고 그는 혼비백산해 비마를 호되게 혼을 냈다. 그러나 곧 꺄르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르주나의 모습을 보고는 말을 잃은 듯 동생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아야만 했다. 비마는 얼얼한 등판을 붙잡으며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아르주나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일 따름이었다.
이런 연유로, 사하데바와 나쿨라가 태어난 뒤에도 두 사람은 함께 다니는 일이 잦았다. 형하고는 같이 못 놀겠어. 푸념하는 쌍둥이의 말에 비마는 입을 떡 벌렸다. 허둥지둥 달래는 비마의 모습에도 두 사람은 뾰로통한 얼굴을 바꾸지 않고 아르주나 형과 함께 놀라며 몸을 떠밀었다. 비마가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 일을 털어놓자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고 있던 아르주나는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형이 너무 힘이 세서 그래. 장난스런 아르주나의 말에 비마는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너 아니면 나를 받아줄 수가 없나보다. 아르주나는 다시금 웃음으로 답했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숲에서의 하루하루는 평화로웠다. 아침에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고, 강가에서 몸을 씻은 뒤 현자들의 가르침을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식사는 숲에서 채집한 열매들이나 사냥한 동물들의 고기로 이루어졌다. 배부르게 먹을 때도 있었지만 여덟 가족이 먹기에는 부족한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불평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채집과 사냥을 위해, 혹은 놀이를 위해 숲을 내달리다 보면 금세 해가 떨어졌다. 어둠이 내리면 신들께 기도를 올리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또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풍요로운 삶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행복한 나날이었다. 숲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곁에 있었다. 이 이상은 무엇도 필요하지 않은 듯 싶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아르주나가 열네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죽어가던 브라만이 남긴 저주는 십수 년이 지나 과거 왕이었던 자의 목숨을 끊어놓았다. 육욕을 이겨내지 못한 판두는 죽음에 이르렀고, 저로 인해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 마드리는 스스로 불에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두 명의 가족을 잃은 형제들과 쿤티는 비탄을 금치 못했다.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그들은 한참을 흐느꼈다. 장남인 유디스티라만이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물을 닦은 뒤 불길로 꽃을 던졌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들을 향한 고별이었으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고별이기도 했다.
불길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내리자 적막이 감도는 집에서 쿤티는 말했다.
“하스티나푸라로 가야겠다. 그곳에는 아버지 판두의 동생이신 드리타라스트라 왕이 계시니, 우리를 받아주실게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눈물로 얼룩져 있어서 형제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쿤티는 자식들의 낯을 천천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하스티나푸라로 떠날 테니 준비를 해 두거라. 쿤티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유디스티라가 대답했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결연한 목소리였다.
그날 밤은 누구 하나 쉬이 잠들지 못했다. 언제나와 같은 풀벌레 소리마저 애처롭게 느껴졌다. 평소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잠들던 비마는 한참을 뒤척이고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비마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의 일이었다. 가족들은 다들 부은 눈으로 잠을 청하고 있었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한 사람만이 없었다. 아르주나. 비마가 속삭였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옆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아 사라진 지 시간이 꽤나 지난 듯 싶었다. 평소였다면 볼일이라도 보러 나갔나보다 생각하고 다시금 잠에 들었겠지만, 그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한순간에 가족을 둘이나 잃은 비마의 마음 속에는 처음 느껴보는 불안이 일렁거렸다. 볼일을 보러 갔다면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걸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비마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옆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디스티라와 어머니를 깨우는 것이 좋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것은 잠시 미루어두기로 했다. 비마는 나머지 가족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문을 나섰다.
“아르주나?”
어둠 속에서도 아르주나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르주나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의 나무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훌쩍이는 소리는 물이 흘러가는 소리에 묻혀 눈물을 닦는 모양새로 겨우 그가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비마가 놀라 성큼성큼 다가오자 아르주나는 그제야 형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숨을 삼켰다.
“비, 비마 형.”
“아르주나. 왜 여기서 혼자 울고 있어.”
비마의 말에도 아르주나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만을 꾹 깨물었다. 쉽게 말하지 않을 눈치였지만 비마 또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눈앞의 부은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커다란 두 손으로 아르주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밤의 추위에 차갑게 식은 몸이 살갗에 와닿았다. 아르주나는 흠칫 몸을 떠는가 싶더니 곧 작은 손으로 비마의 몸을 붙잡고는 다시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가슴팍에 기댄 채 흘리는 울음소리가 볼썽사납게 뭉개졌다. 비마는 가만히 아르주나의 등을 쓸어주며 한층 더 억세게 동생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야 아르주나는 말을 꺼냈다.
“다들 겨우 잠에 들었는데……겨우 받아들였는데……나 때문에, 깨우고 싶지 않아서.”
“누가 너를 탓하겠어. 네가 혼자 울고 있는 모습에 더 괴로워 하실 거다. 진정 되었으면 돌아가자. 아르주나.”
아르주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쉬이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망설이는 듯한 모습에 비마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르주나는 잠시 비마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돌아가자. 비마는 아르주나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음을 알았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슬픔을 안고 있었다. 그것을 캐묻는 것은 아무리 형제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아르주나가 더 이상 춥고 외롭지 않도록 그 몸을 강하게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새 깨어난 유디스티라가 비마에게 물었다. 아르주나는 괜찮아? 비마가 끄덕이자 유디스티라는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됐어. 비마의 옆에 누운 아르주나는 많이 지쳤는지 벌써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잠결에 온기를 찾아 형의 몸을 끌어안으며 파고드는 그 애의 작은 머리를 보면서, 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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