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산책, 돌아 걷기
그래, 알래스카 말고 몬태나. 저와 아무런 연관이 없어 그저 낯설지만 이제는 기억할, 캐나다와 가깝다는 미국의 북서부. 그런 땅의 이름을 외우게 한 것은, 그곳에서 자랐다는 당당하고 씩씩한 붉은 머리 여자애. 지금은 이름을 알아. 비비안 스콧. 기분이 발걸음에 녹아 사뿐해지는,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는 열 셋의 동급생.
아마 이런 식으로 너를 부르면 너는 못마땅해하거나 나를 마땅찮게 볼 테고, 애초에 나도 너를 그렇게 부를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같은 해에 학교에 입학한 동급생이고, 나는 너를 함부로 내려보고 귀여워 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러니 안심하라고 하면, 걱정한 적도 없는데 넘겨짚는 내 태도를 두고 또 어처구니 없어 하려나 싶기도 할 테고, 나는, 너를 보고 어린 동생들이 떠오르면 웃어버리는 일을 좀처럼 그만두기 어려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실은 나도 너 못지 않게 어릴테고,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 아직 어린 나는, 네가 그만큼이나 어리다는 생각만을 자꾸 하고 말지. 첫만남은 그런 이유로 네게는 형편 없었으려나. 적어도 내 태도만큼은 터무니없었지.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애들을 두고 보면 느닷없는 사건을 대비하는 것은 내 오래된 습관이야.
산책로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을 보고 혹시 계곡 수영 전의 준비 운동인가, 이대로 계곡에 뛰어들까 싶어 불안하게 여긴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그렇다해도 막아설 생각까지는 없었고 그저, 평소처럼 멀리서, 무사하고 안전한지만 확인하면 고개를 돌릴 생각이었지만.
그러니까 어쩌면, 그때 너와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은 전부 네 덕분이었다고 해야 해. 네게 내가 고마워 할 일이지.
내가 한 생각은 전부 터무니 없는 오해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유가 무어든 이름도 밝히지 않은 내가 너를 오래 보고 있던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실수일 뿐이라서. 입을 열자마자 꺼낸 것은 덧붙이는 해명 없는 짧고 간단한 사과. 그러나 저를 돌이키는 것도 사과도 어쩌면 지나치게 빨라, 울컥 화가 오르기 전의 네가 판단을 먼저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너는 어쩌면 불처럼 타오르는 듯 싶지만, 태우지 말아야 할 것을 함부로 태우지는 않을 거야. 이것도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지만. 만일 무례라면 미안.
그러니, 용건 없이 걸어본 일 없는 산책로를 밟게 되었던 것은. 티끌만한 미안함이 조금씩 쌓인 탓이었다. 네 포용력과 너그러움이 인상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말했듯이 나는 목적 없이 산책을 하는 편은 아니라서. 만일 네가 동행이 ‘필요’하다고 나를 불렀거나 그저 팔을 끌었다면 결과는 또 달랐겠지만.
너는 나를 ‘데리고 가 주었’고, 나는 너를 따라 걸었지. 그 긴 산책로를 걸으며 나눈 대화 중에 나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느낀 것은…, 그린듯한 샌님의 대답을 반복했던 것인데. …뭐, 아무튼.
그리고 생각하면, 씩씩하게 걷는 걸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혹은 경쾌한 박자를 타고서만 흐른다는 것. 네 말대로 너는 함부로 위험하지 않고, 넓은 길을 골라 밟고, 처음 보는 저를 무리의 연약한 동료인 듯 거두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면. 저는 무리를 짓는 동물의 울타리 안에 든 듯 싶어지고,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네 색채는 어쩐지 탐스러운 갈기가 노을에 젖은 어느 맹수의 왕을 닮기도 해서. 그리고 그 환하게 타오르는 생동감과 강인한 노란 눈동자를 보고.
너는 태양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날씨가 좋다는 말로 들어준 모양이지만.
그쯤이면 말간 네 팔에 멍과 흉터 자락 하나 없는 것을 본다. 함부로 선을 넘어서는 대신, 울타리를 나가지 않고도 기지개를 뻗어 내달리다 자리로 돌아오는 너를 어렴풋 알아가면서도.
지금처럼, 나를 마주하며 뒤로 걷는 너를 보면 손이 먼저 나가는 건 여전히 어쩔 수 없다. 이건 차라리 반사나 법칙과 같은 거라서. 하지만 그런 변명이 게으른 핑계일 뿐인 것도, 너는 간파하고 말 거라는 생각도 했을 거야.
그러면 불만스러운 네 얼굴의 의아함 섞인 노란 눈에 시선이 뺏기는 채로, 저도 모를 웃음이 터졌을까.
너를 보고 웃은 것도, 네가 우스운 것도 아니야. 그저.
그 눈에 불만이 서리는 것은, 스스로를 불신하지 않는 태양의, 붉은 갈기를 흩날리는 사자의, 긍지 높은 경로를 감히 방해한 때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지.
먹을 걸 만들 줄 알아? 하며 흥미로워하는 듯 하다가, 제가 사는 곳의 바른 이름을 새기게 하다가, 돌려세워진 네가 영문을 몰라 하는 채로 걸음을 옮기면, 저는 거리를 벌리듯 뒷걸음질을 몇 번 한다.
그러다가 터트리고 마는 웃음. 딱 세 걸음 만에 휘청거리다가 균형을 잡는 나. 굽이 높은 신발 탓을 하기에는, 실은 너만큼의 운동 신경이 없는 탓이겠지만.
“봐. 이대로 세 걸음만 걸어도 넘어질 수 있잖아. 그러니까….”
위험하니까 이런 짓은, 앞을 향하지 않는 채 걷는 일은 그만두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네 눈을 보면서 해야 할 말이 달리 있다는 걸 알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걸으면 위험해져. 그래서 남이 그러는 걸 보면 같이 불안해지지.”
네 옆의, 제가 나란히 걷던 방향으로 돌아가기 전. 너를 가만히 보며 입을 연다.
“이왕 하는 산책, 같이 마음 편히 느긋하게 걷는 게 더 좋잖아.”
하지만 함부로 돌려세운 건 미안해. 놀라게 한 것도.
여전히 조금쯤 빠른 사과, 이른 인사. 그리고 두 걸음쯤은 늦은 해명. 네가 걸음을 옮겨 나란하게 걸을 수 있도록 기다리며 눈짓하면, 붉은 머리칼 뒤로 지나온 길은, 무의미하거나 쓸모없지 않아서.
이런 산책도 나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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