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라

크리주나 ― by 사야(@eior_)

- 사야(@eior_)님과의 연교로 받은 작업물입니다. 사야 님의 허락을 받고 공개합니다.

- 그리스 신화 중 에로스와 프시케 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하스티나푸라 왕궁에 찾아온 현자의 예언은 달갑지만은 않았다. 판다바와 카우라바 중 가장 뛰어난 영웅을 드와르카의 크리슈나의 반려로 바쳐라. 그러지 않는다면 이곳, 하스티나푸라에 재액이 내려올 것이니.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비슈누의 화신이라는 크리슈나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아무도 그의 제대로 된 용모를 모른다. 비슈누의 화신에게 바쳐진다는 것은 물론 영광스러운 일이나, 그 상대가 짐승인지 인간인지 모르는 상황에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판다바의 자식들은 모두 사내였기에, 다른 사내의 반려로 바쳐진다는 사실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 와중에 카우라바의 맏이인 두료다나의 주장은 가장 뛰어난 영웅인 아르주나를 바치라는 것이다. 판다바를 향한 아주 명백한 증오가 느껴지는 행동이다. 그렇지만 이미 여론은 기울었다. 아르주나는 형제들 사이에서는 물론이오,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여겨지기에 응당 크리슈나의 제물이 될 자격이 있다는 소리였다. 판다바의 어머니 쿤티와 5형제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가족회의를 감행했다.

비마가 탁상을 내리쳤지만 모두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짐승 같은 성격을 잘 알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다소 다혈질 같지만, 이 상황에 그의 행동이 도리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 동감하는 상황에, 제 스스로 절제하거나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뿐.

그래서 비마를 만류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공통된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에, 머리로는 다른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더라도 심적으로는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가족애는 어쩔 수 없는 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입니다.”

사하데바와 나쿨라는 유디스티라의 눈치만 봤다. 그가 비마를 말려줄 것이라 믿으면서도, 혹여 두료다나의 제안을 수긍할까 봐 싶은 일말의 염려 때문이다. 유디스티라는 가족을 아끼지만, 아둔하다 싶을 정도로 도덕적이었다. 때문에 아르주나를 크게 다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달갑지는 않았다.

“사내의 신분으로 다른 사내의 반려로 바쳐진다는 사실이 가당키나 한가요?”

“너무 나무라지는 말거라. 하스티나푸라의 재액을 막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영광으로 알아야지.”

비마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듯하다. 물론 왕궁의 재액을 막기 위해서라면 자신 역시 뭐든 나설 수 있다. 그렇지만 왜 하필 아르주나여야 하는가? 아무리 아르주나의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그가 희생을 강요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설령 아르주나가 자신의 형제임에 나온 이기적인 마음일지언정, 비마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나라싱하처럼 반인반수라는 말도, 바마나 같은 난쟁이라는 소문도 돕니다. 그런 이에게 어찌 아르주나를 보내겠습니까.”

“용모가 어찌 중요하겠습니까.”

내내 잠자코 있던 아르주나가 찬물 끼얹듯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유디스티라 형님의 말씀처럼 저는 영광으로 여깁니다. 비마 형님께서 걱정하시는 마음도 충분히 헤아리지만, 그보다는 판다바와 하스티나푸라를 생각해 주시지요.”

유디스티라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아르주나가 너무 확고하여, 그 뜻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팔짱 낀 손만 툭툭 두드리다가, 이내 등 돌려 방을 나섰다.

“네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형님.”

아르주나의 뜻은 강경했다. 아무도 쉽사리 숨결마저 꺼내지 못했다.

비마는 답답한 마음만 들었다. 왜 아무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인가. 유디스티라에게는 애초에 기대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사하데바, 나쿨라만큼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알았다.

그들은 아르주나의 뜻이 제일 중요하다는 철칙을 알면서도, 만류하는 말만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입을 닫았다. 비마는 그 사실을 알 턱이 없기에, 모두 한통속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비마 역시 자리를 뜨고 나서 두 쌍둥이는 자신들의 소중한 셋째 형과의 작별을 직감했다. 비마마저 아르주나를 회유하는 것을 포기했는데 자신들이 변심시킬 방도는 없었다.

대신 아르주나를 응원하기를 택했다. 그것이 조금이나마 아르주나에게 위로와 힘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형님, 저희가 도와드릴 게 있다면 편히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 가족 간의 짧은 회의는 동났다. 애초에 회의라고 부를 수도 없을 수준의 일방적인 설득이었다.

 


 

보름 후, 드와르카에서 행렬이 찾아왔다. 황금빛의 전차와 각가지 꽃과 장신구들이 휘황찬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르주나도 용모를 단정히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을 휘감은 장신구와 화장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렇지만 가장 낯설 것은 이런 치장이 아닌 드와르카와 앞으로의 나날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드디어 떠나는구나.’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이다. 일평생 살아온 고향과 가족을 떠나는데 덤덤한 이가 누가 있겠나. 그저 주어진 숙명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더군다나 나는 영웅이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을 수행하는 건 오히려 긍지를 가져야 하는 일 아닌가?

행렬은 길고 화려했다. 그만큼 판다바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영웅으로서의 자긍심도 이별 앞에서는 덧없이 초라했다. 내색하지 않은 착잡한 속내를 달래기에는 가족이 너무 소중했으니. 아끼는 마음은 약하게 만들 뿐이라, 되내이지 않으려 애썼다.

먼 길을 떠나 몇 날 며칠을 이동하고, 초승이 넘어 그믐이 될 때 즈음 마침내 드와르카에 도달했다.

드와르카의 궁전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났다. 꼭 황금으로 잘 빚어 만든 조각 같았다. 궁전의 앞에는 판다바의 제물을 환영하기 위해 셀 수 없는 숫자의 하인들이 줄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재력과 환대에 내심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신이 거주하는 공간이라고 할지언정,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충격적인 금력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주변을 둘러만 보고 있었는데, 하얀 의복의 신분이 높아 보이는 이가 말을 걸어왔다.

“드와르카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나는 발라라마라고 하네.”

제법 수려한 외모를 지닌 남성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호감을 살만한 인상이었다.

손을 내밀기에 악수를 했으나 그보다 먼저 마음속의 본심이 튀어나오는 것을 제지할 수 없었다. 궁금증에 대뜸 벌어진 상황이었다.

“크리슈나는 어디에 계시나요?”

“밤이면 너를 찾아올 것이다.”

다소 무례했을지언정, 발라라마는 놀란 기색도 없다. 그저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 찬찬히 눈동자에 자신을 담고 있었다. 호기심 탓일까, 아니면 관찰하려는 건가. 그 시선이 기분 나쁠 법 한데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도 당신처럼 생겼나요?”

그러자 발라라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내가 알려줄 수 있는바가 아니란다.”

확신은 없었지만, 발라라마의 용모를 보아하니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라라마는 마찬가지로 비슈누의 화신이자 크리슈나의 형이지만 그보다는 격이 낮다고 들었다.

신들 사이에서도 외모가 이어지는지는 알 겨를이 없었지만, 적어도 판다바의 형제들과 자신은 엇비슷하게 생겼으니 크리슈나 역시 고울 것이라는 지레 짐작만 할 뿐이다.

궁전으로 들어서자 하인들이 이곳저곳을 소개시켜줬다. 비슈누의 화신이 머무르는 곳답게 화려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황금의 기둥이 하늘로 우뚝 솓아있으며, 사방의 벽은 전원의 풍경을 다듬어 그린 예술품이 일색이었다. 녹음의 정원은 천연의 미와 나비들의 향연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앞으로 묵게 될 곳이라며 고급진 방 하나를 안내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방을 찬찬히 감탄하다, 후식으로 놓인 포도알을 하나 집어먹었다.

새벽부터 단장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피로가 몰려왔다. 침상에 누워도 잠자리가 달라서인지, 이 화려하고도 낯선 공기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인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였다. 조금 뒤척이다가 문득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까지나 신의 제물로써 바쳐진 것인데, 본분을 다해야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조명에 불을 붙였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순간 모든 불길이 꺼지며 어둠 속에서 인영이 나타났다.

“…….”

크리슈나인가. 그렇지만 어두워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무언의 형체만 있을 뿐, 손을 더듬어서 다시금 불을 켜려고 했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만류했다.

“그리하지 말거라.”

촛불로 향하던 손길을 멈추었다. 말의 무게가 달랐다. 나긋하지만 엄중한 압도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저 목소리에는 특별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저 말을 따라야만 하고, 굴복해야 할 것 같은 순종적인 감정까지 들었다.

“네가 올 줄 알았다.”

“…….”

“아주 오랫동안, 아르주나 너를 기다렸다.”

감히 어떻게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기에는 의뭉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째서 나라는 존재인지, 왜 기다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이 중요한가? 자신은 크리슈나의 반려로서의 역할만 충실히 이행하면 그만이다.

크리슈나의 반려로 바쳐졌다는 사실에 그에 대해 반감을 가질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았다. 본래 무던한 성격이 녹아내린 것인지, 강요받은 사실에 익숙해진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이 상황이 썩 나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뒤로도 크리슈나의 모습을 보는 일은 없었다. 그는 매일 밤마다 찾아오지만 날이 뜨기 전에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제 모습을 확인하려 하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그럴 거면 왜 이렇게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지는지,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지라도 말지. 그러나 그의 뜻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오로지 내게 순종하고, 나를 사랑하며 따르거라.”

애초에 두려워한 적도 없다. 그저 호기심을 억누를 뿐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그는 비슈누의 화신이고, 안온하게 대해주는 이의 부탁을 저버릴 이유도 없었다. 크리슈나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를 만족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다소 오만할지언정 사실이었다. 크리슈나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자신 역시 고집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름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매일 반복되는 상황의 향연은 낯서면서도 점점 익숙해졌다. 사랑을 속삭이는 말에는 늘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게만 느껴졌다. 절대적인 존재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마다할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평범한 인간이었을지언정. 누군가의 호의를 애써 사는 것도 노고가 필요한 일인데, 선뜻 내준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 아닌가? 어쩌면 이제는 그 사랑을 갈구하거나 당연시 여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기도 했다. 크리슈나가 신이 아닌 인간이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불경한 생각마저도 이따금씩 찾아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첫만남은 조금 달랐을까. 아니, 알 수 없는 법이다. 애초에 만남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운명이 있고 인연이었다면 다시금 재회하겠지만, 벌어지지 않을 일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 특혜가 언제까지고 이어질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비슈누의 화신이 변덕스러울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적어도 후회는 없게, 크리슈나가 자신을 버리더라도 부끄럼 한 점 없이 떳떳하게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그것이 곳 나를 위한 일이고, 하스티나푸라를 위한 일이었다.

어느 날 맞이한 것은 하스티나푸라에서 사람이 찾아왔다는 소식이다. 나가보니 어머니와 유디스티라, 비마, 그리고 쌍둥이 동생까지. 걱정에 못 이긴 가족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립고 반가운 이들이 찾아온 사실은 좋았으나 발걸음 한 연유가 썩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르주나.”

어머니는 애써 캐묻지 않았다. 넉 자 안에 염려와 걱정, 애정을 담아 자신을 살필 뿐이었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마는 조금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다들 걱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만 보아도 속내를 알 수 있는 것이 가족이라.

살짝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자신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가족들의 마음은 천근만근인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기만을 하는 것 같은 배덕감이 살짝 마음에 새들은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처사다. 제 역시 같은 상황이었으면 무탈한지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더더욱 좋은 모습만 비추어 가족들의 염려를 안심시켜야겠다고 싶었다. 동시에 자신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슈나의 알 수 없는 무한한 애정과는 별개로, 유디스티라는 너무 정직했고 비마는 다혈질이다. 만일 비마가 이곳에 왔다면 성질을 못 누그러뜨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크리슈나께서는 아주 잘 대해주십니다. 드와르카에서의 생활도 만족스럽습니다. 잘 지내고 있으니 개의치 마세요. 크리슈나의 모습은 모르지만, 살갑고 친근하게 굴어주셔 도리어 마음이 든든합니다.”

어머니의 눈매가 조금 풀어지듯 했다. 그럼에도 완전히 걱정을 내려놓지는 못했는지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직접 얼굴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구나. 그렇지만 용모도 모르는 이와 동거동락하는 것이 어미로서 염려치 않구나.”

“괜찮습니다, 어머니. 걱정해 주어 감사해요. 형님들과 아우도 먼 길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참, 드와르카의 궁전이 몹시 아름다운데 둘러보시겠습니까?”

화제를 돌리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들은 눈감아주었다. 아르주나가 자신들을 배려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것을 제외한다고 해도, 드와르카의 궁전은 그의 말마따나 장관이었기에 바라만 보아도 재미가 있었다.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나가는 것은 물론이오, 경외까지 느껴진다.

객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때 비마만이 아르주나를 쫓아왔다. 둘만 남게 되자, 그는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닥치는 대로 물었다. 이곳에서의 생활과 괴롭히는 이는 없는지, 살판이라도 나서 여기가 진짜 네 집인 줄 아냐. 그중 선뜻 답하지 못한 질문은 하나였다.

“대체 어떤 사람이냐?”

크리슈나를 묻는 것이다. 비단 비마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궁금할 것이다. 심지어 자신을 이곳에 보내는 것에 일조한 두료다나 역시 크리슈나가 인간인지, 짐승인지 또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 처지가 어떻든, 얼굴도 모르는 이와 지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크리슈나께서 궁금해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네 마음은 어떠한데?”

내심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인간이라면 무릇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호기심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비마는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내 하나 일러주지.”

비마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등잔을 몰래 숨기고 있다가, 크리슈나가 나타나고, 그가 잠들면 모습을 확인하라.”

아르주나는 놀라서 눈동자를 깜빡였다.

“예?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듣거라. 너도 반려의 용모가 궁금했던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다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

비마의 말을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불같은 성격일지라도, 제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사려가 아주 깊었다.

가족들이 머무는 며칠간, 비마의 권유는 끊이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여 하는 말이라 항상 덧붙였고, 실제로도 그럴 것임을 알기에 배웅 끝에 점차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모습을 알려 하지 말라는 크리슈나의 당부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가족들의 걱정. 무엇보다 비마가 제시한 방법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잘만 해낸다면 들키지 않고 크리슈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인간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법이라, 오늘 밤에는 침대 밑에 등잔을 숨기기로 결심했다. 다른 날처럼 사랑을 속삭이던 크리슈나가 잠든 후, 조심스레 불을 붙였다.

그런데…….

하마터면 탄식을 낼 뻔했다.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미남이다. 어렴풋이 익숙한 느낌도 들지만, 수려한 외모에 시선과 정신마저 빼앗긴지 오래다.

신이 도자기를 빚으면 이러한 형상인가? 감히 형용하려 범하는 것이 죄이고 악인 것 같았다.

긴 흑빛의 머리칼은 윤기가 흐르며 오뚝한 콧날과 시원한 눈매가 정석적인 미남임이 느껴졌다. 얼굴의 문양과 푸른 눈 화장은 화려함은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으며, 탄탄한 몸매마저도 탄식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툭―.

멍하니 한참을 바라만 보다 그만 크리슈나의 어깨 위로 촛농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눈을 뜬 크리슈나는 놀란 기색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크, 크리슈-.”

목이 턱 막혔다. 다급하게 촛불을 치우며 뒤로 물러섰다. 크리슈나는 뜸을 들이더니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나의 얼굴을 보려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찌 된 일일까, 파르타?”

황급히 바닥에 엎드리고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 주십시오. 너무도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감히 모욕하려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볼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재빨리 뛰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귓가에서 북처럼 울린다. 손이 축축하고 떨림이 올라온다.

크리슈나는 가만히 바라보다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모든 것을 관장하는 이만이 응당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졌다. 과연 이 존재가 자신을 용서할지는 미지수였다. 매일 밤 사랑을 속삭인다 해도, 크리슈나의 말을 어긴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실이다.

“네가 그리 한 이유를 알고 있다.”

“예?”

“비마의 채근에 못 이겨 등 떠밀린 것이겠지.”

그는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어쩌면 촛불을 숨기던 사실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시험에 든 것은 자신이었고, 완벽히 패배했다. 수치감이 느껴졌다. 가장 뛰어난 영웅이라고 간택되어 온 자가 감히 신의 뜻에 반기를 들다니. 어머니와 형제들을 뵐 낯이 없었다.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이어지는 맥락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터이니, 가족을 지키기 위한 반사적인 본능이었다. 크리슈나는 자신에게 직접 벌을 가하지 않고, 비마를 벌함으로써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꾀에 넘어간 것도, 탐한 것도 저입니다. 벌은 달게 받을 터이니-.”

그러나 이상했다. 분명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찬찬히 고개를 들자, 크리슈나는 여전히 부드러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장난이었단다.”

경황망조하여 눈만 끔뻑이자 크리슈나가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믿기지 않느냐?”

“……정말인가요?”

이마저도 예의 버릇이 없었지만 크리슈나는 따지지 않았다. 반면 흥미롭게 여기는 듯한 느낌마저도 들었다.

“그러나,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잇따르는 법이지. 그렇지 않나, 판다바의 영웅 아르주나?”

굳이 언급하는 연유는 뻔했다. 직책에 걸맞은 책임감을 보이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영웅이라는 명목하에 품행을 강요받는 일은 익숙했다.

“그러니.”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쪽으로 몸을 숙였다. 크리슈나의 녹빛 눈동자가 빛났다. 그것은 여름날의 녹음과도 같아서, 햇빛에 찬란히 비치는 나무의 잎이 연상되었다. 그 안에 오로지 아르주나, 나만이 온전히 담겼다.

“앞으로 나에게 순종해야 할 것이야.”

아르주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슈나가 하는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묘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넘겼다. 진정 바라는 속내를 숨기는 것만 같았지만 자신이 어찌 헤아리겠는가. 그래서도 안 되며, 그럴 자격도 없다. 그러니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크리슈나가 다가왔다. 그는 아르주나를 깨질 조각처럼 조심스럽지만 우악스럽게 끌어안았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크리슈나의 목소리는 그 고요를 더욱 깊게만 조성했다.

“이번 생에는 결코 놓지 않을 거야. 나의 나라.”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귀를 아주 작게 깨물었다.

목메는 짙은 감정이 옥죄어 왔다. 분명 닿아 있는 것은 크리슈나의 두 팔뿐인데, 온몸이 사슬로 결박되어 있는 듯한 기이한 감정마저 들었다.

어째서일까? 이 눅진하고 오래된 애틋한 감정이 낯설지 않는 이유가. 크리슈나가……, 이토록 맹목적으로 내게 애정을 퍼붓는 연유 또한, 풀리지 않을 의문이었다.

그러니 감히 의심하거나 반박할 수 없었다.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가 하는 모든 말을. 그 사랑스러운 속삭임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모든 숨결과 언행을 온전히 받아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크리슈나가 제 쇄골에 얼굴을 파묻어도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이토록 애정 어린 말이 어디 있는가. 평소 읊어주던 애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겁고도 다정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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