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치카]이치카의 다이어리

키사라기 어텐션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다, 다 됐어요..."

"아, 고마워."

총알에 스쳐 생겨버린 상처에 고운 붕대가 칭칭 감겼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아프긴 해도 제때 치료했고 약도 잘 발랐으니 흉터만 안 생기면 된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이쪽이 아닌 저쪽이려나... 마리는 조금 서툴긴 해도 열심히 내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거까진 참 좋은데 왜 나랑 눈조차 맞춰주지 않는 걸까. 백화점 때처럼 덜덜 떨거나 하진 않지만, 말도 좀 더듬고 고개는 푹 숙이고 있고. 치료받을 때도 내가 아파서 신음을 흘리자 몸을 심하게 흠칫거려서 괜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초면이니까 그런 거라고 해도 괴롭힌 것도 아닌데 이건 너무 정도가 심한 것 같다. 그래도 도움을 받았고 계속 이런 상태는 조금 곤란하니 친한 척이라도 해볼까.

"저기 이름이 마리 맞지?"

"아, 아! 네넷!"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음... 인사가 좀 늦었지만 나는 「시라키 이치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이, 이쪽이야말로... 마, 만나서... 반가워요... 이, 이거 갖다 놓고 올게!"

더듬더듬 모기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던 마리는 더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구급상자를 들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뛰어가다 넘어졌지만 그래도 금세 일어나서 다시 걷는 모습이 왠지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급급해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 백화점의 일로 나한테 겁을 먹기라도 한 건가? 기억을 되짚어 봐도 딱히 겁을 줄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 혹시 「미안하지만 지금은 날 믿고 얌전히 있어 줘.」라고 했던 것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차갑게 나왔다든지, 아니면 너무 갑작스러워서...

"오늘 마리 말 잘하네?"

"키사라기쨩한테도 그렇고 오늘 오는 신입들이 마음에 들었나 보지~ 잘됐네."

"...저게 말 잘하는 거야? 겁먹은 게 아니고?"

"마리쨩은 낯가림이 상당히 심하니까 상처받지 마. 나한테도 그랬거든."

키사라기는 그렇게 말하며 해맑게 헤헤 웃었다. 지금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잡지나 TV에서나 봤던 아이돌과 얘기하고 있으니 조금 신기하다. 그것도 화려하고 예쁜 무대 의상이 아니라 털털하고... 조금 이상한 사복을 입은 채라 더욱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많고 많은 단어 중에 왜 하필이면 아훔이란 말이 쓰인 후드티를 입은 걸까. 뜻이 아마 만물의 시작과 끝이었나? 아니면 들숨 날숨?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나. 남의 코디에 뭐라 할 생각도 없고.

키사라기 말고도 나처럼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 애들과 그리고 여기, 이 아이들이 아지트라고 설명한 이곳도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긴 직사각형 모양인 내부는 다다미로 따지자면 15개 정도의 넓이일까. 어떠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쪽엔 방이 네 개나 더 있는 모양이다. 사실상 메카쿠시단이 생활하는 곳인지 TV와 가스레인지, 컴퓨터와 냉장고 등 일반 가전들도 마련되어 있었다.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에서 사람이 살고 있단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역시 아지트라는걸 강조하듯 생활용품들과 상반되는 외국의 고서들이 꽃혀있는 낡은 책장이라든가 앤티크 풍의 찻잔, 지구본, 그리고 천장에 얽히고설킨 파이프에 매달려 있는 전구 등이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자칫 평범해질 수 있었던 내부에 신비로운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누가 봐도 「아, 여기는 아지트구나.」라고 여길 만한 곳이랄까. 아지트다운 아지트라니 말이 조금 이상하네.

"너한테는 치료까지 해줬으니 마리로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기 신기록일지도 모르겠군."

"그 정도야?"

"하하, 뭐 금방 익숙해질 거야."

여기 이 아지트도 그렇고, 아까 각자의 능력을 활용해 테러리스트들을 격파한 일들도 그렇고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메카쿠시단」이란 것은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아까 같이 위험을 겪어봐서 그럴까? 이 애들이 그냥 친구나 동료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런 일을 겪고 상처까지 입었으면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놀라고 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하단 얘길 많이 들어왔지만, 설마 목숨이 위험했던 순간에도 침착할 수 있을 줄은. 아마 혼자가 아니라 메카쿠시단이 함께 있었다는 게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사실 실감이 안 나서 그런 것도 있다. 지금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그냥 친구 집에 놀러 온 듯한 분위기고, 내 눈앞에 있는 이 애들과 테러리스트를 격파했다니 뭔가 꿈을 꾼 기분이랄까. 솔직히 메카쿠시단이란 단체 자체가 수상하단 것 뿐이지 개개인으로 따지자면 그냥 평범한 청소년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키사라기가 초인기 아이돌이란 것과 나를 포함한 모두가 붉은 눈의 능력자라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그럼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할게. 아까도 말했지만 난 시라키 이치카야."

"그럼 우리도 정식으로 인사를 해볼까~ 크흠! 잘 오셨습니다! 우리 메카쿠시단에! 지난 작전에 참가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지금의 활동으로는 경찰의「눈」을 피하고 위험한 시설로 들어가거나, 거기서 여러 가지로 빌리거나 하고 있죠. 오늘처럼 테러리스트들을 상대한 건 처음이지만! 이야, 이야~ 무척 재밌었어요."

"카노. 제대로 설명해."

"네네~ 어쨌든 자세한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일단 간단히만 설명하자면 여기는 아까 말했다시피 우리들의 아지트. 보시다시피 대놓고 아지트같이 해놓은 건 여기 존재감 없는─"

"어이!"

"앗, 미안, 미안. 우리의 단장 「키도」의 취미예요. 멤버로는 저 「카노」와 당신 옆에 앉아있는 신입 「모모」! 그리고 구급상자를 갖다 놓으러 들어간 「마리」와 「세토」라는 또 다른 단원이 있습니다. 어쩌면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 아까 활동내용을 설명하긴 했지만, 보통은 딱히 하는 것 없이 느긋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곳의 단원들은 모두 「붉은 눈」 소유자랍니다. 설명 끝~!"

"뭔가 텐션 높은 설명 고마워."

"별말씀을!"

고맙다고는 말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건 사실이다. 백화점의 일이야 너무 정신이 없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도운 거지만 이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리고 경찰의 눈을 피한다든가 위험한 시설로 들어간다든가 위험한 활동을 소개하다니 어쩌라는 걸까. 「우린 이렇게 수상하고 위험한 단체야!」라고 생각하게 만들 셈인가. 만약 의도가 그렇다면 정말 훌륭하다고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까 백화점에서 각자 능력을 십분 활용한 걸보면 활동 내용이 100% 거짓말 같지는 않다.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 이 애들만 봐선 별로 위험한 것 같지도 않고 보통은 딱히 하는 거 없다고는 하지만 항상 이런 식이면 무척이나 곤란한데. 그렇지만 여기엔 붉은 눈의 능력자가 많이 모여있다. 그동안 추측조차 할 수 없었던 이 눈에 대해서 알 수 있을지도. 아니, 그래도...

아아... 이런 복잡하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인데... 이미 충분히 휩쓸린 상태에서 이런 생각하는 건 바보 같지만. 살짝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으니 단장이라던 키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럽겠지만 일단 설명을 들었으니 우리로선 그냥 돌려보내 줄 수가 없어. 미안하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딱히 여기에 들어와도 상관없고. 그냥 좀...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뭔가 굉장히 재미있는 단체네요!"

나와는 전혀 다르게 활기찬 목소리가 유리 테이블에 놓인 터치형 휴대전화에서 들려왔다. 백화점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 「에네」였다. 두 눈을 반짝거리며 신이 난 듯 볼을 붉히고 있는 그 모습은 정말 귀여운 미소녀이지만 하필이면 휴대폰 속에 있다는 게 큰 미스다.

그것보다 저거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멋대로 A.I라고 단정 짓긴 했지만, 휴대전화와 컴퓨터 속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프로그램의 소녀라니. 일본의 과학 기술이 그 정도로 발전했던가? 이 정도의 기술력이면 세계를 뒤흔들만한 이슈가 되고도 남았겠지만, 현재 세계가 조용한 것을 봐선 비밀리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설마 안쪽 방에 누워있는 키사라기의 오빠가 만들었을리는... 없겠지. 겨우 고등학생이 세계의 과학자들이 만들지 못한 걸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도 총알 스친 걸로 기절해서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사람이. 내가 계속 에네를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에네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귀엽게 미소지었다. 정말 누가 만들었을까...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한 구현력인걸. 왠지 귀여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만들었을 것만 같다.

"어쨌든 이젠 각자 자기소개를 해보도록 할까. 우선 나는 NO.1, 단장 「키도 츠보미」. 백화점에서 테러리스트에게 들키지 않았던 건 내가 「눈을 숨기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쉽게 말하자면 존재감을 지우는 능력이지. 어째선지 너한테는 통하지 않았지만."

"번호 순서대로 하면 내 차례인가? 나는 No.3인 「카노 슈우야」. 「눈을 속이는 능력」의 소유자고 No.4는 도망치듯 사라진「코자쿠라 마리」. 메두사의 후예로 「눈을 마주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와 마리의 능력은 백화점에서 봤으니까 알 거라 생각하고 설명은 패스~"

"잠깐만, 메두사의 후예라니?"

"뭐, 우리들도 잘은 모르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에게「자신들은 메두사다」라고 들으면서 자란 듯해. 모친은 정말로 사람을 돌로 만드는 게 가능했던 모양이지만, 마리는 아까 봤다시피 움직임을 멈추는 게 다인 모양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아까 백화점에서 테러리스트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시간이 멈춘 듯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그 문자에서 눈을 뺏고 눈을 마주 친다는 건 모모가 모두의 시선을 끌고 그 시선을 마리가 마주 쳐서 석화시킨다는 뜻이었나보다. 이제야 앞뒤 상황이 맞아 떨어지며 의미불명이었던 문자의 내용 전부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메두사의 후예라니... 오늘 들었던 얘기 중에 제일 믿기 힘들다. 눈을 마주치면 돌처럼 굳어버린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고, 그 점이 메두사와 같긴 하지만 저런 소녀가 메두사의 후예라니...

"...그럼 메두사라는 신화 속 존재가 실존하고 있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하고 있었다, 겠지."

"응?"

"저 녀석은 여기 오기 전까지는 혼자 살고 있었어. 엄마도 아빠도 없이 말이야."

"....혼자서..?"

혼자서라니. 나와 같아...

이 두 글자가 마음 한구석을 찌르고는 마구 후벼판다. 부모님 없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모님이 없어서 얼마나 슬펐을까. 그리고 가족 없이 혼자서 그 얼마나 고독했을까...

「혼자」 아마 이 단어보다 외롭고 쓸쓸하고 비참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단어의 의미를, 마리의 기분을 잘 알고 있을 나는...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며 슬픈 눈빛을 짓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키사라기, 이젠 네 차례야."

"네? 아... 아! 그렇죠! 저기 만나서 반가워. 난─"

"너라면 알고 있어. 「키사라기 모모」잖아."

"에... 으응! 맞아. 앞으로 잘 부탁할게, 이치카쨩!"

"역시 너 아이돌 맞구나."

"그것도 초인기의 아이돌이라고? 뭐, 키도는 워낙에 둔하니까 몰랐겠지만... 아파, 아파!"

키도의 주먹이 정확히 카노의 옆구리에 날아가 박히며 분위기가 급반전되어 버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파 얼굴을 찡그리는 나에 비해 당사자인 카노는 말로는 아프다면서 얼굴엔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진짜로 아픈 거 맞긴 할까 싶긴 하지만 주먹이 제대로 들어갔으니 안 아플 리가 없다. 반응 보면 이건 그냥 일상이니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해도 통증이 익숙해질 리가 없는데? 아, 어쨌든 그건 그거고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짚고 넘어가야지.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나랑 키사라기 일단은 클래스 메이트니까."

"...에?"

내 말에 키사라기를 포함한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설마... 당사자인 키사라기도 몰랐던건가? 하긴 초인기 아이돌이라 등교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고, 왔을 때도 늘 사람이 엄청나게 몰려서 제대로 얘기해본 적도 없고, 스케쥴때문에 와도 금방 가는 일이 허다했으니 모를 수밖에 없겠지.

그건 그렇고 어쩔 거야, 이 분위기. 내가 못 할 말한 것도 아니지만 방금 그 말을 철회하고 싶어졌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야 겠어서 입을 뗴려던 순간.

"우와아아!!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응? 아니, 괜찮─"

"클래스 메이트도 못 알아보다니... 미안해, 이치카쨩!"

"괘, 괜찮다니까. 너는 아이돌 활동하느라 아주 바빴으니까 학교 별로 못 나왔잖아. 모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어떻게 클래스 메이트도 모를 수 있는 거지... 우으... 최악이야..."

갑자기 쏟아지는 키사라기의 사과에 이번엔 내가 더 당황해버렸다. 클래스 메이트란 단어가 이런 효과를 가진 단어였던가? 사과에 이어 자책을 하기 시작한 키사라기의 등 뒤에 음침한 기운의 「난 최악입니다 오로라」가 보이는듯하다. 뭐야, 그거. 내가 이름 붙이긴 했지만 기분 나빠. 어쨌든 실컷 우울해있는 키사라기를 보니 저 오로라가 나한테까지 전염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건 절대 사양이므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인 채 분위기를 띄우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말이야. 그... 단원이기 전에 우린 클래스 메이트니까 더 친하게 지내자. 학교 일 같은 것도 도와줄 테니까, 응? 키사라기."

"아, 응! 친하게 지내자, 이치카쨩! 이치카쨩도 편하게 '모모'라고 불러줘."

"아, 으응... 알겠어. 모모."

키사라기, 아니 모모의 요청대로 성씨 대신 이름을 부르니 아까의 「난 최악입니다 오로라」가 거짓말처럼 싹 사라지고 모모 주변이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변이 아니라 모모의 눈이 반짝거려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만. 이름 부르는 게 이렇게 강력한 거였었나.... 난 상대방의 요청이 없으면 끝까지 성씨로 부르는 타입이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니, 이건 모모가 특별한 걸지도. 모모의 텐션이 높아진 거야 좋지만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한 채 반짝거리고 아까 얼떨결에 잡힌 손도 조금 아려오기 시작한다.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부담스럽다. 좀 많이...

"오오! 여동생분 이건 새로운 백합인─"

"에네쨩!"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온 거야?"

"주인님 데이터에서요! 재밌는 게 참 많답니다! 보여주고 싶은데 여기선 무리이겠죠?"

"헤에~ 뭐야, 뭐야. 키사라기쨩의 오빠 그런 취미?"

"아, 아니에요! 아마도..."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확신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 걸 봤다면 더더욱 현실에서 막 내뱉을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백합이란 건... 당황해서 땀이 삐질 나온 우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네는 핸드폰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막연히 참 밝고 활발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백화점에서 들었던 말도 그렇고 아무것도 모른단 얼굴로 엄청난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에네를 보니 모모의 오빠 이 애한테 제법 시달릴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래도 엄청난 수준의 A.I인걸. 조금 탐날 수도.

"주인님 데이터는 말이죠~ 쓸 데가 참 많아요! 먹을 수도 있고 이리저리 던지며 놀 수도 있고 데이터로 주인님을 협박할 수도 있어요! 주인님의 성욕에는 한계라는 게 없는 모양이라서 음흉한 동영상이 진짜 많거든요!"

아까 한 생각을 정정해야겠다. 모모의 오빠 이 애한테 무지하게 시달리고 있다. 확실하게.

"뭐?! 음흉한 동영상이라니! 진짜?!"

"네! 주인님은 그때마다 꽤 잦은 빈도로 슬금슬금 방을 나가요!"

"크크큭... 음흉한, 푸훗, 동영상이라니... 아하하! 저 녀석 진짜 재밌네!"

"저기 그런 말 본인이 없는 데서 해도 되는 거야?"

"괜찮아요! 주인님이니까요!"

"이봐, 너희들 너무 시끄러워."

"악! 키도 아파, 아파!"

키도의 한마디와 카노에게 직격한 주먹에 시끄러웠던 아지트가 좀 조용해졌다. 역시 단장. 하지만 에네는 아직도 재미있는지 '푸흐흐' 웃음을 흘리며 휴대폰 안을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기분이 좋은 걸 티라도 내려는 건지 문자나 전화가 오지 않았음에도 휴대폰은 징징 진동을 울려댔다. 프로그램의 감정 표현은 저런 식으로 하는 것일까.

"사람이 많으니 역시 즐겁네요! 그런데 왜 주인님은 방구석에서 히키코모리짓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자신의 주인님을 두 번 죽이게 하는 말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자세히까진 모르겠지만 아마 장난 아니게 시달리고 있을 거다. 지금까지의 얘기나 백화점 컴퓨터를 단번에 장악한 걸 보면 자신이 프로그램인 걸 100% 활용하여 최선을 다해 자신의 주인을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 백화점에 온 것도 이 애가 협박해서 일수도. 저기 방안에서 기절해 있으면서 A.I 소녀에 의해 아낌없이 까이고 있는 모모의 오빠에게 조용히 애도를 보내준다. 아, 그렇지만 음흉한 동영상을 잔뜩 가지고 있는 건 역시 행실도 나쁘고 기분도 나쁘다.

"그쯤 해두고 키사라기, 너희 오빠를 좀 소개해줘. 기절해 있는 사람에게 자기소개해달라고 할 순 없잖아."

"주인님은 음흉한 2년 차 히키코모리─"

"자, 잠깐, 잠깐 에네쨩! 여기선 내가 설명할 테니까! 어, 음... 일단 오빠의 이름은 「키사라기 신타로」예요. 에네쨩이 말했다시피 히키코모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머리는 정말 좋아서 학교에 다닐 때는 전국 모의고사 톱을 달렸었어요. 지금은 고등학교 중퇴해버려서 아니지만."

"헤에, 톱이라니 굉장하네!"

저기 잠깐만요. 반응이 너무 약한 거 아니야? 그냥 굉장하다는 정도의 수준이 아닐 텐데. 전교도 아니고 전국 모의고사 톱이니까. 모모랑 카노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건 엄청 대단한 거다. 전국 모의고사 톱이란 것은 즉, 전국에서 손이 꼽힐 정도로 엘리트라는 거니까. 여기 학교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수재들도 스케일이 전국으로 커지면 톱을 쟁취하기는커녕 상위권에 머물지도 못하기도 하는데 톱이라니...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어쩌면 모모의 오빠 알고 보면 굉장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은 방안에서 음흉한 동영상만 보는 히키코모리지만.

"응. 아이큐도 높게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몇이었더라... 어... 분명 숫자 다 더해서 15였던 거 같은데..."

"키사라기, 넌 너희 집 전화번호를 포함한 숫자란 숫자는 다 더해서 외어버리는 건가..."

"죄,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집이나 매니저한테 연락 안 해도 괜찮아? 지금 키사라기쨩 사라졌다고 뉴스 뜬 지 몇 시간 지났지, 아마?"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백화점 사건 때문에 깜박 잊고 있었어! 어, 어쩌면 좋죠?"

"그걸 나한테 물어도... 뭔가 좋은 수 없나?"

"음... 「초인기 아이돌의 전국민 대상 몰래카메라」라는 건 어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저기 뭔가 한창 떠드는 중에 미안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줄래?"

어디선가 붉은 비상등이 삐용삐용 하고 울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애써 용기를 내 손을 들었다. 당사자인 모모는 현재 패닉 상태에 빠져 설명할 정신이 아닌 것 같아 슬쩍 키도를 쳐다봤다. 내 시선에 뭔가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 건지 움찔거리던 키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알기 쉽게 정리하여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카노의 부가 설명이 끼어들었지만, 그때마다 키도의 주먹이 날아가서 설명이라고 하기도 뭐한 수다가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모모는 여전히 패닉 중. 에네는 한결같이 밝은 목소리로 뭐라고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시끄럽다. 이 단체는 원래부터 이런 걸까? 바로 옆에 있는 카노의 존재만으로 이 질문의 답은 금방 해결되었다. 응, 원래부터 시끄러운 것일 거라고. 별로 유익하지 않은 자문자답을 하며 멋대로 납득할 무렵, 키도의 설명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우선 모모가 시내에 나갔다가 아이돌이라는 신분과 「눈을 빼앗는 능력」의 시너지효과로 사람들이 잔뜩 몰렸다고 한다. 그 덕에 도망치기 바쁘던 모모를 키도가 발견했고, 그 후 능력을 써서 아지트에 데려왔다고 한다. 카노의 부가설명으로는 예전에 모모를 신입 후보라고 농담 삼아 말했었는데, 키도가 그걸 진짜로 믿어버려서 데려온 거라고 한다. 물론 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맞았다. 아무튼, 그 때문에 모모는 갑자기 사라진 거로 되어버려서 뉴스며, 사무실은 대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심지어 오늘이 첫 드라마 찰영날이란다. 이럴 땐 매니저나 부모님께 연락하는 게 당연하지만 모모의 핸드폰은 마리의 실수로 차를 뒤집어쓰고 장렬히 사망. 지금은 방부제가 잔뜩 든 봉지 안에서 몸을 보존하고 있다. 백화점에서 실수로 테러리스트의 머리에 전기안마기를 날린 마리라면 충분히 가능하기에 이 부분은 단번에 이해해버렸다. 어쨌든 그래서 폰 기종을 바꿀 겸, 아지트에 필요한 컵 세트도 살 겸 백화점에 왔지만 테러에 휩쓸려 버렸고 나머지는 내가 아는 그대로라고 한다.

뭐지, 이 막장 드라마?

"딱히 의심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진짜로?"

"믿긴 힘들겠지만... 응."

"음, 뭐랄까... 모모 너 정말로 불운체질이네."

"으으응... 나도 오늘 톡톡히 실감했어."

내 생각에 이건 이미 불운체질로도 설명하기 힘든 지경이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백화점에 왔다가 테러사건에 휘말린 난 정말 운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모에 비하면 이건 새 발의 피였다. 도대체 얼마나 운이 없어야 이런 사건사고에 쉴 새 없이 휘말려 버리는 걸까. 모모에 대한 동정이 살짝 피어오르려고 한다. 혹시 자신의 운을 전부 인기로 바꾼 게 아닐까...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지만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모모는 운이 안 좋은 만큼 신인이면서 엄청나게 인기가 많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인기는 전부 「눈을 빼앗는 능력」때문인 것 같지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용케 아이돌이 될 생각을 했네.

"어쨌든 일단 엄마한테만이라도 연락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집 전화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런 거라면 이제 문제없지 않아?"

"응? 무슨 뜻이야, 이치카쨩?"

"그야 저기 너희 오빠의 휴대전화가 있잖아. 히키코모리라고 해도 집 전화번호정도는 있을 테고. 일단 급한 대로 저걸로 전화하면─"

"아! 그럼 되겠구나! 고마워, 이치카쨩!!!"

"아니,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보다 어서 전화해. 걱정하시겠다."

"응!"

아까 사과에 이어서 두 번째로 놀랐다. 아니, 아까 이름 부른 거까지 합하면 세 번째인가? 모모는 뭔가 리액션이 커서 예능같은데 나가면 잘 할 것 같다.

"에네쨩, 오빠 폰에 집 전화번호 있어?"

"네! 다행히 있네요! 바로 연결해 드릴까요?"

"응, 부탁해."

핸드폰 액정에서 에네의 모습이 사라지고, 수화기 이모티콘과 「집」이라는 심플하고도 짤막한 문구와 번호가 떠올랐다. 그것을 모모가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들어올려 천천히 귓가에 가져가 댔고, 그와 동시에 조용해진 아지트 내부에선 통화연결음만이 울려 퍼졌다. 따르릉 따르릉. 이 무감각한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안 받는 건 아닐까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때, 달칵하고 짧은 효과음과 함께 모모의 목소리와 흡사하면서 3,40대 정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모 일로 지쳐있었는지 피로함과 걱정에 한숨이 가득 섞인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신타로? 네가 웬일로 밖에 나갔─”

"어, 엄마..."

“모모? 너 모모니?!”

"엄마, 엄마... 나..."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긴장이 탁 풀려버렸는지 모모의 긴장은 녹듯이 사라지고, 안도의 눈물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모는 뭔가 말을 해야하는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 고장난 라디오처럼 계속 엄마만 부르다가 결국은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키도와 카노는 그걸 가만히 지켜봐줬고 나는 조용히 모모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손을 잡아주었다. 순간 눈물을 쉼없이 만들어대던 모모의 눈이 나에게 향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손만 붙잡고 있었다. 때론 말보다 행동이 더 와닿는 때가 있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모는 나와 잠시 마주 보더니 눈물을 쓱쓱 닦아내곤 설핏 웃었다.

한편 수화기 저편에서 좀 더 온화해진, 마치 모모를 달래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모는 울음에 잠긴 목소리를 잠시 풀고는 더듬더듬 지금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모의 엄마 입장에서 들었을 땐 애가 너무 놀라서 그냥 횡설수설 하는 거로 밖에 안 들리겠지만, 간간이 따스한 대답을 하며 끝까지 들어주셨다. 장황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를 설명이 끝날 때까지 모모는 계속 눈물을 쏟아냈고 그에 우리들은, 심지어 카노마저 아무 말이 없었다. 아까와는 너무 상반되는 분위기가 갑갑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냥 지켜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면 그건 내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엄마」라는 따스한 존재를 좀 더 느끼고 싶단 욕심에서 나온 건지도 모른다.

“그래, 그랬었구나. 그럼 지금은 괜찮은 거니?”

"응. 흐윽... 곁에 모두가 있어 줘서 괜찮아요."

“그렇구나. 일단 좀 진정하렴. 아, 매니저에겐 연락했니?”

"아니, 아직은..."

“전화하기 힘들면 엄마가 전화할까?”

"아, 아니. 이건 내가 제대로 말해야 하는 거니까 내가... 전화할게요."

통화하며 들은 설명에 의하면 모모는 이제 아이돌을 그만둘 생각인 듯했다. 능력 탓도 있지만 아이돌이란 신분이 일상생활에 이런저런 피해를 줬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당사자로선 그만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무수한 모모의 팬들과 사무소를 생각하면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하는 걱정이 든다. 하지만 이건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거니까 제3자인 나는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알았어. 그럼 엄마가 매니저 번호 보내줄게. 그리고 모모야.”

"네?"

“엄마는 언제나 우리 딸 편이란다. 알지?”

"으응!"

서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서로의 목소리만으로 오가는 가족의 정에 저절로 마음 한쪽이 훈훈하게 데워지며 아까 후벼 파진 마음의 상처가 나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가슴이 뭔가에 포박된 듯 갑갑하고 찌릿하게 아파져 온다. 부러움 내지는 질투 때문에.

...괜찮다. 이미 몇 번이나 느꼈던 감각이고 어차피 이제 곧 있으면 안정될 거다.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 따윈 아무렇지도 않아.

밝은 대답을 끝으로 통화를 마친 모모는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두 눈을 비벼대었다. 미처 떨어지지 못하고 아직도 눈에 매달려있던 눈물들이 손에 묻었다가 허공으로 흩뿌려 사라져 갔다. 어느 순간 우리 곁으로 돌아와 모모를 보던 마리가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가 손수건을 내밀자, 모모는 어쩐지 부끄럽다는 미소를 짓고는 손수건을 받아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면서도 내가 멋대로 잡았던 손은 놓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들어간 느낌에 조금은 의지가 된 건가 싶어 조금 뿌듯해졌다. 그때 지잉 하고 진동이 울리더니 누군가의 번호와 「힘내렴, 우리 딸」이라는 따뜻한 문구가 적힌 문자가 도착했다. 저 번호는 분명 매니저 번호겠지. 흘낏 모모를 쳐다보자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아무래도 가족인 엄마에게 전화 거는 것과 비지니스 관계인 매니저한테 전화 거는 것은 다르겠지. 저런 표정이 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게 매니저분 번호 같은데 바로 연결해드릴까요?"

"아, 아니 잠깐만! 나 역시 긴장돼! 으으... 분명 엄청 혼날거야... 무서워!"

"괜찮아, 괜찮아. 분명 엄~청 혼날 테지만."

"우으... 카노씨 그거 격려해주는 거예요, 놀리는 거예요, 뭐예요!"

"글쎄, 어느 쪽일까나~?"

모모가 소리를 높여 바락바락 화를 내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카노는 큭큭 웃어댔다. 카노의 눈이 장난기로 가득 차있는 것이 왠지 앞으로도 카노가 놀리고 모모가 화내는 모습을 자주 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옆에 있던 마리는 나름대로 모모를 옹호해준다고 나섰지만 그러다가 자신마저 놀림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키도는 짧게 한숨을 쉰 뒤 카노에게 한마디 하긴 하지만 별 제재를 가하지 않는 거 보면 이 역시 일상다반사인 듯하다. 카노의 평소 놀림의 대상은 아마 마리겠지. 머릿속에 카노가 마리를 놀리는 모습이 너무나 쉽게 그려지고 있다. 역시 이 단체는 원래부터, 언제나 시끄러운 게 맞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분위기 너무 급반전되었다고. 이러니저러니 마음속으로 따지고 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도 살짝 웃고 있었다.

"어쨌든! 후... 에네쨩 매니저 언니한테 연결해줘."

"네! 알겠습니다!"

활기찬 대답과 함께 에네가 지휘하듯이 손가락을 몇 번 휘젓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와의 수신 연결 화면이 떠올랐다. 폰에서는 수신 연결음인 지금 상황과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마음이 편해지는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다. 그걸 들어도 전혀 마음이 편해지지않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모가 조심조심 핸드폰을 들어 올려 귓가에 갖다 대었다. 길게만 느껴지는 순간이 끝나고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는지 달칵 소리와 함께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급한 사정이 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매, 매니저 언니! 저 키사라기 모모입니다!"

“모모!? 너 지금 어디야!”

마치 스피커 모드를 해놓은 것처럼 생생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만 깜짝 놀라버렸다.

목소리 톤과 느낌으로 봐선 어지간히 화난 게 아닌 것 같다. 자비 없이 마구 쏟아지는 잔소리와 질책에 모모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잠깐이라도 말을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입을 열기만 하면 잔소리에 가로막혀 버린다.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모모에게 할 말을 잔뜩 쌓아놓기라도 한 걸까. 쉴새없이 잔소리가 이어지고, 덕분에 말 한마디가 틀어갈 틈새조차 보이지 않는다. 숨은 제대로 쉬고 계신 건지 걱정되기까지 할 수준이랄까. 불쌍한 모모는 말할 타이밍을 못잡고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려야 했다.

"이런, 이런... 키사라기쨩 얘길 전혀 들어주질 않네."

"저쪽은 상당히 화가 난듯하네."

"화날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모모 지금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저 사람 무서워..."

"아아~ 저러다간 키사라기쨩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매니저한테 끌려가는 거 아냐?"

"에!? 모모 잡혀가는 거야!? 나쁜 짓 안 했잖아..."

"마리, 경찰한테 잡혀가는 거 아니야. 그렇지만 저 상태로는 그럴 것 같네."

"으앙... 그런 말 하지말고 좀 도와주세요..."

결국은 SOS 요청이네. 엄청난 잔소리에 귀가 따가웠는지 휴대폰 스피커와 조금 거리를 두고 한 손으론 매니저씨에게 안 들리게 휴대폰을 막고 있는 모모의 눈빛은 정말로 간절해 보였다. 조금 떨어져있는 데도 기세가 엄청나다고 느낄 정도인데, 그걸 고스란히 받고 있으니... 그치만 이런 문제는 역시 꺼려지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서 잘 떠들던 애들이 조용히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닫았다. 심지어 착한 마리마저도 울상을 지으며 무섭다고 회피한다.

이렇게 되면 남은 사람은 나뿐인가.

엄청난 잔소리 대신 「이제 기댈 사람은 너밖에 없어!」라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는 것도 다른 의미로 상당히 힘들다. 그 눈빛이 엄청 간절해보여 시선을 회피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생길 것만 같은데 이걸 용케 피했네, 이 녀석들. 아까 학교 일이라든가 그런 거 도와주겠다고 말했었고 이번에 신세 진 것도 있으니 어쩔 수 없나. ...이번 뿐이다. 이렇게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건 딱 오늘까지인 거야.

"하아... 모모, 잠깐 휴대전화 좀 줘봐."

"응? 아, 여기!"

원래 남의 일에 끼어드는 짓은 하지 말자는 주의지만 이번은 특별히 예외로 두기로 하자. 제3자인 내가 막 끼어들어도 되는 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모모의 휴대폰은 내 손위로 넘어온 상태다. 모모의 체온에 달궈진 핸드폰이 내 손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다.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쏘아져 오는 잔소리에 더더욱 받기 싫어지지만 인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저 기대에 찬 시선을 져버릴 능력이 내겐 없다. 나 저런 시선에 약했구나...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기왕 하는 거 잘 마무리하고 말 거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말도 있고. 물론 지금 쓰는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여보세요,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너란 애는 정말! 어? 넌 누구...”

"갑자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전 키사라기 모모의 친구인 시라키 이치카라고 합니다. 모모가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등 여러 일이 있어서 잠시 돕고 있었어요."

일단은 예의 바르게 자기소개와 상황 설명. 갑작스레 전화 상대가 바뀐 데다가 그 상대가 예의 바르게 나온다면 저쪽도 언제까지나 화만 낼 수는 없을 거다. 그것도 매니저라는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 업종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예상대로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놀란 매니저씨의 기세는 한결 가라앉았고 말투 또한 조금 부드럽게 바꾸었다.

“하아... 저기 미안한데 지금 모모랑 중요한 얘기 중이라서. 모모 바꿔주겠니?”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알면 얼른 전화 바꿔─”

"그래서 미리 사과드리는 거예요."

“...하?”

"오오, 시라키쨩 대단한데?"

일단 초반 기세는 내가 먼저 잡았다. 문제는 이 기세를 어떻게 이용하는가. 잘못하다간 나선 것만도 못하게 되는 수가 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할까. 오랜만에 들어온 대치상황을 캐치한 뇌가 신이 난 듯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저기 너, 이건 나와 모모의 일이야. 그러니까 끼어들지 말아 줄래?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아있어.”

"네, 알아요. 제3자인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럼 왜─!!”

"그렇지만 나와 모모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왜 당사자인 모모의 말은 단 한마디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시잖아요. 지금 화가 많이 나신 건 알지만 조금 진정해주셨으면 해요."

“이게 지금 진정할 만한 일이 아니야. 지금 모모가 마음대로 사라져서 얼마나 난리인지 아니? ...잠깐, 혹시 니가 멋대로 모모를!?”

감정적으로 나서다 보니 엉뚱한 오해로 인한 허점 발견. 뭔가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뇌는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개처럼 그 허점을 덥석 물어뜯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오해예요. 그리고 방금 모모가 마음대로 사라졌다고 하셨나요?"

“뭐?”

"모모도 이런 상황을 원하진 않았어요. 모모는 단지 살 것이 있어 잠깐 밖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게 되었고, 그래서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겨우 연락을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매니저인 당신과의 약속인 1시 전에 잠깐 나갔다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해요. 거기다 본인 나름대로 변장한다고 나왔던 건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 가장 놀란 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매니저인 당신? 사무소 사장님? 아니면 모모의 어머니? 아뇨. 그건 키사라기 모모, 당사자 아닐까요?"

“...”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내 말이 맞아서 그렇다기보단 자신보다 어린 여자애가 맘대로 막 지껄이니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걸지도 모른다. 자칫하다간 상대방의 화를 더 돋우게 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럼 이제 이쯤 해두고 빠질까 싶지만 지금 마무리 짓기엔 너무 애매하다. 조금만 더... 조금은 후퇴도 하면서 얘기를 이어가 볼까.

"물론 모모에게도 잘못은 있어요. 초인기 아이돌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지 않고 번화가에 나가버려 사람들의 주의를 끈 점, 그건 제가 생각해도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모모도 아직은 한창 놀고 싶을 시기인 평범하고 여린 16살 소녀잖아요? 조금 더 그 마음을 이해해주실 수는 없었나요?"

"...이치카쨩."

"그리고 인기가 많다고 해도 아직 신인이에요. 프로의식이나 아이돌로서의 자각이 아직 부족할 수도 있어서 많이 불안한 시기죠. 그런 모모를 이끌어 주고 커버해 주는 게 매니저의 일 아닐까요? 그런데 왜 이야기를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화를 내서 모모가 아이돌을 관두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신─"

아차, 실수했다. 말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조금 격앙되어 조금 날카로워져 버렸다. 게다가 말한 내용은 상대에게 향한 디스. 화만 키우게 할 내용이다.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모두 말짱 도루묵, 아니 상황이 더욱 악화될 텐데!

“그렇네....”

예상과 다르게 침묵을 유지하던 수화기 너머에서 모모와 통화할 때와는 정반대로 작고 힘없는 목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괜찮은 건가? 목소리만 들으면 분노나 흥분의 기운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성하고 있다는 느낌. 이젠 정말로 빠질 타이밍이다. 이 이상 떠들었다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은 된 것 같으니 여기서부턴 당사자들의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야만 한다.

"죄송합니다. 저도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만 감정적으로 말하고 말았네요..."

“아니, 괜찮아. 일단... 모모 좀 바꿔줄래?”

"네. 모모, 여기."

"에? 아, 응! 여, 여보세요?"

이제 내 일은 끝. 긴장이 풀리며 깊은 한숨이 폐 깊숙한 곳부터 끌어져 올라와 공기 중으로 흩어져간다. 휴대폰을 다시 모모에게 돌려주고 텅 비어버린 내 손은 습관적으로 등뒤에 있던 후드를 끌어다 머리에 썼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조금 지쳐버렸다. 한편 다시 매니저와의 통화를 시작한 모모는 내가 통화하는 동안 진정되었는지 아까와는 다르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었다. 내가 한 일이 도움이 되긴 되었다는 게 기쁘긴 해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당사자들끼리 끝내야 할 문제에 다른 사람이 멋대로 끼어드는 일만큼 쓸데없는 참견이 어디 있겠어. 이번 일은 정말로 특별한 예외인 것이다.

어느새 모모의 이야기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대화도 매니저씨와 뭔가 협상이라도 나누는 듯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여기서부터는 매니저씨의 말에 모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그렇지만 매니저가 모모가 아이돌을 관두는 건 최대한 말리고 있는지 얘기는 점점 아이돌을 그만두겠다는 것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긴 사무소 입장에서도 저런 초대형 아이돌을 놓쳤다간 큰 손해일 테니까. 파장도 어마어마할 거고 팬들의 반응도 장난 아닐 것이다. 솔직히 모모가 아이돌을 그만두겠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생각 없는 극단적인 주장이었긴 했다. 사무소 측도 팬들도 고려하지 않은 우발적인 사고(思考)였으니까. 애초에 아이돌을 관둔다고 해도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현상이 딱히 나아질 것 같지도 않고.

"네. 아, 정말로요? ...네, 그럼 그럴게요.. ..네!? 저기, 오늘 일은 정말 죄송해요.저도 잘못했다고 반성중이니까! 그러니까... 네? 어... 알겠습니다..."

서로 얘기는 잘 끝나가는 줄 알았더니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 걸까 다시 한 번 모모가 안절부절해 하며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린다. 어? 나?

"저기 이치카쨩... 그... 매니저 언니가 바꿔달래..."

"...나?"

"으응..."

그렇게 말하며 모모가 내 쪽으로 휴대폰을 쭉 내민다. 잠자코 들으시길래 잘 몰랐는데, 역시 내가 아까 한 말들이 기분 나빴던 걸까? 하긴 갑자기 끼어든 것도 모자라 설교까지 했으니 기분 나쁠 수밖에.

그걸 인정한다고는 해도 역시 저걸 받아들긴 싫다. 저걸 받았다간 어떤 욕들을 얻어먹을지... 아까 모모 혼내는 거보니 엄청 무서운 분이신 거 같던데... 그렇다고 싫다며 안 받았다간 괜히 모모의 입장만 난처해진다. 하아... 내가 이래서 끼어드는 거 싫어하는 건데. 그래도 내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성격도 아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내가 져야겠지. 그 전에 문제가 될 만한 일을 안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잠시 머뭇거리는 내 손으로 기어코 핸드폰이 들어왔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아, 그러니까... 시라키라고 했었나?”

"아, 네. 맞습니다만... 아깐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일단 숙이고 들어가자. 설마 이렇게까지 사과하는데 막 몰아붙이거나 하진 않겠지.

“응? 아아, 그건 괜찮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네?"

틀림없이 혼날 거라고 생각해서 각오했었는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차분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들리자 긴장했던 게 탁 풀려버렸다.

“네 말을 듣고 나니 나도 아직 한참 먼 것 같아. 이런 일에 감정적으로 행동하다니 어른스럽지 않네. 그치?”

"아뇨. 그럴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저야말로 무턱대고 끼어들었는 걸요... 면목 없습니다."

“딱히 널 질책하려고 바꿔달라고 한 거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그냥 모모는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싶어서.”

"네?"

...좋은 친구?

좋은 친구인 건가, 나?

그야 처음 전화받았을 때 모모의 친구라고 소개했었고, 일단은 클래스 메이트이기도 하다. 그래도 제대로 얘기해본 건 오늘이 처음이고 매니저로선 친구 일에 멋대로 끼어드는 애일 텐데 좋은 친구인 건가? 의문점이 풍선처럼 부풀어져 뇌 속이 채우려는 순간 그것을 뭉개트리려는 듯 매니저씨가 말을 이어왔다.

“이런 일에 자기 일처럼 나서주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모모는 아직 아이돌로 있어 주기로 했어. 당분간 휴가를 주는 조건으로 말이야.”

"아, 그거 잘됐네요. 양쪽 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모모 잘 좀 챙겨줘. 너도 알 테지만 많이 덜렁대는 아이니까. 자~ 그럼 난 이만 사장님한테 깨지러 가보실까?”

"저기...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다니까. 그럼─”

말소리가 끊기며 어쩐지 허무한 통화 종료 음이 귓가에 울린다. 음... 그냥 이러고 끝인 건가? 나 욕도 안 먹고 혼도 안나고 그냥 이렇게 끝? 잘은 모르겠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치카쨩! 매니저 언니가 뭐래? 많이 혼났어?"

"아니, 별 얘기는 안 했어. 그보다 휴가받았다면서? 잘됐다."

"응! 다 이치카쨩덕분이야!"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뭘."

한 게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설마 편의점 알바하면서 여러 손님을 대해본 경험이 이런 데에서 빛날 줄은 몰랐다.

"이야~ 시라키쨩 말 정말 잘하네."

"든든한 단원이 들어왔군."

"정말 멋졌어! 아, 그... 이, 이치카!"

"...멋졌다고?"

"네, 제가 보기에도 멋졌어요! 주인님과 달리 말씀 잘하시네요!"

"고, 마워..."

얼떨결에 고맙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건가? 아직도 어리둥절해 하며 앉아있는 나를 향해 호의적인 시선들이 다가온다. 위선도, 가식도 아닌 순수한 의미의 시선들이. 게다가 아까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떨던 마리가 「이치카」라고 불러주었다. 아, 아까 이름 하나 불렀다고 엄청 기뻐한 모모의 심정을 알 것 같아. 어쩐지 오랜만에 느끼는듯한 훈훈한 분위기에 참지 못하고 결국은 슬며시 웃고 말았다.

진심이 담긴 칭찬이란 것은 언제, 어디서, 누가 해도 참 기분 좋은 것이다. 항상 붉은 눈 때문에 이런저런 시선들에 공격당하고, 혹시나 들켜서 그런 시선들을 다시 받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았었는데 여기서만큼은 한결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다. 따스한 분위기와 멋진 아지트, 그리고 좋은 동료들이라.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나 여기 들어오길 잘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내 능력 안 얘기했지? 너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음... 난 「눈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려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투시 능력이야."

"투시라면... 물체 내부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건가?"

"맞아. 그래서 백화점 때 내가 능력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너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 그전까진 전혀 몰랐었거든."

"헤에~ 대단하다, 이치카쨩!"

"별로 그렇지도 않아. 내 눈에는 너희들 능력이 훨씬 신기한걸."

존재감을 없애고,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고, 눈이 마주친 상대를 석화시키고, 기호나 이유 없이 그냥 시선을 끌고... 거기다 덤으로 프로그램인 A.I 소녀까지. 아무 소설이나 만화,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투시 능력을 가진 나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신기하고 독특한 능력들이다. 엄연히 따지자면 내 능력도 신기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럼 시라키쨩은 그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거네? 키사라기쨩하고는 다르게, 풋."

"윽... 웃지 마세요, 카노씨!"

"그럼 모모는 제어가 안 되는 거야?"

"응..."

모모는 부끄럽다는 듯 내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하긴 능력이 제어가 가능했다면 이 정도까지 일이 커지진 않았을 테지.

"사실은 내 능력을 제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서 메카쿠시단에 들어온 거야."

"만약에 제어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이미 설명을 들었으니 안 보내줬을 거지만."

"그래서 나도 안 보내는거라고?"

"그런 거지. 자, 그럼 키사라기쨩 능력 제어 수업을 하기 전에!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내가 물었지만 카노는 대답은커녕 거기서 말을 끊고 '이거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라고 중얼거렸다. 그게 뭔가 위험한 얘기인 줄 알고 모모와 마리, 거기에 키도에 에네까지 카노에게 시선이 쏠렸다. 이쯤 되면 이제 말해줄 법도 하건만 자신에게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즐기는 건지 카노는 손으로 턱을 괴고 마치 일급 비밀을 숨기고 있는 형사 같은 포즈를 취했다.

물론 진짜 일급 비밀 같은 건 없겠지. 속이는 능력이라더니 연기 정말 잘한다. 아니, 이거 자체가 속이고 있는 건가. 모모와 마리는 그런 카노에게 계속 말을 재촉했지만 난 별로 흥미 없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도 저랬을지도 몰라도 상대는 카노다. 말투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장난기가 가득해 보이는 것이 보나 마나 별 얘기 아닐 거다.

"너희가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단원 넘버는 어떻게 할까?"

"겨우 그거냐!"

"악! 키도 아파, 아파!"

역시나. 아무래도 좋을 안건이 튀어나왔다. 키도도 내심 긴장하고 있던 건지 잠시 어이없단 표정을 짓다가 주먹을 휘둘렀고, 그 주먹은 멋지게 카노에게 명중. 한쪽에선 두 사람의 김 빠진 소리가 들려왔다. 적절한 타이밍의 완벽한 펀치에 10점 만점을 주고 싶다. 카노는 또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엔 웃는 표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웃는 표정이 얼굴에 박힌 것 같다.

"단원 넘버라면 여우눈씨는 NO.3였죠? 그거 말하는 건가요?"

"아야야... 맞아! 우리 메카쿠시단은 가입 순서대로 단원 넘버를 붙여주거든! 그런데 오늘처럼 신입이 우르르 들어오는 건 처음이라서 말이야. 이야~ 처음엔 나랑 키도랑 세토, 셋뿐이었는데 이렇게나 늘어나다니~ 단장으로써 기분이 어때, 키도?"

"신입이 들어온 거야 좋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들어왔으니 정해줘야지. 일단 키사라기쨩이 NO.5가 되려나? 이 셋중에서 가장 먼저 아지트에 들어왔으니까."

"제가 NO.5인가요? 우와아... 메카메카단 NO.5 키사라기 모모! 열심히 하겠습니다!"

메카메카단이 아니라 메카쿠시단이야. 정정해 주지도 못할 만큼 모모 텐션 급상승해버렸다. 그렇게나 기쁜 걸까. 처음에는 아이돌이라서 또래 친구들과 많이 못 놀아서 그런 거라고 치부해 버렸었는데 이걸 보니 역시 모모는 약간 독특한 애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단원 넘버라니 어쩐지 중2병스럽잖아... 그렇게 따지자면 메카쿠시단이란것도 그렇긴 하지만.

새삼스럽지만 메카쿠시단이라는건 대체 뭘까?

아까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고 「어쨌든 자세한 건 나중에.」라는 부분이 거슬린다. 대충 능력을 이용해서 경찰의 눈을 피해 이런저런 일을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 「일」이라는 건 대체... 단원들만 살펴본다면 모모를 제외하면 다들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고, 그 힘의 정도도 자유롭게 컨트롤할 수 있는 듯했다. 사실 나도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은데 말이지.

그리고 붉은 눈을 가졌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 「그곳」에 갔다 왔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이 애들도 「그곳」에 대해 알고 있을까. 내 기억 너머 기억해야 하지만 흐릿하게밖에 기억나지 않고, 잘 알고 싶어도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그곳을... 혹시 그 「일」이라는 게 그곳과 관련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경찰의 눈을 피한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일반 상식 밖의 일이니까. 그럼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능력에 관해서는 제법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곳에서 어른도 없이 느긋하게 살고 있으니까 의외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을 수도─

"그럼 문제는 시라키쨩이랑 에네쨩인가~ 으음~ 시라키쨩 무슨 숫자 좋아해?"

"응? 숫자? 11─"

한창 생각 중이다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해주다가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지금 단원 넘버 이야기 중이었잖아! 단원이 총 합쳐서 7명밖에 없는데 11이라니 뜬금없어! 카노는 내가 내뱉은 11이라는 숫자를 말하며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아! 웃지 마! 마음의 소리는 짓누른 채 말실수한 거라고 얼버무리려 시도했지만, 순간 너무 당황해버려 혀를 깨문 탓에 안타깝게도 실패, 덕분에 카노의 웃음만 더 커져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웃어서 눈에 눈물까지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웃을 일인가? 모모와 마리가 이런 나를 원호하기 위해 뭐라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역시도 내 무덤을 더욱더 깊게 파는 행위밖에 되지 못했다.

"그, 그렇지만 11이란 숫자 좋지 않나요? 그... 첫 번째 숫자가 두 번 나오기도 하고, 작대기 모양이 멋있고!"

"맞아! 나도 11이란 숫자 좋아해!"

...저기, 그런 얘기 하나도 도움 안 돼. 차라리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는 거라면 모를까, 저 발언들은 내가 아까 말실수라고 얼버무리려던 걸 강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나를 도와주려는 마음들은 참 고맙지만 그냥 차라리 입 다물고 있는 편이 좋을 뻔했다.

"아하하, 아~ 배 아파. 그럼 다수결로 시라키쨩의 단원 넘버는 NO.11으로 결정~!"

"투표도 안 했는데 뭐가 다수결이라는 거야. 그리고 아직 단원이라고 해봤자 7명 밖에 없는데 NO.11이라니 이상하지 않아? 6이든 7이든 난 괜찮으니까 아무렇게나 정해줘."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단원 넘버엔 큰 의미 없고 기왕이면 당사자가 좋아할 숫자로 하는 게 좋잖아. 그리고 단원이야 또 모으면 되잖아?"

카노는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바꿀 생각은 추호는 없는 모양이네.

"하아... 몰라, 마음대로 해."

"그럼 에네쨩이 NO.6고, 시라키쨩이 NO.11으로 결정!"

"오오! 제가 NO.6인가요! 진짜로 단원이 된 기분이네요! 거기 여동생 친구분도 너무 기죽지 마세요. NO.11 멋지잖아요?"

숫자 11. 넌 좋겠네. 오늘따라 멋지다는 칭찬 많이 받아서.

"쓸데없는 얘기를 해버렸지만 어쨌든 셋 다 메카쿠시단에 온 걸 환영한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네, 단장님!"

"어쩐지 두근두근하네요!"

"나야말로 잘 부탁할게."

존재감을 없앨 수 있는 소녀에, 거짓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소년, 메두사의 후예, 모두의 눈을 빼앗는 아이돌, 그리고 A.I소녀까지 모인 메카쿠시단. 특이한 사람들이 모인 수상한 단체지만 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나도 특이한 사람인걸.

모처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즐거운 장소를 찾았다. 아직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있기는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 있는 게 어쩐지 오랜만이라서. 나랑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게 반가워서. 내 눈에 대해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부풀어 올라서... 그러니 여기에 오길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따지지 않기로 하자. 그냥 왠지 모르게 이곳에, 이 애들과 있고 싶으니까.


지이잉-

"어서 오세요."

언제나 듣는 자동문 특유의 마찰음이 들리고 사람들이 들어온다. 나한텐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많이 본 풍경. 손님들이 살 물품을 고르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서 덮어놨던 잡지를 다시 펼친다. 펼친 페이지에는 몇 시간 전까지 내 옆에 있던 모모가 귀여운 옷을 입은 채 입가엔 미소를 띄우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정말 예쁘고 귀엽기야 하지만 한 가지 미스가 있다면 눈이 반쯤 감긴 거랄까. 왜 하필이면 이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올렸을까. 그 사진을 보곤 소리 없이 웃었다. 물론 비웃는 건 아니다. 이런 걸 확인하지 않고도 그냥 잡지에 올리는 이유는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눈을 빼앗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확실히 잡지를 휙휙 넘길 때 나도 모르게 모모가 있는 페이지에 시선이 꽂힐 때가 많았다. 그건 TV나 인터넷도 마찬가지라서 별 관심 없었던 프로그램을 본 적도 꽤 많다. 그동안은 신경을 안 써서 잘 몰랐는데 이렇게 되짚어보니 확실히 티가 난다. 모모네 사무소는 대어를 낚은 거네. 감당조차 안 될 대어를.

"이거랑 담배 한 갑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담배는 어떤 거로 드릴까요?"

내 앞에 선 손님은 딱 봐도 성인은 훌쩍 넘기신 아저씨였기에 별말 안 하고 가리키신 담배를 드렸다. 몇 번 바코드를 찍고 가격을 말씀드리니 대답 없이 지폐 몇 장을 내밀었고 그에 맞춰 거스름돈을 드렸다. 거스름돈 받기가 무섭게 손님은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셨다. 딱히 기분 나쁘다거나 하진 않는다. 저게 당연한 반응이고 흔히 있는 일이니까. 아무도 일개 알바생인 나에겐 대부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을 가진다 해도 알바생이 응해주는 일은 더 없고. 많은 사람이 한 번쯤은 꿈꿔봤을 법한 편의점 알바와 단골 손님이 사랑에 빠지는 일은 삼류 소설이나 만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키도와 카노는 아주 독특한 손님이라 봐도 되겠지. 관심을 갖는 걸로 모자라 아예 단원으로 데려왔으니. 백화점만 아니었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왠지 굳이 백화점 일이 아니었더라도 언제가 날 단원으로 데려갔을 것 같다. 혹시 어제 카노가 「언젠가」라고 말한 건 내 능력을 눈치채고 스카웃하러 오겠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던 걸까.

...잠깐, 그런데 내 능력을 어떻게 눈치챈 거지?

슬쩍 후드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 들어가니 「메카쿠시단」이라는 그룹 안에 키도, 카노, 마리, 모모, 키사라기 신타로(에네)의 번호까지 순서대로 들어가

있었다. 그룹명을 메카쿠시단이라고 적다니 좀 유치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 애들만큼은 따로 모아두고 싶었고, 거기에 적당한 그룹명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고 알아보기도 쉬우니 그냥 이걸로 괜찮지 않을까.

"이치카, 오늘은 정말 쉬지 않아도 괜찮겠니? 정신도 없었을 테고 팔도 다쳤는데..."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시고 갈 준비를 마치신 점장님께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본 채 말씀하셨다. 갈 준비 만반이시면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저 순수한 걱정이라는 의미를 알아챈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평소보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애초에 스친 거뿐이었고 이젠 많이 나아졌으니까요. 내일 안 나올 건데 오늘까지 빠지면 안 되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여차하면 료타군 일찍 불러줄 테니까."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그럼 이만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렴."

"네, 안녕히 가세요. 점장님."

내가 꾸벅 인사까지 하자 점장님은 나를 몇 번 쳐다보시다가 이내 자동문 사이로 사라지셨다. 약 2년 동안 여기에 근무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점장님은 참 엄마 같으시다. 내가 어려서 그런 건지, 혼자 살아서 그런 건지 아님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날 걱정하시고 신경 써주신다. 그 덕에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알바를 지속하고 있긴 하지만 가끔은 부담스러워지기도 한다. 어차피 진짜 가족도 아니고 난 그저 알바생이니까 언제까지 여기에서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가 끊어질 인연.

그게 가장 무섭다. 오늘 만난 이 애들과도 언제가 헤어지게 되겠지. 처음 만난 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위이잉-

"앗!"

그런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참에 진동이 울리자 놀라서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안 되지, 안돼. 노트북도 망가졌는데 휴대폰까지 망가지면 큰일 난다고, 진짜. 그나저나 나한테 문자 보낼 사람은 거의 없는데 누구일까. 놀란 가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액정을 옆으로 밀어보니 키도의 이름이 보였다. 친구가 되었다며 좋아했던 모모도 아니고 단장인 키도가 문자를 하다니 조금 예상 밖이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문자를 확인했다.

제목 : 시라키

알바가 끝나면 아지트로 돌아오도록 해.

아직 소개시켜주지 않은 단원이 있으니까.

키사라기랑 능력에 관한 얘기도 더 하고 싶고.

알바는 언제 끝나?

늦게 끝나면 혹시 모르니 데리러 갈게.

키도의 성격이 잘 반영되어있는 간단한 문자가 액정 안을 채웠다. 소개시켜주지 않은 단원이라면 아마 NO.2인 세토란 사람이겠지? 그 당시 신입도 아니었던 나와 에네를 포함한 단원 전체가 백화점에서 테러당하고 있을 때, 이 사람 혼자 안전하게 있었다는 건가. 아, 그 테러범들 폭탄이 어쩌고 했으니 안전했던 것만은 아닌가. 어쨌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모모의 일 때문에 이름만 듣고 어떤 사람인지 전혀 듣지 못했으니까. 혼자 행동하는 거 보면 따로 노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애들처럼 좋은 사람이겠지, 아마. 잠시 어떤 사람일지 상상을 하다 도중에 막혀버려서 그만두고 휴대폰 액정을 두들겼다.

제목 : 응, 알겠어.

소개시켜주지않은 단원이라면 NO.2라던 세토란 사람 말하는 거지?

어떤 사람인 지 궁금하네.

아, 알바는 7시에 끝나.

가는 길도 제대로 외워놨고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니까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데 모모의 오빤 아직 안 일어났어?

여기까지 쓰고 송신을 터치하자 문자의 나열이 사라지고 송신 중이라는 화면이 떠올랐다. 자, 그럼 답장은 언제쯤 오려나. 까맣게 변한 휴대폰 액정을 빤히 바라보며 읽고 있던 잡지의 모서리쪽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답장을 기다린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더라. 그다지 없던 것 같은데.

위이잉-

잡지의 모서리쪽이 너덜너덜하게 변했을쯤 휴대폰 액정이 밝아지며 진동 소리를 내었다. 예상대로 키도의 답장이 와있었고 거기엔 키사라기씨는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다는 등의 대답만 간단히 적혀 있었다.

제목 : 아직

안 일어났어.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그러는 너는 정말 괜찮은 건가?

별 이상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

알바가 끝나는 시간은 7시인가...

제법 늦은 시간이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데리러 가는 게 좋겠어.

알바 끝나고 기다려.

정말 깔끔하고 간단한 문자. 참 키도답달까.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뭐, 싫지는 않다.

"아아, 알바 언제 끝나려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내 입꼬리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 알바가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이야. 처음 느껴보는 기분을 남몰래 음미하며 계산대로 오는 손님을 맞이했다.


알바는 생각보다 훨씬 일찍 끝났다. 점장님이 여차하면 다음 알바생을 일찍 불러주겠다는 말을 정말로 실행하셔서 내 다음인 마츠이씨가 30분이나 일찍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 점장님 의외로 행동력 있다. 덕분에 마츠이씨는 오봉이라 친구들 만나서 실컷 놀다 오려고 했다며 투덜거리셨지만, 막상 나에겐 한 마디도 안 하셨다. 아마 점장님께서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리 말해준 모양이겠지. 알바로 이루어진 갑을 관계인데도 이래저래 나를 신경 써주시다니 정말 고마운 분이시다. 언젠가 꼭 답례해야겠다.

행동력 있는 점장님 덕분에 계산대는 얼른 마츠이씨에게 맡기고 원래 탈의실에 들어갔다. 입을 때와 마찬가지로 1분 만에 원래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가방을 챙기고 나가기 전, 알바 끝나면 데리러 오겠다는 키도의 문자를 기억해냈다. 나이스, 내 기억력.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나는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기는 하지만 예의상 지금 끝났다고 키도에게 문자를 했다. 30분이라는 텀이 있긴 하지만 그쪽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나 데리러 일찍 나왔다가 엇갈릴 수도 있지 않은가. 잠시 후 진동 소리와 함께 도착한 답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목 : 기다려

마침 잘됐네.

곧 널 데리러 단원 한 명이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기다리라면 일단 기다리겠지만 「마침 잘됐네」라니 무슨 뜻일까. 때맞춰 누군가가 아지트 밖으로 나가기라도 한 걸까. 「단원 한 명」이라고 칭하는 걸 봐선 키도 본인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능력제어가 안 되는 모모나 내성적인 마리가 나오진 않을 테니 이 두 사람도 제외. 그렇다면 카노인가? 키도 입장에선 카노가 제일 만만할 테니 그럴 것도 같다.

아지트에서 이곳 편의점까지는 약 10분 거리. 만약 나와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5분은 걸리겠지. 어쩌면 다른 데 들렀다 올지도 모르고. 편의점 나와서 카노한테 전화해봐야겠다. 그렇게 확정 지은 나는 가방을 들고 탈의실을 나갔다. 저녁 시간답게 어느새 무채색 정장을 입은 여러 회사원으로 편의점이 바글바글해졌다. 나 때문에 평소보다 30분이나 더 이 사람들을 상대하게 된 마츠이씨에게 심심찮은 감사와 사과의 말을 전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때 마츠이씨를 보느라 앞을 확인하지 못한 나는 자동문 너머에 있던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자동문 때문에 둘 다 천천히 걷고 있어서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일단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초록색 작업복 같은 옷에 고글이 달린 후드를 쓴 키 큰 소년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죄송함다."

...함다?

"아뇨. 괜찮아요."

"저 근데 혹시 당신이 「시라키 이치카」인가요?"

"네. 저 맞는데요."

"아하하, 키도가 말한 그대로네요. 만나서 반갑슴다. 전 「세토 코우스케」라고 함다."

아, 이 사람이 애들이 말한 또 다른 단원 「세토 코우스케」구나. 밝은 미소나 나한테 거리낌 없이 말 거는 모습을 볼 때 낯가림이 없고 싹싹한 사람인 것 같다. 백화점 사건 때 혼자 없었으니 따로 노는 성격일 거라는 내 예상을 크게 빗나간 게 약간 예외였지만,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 같아 살며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야말로 만나서 반가워."

"그럼 갈까요?"

계산 중이라 바쁜 마츠이씨를 뒤로 한 채 자신을 세토라 밝힌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저녁 시간이긴 했지만 여름의 긴 해는 이제야 넘어가기 시작하며, 하늘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였다. 우릴 공격하던 더위는 여전히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가로등은 아직 켜있지 않아도 잔잔히 내려오는 햇빛과 건물들의 불빛으로도 앞을 보기엔 충분했다. 큰길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섰고 아까 모두와 걸었던 그 길을 다시 한번 걸어갔다. 아까 올 때도 느낀 것이지만 이런 한적한 동네에서 잘도 그런 아지트를 찾아냈구나 싶다. 이 도시에 산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이쪽으로는 올 일이 없었고 아지트도 이 동네의 제법 깊숙한 곳에 있으니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아까 왔을 때만 해도 이런 곳도 있었구나 정도의 시시한 반응이었는데 밤에 오니 좀 으스스하다. 이 동네 자체가 평소에도 어두운 편인지 아직 해가 남아있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제법 캄캄했다. 그래도 평소처럼 혼자가 아니라 남자도 있다는 게 참 다행이랄까. 이 사람 체격도 있는 게 듬직해 보이기도 하고.

"이야, 이게 얼마만의 신입인지 모르겠슴다. 마리 이후론 처음이거든요. 아, 다른 단원들과는 만나봤슴까?"

"응. 세토도 만났으니 모두 만난 셈이 되겠네. 참고로 신입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두 명 더 있어. 덤으로 환자도 한 명."

"에? 정말임까? 갑자기 늘어나다니 기쁘긴 하지만 좀 얼떨떨하네요."

"그럴 만도 하지.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할게."

"저야말로 잘 부탁함다!"

첫인상대로 세토는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좋은 성격이었다. 문득 이런 성격인데 왜 혼자 다른 곳에 있었을까 궁금해져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니 알바 중이라 모두와 함께 있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세토는 그 편의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꽃집에서 알바 중이라는데, 가끔은 교통정리나 신문 배달 등도 한다고 한다. 이 말에 학생들끼리 살면서 돈 문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단번에 풀렸다. 한 마디로 세토는 메카쿠시단의 중요한 경제 담당인 것이다. 표현이 적당한 것 같지는 않지만. 아니, 그렇지만 카노와 키도는 딱히 알바하는 것 같진 않았고, 마리는 조화를 만들긴 하지만 한 달 수입이 동전으로 받을 정도라고 하니... 아마 세토가 없었으면 메카쿠시단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없지 않았을까.

"그런데 시라키는 능력이 뭠까?"

"투시 능력이야. 건물이나 물건의 내부를 볼 수 있어. 메카쿠시단 표현대로 하자면 「눈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겠지."

"오오, 투시 능력인가요. 신기하네요."

"그러는 세토는 능력이 뭔데?"

"저는 「눈을 훔치는 능력」임다. 대상의 정보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죠."

"대상의 정보? 무슨 의미야?"

"쉽게 말하자면 제가 본 대상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임다. 독심술 같은 거죠."

"아~ 그렇구나."

독심술이라. 눈으로 그런 능력까지 가능한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여러 능력을 만나보고 나니 붉은 눈의 능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신체에 영향을 주는 능력과 자신이 보는 것에 영향을 주는 능력. 전자는 키도, 카노, 모모처럼 존재감을 바꾸거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등 자신들의 몸에 변화를 주는 거고, 후자는 나와 세토처럼 보는 것에 의해 안이 보이거나 들리는 식으로 능력이 작용하는 능력. 마리의 능력의 경우에는 마주치는 상대에게 영향을 주니 둘 다 속하진 않지만 마리는 메두사의 후예니까 예외로 봐도 괜찮겠지. 아니, 어쩌면 마리처럼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영향을 주는 능력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 걸까?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붉은 눈으로 살아왔지만 나 의외의 붉은 눈은 오늘 처음 본 것처럼 어쩌면 우리와 같은 능력자가 능력을 숨긴 채 어딘가에 또 존재할지도 모르는 거니까. 만약 더 존재한다면 몇 명의 사람들이,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능력들이 더 존재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이 능력에 대해선 정말이지 모르는 것투성이다. 온갖 생각으로 약간 머리가 아파져서 미간을 지그시 눌러주었다.

"아, 다 왔슴다."

세토의 말에 앞을 바라보니 「107」이란 문패가 붙어있는 문이 우리 앞에 당당히 나타났다. 내가 아지트 근처라는 것도 눈치 못 챌 만큼 생각에 빠져 있었단 걸 깨달으니 세토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런 건 별 신경 안 쓰는지 세토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문을 열자 그 안에는 나와 세토를 제외한 메카쿠시단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다들 어서 오라며 우릴 맞아주었고, 이쪽도 간단히 인사를 건네며 아지트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여기에 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쩐지 벌써 친숙한 느낌이 든다. 이 아지트도, 저 아이들도, 약간 시끄러운 분위기도. 어쩐지 다 마음에 든다.

"우와, 정말 바글바글해졌네요."

"키사라기 인사해. 이쪽은 NO.2 세토 코우스케다. 세토, 이쪽은 신입 NO.5 키사라기 모모."

"처, 처음 뵙겠습니다, 세토씨!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림다!"

"그리고 이쪽에도 한 명 더 있어~ NO.6 에네쨩이야."

"오오! 안녕하세요! 에네라고 합니다!"

"에!? 핸드폰 안에 사람이!?"

아아, 역시. 이런 반응이구나. 당황한 세토는 신경도 안 쓰는지 에네는 핸드폰 안에서 둥둥 떠다니며 열심히 자기소개했고, 잠시 당황했던 세토도 얼떨떨하게 에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상했던 장면이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눈앞에 벌어지자 어쩐지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저게 가장 당연한 반응일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에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었네. 뭐, 워낙 상황이 정신없었으니까.

"모모, 능력 제어는 좀 어때?"

"우으... 그게... 단장님이랑 카노씨가 시키는 대로 해보고 있긴 한데 영..."

"우리 설명도 잘 못 알아들었잖아. 키사라기쨩 머리 나쁘네~"

"어, 어쩔 수 없잖아요! 능력이라니 그거 오늘 처음 자각했고...."

"그랬어?"

"응. 그냥 체질로밖에 생각 안 했거든."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이상하리만큼 군중이 모이는데 그냥 체질이라고 치부해 버렸던 거야?

"...어쩌면 그동안 능력이란 자각이 없어서 제어가 전혀 안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그런 것 같다."

"저... 저만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 좀 해주겠슴까?"

방금 막 와 우리의 상황을 모르는 세토에게 키도와 내가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백화점 테러 얘기도 나오게 되었는데, 그 얘길 듣자 '우와아... 그거 정말임까? 큰일이었네요...' 라는 일종의 동정을 받아버렸다. 으음... 역시 그건 동정 받을 만도 한가. 당사자인 나 역시 다시 그때의 일을 떠올려 봐도 뭔가 꿈을 꾼 것만 같다. 분명 엄청난 일이었는데 어찌어찌 해결되었단 것도 그렇고,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한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그렇고. 여기 이 아지트에 내가 있다는 것이 그때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지만

"그런데 정말로 그 사람... 그러니까 키사라기씨는 아직 안 일어난 거야?"

"아, 오빠 말이야? 그게... 마리쨩이 간호해주고 있긴 한데 일어날 기미가 안 보여."

"괜찮다면 내가 잠깐 봐도 될까?"

"에? 아, 으응. 얼마든지."

백화점에서 나온 지 몇 시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다니 좀 불안하다. 나 역시 총을 맞긴 했지만 맞은 부위가 팔이었고 그 사람은 옆구리였으니 장기 같은 것에 손상이 생겼을 수도. 물론 그냥 스친 것뿐이니 그럴 확률은 현저히 낮다. 하지만 살펴봐서 나쁠 건 없지. 살짝 방문을 밀자 안에서 키사라기씨를 간호해주던 마리가 들어온 나와 세토를 보고 기쁜 듯 웃으며 우릴 반겨주었다. 그러고선 바로 세토에게 다이빙. 둘이 사귀는 건지, 그냥 사이가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모습이 훈훈한 남매처럼 보여 보기 좋았다.

자, 어쨌든 지금은 키사라기씨의 상태나 보도록 하자. 눈을 감고 집중하니 뜨거운 기운이 눈에 몰려들었고 곧바로 눈을 떠서 아직도 붉은 저지를 입은 채 새하얀 침대 위에 땀을 흘리며 누워있는 키사라기씨를 바라봤다. 이불은 가볍게 투시해주고 몸 상태를 보는 것에 집중했지만 특별히 이상 있는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딱히 이상 같은 건 없네."

"응?"

"심장 박동도, 호흡도 지극히 정상이야. 다친 부위에서 피도 안 나고 아물기 시작했고. 뭐, 굳이 문제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괴로움이 보인다는 정도일까. 그동안 쌓인 피로도 있는 것 같고. 오랜만에 밖에 나와 더위를 먹어서 일어나지 못하는 거 같네."

"저기 이치카쨩 무슨 얘길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한 마디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그냥 푹 자게 놔둬."

"시라키 「괴로움이 보인다」는 건 무슨 뜻이지?"

어느샌가 카노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키도가 뭔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제야 내가 내 능력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내가 이 부분은 아직 말 안 해줬구나. 아까 내 능력은 단순히 투시능력이라 말하긴 했지만 사실 보는 대상에 따라 조금씩 능력이 다르게 발휘돼."

"예를 들면?"

"건물이나 물건 같은 경우에는 말 그대로 투시해서 내부가 보이지만, 대상이 사람인 경우에는 그 사람의 상태, 감정 같은 것이 보여."

"우와아... 역시 대단해, 이치카쨩!"

모모가 눈을 빛내며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워 시선을 피했다. 과한 반응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분 나쁘진 않다. 조금 부담스러울 뿐.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모모 쪽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터무니없을 정도로 인기 많은 신인 아이돌이잖아? 당사자는 싫어하긴 하지만. 어쨌든 내 말을 들은 키도는 '음... 그런 건가.'하고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모험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상에 따라 능력이 다르게 발휘되다니 그 점은 우리 중에선 네가 유일하군."

"그래? 예전엔 싫어했지만, 지금은 이런 점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사람마저 투시해버린다니 그건 상상만으로도 싫거든."

"하긴 그렇겠네. 본 사람마다 나체라니 어지간한 변태가 아니라면 기분 별로겠지."

"주인님이라면 좋아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뭐,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사람을 투시해버리면 몸속 장기까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시라키..!"

"아, 옷뿐만 아니라 사람 몸속까지 투시할 수 있다는 얘김까?"

"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보는 사람들 모두 과학실 인체 해부 모형같이 보인다니 절대 사양이야.."

"히이... 그건 역시 기분 나빠..."

내 말에 순간 상상이라도 해버린 건지 모모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소름난 팔을 문질렀고, 키도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남자들은 그 정도까지의 반응은 아니었지만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건지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참고로 카노는 그 틈을 타서 키도와 모모를 놀리다가 한 대 얻어맞았다. 분위기를 한 순간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에 대해선 조금 미안하지만 딱히 거짓말한 건 아니니 내버려 두기로 했다. 건물이나 물건들 내부도 얼마든지 투시할 수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잖아. 신체 내부 투시하기.

"인체 해부 모형이 뭐야, 세토?"

"마네킹 같은 건데... 아무튼 그런 게 있슴다. 마리는 몰라도 괜찮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얼굴을 한 마리의 동심을 지켜낸 세토에게 잠시 박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게 돼버렸지만 본래의 목적이었던 키사라기씨의 상태를 확인했으니 다들 우르르 거실로 나갔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키도는 아까의 이야기를 잊으려 애를 쓰는 표정으로 저녁 식사를 권했다. 난 집에 가서 먹어도 된다며 거절하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6인분의 식사가 올라왔고,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에네를 제외한 모두가 그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먹게 된 거지만 키도가 만들었다던 저녁은 정말로 맛있었다. 안 먹고 갔으면 후회할 정도로. 나도 요리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언제 시간을 내서 키도한테 요리를 배우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해서 더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마치고 저녁을 얻어먹은 답례로 키도를 도와 설거지를 했다. 모모도 돕겠다고 나서긴 했었지만, 자꾸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접시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기각. 결국은 나와 키도 둘이 6인분의 설거지를 해치워야만 했다. 그 뒤엔 할 것도 없고, 나 혼자 집에 가겠다고 하기엔 뭐해서 카노가 이름 지은 '키사라기쨩을 위한 능력 제어 교실'을 구경했다.

왜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 했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단 하나, 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하니까. 모모의 능력은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에 반해 내 능력은 보는 것에 영향을 끼치는 거니까. 모모에게는 나나 세토, 마리보다는 키도나 카노에게 도움을 받는 게 낫다. 실제로 그 두 사람에게 수업을 받고 있고.

그렇지만 뭔가 감이 잡힐 거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것인지 한참을 애먹었지만, 성과가 있다면 눈 색을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 정도?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제어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면 좋겠지만, 밖에 나갔다간 자칫 대형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고 시간도 늦었다는 이유로 수업은 간단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후아! 이거 꽤 어렵네요."

"처음치곤 아주 잘했슴다! 기운 내세요."

"가, 감사합니다!"

능력 제어가 확실히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모모는 처음치곤 잘하는 편이다. 나는 이 능력을 처음 알았을 때 아무것도 몰라서 한참을 헤맸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능력 자체는 알아차리기 쉬운 것이라 자각한 직후 제어 연습은 확실히 했었지만. 아, 별로 좋지 않은 옛날 기억이 떠오를 것만 같아. 그만두자.

"그럼 이제 슬슬 잘 준비를 해볼까. 시라키 너도 오늘은 아지트에서 자는 게 어때?"

"응? 그래도 돼?"

"그래, 그래. 자고 가. 여자애 혼자서 집에 돌아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위험하다고, 시라키쨩."

그건 그렇다. 아무리 나라도 이 시간에, 그곳도 으슥한 골목길 사이를 걸어가며 혼자 집에 가는 건 좀 무섭다. 그런 곳엔 질 나쁜 사람이 한두 명쯤은 꼭 있기 마련이니...그렇다고 이 애들한테 바래다 달라고 부탁하는 건 민폐. 여기서 자는 것도 민폐이긴 해도 저쪽에서 먼저 제안해온 이상 내 쪽에선 거절할 이유는 없다. 내 능력으로 위험한 사람들을 피해갈 수는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으니까.

"그럼 그럴까. 나도 이 시간에 밖에 나가는 건 꺼려지니까. 하룻밤 신세 좀 질게."

"그럼 둘 다 부모님께 연락해두세요. 걱정하실 검다."

"아, 그렇네요. 그럼 에네쨩 엄마한테 여기서 자고 간다고 문자 좀 보내줘. 메카쿠시단이라던가 그런 얘긴 좀 빼고..."

"알겠어요! 그냥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하면 분명 이해해주실 거예요."

나는 어차피 혼자 사니까 연락 같은 건 필요 없다. 만약 혼자 살지 않는다고 해도 걱정을, 할까? 됐어, 신경 쓰지 말자. 지금은 혼자 살고 있으니까.

"저기 나는 어디서 자면 돼?"

"그게 문제군. 일단 신타로가 마리 방에 있으니 방이 하나 모자라. 일단 세토는 카노랑 자고, 너나 키사라기 중에 한 사람은 나랑, 나머지 한사람은 마리랑 자야겠다."

"뭐야. 나는 세토랑 자는거야? 아쉽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별로?"

"아니, 난 쇼파로도 괜찮아. 혹시 여분의 이불 있어?"

"아, 내가 알려줄게! 따라와줘."

어느샌가 나에 대한 낯가림 같은 건 전혀 없어진 마리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가 여러 개의 베개와 이불이 쌓여 있었다. 단원이 늘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리 잔뜩 사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쓸 수 있는게 있어서 다행이다. 쇼파라도 베개가 없으면 다음 날 일어날 때 목 아파서 고생할테니까. 맨 위에 있던 가장 무난한 것들을 골라 거실로 나왔을 쯤에는 다들 잘 준비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키도한테서 잠옷 대신 입을 티와 바지를 받고 모모 다음으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미지근한 물에 몸을 맡기자 오늘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이라곤 믿기지 않는 사건들이 연달아 생각나며 피로가 몰려온다. 오늘 하루 다른 사람이라면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한 걸 몇 개나 겪은 건지...

그래도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고 생각한다.

편안한 복장과 상쾌한 기분으로 쇼파 위에 눕자 키도의 잘 자라는 말과 함께 스위치 끄는 소리가 들리며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오늘 쌓인 피로감과 아지트 내부의 편안함, 그리고 아까와 상반되게 고요하고 캄캄해진 실내는 나를 금새 꿈 속으로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