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2부) Repositioning 3
유학이후 프로 X 고졸 얼리 프로
안내사항
*본 창작물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의 2차 팬 창작으로 원작과는 무관합니다. + 원작에서 안나오는 가상의 모브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본 창작물에서 나오는 프로 농구 및 구단 설정은 현실과 상이합니다. 단 참고 자료로 각 구단 채널 / KBL 채널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작성자는 농구 고증을 잘 살리지 못하니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오탈자 비문 수정은...진짜 천천히 합니다. 아시죠?
만족스러운 1라운드 마무리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미지상 그렇고. 막상 내부를 들여다보면 속앓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물밑에서 백조가 물 위에 뜨기 위해 열심히 발길질을 하고 있었고.
2라운드 첫 경기를 앞둔 날. 아침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기 전 비디오 미팅을 진행했다. 다시 맞붙는 수원 ST에서 최근 경기 양상을 보여준 후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었다. 상대의 디펜스가 빡빡한 만큼 턴오버가 나오지 않게 유의할 것, 수비를 할 때는 공격에서 에이스 역할을 하는 선수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것.
그래서 남은건 실전에 대한 연습 뿐인데 오늘따라 한층 우중충해진건 느낌탓인지. 최종수는 묘하게 텐션이 떨어진 사람이 있는걸 느낄 수 있었지만 연습때 분위기가 안 좋아서 처진 사람 (특히 주장)이 있었던걸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닌지라. 그냥 오늘은 그렇겠거니 넘어갔다.
제 할일만 잘 하면 되었고, 더해서 사람 일에 관심을 가져서 오지랖을 부린다던가 그런쪽은 더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신경 안 쓰고 제 할 일에 집중하였으나,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남의 이야기가 입 밖에서 나오는건 막을 수 없었다.
“실연이요?”
오후 연습이 끝난 후의 락커룸. 시작은 오늘 분위기에 대한 누군가의 고찰이었다. 괜찮은 척 하더니 오늘 처진거 보면 확실히 실연이 크긴 크구나. 하는 말. 전혀 못 듣던 소식에 대해 누군가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몰랐어? 주형이 차였대잖아.”
우리 후배들 형에게 관심없구나. 농담과 함께 오늘 분위기가 쳐진것에 대한 답이 들려왔다.
“다른 연애 하는 형들처럼 주형이는 연애기류는 안보이니까. 눈치 못 채겠지.”
“하긴 그런걸 생각하면 딱 헤어질 각이었다니까?”
최종수가 옷을 갈아입고 락커룸을 정리하는 동안 들려오는 목소리는 남의 연애 이야기 뿐이었다. 그것도 실연당한 사람의 연애 이야기.
안그래도 운동선수라 시즌때 만나기도 힘든데 거기에 상무 입대까지 해버렸으니 보지 못하는 기간이 몇이야. 원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남의 실연에 대한 타당해보이는 이유부터 시작해서, 그런데 애초에 좀 안맞긴 하지 않았나? 이야기 들어보면 뭐 연애라기보다는 가끔 만나는 친구 같던데. 둘의 관계에 대한 의심. 야 그래도 주형이가 애인 볼때는 잘 해주는 것 같던데. 안으로 굽어버린 팔 등등.
“그래도 몇일 추스리고 나면 시즌 더 집중하겠지. 신혼버프, 연애버프 다 무의미하다.”
“맞아. 잘하는 모습 보여줘 봐야 한순간의 그때만 눈에 담기는거지.”
중요한건 평소에 잘 하는거니까. 결론은 연애 부질없다. 로 귀결되는 순간이었다.
“근데 솔직히 주형이 전 애인도 좀 이상하긴 했어.”
그래도 처음에는 상대쪽이 먼저 어필하고 그랬다면서. 근데 나중에와서야 자주 연락도 씹고 그랬잖아. 꼭 먹고버리… 야야 헛소리 하지 마라. 연애 초기랑 지금이랑 같냐. 이제 그만하자. 나중에 주형이가 와서 들으면 상처만 받을라. 그 말이 나오고 나서야 언제쯤 가야 좀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나.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인사를 하며 락커룸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최종수 역시 실내 체육관에서 빠져나와 제 집을 향해 갔다. 별로 생산성 없는 이야기들은 그냥 듣고 흘리면 편했을텐데 괜히 머릿속에 박혀지는건 어떤 이유였는지. 더해서 그런 이야기에서 기상호가 생각나는건 왜인지. 애초에 사귀는 것도 아니고,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는건 아닌데.
잠깐 그 요주의 인물에 대해 생각하기를, 최종수에게 있어 최근의 기상호는 진짜 종 잡을 수 없는 놈이라 평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호감이라던가, 말하면 편한 상대라던가. 좀더 가까워지고 싶은 그런 감정은 일단 배제해 둔 채로 말하자면, 그래 거리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비시즌에 어정쩡한 상태로 선이 그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 남인척 구는건 좀 그렇지 않나?
적어도 그래도 최종수가 OK라고 생각한 거리까지 다가오는 줄 알았건만 기상호는 저 혼자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거리감에 내심 서운해하면서 익숙해지려 하던 중, 우연한 기회(라기 보다는 홧김에)로 하게 된 통화를 들으면 예전처럼 대하는 것 같고.
그래서 대체 어디까지 다가가도 좋은건지. 그 알수 없는 거리감에 대해 고찰하며 이건 만나가면서 알아봐야 하는가, 그런 결론을 내리기도 했지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 최종수와 기상호가 서 있는 시간은 정규리그 시즌 중이었다. 하루하루의 연습과 경기가 소중한 시간들이었으니 어디 흔한 약속 하나도 못잡고 있었다. 결국 볼 수 있는 날은 결국 경기때 마주치는 날 뿐이다.
그래서 그 2라운드 첫 경기, 기상호와 최종수가 전화를 한 뒤로 다시 만날 날은 빨리 찾아왔다. 서로 연승가도를 달리는 중인 수원 ST와 서울 LC의 경기.
최종수는 저 반대편 코트에 서 있는 기상호를 한번 쳐다보았다. 말을 걸까, 쟤가 나를 발견해서 먼저 말 걸러 오기를 기다릴까 생각 하고 있자면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아마 저번 경기때 보여준 것 때문에 사전 인터뷰 대상으로 점찍힌 모양이다. 최종수는 한숨 한번 쉬고 인터뷰를 했다.
마이크를 잡으며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여 질문에 답해주기를 몇번, 인터뷰가 끝난 후 다시 기상호가 있는 쪽을 한번 보면 그는 공태성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공태성 쟨 언제 저기까지 갔대. 게다가 기상호 쟤는 뭐 다른 팀이라 눈치보여서 얘기 못해? 저 공태성과는 잘만 얘기하더만.
결국 아쉬운 사람이 간다더니 그 말이 맞다. 그래 내가 아쉬우니까 가준다. 최종수는 공태성이 제 팀이 사용하는 코트쪽으로 오는걸 보자마자 기상호가 있는 쪽으로 넘어갔다.
“종수햄 여까지 어떤 일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시선을 회피하는게 무슨 쫄아버린 소동물마냥 있는 모습이었다. 최종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런지. 적어도 반겨주는 행세는 해야하는거 아니냐. 그렇지만 괜히 눈치보는 기상호 보니까 이전에 들었던 말 생각이 났다. 뭐야. 나는 눈치보이는 대상이고 공태성 쟤는 괜찮다는거야? 마음에 안들었지만 뭐 여기서 따져봐야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질 것 같았다.
“저희 잘 해봅시다?”
그래. 적당한 한마디면 되니까. 그냥 얘와 나의 거리감이 어떻게 되었는지 명확히 알려고 온거니까.
그리고 경기. 여전히 수원 ST의 수비는 빡빡했다. 최소실점 1위 팀 아무나 먹는건 아니었다. 팀 색깔에 맞게 수비 원툴로 프로에 살아남은 선수도 있었고. 그래도 최종수라던가 다른 선수들의 컨디션이나 슛감이 좋은 덕에 스코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상태, 즉 ‘해볼만한’ 게임이 진행되었다.
그것도 잠시뿐으로, 2쿼터 중반이 되자 수원 ST에서는 선수교체로 기상호를 투입시켰고 그 이후로는 경기양상이 어디 출구없는 복도를 쭉 걸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최종수가 빡빡한 마킹을 벗겨내 겨우 득점하는 방식으로 벌어진 점수차를 좀 쫓아가려나 했더니 득점중 한두번은 기상호에 의한 수비성공으로 득점에 찬 물을 끼얹었다.
그것만으로도 짜증이난데, 서울 LC의 수비때 사인미스가 나다보니 실점을 허용. 다들 탄식을 하는 가운데, 최종수는 제 매치업 대상인 기상호를 바라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평소에는 바보같이 실실거리리더만 이 경기장 안에서만큼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 시선이 오늘따라 버려진 칼처럼 날카롭다는 느낌이 드는건, 몇cm 안되는 빡빡한 거리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나? 최종수는 그 긴장감과 날카로운 느낌에 한마디 내뱉었다.
“너 어깨에 힘 많이 들어간거 같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게 뭐 대답 하지 못할 말이냐? 이전에는 경기때 봐도 가볍게 말대꾸는 다 해주더만. 최종수는 오늘 기상호의 태도가 영 마음에 안들었으나 그걸 따질 여력은 없었다. 지금은 경기중이고, 기상호가 지닌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도 일종의 집중력이라 하면 그럴수 있으니까.
진짜 저놈 수비 버겁네. 최종수는 제 이마로 흐르는 땀을 유니폼 끄트머리를 올려 닦아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 짓도 4쿼터까지 쭉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진저리가 났으나 저를 쭉 마킹하는 저 놈의 얼굴을 보면 쉽게 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승부욕 말이다. 최종수는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크게 스텝을 밟았다. 기상호가 어렵사리 따라가며 컨테스트를 했으나 최종수가 던진 공은 백보드를 맞아 림 안으로 떨어졌다.
10여점 차가 난 상황에서 겨우 상대 뒤꽁무니 쫓아가는 2점. 아직 2쿼터밖에 안되었는데도 언제 다 따라 잡으려나 그런 생각이 드는건 제 팀이 겨우 샷클락 다 떨어질 때 공격 찬스가 겨우 나는 자주 왔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 겨우 점수가 추가되는 순간은 저만 느낄 수 있는 환희가 있었다.
절로 지어지는 미소와 함께 백코트. 천천히 드리블을 하며 코트 위로 넘어오는 선수들 사이로 제 위치로 가는 기상호와 얼굴이 마주친다.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은 영락없이 분한 표정이라 그걸 보니 어떤 승리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승리감은 수원 ST의 득점이 이루어지니 바로 가라앉긴 했지만.
이 긴장감이 가득한 줄다리기는 4쿼터 중반, 기상호가 선수교체로 벤치로 들어가기 전까지 진행되었다.
이제 좀 살만하겠네. 최종수는 한숨 돌리며 벤치로 가는 기상호의 얼굴을 흘긋 쳐다보았다. 잔뜩 아쉬워하는 표정이 눈에 밟혔으나 지금 이 경기상황에서 중요한건 저 놈 이겨먹는게 아니라 끈질기게 저를 마킹하던 기상호가 없고 이제는 조금 쉬운 상대가 매치업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체력이 떨어진 탓인지 1쿼터 초반의 폭발력 있는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니까. 경기가 몇십 초 안 남은 상황. 볼은 수원 ST에게. 24초 샷클락을 가깝게 써가며 공격을 전개했고, 역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버저가 울리고 게임이 끝난다. 서로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해주고 가벼운 포옹을 하는 짧은 시간 이후로는 승자의 시간이었다. 최종수는 제 팀의 벤치로 돌아가며 아쉬워하는 선수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수원 ST 상대로 이정도 득점이면 할만큼 했지.”
“진짜 쟤넨 수비하는데 안지치나. 로테이션 얼마 돌린 것 같지도 않은데.”
허울 좋은 말, 그리고 상대에 대한 투정과 함께 다들 안들어간 슛이라던가 스스로 만든 실책들이 아쉬워서 괜히 곱씹어보았지만 이미 지난 시간이었으니 다음에 잘 해보자는 늘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최종수는 벤치에서 떠나며 홈 선수가 자리잡은 코트 위를 한번 보았다. 다들 승리의 여운으로 기뻐하는 얼굴을 하는 가운데 어정쩡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받고 있는 기상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겼는데 표정이 왜 저래. 하여간 오늘의 기상호는 최종수의 신경을 끄는 구석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승자의 영역에 발을 딛을만큼 매너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얼굴의 이유가 급한 용무가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최종수는 제 형들을 따라 락커룸으로 갔다.
원정팀 락커룸에 들어가자 잠깐의 대기시간 후 간단한 브리핑이 있었다. 대부분 어이없는 턴오버라던가 속수무책으로 상대에 수비에 당한 감독의 피드백이긴 했다. 이후 다 같이 퇴근길에 나서니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몇 보였다.
“저 최종수 선수님… 혹시 싸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원정팀 벤치 뒷좌석에도 꽉 차 있던 경기장이었다. 더해서 수도권 경기장이라면 접근성이 그나마 쉬운지라 이렇게 원정팀의 퇴근길을 기다려 싸인과 사진을 요청하는 일은 작년에도 몇번 봐왔던지라 최종수는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그래도 남의 집인지라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몇 안되는 팬들과 사진 몇번 찍어주고 사인 좀 해줬을 뿐인데 어느샌가 같이 나왔던 형들이나 후배의 모습은 안보이고 홀로 퇴근길을 밟고 있는 기상호가 체육관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벌써 나올 시간이 되었던가. 그보단 여긴 우리 퇴근길인데 얜 왜 저기서 나오는거야?
“야 기상호.”
최종수는 기상호가 더 멀어지기 전에 그의 이름을 한번 크게 불러보았다. 그가 완전히 떠나기 전에 발이라도 붙잡으려는 심산으로 부른거였으나, 누군가를 불러 세워서 잠깐만 기다리라 할 것도 없이 팬들은 적당히 빠져주며 응원의 한마디를 끝으로 먼저 자리를 떠났다. 최종수는 성큼 기상호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기상호의 눈동자가 도로록 구르다 어느샌가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누가보면 협박하는줄 알겠네. 기찬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전화 할때는 뭐 별별 말을 다 해줬더만.
전화에서 들은 말을 하니 입이 막히고 기상호의 시선이 땅바닥이 아니라 다른곳으로 향하자 절로 따라가는건 어쩔 수 없다. 얘는 왜 여기서까지 이런 눈치를 보고 사는지. 원래 그랬나?
그렇지만 기상호가 거리를 두는 이유랍시고 하는 말을 들으면 그냥 눈치 많이 본다는 핑계뿐이었다. 공사구분 하니까 그렇다고. 그럼 오늘 공태성이랑 내 태도차이는 또 뭔데. 그리 묻고 싶었지만 괜히 질투하는 모양인지라. 최종수는 한숨 한 번 쉬었다.
그나저나 얘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걸까.
그냥 다른 팀 선수?
대체 얘와 내가 가져야 할 거리는 어느정도가 맞는건지. 나는 그냥 보면 뭐 예전처럼 속을 터놓고 말을 하는게 아니더라도 적당히 근황이라던가 시시콜콜한 이야기 쯤은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커녕 어색하게 인사나누는게 전부였다. 최종수는 이 상황이 영 마음에 안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게 사람 마음이다. 눈치볼 사람이 없는 이 상태라면 저에게 따로 할 말은 있지 않을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건 아닐까. 최종수는 제 기대를 담아 물었으나 돌아온 답은 냉정한 대응이었다.
“뭐 제가 잘못한 거라도…”
더해서 제 표정이 좋지 않으니 비굴하게 구는 꼴을 보니 더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이젠 나한테 눈치 보면서 설설 기는 시늉을 하는걸 보니 완전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래 남보다도 못한 그 때 말이다.
“나 먹버당한거 같다?”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 없는 말이긴 했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그제 실연당한 누군가의 사연이 떠오르는 바람에. 단어선택이 이상하긴 했지만 뭐 어쩌라고.
불만사항을 일일히 말하며 우리가 이런 사이였냐? 를 풀어서 말하니 돌아온건 다음에 보자는 것이었다. 이래놓고 어영부영 다음 라운드가 오기 전까지 못 볼 것 같아 여태 기상호가 했던 핑계를 차단하자 기상호는 제 핸드폰에서 달력 어플을 보여주었다. 경기로만 가득한 일정표 속 빈 날을 맞추고 나서야 최종수는 수긍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거리를 회피하는 것 같은 기상호의 태도는 마음에 안들었으나 여기서 더 버팅기는건 남의 집 와서 깽판 부리는 것과 비슷하니까.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물론 지금만 물러나는 것이지만.
[야 어디서 만날건지도 정해.]
최종수는 형들이 말한 그 ‘실연’의 이야기가 떠올라 집으로 가는 길에 기상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데이트 약속 날짜를 겨우 정했더니 갈 장소가 마땅치 않아 결국 일정이 파토난 적도 있다는 그런 사례. 혹시 몰라, 만날 마음 없으면 어떤 핑계 대고 도망칠지.
[잠깐만요.]
[종수햄, 그냥 햄네 집에서 이야기하죠?]
어디 카페나 음식점이나 뭐 다른 장소들은 보는 눈이 있어서 이야기 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염려와는 다르게 기상호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대고 장소까지 정하는걸 보고 나서야 최종수는 안심하고 기상호가 만날 다음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일정표에 적힌 기상호와 만나는 날. 기상호가 올 낮 시간까지 기다리며 치울것도 없는 집 치우고 청소하는 시늉을 하고 있을 즈음 초인종이 울렸다. 얜 우리집 비번도 알았으면서 그새 까먹었나.
“햄 집은 여전하네요.”
문을 열어주자 기상호는 익숙히 현관에 들어서 고갯짓으로 큰 거실을 훑어보았다. 그래도 제가 준 선물 잘 놨네. 이거 없으면 집 완전 휑해서 어쩌려고. 키득이면서 보는 모습에 최종수는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눈치를 안볼 수 있으니까 이러고 있는건지. 아니면 적당히 맞춰주려고 그러는건지.
“입이 심심할거니까 이거나 먹으면서 얘기해요“
기상호는 저가 편의점에서 사온 간단한 요깃거리를 들어올렸다. 요즘 별게 다 나오드만요. 그래도 많이 먹으면 안좋겠지만. 기상호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익숙히 TV앞에 있는 좌식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사놓은 간식거리 봉투를 하나 둘 꺼내면서 포장지를 뜯어냈다. 묘하게 술을 마셔야 할것 같은 온갖 견과류 모음을 서로의 사이에 두고 있자면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야기 하자고 했는데 무엇부터 말을 해야할지. 최종수가 기상호를 가만히 바라보며 대화거리를 끌어모으려는 도중, 입을 먼저 연건 기상호였다.
“그래서 종수햄. 왜 먹버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 그래 그거 내가 욱해서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단어선정은 별로 좋지는 않았음을 알기에 최종수는 순순히 그 때의 과실을 인정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넵. 뭐… 저 당황했다고요. 제가 어떻게 종수햄을 먹버…”
말하고보니 좀 웃겼는지 푸흣 하고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야야 이젠 웃겨? 난 나름 심각한데. 아니 근데 웃기잖아요. 먹버라니. 누가보면 우리가 뭐 몇번 잔줄 알겠네. 맞잖아 너 우리집에서 자고 간거. 아니 그런 사전적의미가 아니라…잠깐 기상호의 얼굴이 붉어지다가 헛기침을 했다.
몇일 전만 해도 그렇게 낯가리더니 지금와서 막상 단 둘이 있을때는 또 옛날처럼 대한다. 얜 정말 남의 눈치를 보는걸까. 그래서 보는 눈이 많을때는 낯 가리는척, 아무 사이도 아닌 척 하는걸까. 한창 분위기가 풀리자 최종수는 앞에 놓인 견과류를 하나 씹어먹었다. 빨간 얼굴이 진정된 기상호가 헛기침 좀 하고 볼을 글적였다.
“그니까 그간 제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종수햄은 제가…뭐 이전처럼 말 하고 그러지 않아서 불만인거에요?”
눈치본다는 이야기 자주 말하는데 종수햄은 저 몸 사려서 사는거 안보여요? 사실 오늘도 약속있다고 해서 완전 빌어서 겨우 외출 할 수 있었다고요.
“니가 무슨 애기냐? 외출도 남의 허락 받고 하게?”
“그건 아니지만... 형들이 상호야 너 어디가? 하면 눈치보이잖아요.”
“참나, 눈치보는것도 많다? 넌?”
형은 집에서 사니까 잘 모르겠지만 저 숙소에 있던 이후로는 형들이랑 같이 나가는거 외에 따로 외출한적이 없고, 다들 약속이나 만날 사람 없는거 아니까 어디 나간다고 화면 관심받는다고요. 입을 비죽이면서 투덜대는 꼴은 최종수가 아는 기상호 그 자체였다. 적당히 툴툴거리고, 농담도 하는 그런 녀석.
“야, 근데 니가 눈치본다 눈치본다 하는데 애초에 눈치 볼 이유가 있냐?”
“네?”
“너 이제 프로 3년차잖아.”
“뭔소리래. 3년차가 무슨 벼슬인줄 알아요?”
게다가 나이때문에 아무리 연차가 제 나이에 비해 많이 쌓였다고 해도 막내는 막내라고. 그게 힘든지 기상호가 한숨 한번 크게 쉬며 투덜거렸다.
“이럴거면 얼리로 들어오지 말걸”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있네.”
“아 왜요. 지금쯤이면 진로 고민 해줘도 봐줘야 하는거 아닙니까.”
“넌 계속 프로에 뛸텐데 뭔 진로 고민이야.”
최종수가 듣기에는 터무니없는 말이었건만 기상호는 상대의 의견을 흘려들었는지 테이블에 제 얼굴을 묻어두며 땅콩을 하나 손으로 집어 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지금 농구를 계속 할 수 있을지 말지의 기로에 놓여졌다고 생각하고 있는걸요.”
“뭐?”
“다음에도 계약 잘 해서 쭉 선수생활을 하려면 윗 사람들 한테 잘 보여야 하잖아요.”
“보여주는 거라면 잘 보여주고 있잖아.”
“뭐를요?”
“수비같은거?”
최종수는 자신이 본 기상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비야 이젠 두말할 것도 없이 짜증나는 녀석(이 짜증나는 녀석이란건 상대방 입장에서 겪은 느낌이기에 최고의 극찬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다른 수비 원툴인 선수만큼 공격능력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도3&D 선수라는 네임 답게 쏠쏠하게 넣는것도 있었고.
재계약이냐 이적이냐. 그 기로에 서 있는 선배들 중 역량이 예전보다 떨어진 탓에 은퇴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의 걱정을 벌써 기상호가 하는 모양인지라 좀 어이없기도 했다.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경기 외에 보여줄 모습 같은거. 그것도 중요하잖아요. 열심히 하는거. 농구 외에 한눈 안파는거.”
그 기상호가 어떻게 프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그리고 살아남아서 식스맨으로서 활약을 했었는지 저번시즌부터 귀 아프도록 들었던 최종수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 말도 터무니없었다.
“그래서 그게 다른팀 선수랑 대화 못할 이유라도 돼?”
“그건 아니지만… 저희 좀 친하게 지내는 정도가 지나친건지 뭔지는 몰라도 어쨋든 서로 각자 팀에서 한소리 들으니까 더 선넘지 말자고 했잖아요“
프로물 좀 먹었다고 제가 나이 다 무시하면서 같은 팀 햄들한테 대들 수는 없잖아요. 기상호가 볼멘 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럼 경기때는 그냥 남인 척 하자고?”
“굳이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기상호가 뒷목을 긁적이며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솔직히 형을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어요.”
물론 뭐 눈치 보느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 구설수 오르지 않을 정도가 어느정도인지도 모르겠고. 뭐 그러다보니 인사만 해야하나, 아니면 대화는 어느정도까지 해야하나. 그런 고민을 하다보니 이래 되었네요.
기상호의 푸념섞인 변명의 결론을 말하자면 결국 거리감 잘 못잴 것 같아서 아예 극단적으로 치우쳤다는 말이었다. 그래 눈치보느라 거리감 못 잡는거 다 괜찮다.
하지만 최종수에게 있어서 지금 기상호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 그런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었다
“넌 어쩌고싶은데.”
“네?”
“그냥 눈치 안본다면, 너는 나랑 어떻게 지내고 싶은건데?”
그래서 만약을 가정해보았다. 지금 기상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그 답이 만족스러우면 앞으로 기상호가 대외적으로 저를 봤을때 무시하거나 모른 척 해도 봐줄 수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며.
기상호의 눈동자가 두어번 꿈뻑였다.
“그냥 친한 형?”
“뭐?”
“아니, 우리 사이가 원래 그런거였잖아요. 친한 형동생, 동네주민 관계.”
그건 맞긴 맞지만. 최종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잠깐 생각했다. 전에는 크게 생각도 안했었지만 지금 굳이 그 관계를 듣고 기분이 불편해진건 기상호의 ‘친한 형’이 저 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걸 새삼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해서 기상호의 친한형인 공태성이 제 팀에 있으니 왠지 모르게 그들과 같은 선상에 놓였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면 형이야말로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건데요?”
“난...”
되려 들어온 질문에 잠깐 최종수가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전의 거리감을 생각하면 그냥 있는것만으로도 좋았던 때. 그 관계는 단순히 친구라던가 친한 형동생 관계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라 언어로는 제대로 정제하지 채로 입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곤 기상호가 픽 웃었다.
“햄도 잘 모르면서.“
“그래 너 잘났다.”
기상호의 말대로 자신이 정의하고 싶은 관계가 확실치 못한 탓에 요구도 못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저 잘못한거 없는거 맞죠?”
“뭐?”
“아니, 그 먹버 발언 말고도 그 저번에 봤을때 완전 따지듯이 말해서 제가 모르는 잘못이라도 했나 싶었다고요. 뭐 할말 없냐는 말도 그렇고. ”
그때 혼자 섭섭한 마음이 큰 탓에 무턱대고 따진 탓에 그런 말을 내뱉긴 했었다. 최종수는 입을 달싹이다 풀 죽은 소리로 답해주었다.
“어… 니가 잘못한거 없어.”
자기 잘못 아니라면 다행이었는지 기상호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럼 됐어요. 점심이나 먹읍시다.”
“뭐 먹을래?”
“그냥 주말 볼때마다 먹던거? 제가 시킬게요.”
“주소 잘 확인해라.”
“아차.”
하마터면 숙소에 점심 보낼뻔했네. 기상호는 키득 웃으며 배달 어플을 켜 매번 점심에 먹던 메뉴를 주문하였다. 점심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냥 할 것도 없어 TV를 켰다.
“뭐 밀린 애니메이션이라도 있어? 그거나 보자”
“요새 바빠서 뭐가 나왔는지도 몰라요. 그냥 아무거나 봅시다.”
아니면 종수햄 좋아하는거라도 틀어보던가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요즘 재미있다고 하는거에는 관심은 별로 없고, 자주 보던건 천문학 관련인지라 최종수는 ott에 있는 우주 관련 영상을 하나 틀었다. 검은 화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느긋한 나레이션이 사운드를 채우는 영상을 보며 기상호가 하품을 크게 한번 했다.
“종수햄 이거 저 재워서 숙소 못가게 하려고 튼거에요?”
“뭔 소리야. 볼만하다고.”
참 취향 특이하네. 한소리 한 것 치곤 기상호도 제법 집중해서 영상을 보았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과 비슷한 주말의 낮. 내일이 되면 그 이후로는 서로 지옥같은 경기일정을 보내기 때문에 일단 쉬면 휴식이 되는 셈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영상을 보니 기상호는 식곤증으로 꾸벅 졸다가 다큐멘터리가 끝나서야 눈을 떳다.
“진짜 이건 햄이 저 재울려고 튼게 틀림없어요.”
“니가 그냥 잘려고 하니까 자게 된거지. 집중했다면 안 졸았을걸.”
“이게 뭔 논리래. 저거 봐서 안 자는건 햄밖에 없을거에요.”
아무튼 전 가봐야겠어요. 핸드폰으로 시간을 체크하던 기상호가 기지개를 키며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갔다.
“바래다줘?”
“됐어요. 이 동네 처음 오는것도 아니고. 괜히 같이 있는 모습 보이면 어디 찍힐라.”
파파라치한테 찍히면 우째요. 괜히 호들갑 떨며 말하는 꼴이 퍽 웃겼다. 일개 운동선수에게 파파라치는 무슨.
“내가 연예인이냐?”
“종수햄 거의 연예인급으로 노는거 아니던가. 이번 올스타 투표 1위 유망주 아닙니까.”
아 아닌가 1위는 역시 형석 선배님인가. 안그래도 작년에 예능 참여하니까 인기 치솟았는데. 기상호는 현관에 앉은 채로 신발끈을 묶어가다 최종수를 한번 올려다보았다.
“근데 종수햄은 예능 나갈 생각 없어요? 햄도 나가면 화제는 끝장나게 몰 수 있을건데.”
아닌가 종수햄 프로그램 나가면 그냥 얼굴만 비춰주고 끝나려나.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기상호 혼자 설레발이나 치고 있었다.
“됐거든. 농구 하느라 바빠.”
“실제로 비시즌 주말에 할거 없어서 저랑 놀았으면서.”
“친구없는 놈이 나한테 와서 놀았으면서.”
“와 저 친구는 없어도 형들은 있거든요?”
“난 친구 있거든?”
“해봐야 청대 멤버 아닌가.”
“넌 해봐야 지상고 멤버고.”
서로 기 찬 웃음소리만 내뱉는 가운데, 기상호는 3라운드때 보자는 말을 작별인사처럼 말하며 최종수의 집에서 나왔다. 최종수는 문이 닫히고 기상호의 발걸음소리가 멀어져서 안 들리는 이후에도 현관 앞에 서서 기상호가 떠난 자리를 쳐다보았다. 결국 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뭘 바라고 있는지. 기상호가 묻는 순간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 탓에 머릿속에는 의문만이 남았다. 단순히 친한형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뭐, 연인이라도 되고싶은건가? 어이없는 발상에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2라운드 중반이 되어가니 이벤트의 시작이 보였다. 그래 올스타 말이다. 각 구단의 내노라하는 선수들의 투표싸움은 결국 팬들의 몫이고 선수들은 경기에 집중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순위가 몇이더라 하면서 말하니 신경쓰이는건 어쩔 수 없지만.
사실 순위 말고도 신경쓸건 또 있긴 했다.
오후 훈련이 끝난 후 씻고 나가려고 했는데 체육관에 다시 모이라길래 뭔가 했더니 체육관 안에 기다란 책상 하나와 다섯 개의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형 이거 뭐죠. 뒤늦게 온 선배들에게 물으니 다들 익숙히 대답해주었다.
“촬영 한댄다. 올스타 홍보 컨텐츠 찍어야지.”
“저번에 구단 TV에서 촬영하지 않았어요?”
“그거 말고 협회쪽에서도 촬영한다고 하잖아.”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화면조정중이던 PD가 업무용 미소로 컨텐츠 소개를 했다. 이전에는 각 구단만 따로 촬영하고 끝냈는데 뭔가 번잡스럽게 준비를 했다.
“자, 이번에 촬영 컨셉은 각 구단이 게임 대결을 하는건데요.”
승리 상품은 당연 팬들에게 주는 올스타 티켓. 타 구단 선수들과 예능 게임을 한다는 것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면 서울 LC팀과 게임 대결을 할 구단을 공개합니다!”
힘찬 목소리와 함께 전원이 켜진 화면 너머로 비슷한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서 앉아 있는 수원 ST 선수들의 얼굴이 보였다.
서울 LC에서 대결을 할 선수를 지목하면 수원 ST에서는 게임 종목을 고릅니다. 자 최종수 선수 어느 선수를 지목하시나요? 룰 설명을 마친 PD가 가장 첫 차례인 최종수를 주목하여 물었다. 최종수는 화면 너머로 보이는 기상호의 얼굴을 보았다. 저건 고민할 것도 없었다.
“기상호 너 나와.”
“자 서울 LC 최종수와 함께 대결을 할 선수는 기상호 선수네요. 혹시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쟤가 막내라 만만해요.”
사심도 조금 있었지만, 최종수가 봤을 때 조금 대하기 힘든 타 구단의 형들을 상대로 게임을 하는 것보단 기상호가 만만한건 사실이긴 했다. 화면 너머의 기상호는 통 안에 있는 접은 종이를 하나 뽑았다. 게임 종목은 ‘당연하지.’
“당연하지 게임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면 서로 질문을 하고 답은 무조건 당연하지로만 하는 게임입니다.”
간략한 룰 설명이 끝나고 대결을 위해 최종수는 카메라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화면에 비추는 기상호를 쳐다보았다. 이것도 게임인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첫 순서는 게임을 뽑은 기상호 먼저 진행하였다. 대망의 첫 질문.
“햄 아직도 친구 별로 없죠.”
그 한마디에 서울 LC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쟤 왜저래? 종수랑 친한거 아니었어? 요새 둘이 이야기 잘 안하잖아. 그나저나 배짱도 좋다 첫마디부터 저걸 꺼내고.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 최종수가 주먹을 꽉 쥐며 대답을 했다. 당연하지.
“너도 지금 친하게 지내는 친구 없지?”
“당연하죠? 햄 지금도 주말에 할것 없어서 그냥 쉬고만 있다고 하는거죠?”
“당연하지. 넌 주말에 숙소에 쳐박혀서 살고 있잖아?.”
화면에 집중하느라 뒤에 있는 선수들의 표정을 못보고 있지만 여전히 웅성거리는 목소리는 들려와서, 다들 놀란 표정을 지을것을 대충 예측 할 수 있었다.
“종수햄, 아닌척해도 올스타 자기 순위 확인하고 있죠.”
“너는 매번 순위 들 수 있을까 말까 화면 새로고침 하고 있지?”
“사실 동네 농구에서 양학하고 다니죠?”
“넌 동네농구코트에서 망신당한 적 있지?”
“실은 작년 아이솔레이션 실패했을때 완전 쪽팔렸죠.”
“넌 저번 경기때 내 아이솔레이션 못막아서 잠 못자지 않았냐?”
이건 질문이 아니라 반박 아냐? 아니 이건 서로의 폭로전이나 마찬가지다. 트래시 토크도 이만큼은 안한다면서 초반에는 혀를 내두르던 서울 LC의 선수들은 이후 웃음을 참기까지 했다. 와 진짜 최종수, 기상호 이런 놈인줄 몰랐는데 이런 면도 있었네. 이전에 같이 붙어다닌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면서 둘의 관계를 납득해주는 소리도 있었다.
제 뒤에 있는 형들이 기상호와 자신의 관계를 다시보거나 말거나 둘의 게임은 팽팽해져 우위를 가릴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승리는 가려지지 않아 무승부로 끝.
이후로도 서울 LC 팀원들이 다른 선수들을 지목하면서 게임을 진행. 예능프로 좀 봤다 하는 선수들이었는지 능숙하게 게임도 진행하고 클립따 놓을 장면들도 잘 만들어졌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는 멘트와 함께 PD는 능숙하게 각자 대결상대였던 서로에게 할 한마디를 물었다.
“다음라운드 맞대결에 두고보도록 하겠습니다.”
“종수햄 다음에는 쳐 부숴주겠다고 고등학교때부터 매번 각오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기대하고 있을게요.”
한마디를 안지려고 하지. 진짜 다음경기가 오는 날 두고보자고 생각한 최종수였다.
그리고 그 두고보자는 날. 즉 2라운드의 경기가 전부 마무리되고 3라운드. 경기날은 연말에 가까운 날짜였으나 연말 전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즉 누군가는 데이트를 하러 농구경기를 본다면 최종수는 캐롤 송이 들려오는 경기장에서 여전히 똑같은 루틴으로 경기를 준비중이었다.
3라운드가 되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수원 ST는 여전히 1위였고, 서울 LC는 그나마 작년보다는 나은 성적으로 순위가 오락가락했으며 팀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상호는 여전히 저에게 말을 먼저 안 걸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전과 똑같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저번에는 시즌아웃 된 선수가 다시 합류한다던가. 상무에서 전역한 선수가 온다던가. 작년 시즌 끝나고 감독님이 최종수에게 따로 말했던 대로 나름 잘 될 수 있는 상황의 발판인 셈이다. 마냥 우리만 좋은 상황이다. 라고 할 수 없는건 수원 ST쪽에서도 상무에서 전역한 선수가 복귀하고나서 전 구단 상대 승리를 따내면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경기 전 브리핑 시간에도 감독은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홈 경기인 만큼 최선을 다 하자는 이야기로 시작을 하였다. 상대의 수비전략과 함께 압박수비나 트랩, 턴오버 유도를 어떻게 대응할지. 공격루트를 다시 복습, 그리 브리핑이 끝나고 나서 다 같이 화이팅을 외치는 순간이 왔다.
휘슬이 불리고 경기가 시작된다. 모든 경기가 감독 말대로 잘 되었다면 좋겠지만, 사람이 입력한 대로 출력값을 내는건 아닌지라. 이번에도 힘든 경기가 되는건 어쩔수 없었다. 순위를 보면서 예측한다 해도 실제 경기가 달라지는건 정말 만에 하나 컨디션 차라던가 주요선수의 이탈이 있을 때 벌어지는 일이고.
상대는 1위팀 답게 지시된 플레이를 잘 하는게 눈에 보이는 반면
“야야. 못넣을거면 차라리 패스나 해.”
“오픈찬스 냅두냐? 종수 쭉 트랩와서 패스하면 인터셉트 당할게 뻔한데.”
이쪽은 미스였다. 늘 투덜거리며 싸우는 목소리는 3라운드까지 가니 이젠 익숙해졌다. 매번마다 신경전 벌이는 둘 때문에 팀이 영향받아 컨디션 저하가 된다던가 분위기가 더 나빠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같은 팀원 뿐만이 아니라 신경전의 장본인도 비슷하긴 했다. 어이없는 실수는 한번이면 족하지. 다음에는 그러지 말고 경기에 집중하자는 주변의 목소리에 어수선할 뻔한 분위기는 정리된다.
그래도 이전에는 10점차에서 줄다리기를 했다면 이번에는 5점, 투 포제션 게임을 쭉 지속할 수 있었다. 그만큼 방심할 수 없었는지 감독은 거의 풀타임동안 최종수를 뛰게 만들었고. 버저가 울리며 3쿼터가 끝나고 다음 쿼터를 준비하는 쉬는 시간이 왔다. 다음쿼터 작전을 지시하기전 다들 벅찬 숨을 고르고 땀을 닦으며 수분보충을 할 때, 뒤에서 근처 벤치멤버나 엔트리에 못든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기상호는 어디 다쳤나? 엔트리에는 있는데 잘 안보내네. 이때면 나올텐데.”
“어디 다쳤다는 소식 없잖아. 요새 출전시간 줄어들긴 했다만.”
최종수는 물 한모금 마시며 제 매치업 상대를 생각했다. 보통 자신이 득점을 많이 할때 기상호를 채용해서 찬물을 끼얹고 가던데 이번에는 기상호가 아닌 다른 선수를 붙여놨다. 상무에서 복귀했던 유재훈이던가. 기상호와 비슷한 3&D양상의 선수인지라 매치업 상대로 붙어다녔다.
“근데 기상호 없다 해도 디펜스 범위 빡세긴 하네요.”
“그냥 높이로 승부본다는거지. 확실한 득점원도 있겠다.”
기상호 대신 들어온 선수에 대한 말과 그에 따라 달라진 수비양상에 대해 이야기 하던 사람들은 최종수에게 물었다.
“어때?”
“네?”
“도훈이 형 매치업 하는거 처음이잖아.”
최종수는 다시 흐르는 땀을 스포츠 타올로 슥 닦으며 말했다. 그냥 그래요. 사실 말 그대로의 감상이긴 했다. 기상호보다 신장이 좀 더 높은 수비 전문. 그렇다 해도 기상호처럼 진득하게 달라붙은 타입은 아니고 몸으로 막아내며 긴 신장으로 상대의 공격을 압박하는 스타일이었다. 그 신장차이 때문에 공격이 몇 번 막히긴 했지만 그래도 몇 번 상대하니 요령은 생겨서 마냥 막히지는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다행이고. 종수 너 표정 별로 안좋아보여서 힘든가 했거든.”
“네?”
“자자, 잡담 그만하고 다음 패턴 잠깐 복기하자.”
표정이 안 좋았나?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감독이 선수들을 모아 다음 패턴을 지시했다. 이후 전광판에 4쿼터의 시간이 표기되었다. 원투쓰리, 로 시작하는 힘찬 구호를 외친 후 코트위에 선다.
여전히 제 매치업 상대는 기상호가 아니었지만 쿼터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는 시간, 최종수는 자신이 이끌어낸 파울유도로 상대의 파울트러블까지 만들었다. 수원 ST의 선수교체. 그리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기상호가 코트 위에 섰다.
기상호는 여전했다. 그 날카로운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고 움직임을 예측하며 막아냈다. 안그래도 이번 경기의 출전시간이 유독 긴 탓에 체력이 더 떨어지는걸 느낄 수 있지만 신기하게도 최종수는 그 순간부터 그 지친 몸의 감각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서울 LC의 공격. 기상호가 들어온 컨테스트에 볼이 흔들린다. 아쉽게도 공은 들어가지 않았으나 운 좋게 공태성이 바로 리바운드를 따낸 덕에 두 번째 찬스가 온다.
공태성에게서 온 공을 잡고 최종수는 다시 한번 돌파를 시도한다. 바짝 다가온 기상호가 최종수를 막아냈지만 어렵사리 넣은 터프샷이 운 좋게 들어갔다.
다시 득점. 점수차는 원 포제션 차이. 역전의 기회가 왔다는 것에 머릿속이 팽팽해진다. 하지만 그 역전의 기회보다 불타오르는 감정의 것은 분명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아보여서 힘든가 했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더 힘든 상대를 앞두었을 때 기분이 더 좋더만.
관중석의 모두가 경기를 보다가 득점을 하면 환호성이 터지고, 실점이 되면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오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보는 사람과, 직접 뛰는 사람의 심장이 쿵쿵 울리는 시간이 쭉 흘러간다. 그리고 최종수는 그 버거운 상대인 기상호와 매치업 하는 순간부터 유독 가슴이 더 뛰는걸 느낄 수 있었다. 긴장감에 뒤섞여 고양감이 흘러나온다. 경기시간이 0분 0초까지가 되기까지, 그 누구도 승패를 가릴 수 없는 시간동안 최종수는 그 감각을 느꼈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의 끝, 게임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렸다. 승리는 수원 ST.
그리고 코트위에 서 있는 모든 선수들이 숨을 버겁게 흘리며 각자 포옹해주거나 악수하는 익숙한 시간이 왔다. 최종수는 다들 친숙하게 인사하는 사람들 사이로 멀뚱히 서 있는 기상호에게 다가갔다.
“야 이번시즌에는 손 안내미나?”
그래도 작년 시즌 경기때마다 예의상 손 내밀던 놈인데 오늘은 또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저가 다가오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매번 햄한테 내밀어도 거절 당해서 이젠 안할라고요.”
“그렇냐?”
그렇게 말하니 괜히 무안해지긴 했다. 그렇다고 먼저 내밀기에는 다들 자리를 뜨는 시간인지라 최종수는 딱 한마디를 남기고 벤치쪽으로 갔다.
“다음에도 또 봐.”
분명 패배했기에 분하고 짜증나고 뭐 별별 부정적 감정이 든다해도 마음 한켠에서 어떤 후련한 기분이 드는건, 기상호와 매치업을 할 때 느끼는 감정 탓일지도 모른다. 그냥, 즐거웠다. 그 녀석과 있으니까. 그것이 같은 팀이 아니라 다른 팀으로서 적으로 있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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