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2부) Repositioning 4
유학이후 프로 X 고졸 얼리 프로
안내사항
*본 창작물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의 2차 팬 창작으로 원작과는 무관합니다. + 원작에서 안나오는 가상의 모브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본 창작물에서 나오는 프로 농구 및 구단 설정은 현실과 상이합니다. 단 참고 자료로 각 구단 채널 / KBL 채널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작성자는 농구 고증을 잘 살리지 못하니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오탈자 비문 수정은...진짜 천천히 합니다. 아시죠?
경기뛰고, 쉬고 경기 연달아 뛰고 쉬고. 시즌도 어느덧 중반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말이라고 분위기는 들뜨지만 크리스마스에도 경기를 하고 한 해의 마지막 날에도 경기를 할 걸 생각하면 그냥 연말도 시즌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요 몇 년간 기상호는 그런 기분으로 경기에 임했다. 크리스마스라고, 연말이라고 뭐 별거 있나. 똑같은 경기날이고 상대는 3번째 맞대결을 치루는 팀인데.
“하, 이 날에 누군 데이트 하러 경기장에 오는데”
“우린 농구랑 데이트 하는거지 뭐.”
오, 이러니까 좀 농구에 미친 것 같네? 우스갯소리로 하는 형들의 말을 들으며 기상호는 전석이 매진을 알리는 전광판을 보았다. 그리고 하나 둘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연인처럼 보이거나 가족일수도 있고 친구이기도 한 사람들. 사실 주말에도 이런 풍경을 자주 보았었다. 수원 ST는 작년 시즌 우승팀인 만큼 팬층도 늘어났고 상대인 서울 LC도 최종수의 스타성에 의해 팬이라던가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평소와 같은 주말 오후 2시 혹은 4시에 진행되는 휴일의 경기날. 유독 오늘이 특별해 보이는건 들뜬 분위기라던가 이번에는 다른 상대방의 복장 때문이겠지. 그래 그것때문일 것이다. 기상호는 상대편에서 색다른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을 한번 보며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통칭 크리스마스 에디션이라고 불리는 유니폼 말이다.
“상호야, 자꾸 저쪽 보는데 뭐 유니폼이 부럽나?”
“에? 아니요. 그냥 안 쓰던 색이구나 해서요.”
기상호는 헤쓱한 웃음을 지으며 상대팀을 보던 시선을 빠르게 돌렸다.
“하긴 크리스마스 하면 대체로 빨간색 많이 쓰던데. 초록색 계열은 잘 안하려고 하지 않나?”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다 거기서 거기니까 특별한거 시도하려고 하는거지.”
그러다 색감 구리다는 소리 듣고. 뭐 우리야 군말없이 입으면 끝인데. 저거 기념으로 사는 사람이 있잖아. 그래도 팔거면 나름 팬한테 팔 수 있는 물건 팔아야 하지 않겠냐. 어느샌가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유니폼에 대한 나름 진지한 고찰이 진행되었다.
“그래도 쟤넨 괜찮네. 우리는 작년 특별 에디션 구리다고 욕먹었는데.”
“야 그거 착시현상일수도 있어.”
옷걸이를 봐라. 최종수잖아. 쟨 뭘 입어도 괜찮을걸? 멀리가지 말고 작년에도 우리 스폐셜 유니폼 만들었을때 성준수 픽 보고 그대로 진행했다가 망했잖아. 기상호의 근처에서 가볍게 몸을 풀던 선수들의 시선이 최종수와 성준수를 한번씩 번갈아 보기를 잠깐.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상호 역시 선배들을 따라 고개를 돌려가며 최종수의 얼굴을 보기를 한번. 그리고 혹여 눈이 마주칠까 빠르게 시선을 돌려 몸을 푸는 몸 동작을 괜히 더 크게 해 보았다.
여전히 기상호는 최종수와는 선을 그은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올스타전 컨텐츠 촬영때 최종수가 나서서 엮어볼 구실을 만들긴 했지만 그것도 그 순간뿐이다. 결국 경기로 벌어먹고 사는 선수들에게는 그런 일은 잠깐의 화젯거리만 될 뿐이지 그 이상으로 관계가 발전할 구실이 되지 않는다. 아 너 원래 그런놈이였나? 같은 오해받은 것도 있고. 여전히 선배들의 눈치를 본다는 핑계로 대외적으로는 최종수와는 그렇게 친하지 않은 척, 그냥 인사만 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인 척 하고 있지만 최종수를 볼때마다 신경쓰이는건 저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그냥 친한 형 동생이거나, 다른 팀의 선수. 딱 그정도로 정리가 되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최종수는 저에게서 친한 누군가가 아니라 다른걸 원하는 것 같아서 신경쓰이는게 첫번째. 그리고 자신 역시 최종수를 볼 때마다 복잡미묘한 감정이 치솟는게 두번째.
그 무엇도 답이 딱딱 떨어지지 않고 규정할 수 없는 상태인지라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기상호는 한숨을 푹 쉬며 슛을 던져보았다. 림을 통과하지 않고 골대를 튕겨 나가는 공의 모습을 보니 복잡한 머릿속을 꽉 채운 화제가 어딘가로 치워졌다. 당장의 경기가 중요하지. 얼른 슛감이라도 찾아보자. 기상호는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다같이 순서대로 림터치를 하며 스킬을 써 보다 경기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면 간단한 브리핑 시간이 왔다. 그 시간의 주 화제는 당연 서울 LC의 에이스인 최종수였다.
“도훈아.”
늘 그의 전담마크는 기상호였기에 브리핑 시간이 되면 감독이 기상호에게 최종수를 어떻게 막을지 요구를 해주었으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입에 올라왔다. 사실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2라운드 초반이 지나고 나서 상무에서 복귀한 도훈형이 자주 불리는건 이전 기상호가 수행했던 롤을 먼저 수행했었으니까. 그리고 감독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결국 비디오 미팅때 했던 말들의 반복이나 다름없었다. 서울 LC의 공격은 결국 최종수의 히어로볼이 전부니까, 그만 잘 막으면 반은 막는거라고.
기상호는 자신이 막던 순간을 다른사람을 끼워넣어 떠올려보았다. 도훈이 형은 나보다 키 더 크고 상무때 몸 더 잘 만들어졌으니까, 몸싸움에서는 지지 않겠구나 하는 상상. 그 모습을 떠올리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감각, 꼭 자기 자리를 뺏긴 것 같은 기분. 애초에 최종수 막을 사람 이 나 밖에 있는 것도 아닌데. 따지고보면 이건 자리를 뺏긴것도 아니고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 생각하며 기상호는 벤치에 선 채로 감독의 남은 말에 집중하였다. 자 이제 준비되면 나가자.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 선수소개의 시간을 기다리자면 누군가가 제 어깨에 팔을 얹어놓았다.
“상호야.”
“네?”
“최종수 수비할 때 뭐 유의할거 있냐?”
아무래도 경험자의 조언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유도훈이 기상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친근히 물어보았다.
“솔직히 저도 막기 힘들어요. 진짜 쫓아가면서 수비하는 수 밖에 없거든요.”
“엄살은, 너 이전에 잘 막은거 다 알고 있거든?”
“아이 그건 최종수가 저번 시즌때 프로 입문 했을 때 이야기고. ”
그때는 최종수가 팀 스타일 잘 적응 못했을때라 초반부에 잘 막았었는데, 후반에는 그냥 정석적으로 체력 떨어트리는 것 외에 방법 없어요. 시간에 쫓기게 터프샷 던지게 만들거나 아니면 스틸을 한다면 패스 읽어서 인터셉트 하는 정도려나. 그래도 종수햄 공격 옵션에서 스핀 무브 하면서 거리 벌려두고 슛 던지는게 많긴 한데 보면 움직임을 바로 따라 잡을 수 있을거에요. 막기 힘들다고 투정부린 것 치곤 세세한 말들이 이리저리 튀어나왔다.
아무튼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체력저하를 하는 수 밖에 없어요. 요령같은게 잘 통하지 않는 상대라. 그렇게 말을 마무리 지으며 잠깐 숨을 고르니 상대의 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나, 막기 힘들다면서 그냥 백과사전 수준으로 읊잖아?”
“아니. 근데 안다고 해서 다 막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힘든걸요.”
울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바로 반론이 들려왔다. 야, 보통은 그런거 분석도 못하고 그냥 막무가내로 막다가 점수 내주고 그러는거야. 그런가. 기상호는 턱 밑을 긁적이며 상대 벤치에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최종수를 흘금 보았다. 별거 아닌 척 겸손떨며 말했어도 그렇게 입을 털어넣고 보니 무언가 충족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꼭 자신이 최종수의 전담마크였다는걸 알려주는 어떤 근거가 된 것 같아서. 그리고, 그걸 타인이 인정해주었으니까.
여전히 신경쓰이는 상대와 그를 생각할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잠시, 선수소개의 시간이 다가왔다. 코트위에 서서 스타팅으로 나가는 형들에게 하이파이브 해주고 난 다음에는 상대의 선수소개가 있었다. 모두의 환호성과 함께 선수들의 이름이 불리고 전광판에 10분이라는 시간이 입력될때, 1쿼터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깔끔하게 슛을 넣는 최종수가 첫 득점을 알렸다. 그 이후 수원 ST의 빠른 공격전개, 초반부는 서로 경기의 감을 잡아갔지만 점점 진행될수록 감독이 주문했던 플레이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이전의 브리핑대로 최종수의 히어로볼이 전부이긴 했지만.
기상호는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최종수를 마킹하는 도훈형을 보았다. 사이즈에 장점이 있는 만큼 따라가는 속도가 조금 느린 것이 있지만, 자신과의 매치업과는 다르게 과감하게 슛을 던지는 동작은 없었다. 블락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을까. 혼자 수비를 달고 득점을 넣거나 혹은 수비를 스킬로 떼어넣는 플레이가 아닌, 상대방에게 공을 넘기는 플레이가 보인다.
그걸 보게 되니 기상호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없어도 최종수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있는데. 사실 최종수 뿐만이 아니라 각 팀에 있는 에이스들을 막을 수 있는 선수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나 없이도 팀은 잘 굴러가는거 아닌가. 그럼 내가 오랫동안 이 코트 위에 서 있을 수 있을까.
그리 혼자 땅 파는 생각하는 것도 잠시, 기상호는 저 혼자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도훈이 형이 풀 타임을 뛰는건 아니니까. 몇분이라도 뛰게 해주겠지. 물론 예전에 비하면 출전시간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뛰는게 어디야. 기상호는 그 때를 생각하며 자신이 막을 상대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자신도 잘 막을 수 있는걸 알려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종수의 움직임을 전부 파악하는게 우선이었다. “확실히 최종수가 힘들긴 하네.”
어느덧 경기가 4쿼터에 이르러, 감독은 전광판을 한번 바라보고 한마디 내뱉었다. 기상호가 따라 전광판을 보면 스코어와 함께 유독 파울개수가 많은 도훈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선수교체를 하면서 체력세이브라던가 파울관리를 했었으나, 속공이라던가 슛 찬스를 쉽게 주지 않기 위해 파울을 쓰다보니 이제는 퇴장 문턱인 4파울이었다.
접점인 경기 속에서 마지막 파울을 안쓰려고 안간 힘을 써도 상황에 따라 차라리 파울로 끊는 수 밖에 없을때가 있었다. 혹은 의도치 않은 플레이로 파울을 얻게 되거나. 삑, 휘슬이 불린다. 마이크에서는 유도훈 5반칙 퇴장. 이라는 안내가 나왔으며 같은 팀의 벤치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상호야 나가자.”
“넵”
기상호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발목을 돌리다 코트에서 벤치로 들어오는 도훈과 하이파이브 하였다. 하, 만만치 않네. 부탁한다. 그런 감상은 들으며 매치업 상대인 최종수쪽으로 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 멀끔한 자신과는 다른 땀 투성이의 얼굴, 입가에는 뜨거운 숨이 나와 경기장의 열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오늘 종수햄이 몇분정도 뛰었더라. 기상호는 경기장에서 보였던 그의 출전시간을 어림잡아 계산해 보았다. 평소보다 많은 출전시간과 함께 그의 플레이를 떠올리자면 이쯤이면 지칠만도 하다는걸 추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보는 최종수의 얼굴에서는 지친 모습 보단, 그래 웃는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몇년 전 경기장에서 저한테 실실 웃지 말라고 하던 종수햄 듣고 있나요. 지금 본인이 완전 웃고 있는데요. 기상호는 그 옛날일을 떠울리며 속으로 투정부렸다. 사실 시샘이 나니 괜히 생각나는 것도 있었다. 그래, 경기가 즐거우면 웃을수도 있지. 이번시즌 앞선 두개의 경기동안 지다가 이제는 거의 접점에서 승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웃을만도 하지. 기상호는 여태 잘 안보였던 최종수의 표정에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거라고 여기고 싶었던 것에 가까웠지만.
최종수의 웃는 얼굴에 대한 진상이 어찌 되었건 기상호가 할 일은 수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도훈형이 체력을 깎아놨다고 해도 최종수는 최종수였다. 움직임을 몇번 예측하고 막아선다 해도 과감하게 슛을 던지면 그게 들어간다.
득점을 주고받는게 지속되고 누구 하나가 스코어를 벌리지 못하다보니 클러치 상황의 연속이었다. 기상호는 제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은 오로지 최종수를 막아야 하는, 그리고 이 경기에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못 막으면 안되는데. 못막는 대상이라고 해도 막는걸 어떻게든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줄어드는 출전시간을 늘리고 벤치에 있는 나 자신이 그래도 어떤 부분에서는 팀에 잘 맞는 조각임을 알려주려면…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를 막아서서 내가 유의미한 수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라는걸 알려주는 것. 그렇기에 당연히 시선은 저가 막아야 할 최종수에게로 고정이 되었고, 그 고정된 시선에서 보이는건 자꾸 저를 마주하면서 최종수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 진짜 즐겁나보다. 하긴 즐겁겠지. 팀의 에이스니까. 뭘 해도 출전시간 줄어들 걱정도 안하고 보여줄 게 많은 사람이잖아. 게다가 지금은 혼자 농구를 잘 해서 팀이 진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최종수라는 선수를 각인 시켜줄 수 있잖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 울렁거리는 감정. 그 기분과 함께 경기에 임하며 아득바득 이를 꽉 물어가며 최종수를 마킹하고, 주변으로 시야를 넓혔다. 대체 오늘은 뭘 먹고 경기에 뛰는건지 최종수는 그 길고 긴 출전시간동안 집중력을 놓는 일은 없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울 LC라는 팀에서는 그 집중력의 틈이 있었다.
저긴 매 경기마다 미스 나던데. 기상호는 최종수가 아닌 다른 팀원들로 시선을 돌렸다. 최종수에게 공이 투입되기 전, 바로 뚫릴 것 같은 사람들 사이로 헬프 디펜스를 가며 공을 채갔다.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수비를 한번 성공하고 그대로 공격으로 이어나가니 원포제션 게임이 투포제션으로 늘어났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팽팽하게 진행되는 4쿼터, 점수 하나에 환호성이 울리고 실책 하나에 아쉬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접점 끝에 승리를 가져가는건 수원 ST였다. 하마터면 연장전까지 갈 뻔했네. 기상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깊게 숨을 내뱉었다. 헬프디펜스 가랴, 최종수 마킹하랴 몇분 안 뛰었을 뿐인데 체감상 출전시간은 10분을 넘긴 것 같았다.
“이젠 악수 안하냐?”
승리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숨을 고르며 제 팀에 있는 형들에게 가려던 중 후련한 표정의 최종수가 다가오자 기상호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악수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저번 시즌에는 하는 내내 다 쿠사리 줬으면서. 오늘은 왜 이런대. “거절 당해서 안하려고요.”
사실 악수 안하냐는 말을 들었을때 멋쩍은 미소 지으면서 먼저 손 내밀고 좋은 경기였다고 웃을법도 한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그러기가 힘들었다. 아니 오늘뿐만이 아니라 다른 날에도 그럴 것 같았다. 최종수의 그 웃는 얼굴이 떠올리면 괜히 심통이났다. 여유롭다고 해야하나. 팀이 졌어도 개인 점수는 다 남으니까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점수차가 얼마 안벌려져서 다음에는 이길 수 있는 확신이 있어 그런건지. 누구는 그런 여유 부릴 생각도 없이, 점수를 남길 수 없는 플레이를 하며 피드백 하나와 자신의 플레이가 반영된 출전시간에 매달리는데.
퉁명스러운 거절이었지만 최종수는 아무렇지 않게 그래? 라는 말을 남기며 제 벤치석을 향해 갔다. 아무런 타격 없는 꼴을 보니 기분이 더 이상했다. 오만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상호는 등을 돌리고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얘들아 자는거 아니지?”
“넵.”
밤10시. 당연히 잘 리가 없는 시간이지만, 운동을 하느라 지친 선수들이라면 잘 수도 있을 시간이기도 했다. 불시검문이랍시고 수원 ST의 주장 김세형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성준수와 기상호의 방 문을 벌컥 열고 찾아왔다. 한번 방을 슥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니들 이러는거 나중에 다 자산이 되는거야. ”
국가대표 되면 해외 시차도 적응 해야 하잖아. 아직 꿈꾸지도 않는 먼 이야기에 둘은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이만 간다. 12시까지는 깨어 있어야 한다? ”
쿵 하고 숙소 방의 문이 닫힌다. 그래서 왜 갑자기 누가 뭘 하는지 신경도 안 쓸 10시에 불쑥 찾아와서 자는지 안자는지 감시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내일 할 경기인 농구영신 때문이었다. 제야 행사와 농구를 어거지로 맞추다보니 10시에 경기를 한다는 1년에 단 한번뿐인 경기.
이번 농구영신은 부산 실내 체육관에서 부산 TX와 수원 ST가 대결을 펼치기 때문에 수원 ST의 어린 선수들은 먼 부산에 와 원정 숙소에서 10시에 자나 안자나 감시까지 받게 되었다. 사실 경기 시간 적응한다는건 핑계고 반쯤은 그냥 재미삼아서 괴롭히는것 같았지만.
사실 늦은 밤까지 깨어 있는것은 괜찮았다. 당장 몇일 후가 경기이기 때문에 연습때 몸을 많이 굴리지도 않고, 개인연습을 늦은 시간까지 하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피곤하다는 이유로 일찍 잘 일도 없었으니까.
“근데 진짜 할거 없네요. 준수햄은 뭐해요?”
“NBA영상.”
“저도 경기 영상이나 볼까 .”
단 한가지의 흠이 있다면 10시에서 12시동안 꼼짝없이 깨는 루틴을 만드려고 하니 심심했다는 점.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게임을 하기에는 눈치보이고. 경기영상을 보자니 최근 다른 팀들의 경기영상을 뚫어져라 보면서 분석하는게 매번 하는 짓인지라 이젠 경기영상을 보는 것 만으로도 정신이 피로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며 인터넷 글을 보는것도 잠시, 기상호는 벌떡 일어나 두꺼운 겉옷을 챙겨 입었다.
“어디가냐?”
“그냥 간단하게 산책이라도 좀 하려고요. ”
이대로 누워 있으면 괜히 잠 들것 같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며 나갈 채비를 하니 성준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기상호를 한번 쳐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늦게 돌아다니지는 마”
“넵 12시 까지는 올게요.”
그래. 기상호는 성준수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방 문을 열어 숙소를 나설 수 있었다. 물론 숙소를 나오는 길에도 마주친 형들에게서 질문을 받긴 했다. 어디 가냐. 잠깐 시간때울려고 산책이요. 부산이라 친구만나는건 아니고? 장난섞인 의심도 받았지만 제가 친구가 어디 있다구, 형들 뿐인걸요. 최대한 불쌍한 척 말하니 다들 픽 웃으며 날이 추우니까 추우면 얼른 돌아오라는 조언, 혹은 너무 늦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숙소 밖, 번화가는 아니지만 적당히 가로등이 놓여진 길목을 걷다보면 가까운 거리에 편의점이 있고 늦게까지 운영하는 음식점들이 몇 보였다. 기상호는 멍하니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사실 부산에 원정 올때마다 음식점을 뚫어보네 하면서 오갔던 길인지라 살던 동네가 아니여도 낯설지 않고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귀에 이어폰을 꽃아 핸드폰이 들려주는 추천 음악을 들으며 머리를 비우고 있을 즈음 누군가가 제 어깨를 두드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누구지? 이어폰 한쪽을 빼내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호가?”
“재유햄?”
햄이 우째 여기에. 기상호는 눈을 깜빡깜빡 하며 저와 마찬가지로 두꺼운 패딩을 입고 홀로 나온 진재유를 보았다. 그야 여기는 부산이고, 재유햄은 부산 tx였으니 길을 간다면 아주 우연의 확률로 마주칠 수야 있긴 한데 어째 이 시간에 마주쳤지. 의문을 가진채로 그의 인상착의를 보아하니 딱 외투만 입고 나온 어째 저와 비슷한 목적으로 나온 걸 추측할 수 있었다.
“니도 농구영신 때문에 루틴 만든다고?”
혹시나는 역시나가되어, 둘이 비슷한 목적으로 길을 가다 마주친걸 알았기에 마주보며 풋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햄네도 10시되면 막 형들이 와서 잠깨우고 그런가요.”
“말 마라. 우린 형석 형이 다 깨우고는 집합시킨다.”
“와, 진짜요?”
“그러면서 뭐 시키는줄 아나? 팀 단합이라고 게임 시키지.“
그래도 뭐 어디 보드게임이나 카드게임 같은거 정도라 다행이긴 한데. 인원이 많은 탓에 적당히 때 되면 하는 사람만 한다고. 사실 그런류의 게임들은 나름 반응이 재미있는 사람들끼리 해야 재미있는법인지라 얌전한 진재유의 성격상 그런 게임에 참여해도 남들이 기대할만한 반응은 없었던 지라 그냥 선배들끼리 노는걸 구경하다 잠이나 깰 겸 나왔다고 했다.
“그나저나 잘 지내고 있제?”
“네? 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죠.”
어쩌다 만나게 되었는지, 그런 사유를 다 알게 되고 나서 나온 다음 이야기는 언제나와 같은 근황 묻기였다. 경기때야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는 화제였지만, 이런 때 만나서 말 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다르고, 할 시간도 더 늘어나는 편이니까. 기상호는 침을 한번 삼키곤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날 추운데 우리 뭐라도 마시면서 애기할까요. 각자 잠을 깨려고, 심심해서 하게 된 산책은 노선을 틀어 근처의 편의점으로 향하였다. 온장고에 진열된 따뜻한 캔 음료를 하나씩 사들고 나와 편의점 앞에 비치된 야외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말을 꺼낸건 진재유였다. 니 경기 활약 잘 보고 있다. 겉치레로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도 듣고. 기상호는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활약이라. 과연 활약을 했을까? 기상호는 최근 저의 경기 출전시간을 생각해보았다. 길어야 십분 남짓한 시간. 그리고 그 시간에 이뤄낸걸 생각하자면 개인의 득점보다는 몇 안되는 리바운드와 스틸의 개수가 눈에 띄었다.
애초에 수비라는게 숫자로 치환되지 않는 구석이 있긴 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자신감이 없던 것도 있었다.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숫자는 줄어들고 있는 셈이니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이제 도훈이 형 복귀하니까 출전시간은 줄어들고. 그렇다고 제가 공격에 강점이 있는건 아니고.”
“다들 그렇게 하면서 다른 기술 장착하거나 강점을 만들어나가는거지. 내도 엔트리 빠질때 있다.”
“햄이요?“
부산 티렉스가 가드 없는 팀도 아니고. 국대가드 조형석도 있지. 내는 뭐 체력 분배용으로 나올 기회 얻는거지만 그마저도 감독 전술따라 엔트리 멤버가 다 달라지는거 아냐. 니는 엔트리 꾸준히 오르는 것만으로도 니가 농구 잘한다는거 알아야 한다.
그말을 들으니 방금 전의 말이 배부른 투정같아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그 말대로 출전시간 줄어들고 있다. 유의미한 결과를 잘 못보여주네 해도 꾸준히 엔트리에 오른 것 만으로도 어떤 기대를 받고 있는건 맞긴 했다.
다만, 점점 줄어드는 입지 때문에 불안이 가중된 탓에 땅 파는 생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아서. 정말로 이것만으로도 괜찮은걸까. 기상호는 아랫입술을 잠깐 깨물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의 이유를 떠올려봤다.
“아무튼 니도 생각 많아서 땅 파는건 내랑 닮았나보다.“
“네?”
“꼭 니 말하는 걱정 들어보면 내가 하는거랑 비슷해서 하는 말이다.”
더해서 비슷한 때 농구를 잘 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해서 관둘려고 하고. 어느샌가 이야기는 과거의 회상으로 돌아갔다. 고민의 결은 좀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비슷한 고민을 끌어안고 길을 지속해서 갈지, 아니면 다른 길로 가야할지 선택의 기로에 갈려있었던 때.
나중에 술마시다 옛날이야기를 안주거리 삼아 말하다 보니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웃으면서 넘겼던 때를 떠올렸다. 형도 그랬어요? 하면서 말하던 때. 그래도 우리 끝까지 농구를 해서 다행이다. 같은 말로 좋게 잘 넘어갔던 시기. 그렇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그때야 그래도 쌍용기 우승하는 과정에서 잘 이겨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이 길을 지속할 수 있는지의 고민이라서. 기상호는 입맛을 쩝 다시며 다 마신 음료의 캔을 꽉 쥐었다. 사실 학생때야 학년이 올라가면 코트위에 설 기회를 얻게 되지만 프로에서는 위 선배도 제쳐야하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과도 경쟁해야하고 그렇잖아요. 막막해지는 현실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왓다. 물론 현실이 그렇다보니 어디 엔트리에도 못 올리고 프로선수. 라는 타이틀만 얻고 사라지는 선수들이 있다는걸 직접 봐 알게되었으니 기상호는 저의 처지가 남에 비해 배부른 소리라는건 알고 있었다.
다만, 배부른자라 해도 어떤 상황에서는 결핍을 느낄 수도 있는걸.
“뭐 어쩌겠냐. 이리 한탄해봐야 우리들이야 내일 아침 일찍 나와서 슛 던지는 것 밖에 답 없지 않나?.“
“그러게요.”
내일을 미리보기로 본 듯한 말에 기상호는 픽 웃었다. 사실 막막한 고민의 끝은 결국 이런 한탄할 시간에 당장 뭐라도 더 해보자. 라는 결심으로 귀결되긴 했다. 누구보다 더 부지런하게 한다면 그래도 나아지는게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아침 일찍 나와서 연습하고 밤 늦게까지 남아있다면 그래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겠지 하는 마음. 물론 노력만으로도 될지 의심과 공존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저 멋쩍은 미소로 적당히 수긍하는 척 하니 진재유가 다 식어버린 음료를 다 마시고는 캔을 찌그러트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지만 상호 니는 이번에 혼자 땅 파지 말고 주변 사람들한테 털어놓는 걸 좀 해보는것도 낫겠다.”
니 농구 그만둘거라고 한거, 감독님만 알고 다른사람들 다 몰라서 얼마나 섭섭해했는지 알잖아. 뭐 그때야…기상호는 말 끝을 흐리곤 지상고 멤버들에게 한 소리 들었던 때를 떠올려보았다. 쌍용기 결승이 끝나고 나서 너 사실 농구 그만두려고 했었어? 질문으로 시작된 말은 왜 우리한테 말 안하려 했나, 고민이 있다면 말이라도 해줘야지. 하는 섭섭함으로 그리고 그 끝에는 너무한다는 말과 함께 가벼운 응징의 시간이 있었었다.
“사실 그땐 말하면 괜히 분위기 나빠질 것 같아서 엄두도 못낸거죠.”
기상호는 뒷목을 어루만지며 괜한 변명을 해 보았지만 바로 반박이 들려왔다.
“그건 니 생각이고 ”
완전히 늦은 후에야 니가 했던 고민 들었으면 다들 그때 들어줬다면~ 같은 후회 할텐데. 그러게요. 기상호는 픽 웃고는 제 등짝이 남아나지 않았던 때를 떠올렸다. 팔 부상인데도 부상당하지 않은 팔로 열심히 때려가며 서운함을 드러냈던 정희찬이 말했다. 고민이 있으면 좀 말해달라고. 친구인데. 그 다음은 김다은이 한마디 얹어주었다. 님 적어도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 할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거임? 우리의 관계는 드립뿐이었던거임? 그리고 뭐 형으로서 신뢰를 주지 못했던 걸까 미안해한 나머지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걸 생각하면 저 혼자 삽질하면서 결정하는 것보단 누군가에게 말을 해보는게 낫다는 뜻이긴 한데. 기상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사실 고민거리를 털어놓은 짬도 안되어서 말로 표현하지 않고 속으로 앓는채로 냅두기도 했었다. 프로 팀이 지상고처럼 6명이 똘똘 뭉친 상태에서 너 없으면 농구부 망하니까 인원수라도 채워라. 하는 상태도 아니고. 더해서 저의 존재감이 팀에서 그리 큰가? 하면 또 아니었다. 내가 고민 한다고 해서 뭐 크게 달라질 것도 아니고.
그걸 알았는지 맞은 편에 앉은 진재유가 한마디 찌르듯 한마디 내뱉었다.
“니 또, 땅 파는 생각중이제?”
“에 우예알았어요.”
“말하지 않았나. 니랑 내랑 땅 파는건 똑같다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나름 경험자니까. 혼자 앓아보는 것보단 그래도 누군가에게 말하면 정리가 되는 것도 있으니 그래도 용기는 내봐라. 누가 도움이라도 주겠지.
아직도 기상호의 마음 한켠에는 과연 저가 가진 고민이 털어놓는다고 해서 괜찮아질까. 도움을 받을수는 있을지. 되려 역효과가 나는건 아닐까. 그런의심도 들었지만, 나름 저를 생각하는 선배의 조언이었다. 듣는다고 해서 나쁠건 없으니까. 기상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늦었다. 가자“
“네 재유햄도 낼 봐요.”
많은 수다를 떤 것도 아닌데 어느샌가 시간은 11시 반을 넘겨 각자 숙소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서로 갈림길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가로등만이 길을 비추는 길목을 걸어가 숙소에 도착하자면 12시에 가까운 시간인지라 로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고요한 복도에는 저의 발소리만 들려왔다. 혹여 일찍 자는 형들을 깨울라. 조심스레 발을 놀려 겨우 제 숙소 방 문을 열면 침대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는 성준수의 모습이 보였다.
“왔냐? 별 일 없었지?”
“별 일은 없고, 그냥 산책하다 재유햄 만났어요.”
“그래?”
성준수는 별 일 아닌듯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주며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하였다. 딱 자면 좋을 시간이라, 기상호가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와서 침대에 눕는걸 기다려주었다. 이제 불 끈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방의 불이 꺼지고 고요함과 어둠이 찾아왔다. 기상호는 뜬 눈으로 천장을 잠깐 보다가 건너편 침대에서 자는 성준수에게 말을 걸었다.
“그 준수햄.”
“왜.”
“햄도 뭐, 엔트리나 실력에 대한 고민. 같은거 하나요.”
평소라면 이런 때에 하는 말들을 한번 들어주고 별 가치가 없는 화제라면 잠이나 자라는 퉁명스러운 말로 대꾸하는 성준수였지만, 나름 진지한 고민을 묻는지라, 답이 나오기까지 시간은 조금 걸렸다.
“누군 그런거 고민 안하는줄 아냐? 다들 해.”
애초에 주전 못단다는 이야기 듣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전학왔었던거 모르냐? 아 맞다. 기상호는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근데 갑자기 왜. 안 하던 말을 하고.”
“그냥 요새 생각이 많아져서. 이제 팀에 도훈이 형 있어서 수비도 안정적이고 팀도 잘 나가잖아요.“
여기서 제 할일은 얼마 없어 보여서. 그냥 내는 여기까진가. 그런 생각 자주 들어버리니까. 기상호는 내재된 불안을 천천히 풀어나갔다. 분명 그가 상무에 있는 동안은 자신이 팀의 수비자원이자 식스맨으로 활약했었다. 이대로 자리잡아서 프로의 생활을 이어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상무로 갔던 선수들이 복귀하고 원래 있었던 자리를 찾아가는건 당연한 수순인지라.
기상호는 몇분 안되는 출전시간을 떠올렸다. 체력 세이브 용, 이라던가 팀의 수비전술의 변수. 같은 말로 투입이 되었지만 그걸 생각하자면 그런 용도의 선수라면 나 말고 다른사람도 가능한거 아닌가. 열심히, 최선을 다 해서 뛴다고 해도 만족스러운 결과일까.
“야. 상무 갈 사람 땜빵하려고 선수 뽑아서 키우는구단도 있겠냐?”
물론 드래프트때 다들 신규 선수를 기존에 있는 선수들의 후임처럼 생각하고 뽑기야 하지. 그런데 그거 앞으로를 같이 잘 할 생각하면서 뽑지 나중에 버릴 생각해서 뽑겠냐. 그냥 잘 할 생각이나 해. 허튼 생각하지 말고.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 끝에는 내일 밤 경기부터 잘 할 생각 하라는 조언이 있었다.
“컨디션 관리해야지.”
그래야 내일도 잘 뛸 수 있잖아. 그러게요. 기상호는 적당히 수긍하며 눈을 감았다. 그래, 형들의 말대로 내일 슛이나 잘 던질 생각하면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지.
그래서 다음날.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로 늦은 저녁부터 경기 전 루틴을 시행하였다. 테이핑을 감고, 스트레칭을 한 후 슛을 던지면서 감을 찾아본다.
정규리그의 경기지만 농구영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다보니 여기저기서 촬영을 하기도 했다. 지역 방송 인터뷰가 있는가 하면 (물론 이런 인터뷰는 액면가가 있는 선수들의 몫이었다.) 새해 인사 좀 찍자고 구단 유튜브에서의 촬영, 혹은 셀프캠 영상. 그리고 농구영신 관련 영상을 찍어야 하는 협회 유튜브 채널의 인터뷰.
“기상호 선수님, 올스타 컨텐츠 영상이 화제된거 아시나요.”
그래서 유튜브 채널의 타겟이 된건, 올스타 투표 마감을 앞두고 공개된 영상에서 화제가 된 기상호였다. 분명 기획은 예능게임을 하면서 선수들의 캐릭터성을 홍보하는 것이었는데 어째 둘의 게임은 가지고 있던 캐릭터성을 부술 정도로 살벌하고 치열했다고.
“그래서 진실은 어떤건가요?”
“네?”
“두분이 만난다면 비시즌때 찍었던 촬영의 모습인지, 아니면 저번 영상때의 모습인지. 다들 궁금해 하시더라고요.”
분명 리그 시작 전에 공개된 영상에서는 나름 사이좋게 지냈는데 왜 저런대. 싸우기라도 했나. 같은 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싸우기는 무슨, 그냥 게임이라는 틀 안에서 진행을 하다보니 서로 지기 싫어하는 성질 탓에 그런 모습을 보인 것 뿐인데.
“그냥 게임이라 그렇게 한 거에요. 실제로 만나면 그냥 비시즌때 만난 그 모습 그대로고요.”
“오 그러면 시즌중에도 따로 만나나요?”
“뭐 만나기야 하죠?“
경기때 자주 붙고 트래시토크도 하면 대화도 하고 만나는것도 맞는거 아닌가요. 사실 그 전에 개인적으로 따로 만난 적이 있긴 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적당히 둘러대었다. 재미있는 답이었는지 PD가 웃음소리와 함께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저멀리 있는 최종수 선수님께 신년 인사를 하신다면요?”
“요새 막기 힘들어서 종수햄의 컨디션 지금의 제가 빼서 쓰고 싶네요.”
“그거 새해인사 맞나요?”
“그야 새해에 덕담만 들으면 심심하니까… 이런 말도 있어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요.”
당사자가 없으니 말은 편히 나왔다. 사실 당사자가 있어도 비슷한 말을 할 법도 했지만. 그렇지만 그 신년 인사는 좀 진심이기도 했다. 어제 경기한거 보니까 완전 날아다니더만. 물론 그렇게 바란다고 해서 컨디션이 쑥 하고 좋아지는건 아니었다.
부산 TX와의 경기. 여전히 기상호는 스타팅은 아니지만 엔트리에 들었고, 그렇다고 해서 긴 출전시간을 가진건 아니었다. 수비야 늘상 하던대로 했었지만, 제아무리 수비가 성공해도 공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인지라.
오픈찬스가 났을 때 기상호가 던진 공이 림을 맞고 튕겨나간다.
진짜 종수햄 컨디션 빼다쓰고 싶네. 기상호는 제가 던진 슛이 불발되자 입술을 깨물며 백코트를 하러 달렸다. 사실 이런게 한두번이 아닌지라 속이 터지는건 당사자였다. 수비 성공해서 속공을 전개하려고 해도 상대팀에 빠른 속도의 선수가 몇 있는 덕에 속공 득점은 무리. 공격 전개를 하려고 하면 슛은 잘 안들어가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인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공격이 불발되어 상대방의 공격이 전개되는 지금은 딱 봐도 속공찬스인지라 기상호가 파울로 끊은 뒤 손을 들어본다. 휘슬이 불림과 동시에 선수교체가 선언된다. 성준수가 코트위로 나가며 기상호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야 당연한건가. 수비에서 뭔가를 보여준다고 해도 공격을 실패했으니 차라리 공격을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낫겠지. 기상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코트 위에서 벤치로 걸어나갔다.
“상호야 수고했어.”
“슛 감 안좋으면 어쩔 수 없지.”
적당한 위로와 함께 스포츠 타올과 수분보충을 위한 물을 받으며 기상호는 벤치에 앉아 경기의 양상을 보았다. 언제든지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팀인 부산 TX였기에 접점인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접점의 끝은 얼마 안되는 점수차로 수원 ST의 패배였다. 게임이 몇십초 남은 상황에서 마지막 작전타임을 써가며 공격 패턴을 지시했지만 마지막 공격이 안 들어간 탓이었다. 몇점차의 패배라는 결과를 받아들이니 자꾸 안들어간 슛이 생각났다. 그게 들어갔다면 이겼을텐데. 같은 그런 생각.
물론 이미 다 끝난 경기에서 안 들어간 공을 생각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지만, 그런 미련한 짓을 할 만큼 점수차가 아까웠다. 그리고 그 점수를 놓친게 자신이라 자책감이 드는 것도 있었고.
“그러면 농구영신의 제야행사가 있겠습니다.”
경기가 끝난 직후, 새해를 알리는 12시에 맞춰 진행되는 제야행사로 이어졌다. 커다란 종이 준비되고 온갖 높으신 분들이 카운트다운에 맞춰 종을 친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서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서로 주거니받거니 했다. 그렇게 농구영신이 끝나고 나서야 퇴근길을 밟을 수 있었다.
“자. 시간도 늦었으니까 빠르게 훑고 지나가자.”
그렇다고 해서 바로 퇴근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제야행사가 끝난 후, 원정팀의 락커룸에서는 경기 직후에 가질 피드백 시간이 평소대로 진행되었다.
“일단 우리 이번 경기의 수비는 좋았지만 알지?”
“네.”
다들 직감하듯, 피드백은 수비가 아닌 공격에 관한 이야기였다.
“상호야. 선수마다 슛감 안 좋을때가 있다는거 너도 잘 알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 말을 시작으로 이번 공격에서 어떤점이 아쉬웠고 뭘 보강할지, 앞으로 어떤 플레이를 보여줘야 할지.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 주 무기가 3점이지만 안 들어가면 그거 말고 득점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도 염두에 둬야지.
다른 선택지. 다음을 기약하는 말이었지만, 아쉬움이 남은 감정은 머릿속에서 그 다른 선택지를 선택했을때의 시뮬레이션이 떠올랐다. 만약에 이때 공격을 성공했다면 지금 분위기가 달라졌을텐데.
“다음에는… 더 잘할게요.”
기상호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니 수비 좋은거 다 알아. 그렇지만 공격이 안되면 성공한 수비가 아쉬워지잖아. 감독의 피드백은 기상호의 차례를 넘겨 다음 사람들에게로 넘어갔는데 어째선지 그 다른사람의 피드백도 저의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모든게 제 탓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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