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가의 유령
베르디우스 백작가의 본저에는 오래도록 묵은 소문이 있다.
이제는 다소 유행이 지난 고딕 형식으로 지어진 근사한 저택에는 깊은 밤만 되면 무언가가 기어 나온다 했다. 실제로 오래전, 달조차 뜨지 않은 깊은 밤이면 백작저의 창밖으로 흘끔 보이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희끄무레한 형체로 빚어진 무언가는 도무지 사라질 수 없는 구조에서 순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희뿌연 형체가 머문 장소에는 언제나 물기 어린 발자국이 산발적으로 이어졌는데, 도무지 시작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이는 저택의 사람들과 외부인에게는 제법 구미가 도는 소문이 되었다. 유령이다, 유령! 백작가에 유령이 있다. 이성을 잃은 백작과 제정신 아니게 된 자녀를 두고서 떠도는 유령의 정체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정의되었다가, 이후 오랜 세월 추측으로 명맥을 이었다. 한때의 유령은 산열로 죽은 백작부인이었다가, 과거 원한을 가지고 죽어버린 어느 기사였다가, 백작저를 지을 때 밀어버렸던 무명의 무덤에까지 닿았다.
소문이라는 것은 본래 무엇도 타당하지 않다. 사람의 입을 통해 구전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뒤틀리고 변형되기 마련이었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제 이름자 뒤에 익숙한 성을 붙인 뒤로 종종 상인들에게 붙잡혀 유령 이야기를 들었다. “베르디우스 본저에는 유령이 떠돈다면서요? 희고 축축한, 정체 모를 유령 말에요.” 그럴 때마다 그가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해묵은 과거의 소문일 뿐이라며 일축하거나,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본저에 가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면서 어깨를 으쓱이는. 애초 그런 주제는 보통 진지한 물음이 아닌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 위해 시작된 주제였으므로 화제는 어렵지 않게 진정 바라는 주제로 넘어갔다.
이야기가 다음 막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생각마저 온전히 끝맺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상념은 분노와 함께 로시난테를 붙들어 온 오랜 원동이었으므로, 그는 종종 백작저의 유령에 대해 생각했고, 유령이 어째서 과거의 산물로 남았을지 떠올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짧은 한숨으로 생각을 갈무리했다. 구깃구깃 접어버린 의식은 고의적으로 음절마다 쪼개져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애초 시덥잖은 소문에 신경을 쏟을 만큼 여유가 있지는 못했다. 혹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거나.
그는 말이 많았지만 수다스러움은 생각을 숨기기 위한 연막에 가까웠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아주 많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데에 익숙했고 그만큼 대화 속에서 아주 많은 활자를 삼켜냈다. 그건 습관에서 시작되어 체화된 습성이었다. 제 이름 뒤에 붙어 있는 가문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랬다. 애초 그는 이 가문에 아는 게 아주 많지 않은 듯 굴었다. 수도에 있는, 백작 가문, 이제는 쇠락하기 시작한. 그저 매물로 나온 것을 괜찮은 값에 샀을 뿐인.
그러나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유령의 존재규명을 위한 열쇠를 가진 자다. 그는 제 손에 들린 몇몇 쓸모없는 열쇠들을 볼 때마다 많은 한숨을 흘려냈다. 주인이 바뀐 백작저에서는 더 이상 유령이 나오지 않는다. 유령에 관한 소문이 근 사십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는 몇몇 목격자들이 존재하는 까닭인데, 이제 몇 년 전부터는 목격담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이유를 안다.
묵은 피 향이 가득 번지는 장소에서 로시난테는 막연히 백작저의 유령에 대해 생각했다.
눈을 손에 걸린 수갑을 보았을 때에는 정신이 아주 멍하기만 했다. 구석에 처박혀 몸을 떠는 사람들을 목격했을 때에는 두루뭉술하게 떠오르던 상념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지금 두 눈에 담기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석제로 빚어진 재단은 사람을 산 채로 죽여버리기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참한 광경에도 구역질이 치밀지 않는 건 살아오며 나름대로 비위가 강해졌음을 증명한다. 신체화되는 증상이 없다 한들 아주 타격이 없지는 않았다. 늦게 눈을 뜬 것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혹은 크나큰 불행이거나. 행운과 불운은 결코 공존할 수 없으므로 결국 그는 둘 모두 될 수 있고 둘 모두 될 수 없었다.
분명 불길을 뚫고 나왔을 때에는 붙잡혔던 이의 손목이 붙들려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곁에는 누구도 없이 저 혼자 초조한 걸음으로 선두에서 걸음을 이어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생각이 파편적으로 끊어지는 와중에도 나름의 말끔함을 표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미미하게 진동하는 손으로 나무를 붙들고 생각한다. 이는 사유 아닌 상념의 형태로 빚어져 드문드문 묵혀둔 파편들을 끌어온다. 불타오르는 지하에서부터 그는 오래전의 백작저를 떠올렸다. 살려달라는 빼곡한 문자열을 목도했을 즈음에는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려 도통 정신이 없었다. 모든 것들이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져 그는 잠시간 제 시야를 확인할 새도 없었는데, 나중에서야 보니 안대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유독 까맸다. 분명 무언가 비춰야 함에도 정작 보이는 게 없어 의아해하다가, 그제야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지금 앞에 보이는 것은 뭐지? 깨달음은 뒤늦게야 찾아온다. 아, 파편이구나. 이건 파편이다. 무수히 많은 시간 삼켜내고 죽여온 어느 시절의 풍경은 파편으로 남아 감긴 시야에 지독하게 달라붙는다. 그는 잔상이 의미 없음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머잖아 손을 떼어내고 몸을 고쳐 바로 섰다.
정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은 익숙했지만, 마법도, 정령의 목소리도 무엇도 없이 오직 무기와 몸 하나만이 오롯 남아 있는 순간을 감각하는 건 아주 끔찍했다. 우습게도, 혹은 불운하게도, 당장의 로시난테는 제 삶의 소유권조차 쥐고 있지 않았다. 아, 모든 것이 유령을 목도하던 시절과 같지 않은가! 죽음으로 점철된 시간이 과거의 복판으로 떠미는 형국에 그는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간신히 삼켜야 했다. 사실 그게 웃음인지, 주체할 수 없는 헛숨인지는 명확히 알기 힘들었다.
임계점은 느리고 진득하게 다가온다. 저 지점을 넘기면 더는 돌이킬 수 없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뒤로부터는 후회와 회한을 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늦은 후회만큼 쓸모없는 것은 없으므로, 로시난테는 오십 구 년을 살아오며 체득한 것 중 가장 유용한 시술을 자행한다. 결심과 동시에 찾아드는 비명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도통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감은 눈 사이로 그어둔 선이 보인다. 모서리가 보인다. 지붕의 끝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이 보인다. 추락까지 다섯 번의 한숨을 남긴 순간 낯은 거짓말처럼 멀끔해져 평소의 모습을 되찾는다.
과거는 과거로 남아야 한다.
사적인 불행은 가시화 되어선 안 됐다.
다행히도 그는 삶을 죽이는 법을 잘 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미리 파 둔 묫자리에 당장 웅웅대는 것들을 모조리 집어 욱여넣고 다시는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봉하면 된다. 납작한 봉분 위에 그럴싸한 묘비까지 세워둔다면 아주 완벽하다. 과정 중 내내 울리는 비명소리는 무시해야 한다. 귀를 찢을 듯한 먹먹함에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판다면 묻는 자와 묻히는 자는 순식간에 뒤바뀌기 마련이었으므로, 이는 신중과 집중을 기해 벌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본래 로시난테가 제 삶 속에서 죽여야 할 사람은 오직 한 명 뿐이었으므로 대상이 사라진 뒤로부터 그는 누군가를 해할 이유 없이 그저 불살자가 되었는데, 기이하게도 이런 방식으로는 아주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그는 로난테를, 단테를, 이제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을 모두 죽여 걸어온 길목마다 묻고 비석을 세웠다. 그들은 오로지 기억과 과거에만 남은 존재이기에 생존했다는 물증 하나 없이 사그라들었다. 기억마저 함께 묻혔으므로 유의미하게 내어둘 수 있는 추모는 없었다. 매몰을 닮은 암매장은 아주 능숙하고 조용히 이어진다. 누구도 죽은 자를 알지 못하기에 그는 완벽한 범죄의 유일한 가해자이자 목격자가 된다.
봉인을 기점으로 살려달라는 비명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정령의 기척 역시 내내 공백이다. 손끝에 남는 마력의 감각도, 무엇도 없이 오직 실재하는 순간만이 생생하다. 어쩌면 이런 일도 나쁘지 않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아니, 분명 괜찮다. 그는 괜찮았다. 나무에 닿은 손의 떨림은 예고 없이 멈춘다. 시야에는 이제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들어와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직후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기에 로시난테는 낯을 갈무리하고 몸을 돌렸다. 평소와 같은 문장이 이어진다. “나야, 조금 늦게 정신을 차려서.” 그 말은 끝내 참인 명제가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비참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적어도 아주 짧은 순간 동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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