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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의 이야기

크리주나

아득히 먼 곳을 헤매던 의식이 차차로 돌아오고, 무겁게 짓눌려있던 두 눈이 뜨였다. 깜빡, 깜빡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의식은 점차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사방은 몹시도 조용했으며 어두웠다. 또 잠에서 깼구나. 아르주나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쉬이 잠에 들지 못하고, 겨우 잠에 든다고 해도 얕은 잠을 잘뿐인 그에게 있어 이런 일은 일상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홀로 잠을 잘 때만도 몇 번이나 깨어나기 일쑤였으니, 지금처럼 다른 이의 품에 안겨 있는 상황에서는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리 될 줄 알고 미리 힘을 빼두었지만 그것도 그리 효과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아르주나는 별다른 아쉬움도 느끼지 않은 채로 살짝 고개를 들어 제 눈앞의 인영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얼굴이 눈가에 비쳤다. 크리슈나. 그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당연하게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잠에 든 이 특유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잠에서 깨어날 것만 같은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어지간히 곤히 잠든 것 같다. 저만큼이나 쉽게 잠에 들지 않는 크리슈나치고는 드문 일이다. 대개 그는 저보다도 먼저 일어나서 미소를 지은 채 저를 바라보고는 했다. 지금처럼 잠든 그를 제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아르주나는 새삼 신기한 마음으로 크리슈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잠에 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는 정말로 평범한 청년처럼만 보였다. 이마에 새겨진 비슈누의 표식만 아니었더라면 그 누구도 눈앞의 청년이 절대신의 화신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리라. 그저 조금 많이 잘생기고, 재주가 많은 청년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를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아르주나는 크리슈나가 비슈누의 화신이 아닌 세상을 몇 번인가 상상한 적이 있다. 그 세상의 크리슈나는 아르주나가 잘 아는 야다바의 수장이자 드와르카의 왕으로서의 모습보다는, 그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목동으로서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그는 자유롭게 들판을 거닐며 소를 치고 양을 몰았다. 수많은 여인들의 구애를 받으면서도 짓궂게 웃으며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어떠한 의무도 책임도 그를 속박하지 않는 채로, 그는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았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단 한 명의 여인과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고, 언젠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기도 했다. 어느 쪽의 삶이든 그는 행복하게 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늙어 죽었다.

참으로 불경한 상상이었으며 장대한 기만이었다. 크리슈나는 한 번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삶을 즐겼다. 본래부터 화신으로 태어난 이가 일개 인간으로서의 삶을 바랄 리도 만무하다. 이 모든 상상은 자신의 주제 넘은 연민일 뿐이었다. 아르주나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도 결국 한 명의 인간임을 깨닫게 되는 날이면…….

그도 같은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인간임을 알게 되는 날이면,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고 슬퍼하는 인간임을 알게 되는 날이면, 그저 그의 손을 붙잡고 도망치고 싶었다. 멀고 먼 곳으로, 신도 인간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는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것은 곧 더없이 평범한 존재일 것이다. 조금 많이 잘생기고 재주가 많은 청년. 언제나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삶을 즐길 줄 아는 청년.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어려웠다.

아르주나. 크리슈나가 속삭였다. 감겨있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있었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가만히 눈앞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 손을 들어 아르주나의 눈가를 쓸었다. 서늘한 손에 축축한 것이 묻어나왔다. 왜 울고 있어.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아르주나가 고개를 저었다. 목이 메어 괜히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르주나가 말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크리슈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떼었다가도 다시 입을 닫았다. 그는 그저 아르주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제 품에 가두듯 안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서로 엇갈리던 박동이 어느새 같은 박동으로 변해갔다. 그제야 크리슈나가 입을 열었다. 아르주나.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와닿았다. 고마워. 나를 사랑해줘서. 나는 네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상냥함이 너를 상처입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야. 그걸로 충분해. 크리슈나가 조심스레 아르주나의 등을 쓸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서늘한 체온이 전해졌다. 잠시 후 아르주나의 눈이 가물거리며 감겼다. 미안해. 크리슈나. 그는 마지막으로 말을 남기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가 잠에 든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등을 쓸었다. 어느새 고르게 변한 숨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겨우 움직임을 멈추고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는 아르주나의 붉어진 눈시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끝없이 표류하는 의식 속에서 산발적인 꿈이 스쳐지나갔다. 꿈 속에서 그는 버터를 훔쳐 먹는 어린아이였다. 막 양어머니의 아래에서 목동이 된 차였고, 무리에서 도망친 소를 찾으러 나선 도중 근처의 숲에서 또래의 아이를 만났다. 검은색의 곱슬머리가 특징적인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 난생 처음 보는 아이였지만 그는 그 애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았다. 안녕, 아르주나. 이름이 불려 수줍게 웃는 아이에게 그는 웃으면서 손을 건넸다. 너를 오랫동안 찾아다녔어. 어떤 세상이든, 어떤 삶이든 좋아. 신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어. 내 곁에 있어줘. 우린 분명 행복해질 거야. 곱슬머리 소년은 조심스레 목동의 손을 맞잡았다. 곧 두 사람은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저 그들은 행복했고, 또 행복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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