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 교차하는 순간
로시난테
님벌스에 도착하고도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큰 마을을 지나 사람들의 인적을 찾기 힘든 들판이 하나 있다. 온화한 기후 속 사시사철 보리가 가득 피어 있는, 대류가 일렁일 때면 은빛 늑대의 갈기처럼 쉼 없이 움직이는. 처음 그곳에 뿌리를 내린 씨앗은 바람결에 실려 온 보리 이삭이었다고 한다. 정령이 가장 처음 눈을 떴을 즈음엔 대지 위에 사람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밤이 되면 이삭을 훑고 지나가는 멧밭쥐, 토끼, 그들을 노린 맹금이 길게 자란 수풀 속에서 쉼없이 노닐었다. 드물게 맹수가 찾아왔는데, 그들은 사냥이 아닌 안식을 위해 보리밭이 시작되는 언덕에 조용히 몸을 뉘이고 땅속으로 삭아 스며들었다. 뼈들은 오래 남아있다 발길에 채이고 비에 깎여 마모되었다. 소음과 악취는 그렇게 종적을 감춘다.
땅은 탄생의 시작점임과 동시에 삶의 끝을 안배하는 장소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이전, 아주 까마득한 과거에도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던 정령왕은 그 이치를 알았다. 인간 된 자들의 언어가 들려오기 시작한 이래 정령왕은 굉장히 호의적으로 굴었다. 대평원에는 사시사철 보리가 피어 있었다. 봄철에 자라 초여름에 수확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확의 굴레였겠지만 정령의 안배에 놓인 대지 위에는 사시사철 보리 낱알이 피어 쉼없이 녹색이었다가, 황혼의 갈빛이었다가 했다. 초여름에서 한여름의 중엽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녹색과 금빛이 섞여 마치 사후의 어느 세계를 꾸려놓은 것만 같았다. 정령은 죽음을 몰랐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이야기 했던 것은 주워들었다.
그때의 인간은 고마움을 알았다. 대지에는 ‘게이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평원 남부의 정령이라 하면 으레 드넓은 보리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게이멜은 자신에게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오래 알지 못했다가 처음으로 계약한 어느 마법사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섬마을에 살다 이곳까지 정처없이 밀려온 이들이 보고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 가장 처음의 설명이었고, 이어지는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았다. 땅의 파도. 대지의 바다. 누군가가 섬의 가장 내밀한 장소에서부터 끌고 온 의미 없는, 혹은 아주 중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 대지는 물처럼 움직일 수 없는 말이었으므로 땅의 파도는 하염없이 역설적인 명명이었으나 정령왕은 그것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정령이 물었다.
‘파도가 보고 싶어. 날 데려가 줄래?’
‘나는 이곳에서 남은 영원을 살 겁니다, 게이멜. 나는 지치고 나이 들었어요.’
‘네게 영원은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고 말 거야.’
‘눈을 감기 전이 나의 영원입니다.’
수도에서 제법 큰 공을 세웠으나 모든 부귀를 마다하고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던 마법사는 그 말을 남기고 웃기만 했다. 다음번의 계약자를 붙들고 여행을 떠나 보라 했다. 하지만 어느 곳을 가든 이곳보다 아름다운 장소는 없을 거란 확신도 담긴 채였다.
대지 위에서 일렁이는 파도의 주인은 그것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번째 계약자가 떠난 뒤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갈 동안 계약자들은 하나같이 보리가 보이는 장소를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누군가는 떠날 법한데도. 이상하게 평원을 찾는 마법사들은 더는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지 않았거나 이곳에서 영원히 안주하기를 바랐다. 게이멜은 불만스러웠지만 태생적으로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아꼈다. 그는 다정한 정령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아이의 모습으로, 누군가에게는 나비의 모습으로, 그도 아니면 그저 한 데 얽힌 빛무리가 되어서 존재하는 정령은 오랜 세월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 왔다. 바다를 궁금해하면서. 나는 나의 영원 동안 바다를 그리워 해야만 하나? 그건 조금 불공평해. 영원에 관한 이야기를,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게이멜은 첫 번째 계약자를 생각했다. 그의 무덤은 보리밭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제는 그곳에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거 누군가 모두 수확할 것을 주장하다 뜻모를 사고로 급사한 것을 제외하면 모든 보리를 베어가는 몰상식한 사람은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게 정령의 저주라고 했지만, 사실 정령왕은 인간에게 저주를 내린 역사가 없다. 기적을 유지하는 대지는 생몰의 반복으로 지력을 유지했다. 많은 것들이 죽음을 맞기 위해 보리밭으로 왔다. 그만큼 많은 생명이 다시 자랐고, 보리를 베어가는 사람들은 보릿대를 삭혀 땅의 거름으로 묻었다. 모두가 괜찮았다. 모든 게 행복했다. 게이멜은 파도를 궁금해했지만 이런 시간을 살아간다면 영영 몰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종말은 고요히 찾아온다. 무수한 녹음이 지평선을 장식하던 곳은 이제 흔적을 감췄다.
어느 순간 땅이 회복되지 않음을 느낀 정령은 조금 당황했다. 지력의 고갈은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벌어진 적 없었으므로 정령은 끄트머리부터 죽어가는 밭을 보며 어쩔 줄 몰랐다. 그때에는 계약자가 없었고, 나쁜 순간은 언제나 동시에 온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그와 계약하고자 하는 마법사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바다를 보지 못했어. 파도를 보지 못했다고. 나는 죽음 너머의 삶을 몰라. 내게는 끝없는 영원만이 존재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마법사 하나가 찾아 왔다. 삼십 년 전의 일이다. 꾀죄죄한 몰골을 보아하니 거렁뱅이라도 되나 싶었는데 부러 사람 없는 곳으로 가 이것저것 하는 모양새를 보니 마법사가 맞긴 했다. 며칠 동안 꼼짝않고 나무 아래서 죽은 듯이 잠만 자길래 장난기가 일어 불러봤던 게 첫 대화였다.
‘얘, 여기 정말 예쁘지 않니?’
‘…풀떼기만 가득한 게 뭐가 예쁘다고?’
정령왕은 화가 났지만 팔백의 세월을 살며 인내심을 기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정령왕은 드물게 현현하여 나무 옆에 살포시 발길을 얹었다.
‘그러면 여기보다 더 괜찮은 풍경은 알아? 바다나 파도 같은 거 말야. 이 평원은 보리가 일렁이는 게 꼭 파도의 모습을 닮아서, 땅의 파도라는 명명을 하게 됐대.’
‘몰라, 관심 없어. 그런 걸 왜 묻는 거야? 한가롭게 풍경이나 응시하는 건 돈 많고 여유로운 작자들이나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마법사가 한 번이라도 눈을 떴다면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가 사람 아닌 정령임을 깨달았겠지만, 혹은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외눈마저 감은 채로는 자신이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이멜은 몹시 화가 났다. 그래서 땅을 뒤집고, 흔들고, 마법사의 위로 흙을 뒤엎었다. 난데 없는 재난에 봉변을 당한 마법사는 욕설을 한참 지껄이다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지력의 고갈은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이제 겨울에는 들판에 보리가 자라지 않아 황량했다. 게이멜은 가끔 그 마법사 생각을 했다. 이곳에 와 정착하지 않고 떠나간 유일한 마법사. 한 번쯤 붙잡아 볼 걸 그랬을까? 아냐, 그 애는 정말 무례했어. 아무리 세상을 보고 싶다 한들 그런 무례마저도 봐줄 생각은 없었다. 게이멜은 몸을 웅크리고 잠에 빠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법사는 대평원을 보러 다시 왔다. 게이멜이 눈을 떴을 무렵에는 익숙한 마법의 기척이 있었다. 떠났다가 돌아온 마법사는 꼭 며칠 전에 보았던 것 같은데, 제가 그만큼 오래 잠들어 있었기 때문인지, 혹은 이제 막 깨어나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마주한 마법사는 이젠 제법 늙어 있었다. 마법사는 이제 정령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땅속에서 움트는 힘을 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예전보다 여유로웠고, 그보다 가진 게 없어 보였다. 얼굴을 가린 안대만큼은 똑같았다. 대화는 예고하지 않은 순간 시작된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세상을 봤어?’
‘글쎄, 더 돌아보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당신도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온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기억나는 곳 중에…… 여기가 제일 보고 싶었거든.’
‘풍경을 보는 건 한가로운 작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나도 이제 시간 많아. 할 일이 없어서.’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복수의 허망함, 시간의 무상함, 인연의 무용함, 그럼에도 아름다운 보리밭의 전경에 대하여. 소멸하는 모든 것이 한 때 가졌을 미학에 대하여. 정령왕은 대지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마법사는 더는 가진 게 없었다. 종말을 목전에 두고서 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령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었고 마법사는 시간이 많았다. 총량으로 따져야 한다면 전자가 압도적으로 오랜 시간을 가질 수도 모를 일이었지만 적당히 이해관계가 맞았다. 마법사는 평원에 정착하지 않은 유일한 자였다. 쉴 새 없이 사람을 소모하는 종말. 고길된 지력은 끝날 듯 이어진다.
정령은 점점 더 잠이 많아졌다. 대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한 뒤로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든 시간이 많았다. 그의 계약자는 다만 충실한 여행의 동반자로서 정령이 보고자 하는 풍경이 보일 때마다 그를 깨웠다. 주변에서 종말이 시작되었노라 비명을 지르는데도, 두고 온 근원지에는 이젠 봄철을 제외하곤 보리가 자라지 않음에도, 오직 그들만큼은 평온했다. 마치 재난 속에서 유리된 듯한 모양새였다.
적어도 마법사가 기사단으로 걸음을 옮기기 전까지는 그랬다. 불온과 불신 속에서 정령은 생각한다. 너는 왜 이곳에 왔어? 그들은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정령은 그가 기사단에 지원하겠노라 운을 띄웠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오랜 영원을 살아온 자는 궁금해했다.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왜 외면하기를 멈추었는지. 방랑자의 걸음을 이곳까지 끌어온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어쩌면 오랜 과거의 열망을 묻어놨을지도 몰라. 어쩌면 이제 와서 세상을 구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열망과 열의는 그와 아주 어울리는 수식어가 아니다. 분명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주 깊게 묻어두어서 누구도, 파헤칠 수 없는 이유가…….
그래, 마치 그에게 열망을 심어주었으나 이제는 마치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보리밭 가운데의 무덤처럼. 정령왕은 더는 묻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침묵이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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