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태워지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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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알마게스트가 만들어낸 공간을 찬찬히 눈으로 익혔다. 본디 한 번 행차한 길은 까먹지 않고, 머릿속으로 대번에 지도를 만들어내는 까닭에 눈으로 훑은 시간 느긋한들 알아야 할 내용을 부족하게 이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천천히, 눈으로 광경을 새겨두려는 과정은 일종의 의식에 가까웠다. 전기 왕국 시기 건축되었으니 최소 400년 전, 혹은 그보다 더 까마득히 먼 옛날에 지어진 호사스러운 지하 유적이 성체의 힘으로 난데없이 지상에 도래한 순간. 예레미야는 유적 입구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깊은 계단을 지나 맞이한 넓은 복도에서 아무 방에나 들어가 보기도 했다.
시기를 알 수 없이 고풍스러운 아치형 천장을 지나 알레테이아가 기억하는, 잊지 않는 문 너머로 향하거든 어느 곳이든 아늑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제단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하필 제의 치르는 도구가 금으로 번쩍였으므로 예레미야는 조금 웃었다. 부를 쟁여 놓고 요란하게도 번거롭게 살았다고 하자니, 요람의 마법사들은 이를 충분히 다 이용했으리라. ‘형제’를 새로 늘리는 데, 어린 애를 납치해서 키우는 데. 그 모든 것에. 하지만 썩 관리된 것 없이 간소한 공간에서 덜렁 금으로 환한 부분만 두고 이곳의 호화로움을 짚자니 그것도 멋쩍었고, 그냥.
방마다 창문처럼 딸린 것 밖으로 흙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예레미야는 지하 유적, 으로 불리는 것이 한때 지상에 머물렀던 시간을 또 추론해볼 뿐이다. 이 모든 흔적은, 여전히 인간이 드나들어서 허물어지지 않은 이 모든 광경은 진작 풍화된 시간으로 돌아갔어야 한다. 참혹한 재앙을 지나 부흥한 왕국에서는 로뷔스테의 유적을 인간이 다시 복원해낸 증거로 종종 긴요했으나…… 어디까지나, 현재와 이어질 때의 이야기다. 어느 유적이든, 사료든, 과거로 따로 머무르고자 온존하면 해괴한 꼴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망령 따위로나 지칭될 뿐.
예레미야는 그곳의 마지막을 낙원으로 맺으려던 이에게서 지금, 불태워 없애도록 허락받은 참이었다. 알마게스트의 전개가 끝나고, 이윽고 예레미야가 걸어 디디며 찾아 앞서 눈으로 외운 공간이 사라진다.
“정말 혼자 가도 되겠어요? 안내가 필요할 텐데.”
알레테이아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예레미야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 이곳으로 들여 보내줄 때, 그리고 꺼내줄 때 이미 한 번씩 알레테이아의 마법이 또 알레테이아 본인에게 망각을 덧댈 것이므로, 그 이상의 소모는 필요하지 않았고.
“내가 네 형제들을 곱게 죽이지 않을 것 같아 그런다.”
두 번째, 태연하게 이른 말이 더 없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한참 말이 없는 낯을 보다가 웃어만 보였다.
“네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지금 모두 외웠으니, 길 잃지 않으리라고만 믿어줘.”
“말은 잘해…….”
“이건 진짜여야지. 내가 죽어 돌아갈 수는 없거든.”
알레테이아는 기어이 죽을 수도 있다, 고 전제하는 얄미운 작자에게 한마디 더 끼얹으려는 듯 표정을 구겼다가 끝내 한숨만 푹 쉬었다.
“무사히 돌아와요.”
예레미야는 거듭 일러지는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테이아가 유적으로 이어지는 문을 개방한다. 꼭 두 번. 계획대로, 마지막 장소에 이르러서야 한 번 더 열릴 문으로 향하면……
집행자여, 이른 번제 치를 것을 허락하겠어요. 모조리 불태워 어떤 것도 남기지 마세요. 다시는 누구도 돌아갈 수 없도록 하세요. 그리고, 온전히, 지금 모습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 약속대로. 돌아올게.”
예레미야는 자신이 간구받은 내용을 되새긴다. 명령도, 허락도 아닌 것. 번제에 있어서만큼은 모든 약속 다 지켜질 것이므로.
종내 낙원, 으로 덧입혀지지 못할 것.
알마게스트의 허상에 삼켜져 평온 누리게끔 두지 않을 공간으로 발 디디며, 예레미야는 이제 익숙하게 그을음을 상상했다. 조금 전까지 목격한 모든 광경 애초에 오래도록 검게 그을린 채로만 해묵었어야 했다는 듯이.
***
구시대의 마법으로 둘러싸인 내부는 온통 선뜩했다. 매 순간 철저히 마법으로만 돌아가는 집단이란, 태생답게 한순간도 마법사 아닌 양태로는 산 적 없는 예레미야조차 상상해본 적이 없다. 엉뚱하게 편리한 일부를 하나 더 타고난 족속들은 종종 턱없이 천진하기 마련이라 구태여 모여 있거든 한미한 곳으로는 눈 돌릴 가능성 영영 적기 때문이었다. 예레미야는 마법사 집단이 이기적으로 고인 사례를 몇 건 알고 있었으나 이만큼 집요한 수준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불신자도 이쯤 되어서는 아는 것이다. 애초 경전조차 없는 세상이란 이따위 교조적인 자들로 들끓어 더 환난일 수밖에 없다고. 대다수가 포용하는 신이 기능하는 합의란, 이렇다. 오직 그들만이 나누어 가졌으며 독점하겠다고 외치는 요람의 교도들은 하필 마법사들로만 뭉쳐 있었으니 알레테이아가 그 독을 빠짐없이 다 받았다. 생장이 멈추고 아물지 않는 저주, 망각의 저주. 그리고……
이곳을 자기 몫의 무덤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최초에는 네가 감내해야 했던 굴곡에 화가 났다가 기어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망집으로 널 붙들어 잡고 있으니 화가 난다. 목자조차 삼킬 낙원이니 되었다. 오직 불태우는 형상, 살아남지 못할 비명, 죽음으로 제단을 쌓아 올려 네게 오직 불완전함을 고하겠다.
예레미야는 잔재로 연명한 낡은 것과, 장차 살아갈 것 집어삼킬 곳으로 왔다. 그 입을 부숴 없애기 위해.
“으음…….”
예레미야는 제복을 적신 피를 털며 짧게 숨을 흘렸다. 이곳으로는 홀로 건너왔다. 예레미야의 목숨은, 예레미야 자신이 본인을 죽이고자 노력했던 것만큼이나 철저하게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는데, 성혈 기사단의 단장이 사적인 일로 비명에 소식도 없이 죽거든 농담으로도 취급될 수 없는 아둔함이었다. 따라서 만용으로 결정한 방문은 아니었다.
단지 예레미야 카일루스, 이 악인은 자신의 주인에게 가장 앞서 무용한 피 흘리는 짓 허락받은 바 있었으므로.
알마게스트로 내부를 먼저 살피고, 구성원에 관한 정보를 듣고, 가장 먼저 디뎌 참화를 일으킬 곳을 찾았다. 예레미야의 급습이란 처절하게 공간을 지켜 온 무리에게도 예정에 없던 변고라 예레미야는 그럭저럭 재앙 노릇을 충실하게 해냈다. 연기 빠져나갈 곳 없는 데서 불 질러 사람 죽이고자 획책한 바가 해괴한 사실이 먼저인가, 성물의 무위가 먼저인가?
예레미야는 그 두 가지를 구태여 나누지 않기로 한다. 입구에서 불을 지르고 들어선 동안 예레미야는 홀로 호흡이 편안했다.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물의 힘이 주인을 보호하는 까닭에, 예레미야는 우습게도 지하에서 혼곤하지 않았으며 작열통으로 비명지르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메마른 무덤에 별안간 재난으로 튄 불꽃처럼 굴었다.
예레미야는 연기로 혼탁하게 어두운 공간에서 누군가 놀라서 뛰쳐나올 때마다 머리를 태워 죽였다. 노련한 마법사 무리의 방벽이란 마땅히 험준했으나…… 이들이 아직 다 죽지 않았던 건, 알레테이아가 이들을 한때의 흔적으로 분류해서 미루었기 때문일 뿐이다. 자신의 뿌리라고 여겨 잔학하게 굴지 않았으므로.
예레미야는 바로 그 온정을 알고, 애도해서, 사람째로 부수러 왔으니 거슬릴 것 없었다. 여기까지의 계산에 예레미야 자신의 목숨이 포함될 것도 없었다. 대신 지금 천을 적신 피에 예레미야 자신의 것도 있었지만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터무니없이 허무하게 죽어 나간 자들이 숱하게 많은데, 다치지 않기를 바라거든 도리어 반드시 죽을 심사일 뿐.
우두머리의 이름은 ‘사하’라고 해요. 정신 계열 마법사니까 조심해요. 세뇌를 구사해요.
예를 들어, 예레미야가 발 들여서 처음 죽이고자 한 자는 우두머리였다. 예레미야는 그 자의 시신을 일부러 모욕하고자 발로 차 밀어내며 눈에 익은 문양 아래로 향했다. 유적의 중앙을 지나 거대한 굴을 지나는 동안, 예레미야는 이 거대한 방까지 고단하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갑자기 불길에 놀라 허망하게 죽어간 적, 같은 행운이 슬슬 사그라졌으므로.
우두머리는 이곳, ‘관’이 있는 방 앞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죽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 남은 상처조차 그가 남긴 건 아니었다. 그의 수하 된 자들이 남긴 자상 따위일 뿐. 언제나 온전히 준비할 시간을 가진 채 수족을 부리던 자는 기습 끝에 정작 그 자신은 특기인 마법을 쓸 틈 없이 타죽었다. 그마저 주변에서 먼저들 죽고 있었으니 이 공간에 해박한 노련함으로는 충분히 도망칠 시간이 있었을 텐데……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달아날 수 없는 삶은 이해한다. 쥐지 못하거든, 지킬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삶도. 예레미야는 어느새 관 앞에 다다른 참이었다. 우두머리가 끝까지 사수하려던 관은 3m 정도로 아주 거대해서, 실제로 사람이 들어가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그저 제의를 위한 수단으로 보였다. 여기에 사람이 진정으로 들어갔을 리가? 라고 의구심 갖기에는,
……내가 들어갔던 관이에요. ‘요람’의 신자들은 그것을 어머니의 무덤이라고 부르죠. 계시도, 교리도, 다 거짓말인데, 그 ‘관’이 사람들을 허상에 붙잡아 두고 있었던 셈이에요. 나는 당신이……
이미 한 번 파묻혔던 흔적이, 복수해주고 싶었던 자의 입에서 나왔다. 예레미야는 이 부근에서 열기로 한 알레테이아의 문을 기다리며, 관으로 스태프를 겨누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옮겨붙었다. 재질이 무엇이든 이토록 지독한 불에는 별 소용도 없이.
그걸 불태워줬으면 해요.
예레미야는 관 앞에 높게 쌓인 벽에서, 익숙한 문양이 그을려 사라지는 과정을 본다. 알레테이아의 머리 장식과 닮은 문양이 오래된 행색으로 서 있다. 알레테이아가 묘사로 이르기를, 태양 아래 어머니의 무덤이 있고 요람이 그것을 감싸고 있다던 그 형상. 예레미야는 요람이 한사코 지키려던 무덤이, 이제 지키는 자 없는 상태로 불타는 걸 잠자코 지켜보았다. 알마게스트로 먼저 들여다보았던, 신자들의 생활 장소는 남루하니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았는데 이곳만 번듯해서 불만스러웠으나 이제 똑같이 검게 그을려 기껍다. 불은 소란스럽게 타들어 간다. 불로부터는 무사했으나 예레미야도 이곳이 다 무너질 무렵에 자신이 무사할 리는 없었다. 단지 문이 열리기를 확신하므로, 예레미야는 천천히 화마를 보았다.
이 오래된 무덤에서 한 가지 실수가 있었다면, 누군가 꿈꾸도록 두었다는 것.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무덤에서 기거한 자들은 무덤 밖이 궁금하지 않아서, 파헤쳐 나갈 누군가가 있으리라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뿐. 집요한 복수자가 나타나 잔학을 부리리라 상정할 수도 없었다. 그건 재해니까.
그러나, 이미 재앙 와중에 왜 이곳만 여태 무사히 알레테이아가 돌아가 자신의 숨을 짓눌러 끊을 장소로 존재해야 한단 건가. 알레테이아는 이미 무덤 밖을 나선 자였고, 무덤 밖의 삶을 아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리되도록 태어난 것이 죄인가. 죄일 리 없다. 돌아온 길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자에게 잔학 부릴 마음이 주어질 수 없으니.
예레미야는 그저 그 자신의 욕심으로 오늘까지 요람, 으로 불렸던 무덤의 번제를 치른다. 살아 있는 것은 올리지 않았고, 앞으로 태동해서 이곳으로 다다랐을 모든 가능성과 존속되어 온 시간 모두를 번제물로 삼아 불을 지핀다. 인간 각자의 불행은 틀어막을 수 없고, 연원도 제각각이라, 틀어막는 건 죄다 신을 명목으로 삼아 공상으로만 떠올릴 따름이지만.
불신자는 똑같이, 불신자로 길러진 자에게 주고 싶었던 답을 안다. 기적은 인간의 손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어차피,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성물을 쥔 손도, 다루는 손도.
“예레미야!? 어디예요?”
신성의 이름 빌린 인간일 뿐이라.
예레미야는 문이 두 번 열린 만큼 삭아 없어졌을 알레테이아의 망각 와중에, 자신이 당부했던 한 가지 부탁이 선연하다는 점에 슬쩍 웃었다. 예레미야, 사관학교 시절 줄창 듣던 이름이 또 호명된다. 연기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부르는 소리만 들리고, 한참 헤매며 재촉하는 소리 내내 예레미야, 예레미야, 이름이 들린다.
예레미야는 얼른 표정을 지우고 알레테이아의 문으로 향했다. 피 뿌리고 피 흘린 자의 웃음치고는 선뜩할 터라, 그저 소임을 마친 후 휴식을 떠올릴 뿐.
예레미야는 자신의 기분이 어떠한지, 를 잠깐 떠올렸다. 글쎄, 그냥……
오한 없이 견고한 번제란 이렇구나, 싶어서.
예레미야는 훗날 상상으로 안배해둔 번제를 새삼 곱씹는다. 타인의 과거를 도려낸 순간, 자신은 그대로 붙박여 단서를 되풀이해서 곱씹는 꼴로.
***
그러니까,
“…열쇠 준 이들의 마음을 알 것 같군요.”
언제든 집으로 돌아와. …라고 한 것 같군요. 의미는 있었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어요.
그날로부터, 또 한참.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5년 전, 알레테이아가 건넨 열쇠의 이력을 새삼 복기한다. 떠나는 어린 애에게 쥐여졌던 것. 알레테이아, 아니, 이제 ‘수리’로 지칭할 이가 어린 시절 그를 아꼈던 이들에게서 받았던 마음을, 이름 되찾은 자의 모습 안에서 비로소 공감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도.
“그러니 나도 돌려줄래요. ‘언제든 집으로 돌아오라’고. 당신은 내가 열심히 닦아놓은 땅 제대로 못 봤으니까요. …자랑 못 하면 아쉬울 것 같아서.”
알레테이아의 터전을 궁금해하면서도, 비로소 무덤을 건너 새로운 열쇠마저 찾아 쥘 이의 삶의 나머지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 초대는 지금 기억했어.”
불 질러 없애는 법밖에 궁리하지 못하고, 그것으로만 기능하는 자는 그 순간 반절의 확언을 돌려줄 뿐이었다.
번제를 집행한 자에게는 어떠한 화상 자국도 남겨지지 않았지만, 그저……
그 스스로만큼은 태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직.
“그때 별이 아름답기를 바라야겠군.”
자신에게 주어질 것 같지 않은, 지난날 사막의 밤하늘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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