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난테

신앙이 있던 시절

 내게도 신실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정말이야. 그때는 신전을 자주 들락거렸지. 신관의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울리는 성가 속에서 다가올 내일을 기도하며 세상이 언제나 다정하기를 빌었다. 사소한 잘못으로도 신관께 달려가 고해를 청하고, 한 주의 고단한 일정이 끝이 나면 손을 붙잡고 백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신전에서 영광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 기도를 올렸어. 나는 풍요의 시대를 살았으니까. 그 시절에는 많은 이들이 행복했다. 정정하자, 풍요와 영광이 범람할수록 불행에 침식당한 이들은 짙어진 음지 속으로 기어들어 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에는 그저 이 세상에 오직 행복한 자들만 있는 줄로만 알았다. 내가 온전히 행복하다면 누군가는 온전히 비참해야 세상의 균형이 맞는 것이 이치인 줄을 모르고, 그저 주어진 순간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때가 있어.

수도의 거리를 오가는 자들의 낯에서는 불우함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아카데미에서 검을 휘두르던 시절. 암암리에 자그마한 무기들을 손보는 법을 배웠던 때이기도 해. 부귀 너머에는 부패가 자연스레 남았다. 그때엔 기사가 되고 싶었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랐거든. 갑작스레 몸집을 키우기 시작한 부르주아와 귀족들이 있었고, 자연스레 쇠퇴하고 몰락한 자들이 있었다. 부의 파도에 편승하여 살아가는 자들은 자신을 어떤 방법으로든 지켜줄 패를 원했다. 수도의 몇몇 가문에서 기사가 되기 위해선 조용히 요구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작은 무기를 옷 안에 붙이고 다니는 습관은 그때부터 든 거야.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들이 없으면 영 불안하기까지 하더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면.

이런 세상에서도 부패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었다. 베르디우스 백작가. 아주 오래도록 명맥을 유지해 온 수도의 유서 깊은 가문. 본저가 조금 유행 지난 디자인으로 설계되었다는 게 꼽을 수 있을 만한 그나마의 단점이었지만 어렸을 때엔 그마저도 고급스러워 보였지. 백작가에는 외동아들이 있었어. 그 애의 이름은 ■■■■였는데, 나는 그 애와 제법 친했어. 동갑내기였고, 아카데미 동기에, 집도 그렇게 멀지 않았던 데다가, 그 애는 기사가 되고 싶어 했거든. 예정된 작위가 있는데도 명예로운 직책을 얻고 싶다며 늘 아버지를 졸랐지. 내가 백작을 처음 본 건 열 살 즈음이 되었을 무렵인데, 이후에는 달에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볼 수 있었어. 우리는 정말 친했거든. 백작은 신분 고하에 따라 친우를 다르게 사귀라 말하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내가 작은 무기를 다루는 것만큼은 탐탁찮아 했다. 가끔 ‘네 어머니께 들키는 날에는……’이라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운을 띄우기도 했지. 하지만, 알잖아. 귀족 된 자와 평민 된 자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나는 그때에는 제법 겁이 없었어. 어떤 방식으로든 기사가 되고 싶었거든.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은 정도를 지켜 걷다 보면 그 집의 기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뭐, 일이 잘 안 풀렸네. 이제는 지난 일이니까. 그때의 기억을 아주 싫어하진 않아. 좋은 시절이었어. 그랬었지.

이제 와서 기사가 됐다는 사실이 조금 웃기기는 해. 돌고 돌아서 결국 목표한 지점에 다다르기는 한 거야. 수도가 아닌 북부이고, 가문을 지키는 것이 아닌 죽지 않기 위해 칼을 빼 들어야 하며, 전사 아닌 정령사로 살아가고 있지만, 나름대로 축하할 일이지 않나? 아주 많은 것이 달라진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게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면 신실함이 이제 별로 남지 않았다는 점이 되겠다. 나는 이십 대의 초입을 지나는 순간부터 신을 믿지 않았어. 정확히는 신의 존재를 믿었으나 그가 이 세상을 외면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목소리를 죽여 삼키고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을 알기 때문이야. 마침 종말이 판치는 세상에서 구원을 위해 목소리를 드높이고 사람을 불태우는 자들이 나타났다는 게, 사실은 조금 우스웠다. 그들을 이단이라고 일축한다 해도 결국 저자들이 믿는 신은 결국 우리와 같은 존재이고, 사실, 신실함을 가장하여 벌어지는 일은 아주 모르지 않거든.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저 믿음 하나에 미쳐서는 사람을 매달지. 수십 년이 지나도, 장소가 변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어. 어쩌면 이건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일 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건 아주 당연한 일이고 놀라울 것도 없다니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

참상을 목도하고 섰다. 불길이 흩날린다. 숨이 맥없이 꺼지는 모습을 본다. 괜찮아. 종교에 미친 자들은 언제나 그래왔다. 뭐가 괜찮은 거지? 신앙은 언제나 오독되고 곡해되어 사람을 절벽으로 내민다. 시선을 돌려 여신의 이름 아래 세상을 구하겠노라 걸음한 자들을 불태우려 드는 이들을 본다. 피가 튀기고 사람이 포박된다. 누군가는 즐거운 듯이 웃고, 아직 죽은 자에게서 미련을 놓지 못하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달리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습관처럼 끊어지는 동작으로 사람을 포박하고, 제압하고, 도망치는 이들을 발 걸어 쓰러트렸다. 이렇다 할 정신 없이 한 차례 파란이 지나간 장소는 내내 고요했다. 그사이에 자주 웃었고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집 안이었는데, 내부에서 나눈 이야기들만이 선명했지 외부의 일은 마치 한 걸음 뒤에서 목도한 양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닳은 장갑과 핏물 묻어난 부츠가 마주한 사건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신앙 없이 고해한다. 매달린 이나니스 뮬레를 보며 끊임없는 상념에 시달렸음을. 저 자의 고통 아닌 제 과거를 복기했음을. 사람은 잘 죽지 않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간편하게 끊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의 목숨이었다. 구차하고 지리멸렬하게 이어온 목숨이 있다면 상승가도에 올라선 순간 사라지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아 한참 천장을 응시하고 있어야 하는 날이 늘었다. 잠들지 않는 밤은 익숙했지만, 불면마저 오랜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기사가 되면 전부 괜찮아질 줄 알았다. 묵은 염원을 이루겠답시고 경쾌한 걸음으로 북부까지 걸음 했건만 막상 나아가다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과거의 숙원을 해치우는 것과 현재의 참상을 해결하는 일, 두 가지 중 하나에만 집중을 해도 부족할 판에 온갖 곳에서 정신을 들쑤셨다. 도통 무엇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로시난테는 살아온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선택할 수 없었던 일들은 열외로 두고서 그가 고르고 고르며 나아온 삶은 제법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미련 남지 않도록 살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문득 살아온 나날을 돌이켜보면 모든 지표가 후회로 쌓여온 것만 같다. 애초 종말이 도래한 장소에서 후회가 남지 않을 수 있을까. 선택한 적 없는 삶에서 바란 적 없는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조금은 슬픈 일이었다. 비통함보다는 사소하고 우울함보다는 짙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

그래서 사실은, 레뷰 숲을 지나오던 마지막 길목에서, 고대인지 미래인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보였을 때,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그냥 그곳에 영원히 남아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좋잖아, 그냥 다 두고 주저앉는 거. 끝없이 펼쳐진 산맥의 광막함. 발 딛고 살아가는 생명체라고는 무엇도 없이 그저 자박하게 자란 들풀이 흩날리고 막힘 없이 지평선의 아득한 저편까지 시선을 던질 수 있는 광활함이 펼쳐진. 적막한 풍경은 그가 오래도록 그렸던 평화와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홀로 보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풍경이라 내내 잠들어 있던 정령왕을 깨웠는데도 마땅히 반응이 없었다. 분명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그가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그마저도 모를 만큼 지쳤거나.

숲을 나오는 동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동료들이 곁에 서 있었음에도 한 번이라도 등을 돌렸다간 빠져나오지 못하고 내내 그곳에 붙잡힐 것 같았다. 그에게는 해야 하는 일이 아주 많았다. 그는 종말에 맞서는 기사였고, 다시금 대평원으로 가야 했고, 오래 살아남아야 했다. 이만큼 살았는데도 여기서 더 해야 하는 일이 많다니 재미있지 않나. 상황이 조금은 우습다. 그래도 적당히 할 수 있었다. 로시난테는 신을 향해 기도하지 않으므로 기대 역시 하지 않는다.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견딜 만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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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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