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부외자로 놓이지 않았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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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속하지 못할 자, 그는 설원에서 죽었다. 아리엘 노르니르 크란츠벨룸 휘하 15인의 기사단장 중에서는 처음으로, 요란한 충정치고 조급하게도.
따라서 그는 서약을 지키지 못한 자였으되,
서약을 잊은 적은 없었다.
2.
예전에.
예레미야는 어린 시절, 숲 밖으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온갖 호사 흔하게 소식으로 들려오도록 높은 데서 태어났으나 정작 바깥의 소문에 눈 돌리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턱없이 호기심 많은 자가 호기심조차 억누르거든, 예레미야 자신이 지금 서 있는 땅에서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까마득히 시야를 메운 숲은 창살이었던 적 없었으나 예레미야의 삶은 종일 갇힌 채였다. 거짓 계시로 기적을 두르고, 신실함을 제의로 갖춰 입었으니, 순한 양 행세하다가 처음 목줄 끊은 것이 사관학교 입학이었으되 예레미야는 또 줄곧 빗살 같은 나무 틈에서 헤매던 자였다.
다음 방학부터는 집을 나가거나 여행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어떤 핑계든 대서라도 벗어나면 될 것 아닌가.
그러다 어느 날, 예레미야는 피렌티아의 질문을 곱씹는다. 그전에 들었다면 이른 질문이었을 것이고, 그 이후에 들었더라면 한참 더뎠을 테니 마침 알맞은 순서였다. 사관학교 밖으로 나가기까지 고작 2년. 그때, 예레미야는 자신이 한사코 숲 바깥을 생각지 않았던 이유를 깨닫는다. 디디고 서 있던 자리 안전하다고 여긴 적 없으므로, 나가거든 영원히 추방된 듯이 느낄 것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예레미야 카일루스, 그쯤 가진 것 절박하게 붙들어 쥐지 않고서도 간신히 주저앉지는 않게끔, 겨우 안정 위에 올라선 어린 애가 비로소 이해한다. 이제,
숲이 돌아올 곳, 이 될 수 있겠구나. 영원히 내몰려 추방당했던 장소 아닌. 예레미야는 우습게도 그 한마디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모르다가 곧바로 들떠서, 어린 애처럼 구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그때도 여전히 어린 애였다. 그러니 어린 애다운 습성으로, 예레미야가 여행을 시작한다. 떠나려던 객들을 집으로 불러모아 환대하고, 황금들녘이 융성한 풍요의 땅으로 떠났다가 바다로 향했다. 바다는, 최후에 이르러서는 찢겨 나갔지만.
우둘투둘 찢긴 낱장까지 자국으로 뱄을 뿐. 여행은 도리어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 같았다, 종종. 돌아갈 곳이 있어야 비로소 여행이었으니까. 밖에서 영원히 추방자로 굳어 없어지지 않는 게 전제였으므로. 예레미야는 그전까지 오로라를 본 적이 없었다. 너르게 펼쳐지던 빛무리, 밤하늘을 머리 위에 인 채 바라보던 세상. 예레미야는 죽음을 꿈꾸면서도, 그래서, 삶이 아름답다는 것도 아는 자였다. 삶이 환난이었어도 매 순간 모두를 지옥으로 삼아 곱씹지 않았다. 삶이란 게 본디 그랬다.
삶으로는 언제든 근사한 조각 입혀지고 말아서, 살아 있거든 끝내.
그런데,
예레미야, 우리는… 산목숨으론 도저히 기쁠 수 없어?
예레미야는 성혈 기사단의 깃발이 불태워지는 모습을 본다. 베르하임으로 돌아온 자마다 분노할 곳 어디인지 명백하게 알았으므로 도처에 널린 광경을. 그쯤, 예레미야는 자신이 끝까지 곁에 머무르지 못한 주인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린다.
예레미야. 저주가 걸렸거든 풀 방도도 있었어야 할 것, 우리는 저주 내린 자로 신의 존재는 들 수 없어서, 일평생 저주를 지고 틀린 방도로 헤매이느냐? 저주가 스스로에게서 발원했거든, 내가 재앙을 멈출 방법 잊었듯이, 해결법도 우리에게는 부재해서…….
처형이 언도된 주인이 갇힌 방향으로는, 가만 보더라도 목소리를 다시금 돌려받을 길 없고 하염없이 반복해서 떠올릴 뿐. 마땅히 투항하지 않은 자, 투항할 수 없는 자. 도무지 처형조차 용서의 양식이라 입혀져서는 안 되는 자,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생각한다. 때로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삶이 있다. 죽어야만 순리이고, 치를 값이며, 해소되는 순간이 있다. 예레미야 또한 마땅히 찢기고 불태워지며 죽어가는 것만이 남은 소명이었다. 참화를 불러일으킨 자 목이 달아날 때조차 그 죽음 온순할 수밖에.
온 땅에 끌어다 입히고, 덧씌우고, 메운 죽음이 너무 많았는데 예레미야는, 한때 여행하기를 즐겼던 자는 모든 곳의 죽음을 다 상상할 수 있었고 목격해서 알았으므로, 한순간 잊을까 봐 온 곳 돌아다니며 눈으로 기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목에 씌워질 칼조차 그만 간단하다 여겼다. 그러니까, 그들은 어김없이 저주였으리라. 도대체 해주의 방법이 간명하지 않은 저주. 그러나, 훗날 씌워진 것마저 아니고 태어난 연원부터 벌써 저주였던 삶이거든, 그 삶으로 이 땅에 참혹함 일으켰을 때 어떻게 다 씻어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어떻게 고통스러워야 할까.
폐하 곁으로 가기 전에 자진하거나 상하는 일 없으리다. 서약하겠습니다.
자, 고통의 첫머리는 성사되었다. 투옥되더라도 처형식에서조차 얼굴 맞대지 못했을 주인과 종은 벌써 갈라졌다. 예레미야의 서약은 무용했다, 이미. 어찌 당신 곁으로 갈 수 있으리라 믿겠습니까? 자진하거나 상하지 않더라도.
그러나, 나는 당신 곁으로 가기로 서약했는데.
그래도, 예레미야… 우리가 산목숨으로 도저히 기쁠 수 없어도, 외롭지는 않았구나. 네 불온한 바람을 들었을 때, 나는 그냥 가짜 신성이라서, 빛 바로 아래 가장 어두운 지점이라서, 내게 무슨 힘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마음이 수런거렸어. 괴로워도 외로운 채로는 아닐 수 있겠다 싶었어.
돌아갈 곳 없는 자, 예레미야 카일루스의 머릿속은 소란하다. 괴로워도 외롭지 않아야 했을 자가 홀로 놓여 있는 순간에, 나머지 반편으로 떨어진 저주에게는 언뜻 너그러울 만큼 삶이 까마득히 남겨져 있었다. 당장 숨 멎지 않은 이상 과분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뒤를 따르는 게 좋겠다.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예레미야는 자신의 주인이 겪으며 한 번도 돌아갈 곳, 을 되짚어 헤아릴 수 없었던 여행으로 발 디디기로 했다.
뻑뻑하게 들어선 나무 위, 수풀 안쪽으로 오려져 붙인 것 같이 반짝이던 밤하늘. 사랑하는 숲, 나고 자라 갇힌 듯이 머물렀어도 끝내 사랑했던 숲, 망가진 가시 울타리를 넘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을 나가서, 내가 한때 당신이 디딘 곳을 다 가봐야겠다. 당신이 진실로 사랑하는 조국의 풍경을 눈에 담자. 우리, 저주가 망가트린 세상을. 그러니 산목숨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감내하기로 하자. 돌아갈 수 없는 모든 곳으로 가자. 이것 여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자.
주인이시여, 당신에게 오랫동안 세상이 그러한 장소였듯이, 나 또한 이제야.
그러자 예레미야 카일루스의 삶은 비로소 온전히 참담했다, 마침내.
3.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평생의 율법으로 삼았던 것은 불신자의 삶이었고, 또한 복수였다. 예레미야는 도대체 삶을,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요행으로 게걸스럽게 해쳐나온 삶이었으니 기꺼울 수 없었고 그마저 이어가는 마음은 고작, 태어난 순간부터 예레미야 자신의 살점 도려가던 자들, 저주로 만들었던 자들, 혹은 신청 자체, 그 모든 것에 분노하기 위해서였을 뿐. 언제고 찬탄 머금고 마는 삶의 성질을 올곧게 알지 못한 채 볼품없었던 자, 그러나.
신성이 신성으로 짓이겨지길 바라나이다.
비로소 불온한 자이기를 맹세한 순간부터.
예레미야가 신성을 제의로 걸친 인간에게서 뚜렷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으니. 프리트헬름, 그가 용서하는 자라는 사실이었다. 용서란, 가장 높은 데 올라 서 있는 자의 미덕인가? 한미한 데 미처 시선 닿지 않고, 간단히 등 떠밀어 어느 숨이든 꺼트릴 자가 마땅히 갖춰야 할 힘이던가? 그러나, 이는 오직 환상 속의 공상에 지나지 않고 인간 누구나, 그 위정자조차 인간이라, 하물며 뻗어 온 손이 목을 졸라 숨을 꺼트리려 하는 위협이거든, 예레미야 자신의 삶으로써는 짓눌러 없애는 것만이 유일한 독해였을진대.
입센, 이 이름으로 불리십시오. 오직 당신의 것이니. 당신이 신성 아니어도 되는 몫, 비로소 당신이 알게끔 지금 주어지지 않았습니까?
불온한 자,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바치는 자를 부른다. 기어이 인간으로서 헌사된 자가 유일하게 남겨 받은 몫을.
기어코 신성이 된 자, 그러나 인간 하나, 입센. 예레미야가 할 일을 하지 않을 자, 용서하는 인간.
네 죄에 대한 얘기다. 네가 이미 그것을 보았고 두려움 느끼니 더 말할 것 없겠다. 짊어질 수 있을 듯하느냐?
예레미야는 입센, 을 입술 사이에 문 채로 웃었다. 그날 대답하지 않았던 것.
용서받지 못할 자는 죄 짊어지지 못하리다. 그러므로,
…너는 늘 내게 모질구나 카일루스.
용서 할애받지 않겠나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삶, 용서와 먼 삶.
불온한 자는 당신 본뜰 수 없었으니, 당신 죄 아니었음을.
용서받지 못할 자, 용서받지 않을 자.
돌아오지 못할 여행에 나서리다.
4.
하지만, 돌아오지 못할 여행에도 지도는 있나니.
예레미야 카일루스, 영락한 자의 거취는 지도로 규합된다. 이 삶이 겪은 형상으로.
드나든 곳에서 몸 감싸고, 감추고, 비밀로 위장해도 온 곳에서 들썩이는 원망과 저주, 듣지 못할 수 없으니. 귀 유독 밝은 자 산목숨으로 거니는 동안 과연 찬찬히 자신의 저주로 태어난 연원 알고, 부서지며,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 자체보다도 자신이 허물어트린 흔적 보며 영혼이 찢길 때. 그 주인 된 자가 그러했듯, 말미에 고통 머금을 줄 알면서 부단히 애쓰며 모든 곳, 사랑하는 땅 다 보아두려고 애쓰던 기간에. 그래도,
기어코 외롭지 않았던 자의 기억.
점을 이어 그리기로 하자.
5.
베르하임. 크란츠벨룸, 신성의 머리 위에 얹은 것처럼 호사스러운 가시 울타리로 둘러싸인 숲.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이름 끄트머리에 무게 짊어진 것치고 철없이 맹랑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 이외 다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똑똑히 알았다. 이름 버리고 떠나자니 모진 성정이 들끓어 힘을, 권력을 숭상했으니 원한으로 새긴 이름마다 짓이기기 전까지는 훌쩍 떠날 수 없는 것 이외에도, 그냥. 그 숲은 좋아했다. 숲에서, 예레미야는 아주 오래도록 갇힌 양 살았을지라도 그것이 숲, 이라서 불행했던 건 아니다. 예레미야는 머리 위에 놓인 것, 하늘 바라볼 줄 생각지 못하던 때조차 베르하임의 밤하늘이 아름답다는 건 아는 자였으니까. 어린 애, 짧은 생이니 삶에서 더 많이 차지할 어린 애, 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숲이었다. 예레미야는 말을 타고 거닐던 호수도, 창살처럼 들어서 있던 숲도 좋아했다. 볕이 따듯하게 늘어지던 시간도.
그러니 여행의 첫 시작은, 사랑했던 숲에서 벗어나는 것.
“예레미야, 너 가라 이제.”
와이엇이 뒤돌아 떠난다, 베르하임의 그림자가. 예레미야는 와이엇이 끝내 돌려주지 않은 말을 생각한다. 예레미야 자신의 입으로 먼저 따라 읊으라고 실없이 늘어놓았던 것. 와이엇은 본래 인사에 유독 멋쩍었던 인물이어서 고맙다는 말도 한참 지나 들었다. 몸에다 투신자의 흔적 새기고, 불길로 가시덤불 수놓는 동안 와이엇 자신이 귀하게 골라 왔다던 색유리잔에, 또. 그를 생각하며 마시기로 한 붉은색 럼주 들이붓는 동안, 아주 조심스럽게 내어졌던 것이 고마움이듯. 사랑은 끝머리에도 일러지지 않는다.
그래도, 예레미야가 안다. 그들의 친애를. 그래서 예레미야는 와이엇이 뒤돌아 떠나기 전, 힘 줘서 끌어안았던 감각만을 기억하는 자였다. 말만으로는 한참 겉돌았을 상대가, 기어이 인색하지 못했던 증거가 기쁘다. 예레미야는 와이엇이 떠난 자리에서, 와이엇이 지적한 대로 길게 늘어트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어떻게 할까, 생각한다. 베르하임은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는데. 발 걸려 잡힐 수는 없겠구나. 예레미야, 생각한다. 이 순간 순간이 참혹하고 기쁠 테니,
내가 너희를 다 봐야겠구나.
나의 사랑하는 숲에서.
“예레미야. 축하한다. 나를 긁어 흔적을 남겼구나.”
사랑한다, 니아. 네가 있어서 덜 외로웠다. 이르거든, 여전히 박하게 똑같이 일러주지 않는 목소리가 웃음기를 머금는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한사코 긁어서 다정한 외연 벗겨내려던 자에게서 돌아온 인정이 기껍다. 도대체 무엇에게든 다르지 않은 사랑 내어주는 자이니, 그렇다면 그 경계 없음이 발원한 지점, 여유를 허물어트리고 이름 새기려는 것이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태어난 고약함이었다. 똑같이 힘을 추종하는 자, 그러나 약함에 이르거든 뒤돌아보지 않고 버렸을 자가, 호사스러운 번제로 이르지 못하고 미처 재로 화하지 못한 찌꺼기를 두고도 아주 모질지 못하다.
니아, 자신의 육신조차 그저 약함의 표상, 한계로 두고 번거로워하던 자, 그래서 다리조차 그저 시험하기 위해 잘라냈던 자가 자신과 마지막으로 맞닥뜨릴 순간에 내놓은 답을, 예레미야는 뜻밖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외로움을 달랜 양분이 무엇인지 익히 알았다. 그 긁힌 상흔이 니아에게도 기껍게 남았음을. 니아의 유치한 친구, 예레미야는 웃다가 돌아서서 갔다. 이미 아는 자들끼리의 가벼운 이별.
다시 재회하지 못할.
“외롭지 않을 거야. 네가 지금 들려주었으므로, 네 말소리가 내 일부로 스몄으므로. 사랑해. 이 말, 네가 다른 이들에게도 더 많이 들려주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에, 너 역시 사랑받는 자일 테니까.”
리즈가 떨리는 손끝으로, 팔을 벌려 안았다. 이제 타인을 껴안는 법 알게 된 자에게 안도하며 찬찬히 이르자 더는 12살, 순전히 애정 주고받던 어린 애 바치고 움츠러든 작은 자가 용기를 낸다.
“…그래… 외롭지마, 사랑받고 있음을 잊지마… 너 역시, ‘예레미야’로서… 우리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잊지 마…”
흑, 리즈가 울음을 터트린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자, 배우, 리즈가 운다. 이미 쓰러져 넝마로 늘어진 자 붙들고 생을 재촉하거든 그것, 리즈가 말했듯이 미친개의 자질이었겠으나 순전히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실 원하지 않아서 보챈 바이기도 함을. 네가 사랑받던 시절, 굳혀두고 놓지 않으려던 시절 바친 끝에 도려진 자는 이제 추억을 하나 잃으리라, 또. 하지만 예레미야는 리즈가 기꺼이 내어주었던 자리가 반드시 쓸쓸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다시 누군가를 껴안을 수 있는 자가 되었으니.
네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대도, 너를 사랑하는 ‘우리’를 네가 사랑하고 말 것이므로.
범람한 사랑에 잠길 자를 두고, 예레미야는 그 상실이 너무 깊지 않기를 바란다. 꼭 자신만큼의 상실만을 안겨줄 것이라서.
그러고 보면, 이제 해줄 수 있는 일이란, 도려낸 자국으로 남는 것뿐이구나…… 싶다가도.
“결국 제게 남은 건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끈이니까요. 죽을 자유조차 없어 삶을 연명할 뿐이죠.”
베키는 홀로 남은 몬레알의 더는 실에조차 묶이지 못했으면서도 어김없이 종속되어 있었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목 조를 힘조차 남겨두지 않은 이에게서 애상을 느낀다.
제가 직접 택한 일을, 제 의지로 할 거예요… 예레미야의 말대로. 분명 행복해질 거예요.
손수 화마 일으키는 자는 부추기는 일 또한 소임으로 두었으므로, 먼저 목줄 끊고 나온 자의 본분답게 묶여서 웅크려 앉아 있던 자를 몇 번씩 추궁하며 헤집곤 했다. 그 끝에 튀어나온 대답이 기뻐서, 실패하더라도 기다리겠다던 대답대로 언젠가 환희하기를 바랐다. 몸을 얽어매던 실 다 끊어내고 오직 자유로 살기를. 그리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막상, 이제 그들 패배한 이들은 바쳐서 보낸 것을 결여로 단 채 마주 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남은 생에 다시 채워지지 않을 공백으로. 예레미야는 베키 스스로는 직접 끝마치지 못할 삶을 잠자코 애도한다. 산목숨끼리, 벌써 송사를 읊듯 피차의 운명을 아는 채로 대하고 있으니 우습다. 투신할 때 맹세한 바, 그들 누구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후회 없어야 할 텐데도, 예레미야는 베키가 밟고 서려던 땅의 허전한 풍광을 보며 생각한다.
바쳐야 했던 것, 에다 기어이 미련을 붙이며. 이것 이외의 삶을 쥐여다 주고 싶었다고.
하지만 본디 삶은 스스로 골라 쥐는 것이라, 여기까지다. 아쉽더라도, 안타깝더라도.
“영영 숨 막히는 채가 되겠지. 만약 죽음이 고해 대신될 것으로 기다리거든, 그게 차라리 숨 멎어 가쁠 일조차 없을 지도 모르고?”
애셔가 느긋하게 이른다. 이미 턱 밑까지 숨 가쁜 처지인 줄은 뻔히 아는데도, 그간의 모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므로. 예레미야는 자신이 한때 악의를 부추겼던 자의 피로한 낯을 본다. 흐름에 몸 던졌던 자, 다다른 곳 죄책감이니 예레미야는 자신의 말소리를 다시 되짚는다. 시시하고, 오만하게, 긁어내며 이르던 모의.
악담을 상상해본다면, 어때. 내용을 어떻게 채울 거야? 그럼 구상을 해보자고. 어떻게 해야 형이 너와 다툴까?
그러나 악담의 주인공은 이제 기쁘지 않다. 어쩌면, 한순간도. 최후에 이르러 죄책감 느끼거든 그간의 즐거움이 다 무위로 돌아갈 리는 없다. 다만 갚아야 할 죄 쌓아 올린 자는 그 즐거움에다 일일이 공들여 죄를 매겨 볼 줄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애셔에게 소중한 것, 으로 놓여 바쳤던 그의 형. 악담의 주인공. 그가 진작 사라진 곳, 레이몬드의 폐허에서 애셔는 더 떠밀려 갈 곳으로는 아직 발 디디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알고도…… 그저 궁리함이 길어질 뿐으로, 패퇴한 자들의 말로는 어쩔 수 없다. 차마 후회로는 명명할 수 없는 감정, 또는 애초 후회하지 않았으므로 벌인 일에다 간신히 인간의 권리로 명확한 이름 붙이는 것.
예레미야는 그 흐름에 얹혀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나 역시 네게 소중한 것 도려낼 악담 읊지 않았어야 했다, 고. 단지 여전히, 후회로는 이름 매길 수 없을 뿐.
후회조차 할 수 없거든, 어쩌지도 못하고.
“마지막 순간…… 홀로일지라도, 그리며 생각하면 외롭지 않게 되는 걸까요?”
오벨이 눈물 젖은 얼굴로 헝클어져서 묻는다. 대개 견고했던 외연이 무너지고, 무르게 드러난 속이야말로 오벨의 본연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저, 그저…… 이제 주인 곁으로는 갈 수 없는 검은 턱없이 외롭고, 절망스러워서, 일전까지의 형상에서 붕괴된 채 놓여 있을 뿐. 끌어안은 몸에서 흐느낌이 끊기지 않는다. 마음 아리더라도 위무할 방안은 없다. 우리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그러면, 저는 당신이 잔해로 걸어가는 순간까지 계속 귀찮고 시끄러울 만큼 존재 과시할 테니까…… …… 네, 있어요. 성혈의 모두가 있어요. 우리는, 다 같은, 투신자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예레미야 선배는, 내 친우고…….”
전부 끝마친 여로에서.
아물지 않을 상처 몸에 짊어진 자들끼리의 위로는 결국 그들 서로밖에는 없었다. 우리는 같은 날 죽지 못하리라. 결의도, 목표도, 옛일이 되었으며 우리에게 전장 주어지지 않을 것이니 우리에게 그토록 과분한 일 주어지지 않으리라. 우리는, 서로 홀로 죽으리라. 그래도,
예레미야는 옛 편지를 기억한다.
[오벨 바네사 도노반에게.]
이제 오벨, 이라고 해야 한다. 바네사, 와 도노반, 을 떼어낸 예레미야의 친구, 오벨. 우리 같이 몰락한 자.
[돌려받지 않을 이름을 봉한다.]
그러나 이것 바뀐 적 없다.
[예레미야 프리에르 카일루스가.]
유대를 봉한다.
그러니 마음대로 선배의 증명에 인용될 증거가 되겠습니다.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이미 영원은 고했으니, 불변으로 고를게요.
한때 오벨이 고했던 말, 다시 일러서.
우리가 서로 혼자 죽는 순간에도 불변으로 떠올릴 자국, 모두 서로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겪은 자들끼리 마지막 순간 덜 비참하거든, 오직 서로로 인함임을.
그러니,
먼저 이 숲을 벗어나기로 하자.
“폐하의 곁입니다. 감사하게도 왕성의 빈 곳에 뿌리내리는 것을 허해주셔서.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곳이 제 돌아갈 곳이 되어주겠지요.”
레비안. 이제 가렛, 은 잊히고 뿌리 뽑힌 자가 마중나온 듯이, 로뷔스테에서 마주치면…… 예레미야는 이전에 자신의 모든 것, 이었던 숲에 새로 심긴 자국을 찬찬히 복기한다.
슈네펠트의 그토록 굳건한 광경이 만약 무너진다면? 인간을 위해 이곳까지 향한 대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겠나? 그처럼 굳건한 교리가 무너진 곳에서도.
인간을 지키기 위해 사관학교에 입학했다던 어린 애는, 과연 철성으로 수호하는 북부의 전사라. 옛 재앙에서 출몰한 겁화를 두고도 두려움 없이 답했었다.
처음엔 무너질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일어서 볼게요. 지금도 계속 노력하고 있으니까 지금처럼만이라도.
그 어린 애는 얼굴 가린 채 떳떳하지 못한 삶 자신의 숨기는 행색으로 증거하고자 했으나…… 사실은, 터전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이전과 같은 의지로, 충정으로 단단히 서거든 지난날의 교리는 굳이 혹한에서 발원한 바는 아니었으리라. 그때 인간을 향했던 선의는 여전히 잔재로, 자질로 남아서 이제 숲을 수호하리라. 거점을 지나서는, 다시 전체를. 예레미야는 숲을 지나며 구겨지고 바뀐 형상을 더디지는 않게 이해했다. 모든 것이 바뀌어서 자신의 자리는 이제 없음을.
그러나 메울 자 있다, 이렇게.
허락되지 않을 향수는 이제 잊고.
예레미야 카일루스, 베르하임을 벗어난다.
6.
로뷔스테는 비로소 밤을 되찾았다. 해가 그치지 않는 백야 재앙이었으니, 감히 인간이 올려다보지 못했던 하늘 이제 다시 밤에 삼켜져 별이 아름다웠다.
예레미야는 엑스와 함께했던, 첫 방문을 떠올린다. 경계로 드나든 첫 날의 밤에도, 둘이 나란히 감탄했던 것처럼 아주 큰 별이 보였으므로. 저토록 선연한 빛이라 신성이라 이르는가? 예레미야는 엑스의 비유를 들어, 이제 와서 생각한다. 그때도, 지금도. 가장 찬연한 별이 있거든 인간이리라. 오직 인간만이 신의 뜻을 전하고, 그 주조된 뜻이란 끝내 인간의 것일진대 경전이란 종종 기꺼이 인간을 위해 향기로우니까.
“마지막까지도 남을 위해 죽는 삶이라니…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음을 내가 증명하고 누리게 해주려 했는데, 결국 난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욕망을 채웠는데도 그만둘 줄을 몰라.”
그러나, 처음 별을 지표로 제시해주었던 자는 허망하다. 도망치지 않은 채로도, 그저 탈력이 온 듯이. 라에간이 욕망으로 두고 분주하게 애썼던 가족이란, 이미 한참 전에 죽어 사라진 이들이었으니까. 애초 잃은 공백은 도대체 채워질 수 없다. 라에간은, 가족이 죽은 연원과 똑같은 방식으로 헤매고 있다. 그렇다면 라에간 본인이 아닌 자, 예레미야가 아는 건 한 가지다.
라에간이 결국 돌아온 곳의 광경.
내년에 가 봐. 사막에선 온전히 별에 집중할 수 있으니.
어린 시절, 여행에 들떠서 묻자 라에간이 말한다. 별은 모든 하늘에 다 떠 있는데, 유독 사막의 별을 이른다. 좀처럼 집으로 돌아가지 않던 성미, 로뷔스테를 적으로 두고도 단 한 번 이르지 않던 자는 그래도 외연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다 가족을 기억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예레미야는 라에간의 간극을 종종 궁금하게 여겼다. 그러니까, 한사코 스스로 새겨서 잊지 않는 자가 무심히 낸 말은 마침내 무게추를 찾아낸 것처럼 울림이 있어서, 예레미야는 어서 그 순간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사막에서 별을 보는 순간 이 말을 지표로 떠올리고 말 거라는 것까지도.
내가 본 하늘 또한 이곳과 로뷔스테에서 본 게 다지만, 로뷔스테의 사람들이 괜히 별을 지표로 삼아 움직이는 게 아니겠지.
그래서 종국에 로뷔스테로 돌아온 자는, 그러나 이제 가진 게 없었다. 갖고자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예레미야는 증명되지 못하는 여백을 슬퍼하면서도, 순전히 자신의 감정이라는 것도 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순전히 애도한다. 별을 올려다 보는 순간의 감상이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이는 예레미야 자신도 같았다. 그래도, 백야로부터 되찾은 밤하늘에서 시선 떨어질 줄 모르는 채 미련한 자들끼리는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고.
“이대로 같이 앉아요, 그냥.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그러면, 그다음으로 걸어 디딜 쯤에는 진실로 휴식의 순간을 가늠하던 기록자를 떠올린다.
이라즈는 사관의 소임이 수거된 이후에 도리어 평온했다. 인간이, 환난의 때를 기록하는 것이 턱없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인가. 신은 없고, 인간만이 ‘신’일 수 있음을 피력하는 것을 사명으로 둔, 신앙을 목자 삼아 인도되었던 순백색 양떼 사이 검은 양은 신을 참칭하여 기어이 인간을 짓이긴 시도 쇠락했을 때, 마땅히 재앙 멎은 인간의 장소로 돌아왔을 때. 어떤 모멸의 흔적도 빠트리지 않으려고 인간을 기록하던 강박 내려놓은 채 비로소 다음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이제 삶의 여정을 마저 이어가는 자에게는 경고할 기록 더 따르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삶이 놓일 뿐이라…… 예레미야는 잠자코, 신성이 기어이 거두어진 세상의 풍광을 궁리하기도 했다. 입센, 신성으로 이름 매겨진 자는 인간. 성물, 떠받들여졌던 힘은 사실 재앙이었으니 숱하게 내세워졌던 기수들 낙후된 때. 인간 하나가 집요하게, 인간을 위해 기록했던 세상 다음 공간은 어떠한 형상일까? 그러나, 예레미야가 알 길은 없다. 설사 신성이 날것으로 짓이겨지고, 언젠가 신성이 크란츠벨룸 이름자에서 내려놓아지는 순간이 올지라도 그것은 아주 훗날의 일이다. 설사 조금 이르더라도,
예레미야가 그것을 볼 수는 없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기다릴게요. 나도 고마웠어요.”
알레테이아, 에서 수리.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린 자가 설원에서 인사하기 전. 그간의 일로 떠올린 장면이란, 어김없이 사막을 장소로 둔다. 낙원으로 삼으려던 무덤은 불태워 없애고, 사라지지 않게 붙들어 잡을 때, 예레미야는 그것이 사실은 잡혀준 셈이라는 걸 안다. 자신 혼자만의 노력도 아니고, 그저 알레테이아가 새로 거머쥐기로 한 사랑의 결과. 예레미야는 한때 두고 가는 흔적으로, 알레테이아 자신까지 번제에 올리라는 선언으로 내밀었던 열쇠가 비로소 알레테이아에게서 애정으로 이해되었던 순간을 귀하게 기억한다.
그러니 나도 돌려줄래요. ‘언제든 집으로 돌아오라’고. 당신은 내가 열심히 닦아놓은 땅 제대로 못 봤으니까요. …자랑 못 하면 아쉬울 것 같아서.
이제 수리, 라는 이름으로 살 자. 낙원이니, 계시니, 요람이니, 멍에 다 벗어던지고 지상에 발 디딘 자. 저주를 뒤집어쓰고도, 저주가 삶을 좀먹지 않게 바로서기로 한 자가 이야기해준 터전을, 예레미야는 볼 수가 없다. 모든 약속 다 달게 받아 삼켰으면서도, 단맛인 줄 알면서도 막상 그 광경에서 예레미야 자신만큼은 빼놓을 수밖에 없을 때. 이 사실이 상대에게도 기어코 상흔으로 밸 줄 알더라도.
그래도, 안심할 수 있겠다. 그들이 살아갈 것이라서.
“들어라, 성물이여. 내가 거머쥔 힘이여.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라! 다만 명심하라. 내 모든 것, 나의 영광, 나의 친애, 나의 인연. 나 손에 쥔 것 놓는 법 알지 못하니.”
살아갈 자들의 선두에서.
체레브 가아바테카, 잊힌 자가 천명한다. 성물로 이름 지어진 것에게조차. 그때, 체레브는 진작 신성을 뒤엎은 자였다. 탐욕을 자처하고 거머쥐고자 한 것 다 삶의 생동하는 흔적이었음을. 예레미야가 모르고, 알지 못할 미래가 있거든, 다만 그 편린으로 미리 접해서 볼 수 있는 단서란 체레브 자체였다. 인간으로서 움켜쥔 삶, 놓지 않고. 영광이 앗아졌거든 다시 그 탐욕스러운 성정으로 모두 채워 넣어 또 한 번 이름 빛나게 할 자. 머리 위로 밤하늘을 둔 채, 예레미야는 지난날과 같을 수 없는 사막의 정경을 본다. 샘이 말랐던 시기가 있다. 해가 저물지 않아 인간이 차마 하늘 올려다볼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공평히 놓인 광휘가, 온곳에 다 임하는 재앙으로 선뜩했던 나날이 있었다. 그 참혹함이 지나간 사막에는 또 다시 밤하늘이, 별이, 마시고 살아갈 물이 주어져서 또 인간의 자취가 들끓을 때. 성대하게 움틀 영광의 이름을, 예레미야는 운 좋게도 지금 모르는 자들보다는 조금 더 일찍 안다. 인간임에 충실한 체레브가 선두에 선 세상이, 인간으로 융성하리라는 걸 안다.
그러므로,
잠깐 알 수 있었던 데 감사하자. 살아갈 자들의 삶, 예레미야의 것 아니니. 인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증거로, 인간 세상 위에 머무르는 별을 지표로 장식될 기록의 낱장을 들춰보는 손, 예레미야의 것 아니다.
예레미야, 이제.
더는 가장 환한 별을 찾지 않으리다. 다시 보지 못할 테니.
로뷔스테를 벗어난다.
7.
클리브라이스, 풍요의 땅. 번영이 멎지 않는 땅. 신이 내리부은 융성함 그칠 일 없어 곡식이 남아돌아 찬장은 술로도 빼곡하고, 황금들녘이 지평선으로 가로질렀던 이름. 그 지난날의 흔적은, 전락한 로뷔스테의 유적처럼 영원히 삭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풍요로 갈아엎어질 것인가? 예레미야는 답을 알지 못한다. 과거를 증언할 눈과 입만이 있고, 미래를 알 방법은 없다. 단지……
“주위에서, 내가 도망칠 수 없게 자꾸 들추고 끌어내지 뭐야. 그러니까… 좀처럼 모르는 척 눈만 감고 있지는 못했어. 응. 계속해서 그들이 깨워줬으니까.”
유벤투스. 클리브라이스, 를 이름자에 달았던 자가 후회의 연원을 고한다. 바쳐야 했던 것, 투신하는 자로서 종용받았던 대가. 현재의 풍요를 가장 소중히 여겼던 자는 이제 후회를 알았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친구가 순조롭게 이르는 후회를 들으며, 이름자에 매달려 있던 무게가 그 자신의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가장 깊이 공들여 슬플지라도…… 다시 재건될 번영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인간으로서는, 저지른 후에 감당할 수 없는 죄, 후회. 그것을 유벤투스가 인정한다. 수긍한다. 왜냐하면, 살아가기 위해서. 벌써 시체 아니므로, 인간으로서 짊어지기 위해 인정한다. 그때 유벤투스의 모습은 언젠가 붙잡힐 날 염두에 두되 나머지 자유를 누리는 자였고, 예레미야가 본 적 없는 외관이었지만…… 예레미야는 그저 친구로서, 그 소탈함이야말로 지난 5년간 유벤투스에게서 제외되었던 인간성이구나, 싶다.
신이 네게 기적을 선사하여, 네가 살아났다면. 나는 신을 지독하게 증오하면서도, 그 신이 네게나마 손을 뻗었으니 오롯이 증오할 수만은 없으리라…
불신자, 한때 오직 예레미야를 위해 기적을 용인했던, 예레미야의 친구는.
여전한 친애로… 너를 용서할 수 있어. 그리고, 어쩌면… 내가 네게 용서해야 할 일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그 기만에도 불구하고 다시 용서한다. 인간만이 인간의 죄를 사하나니. 인간이라 후회할 자, 예레미야가 보아 알았다. 예레미야는 유벤투스가 그 무거운 짐으로, 후회를 기꺼이 다 짊어지고 나머지 삶을 살아가리라는 걸 이해한다.
그러므로, 풍요의 땅에도 다시금 번영 깃들기를.
“너는 물러설 수 없으니 네가 서 있는 곳에서 다만 기꺼이 행하라.”
비록 다시 돌이키기 어려운 자 있을지라도.
클로이, 바치지 않았던 자에게 일렀던 말이 들판에 떠돈다. 지난날의 황금들녘은 온데간데 없고 횅한 가운데, 한때 번영이었던 흔적을 거닐고 있자면 잎을 틔우던 성혈의 끝을 생각한다. 클로이는 그 자신의 책무를 알고, 신하로 임명한 주인의 뜻을 위반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그때 죽음을 돌이킬 수 없으리라 선고한 반절은, 믿음에 의해서. 바치지 않을지라도, 바치고자 한 마음 받아들이지 않고자 결론 내렸을지라도 그 끝만큼은 다르지 않으리라는, 이반한 바가 과연 불신으로 싹 틔우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그러나, 그 믿음은 주인께서 계실 때의 일이었으니 예레미야, 주인의 뜻을 잊지 않고 산목숨으로 거니는 자는 이제 흩어진 흔적 속에서 잔을 함께 부딪쳤던 자의 평안을 빌기도 했다. 투신한 자 기꺼이 환난으로 아득하니, 지금 고통으로 번잡할지라도. 모두가 다 극단을 공유할 까닭 없었으며 이미 이 땅의 폐허가 클로이에게 죄목으로 얹어져 있었으니까, 예레미야는 지난날의 말을 이제 거두어가기로 한다. 그때의 말 거두어간 줄 클로이 자신이 모르더라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삶 아닌가. 서로에게 모두가. 예레미야는 클리브라이스의 풍요를 빌었듯이, 주저했던 인간의 가능성을 상정한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찾아줘서 고마워요. 어떤 것도 허상이 아니에요. 당신도 나의 보물인 것을, 당신이 모든 순간에 외롭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잊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럼에도.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증거는 이미 선연하니까. 떠오른 고성, 이름 잊힌 자의 성. 예레미야에게 영원히 다프네, 로 불릴 그의 친구가 인사한다. 망각되고도, 잊힌 자의 삶 어느 것도 허상 아니었으니 다프네, 로 끝없이 불러 상기시키며 붙드는 동작이 예레미야의 양식이었다면,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오래된 습관이기도 했다.
이곳의 시간을 옮기는 거야. 아주 잠깐.
지난날, 프리모니체라는 이름에 오직 영예만이 일렁이고 황폐함과는 한참 멀었을 때. 지금의 광경, 잊힌 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을 때. 다프네는 그, 번영의 상징으로 놓인 삶에 갈증을 느끼며 따분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장식장 안의 삶이 으레 그러하듯. 그래서 예레미야는 사관학교에서 나란히 걷던 시간을, 프리모니체에 다시 옮겨다 심었었다. 그러거든 다프네가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
당신이 내게 기꺼이 시간을 잘라내어 왔던 것처럼.
그래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란 일찍이 외로움에 가 닿는다. 외로움을 아는 자들끼리 서로 결여를 염려하고 조심스럽게 메우고자 하던 나날. 그 마지막 인사에 이르러서도 비는 마음은 어김없이 애정이었으되, 예레미야는 부서진 유리 방패의 파편이 수복되지 않으리라는 것 역시 안다. 그저…… 외로움을 많이 탔으니까, 너무 잘게 흩어지지 않기를. 마지막에, 온기로 적셔둘 곳 조금 더 있기를.
지난날의 영예 다 부서진 광경 속에서도 부서지기 어려운 것, 그리움이고 애정이었다. 예레미야는 그, 귀한 보물을 두고 다시 돌아나온다.
“……나도 사랑해요. 레미와 함께한 많은 순간들이 내게 기쁨이었음을 고백해요.”
다시, 숱하게 환대받았던 저택으로 향하기 위해서. 이제 한 사람만이 남은 곳, 속에서 들끓어 차오를 욕망 없이는 지나치게 고요할 것이라 그 적막 깨부수고 싶어서.
외롭지 않았으면 해서.
마리안느, 욕망이 박탈된 이는 말했었다. 너무 일찍 죽지는 말라고. 욕망이 달아난 첫 순간에는 도무지 울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예레미야는 욕망이 떨어져 나간 곳에서 차오르는 슬픔을 본다. 사랑하는 마리, 마리안느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예레미야는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결국 투정이라…… 그냥, 마리안느가 다시 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여기기로 한다. 처음 마주했던, 화관을 씌워주었던 사랑스러움과는 달라졌어도. 마리안느가 설사 빈껍데기, 로 존재했어도 사랑했을 것이되, 지금 새로이 마리안느를 구성하는 심상은, 감정은, 더 턱없이 귀했다. 예레미야는 비슷하게 울 것 같은 낯으로 잠깐 있었다가 이내 웃었다. 자, 웃는 얼굴을 보여주기로 하자. 우리가 곧 작별할 것이므로.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되어도, 할머니가 되어도, 서로 귀애할 것이라 이야기했었다. 진심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서로의 나이 든 얼굴을 상상하지 못했고 이제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본 모습 중 가장 오래될, 우리의 모습이 욕망과 멀지 않은 형상이었으므로 다행이었지, 마리. 마지막 순간에 기어이 쓸쓸할 너를 위해. 네가, 기쁘기를.
“아모르라고 지었어요. 제가 정말 언약으로 묶일 수 있다면 그 이름인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여전히, 사랑만이 공허를 채우므로.
예레미야는 결국 붙들어 잡혀 말의 이름을 지어주고 만 시빌라를 보며 웃는다. 말을 받은 건 어린 시절의 일. 그간 홀로 오래도록 비워 두었던 건, 말까지 수용할 여력이 시빌라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이름 붙여지게 두지 않으려고,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채워 넣고자 할 것이니 그리 두지 않으려 애쓰던 흔적 무용하게, 이제 매개로 삼으려던 말마저 꼬박 사랑으로 이름 붙여지고 말았다.
“그러면 이름 지은 순간에 묶인 셈이구나. 네가 그 이름 기어이 부여했으므로.”
시빌라가 불퉁하게 말한다.
“저는 남은 생 내내 죽고 싶을 텐데두~”
“그러나 죽지 못하는 삶에 공허만 있지 않고, 한 가지 이름 덧붙여졌으니 다행이고.”
“없어지면 더는 다행 아닐 텐데두?”
송곳처럼 날카로움 반문, 그래도.
“말이 없어지는 건, 죽음에 의해서던가? 말이 살아 있을 때까지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죽어 사라져도 네가 나를 기억할 것이므로 사랑이 반드시 죽음 뒤편에 묻히는 건 아닌 셈이겠지. 그렇게 묶이는 건 괜찮고.”
아무래도 곧 떠나고자 걸음 바쁜 자에게서는 모진 말만 나오기 마련이라, 죽어서도 잊히지 않을 자가 이르니 시빌라가 금세 원망한다.
“못됐어 진짜!”
그러나 묶어두려는 것 내 고약한 심사이니 네가 이해해야지. 그렇게 클리브라이스에 존재했던 밀밭을 못되게 내버려두고 갈 자는.
“그래도 바치지 않으면, 또 후회하게 될 것 같았어요.”
이델, 엘레지. 아주 오래도록 돌아나온 끝에 자신의 이름을 찾은 이를 알게 되었다. 바친 것 보았고, 바친 연원은 지금 들었다. 그러나 알고자 한 건 마지막 순간에 기억으로 남겨둘 이름이었으니. 예레미야는 지난날의 모든 추억 중에서도 미처 다 규명해두지 못한 결여가 많다는 걸 느낀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의 몰이해는 이렇다. 이름을 드높이길 원하는 성미이니, 지난날 축록전에서 준우승하며 영예 거머쥐었던 일 두고 두고 자랑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의아하게 궁리하던 것부터. 그야, 자기의 삶을 살지 않으려던 괴리다. 불신자, 기적이며 계시를 자처했으니. 자기 자신이 아닌 채로 산 시절이 오래도록 길었던 자, 예레미야는 홀가분해 보이지만은 않은, 그저 이름 바뀐 자를 보며…… 그가 스스로 거머쥔 기회임을 본다. 친구에게 헌정한 삶으로, 표지로, 이름 지어서 붙인 것 알겠다. 그러나 자기 자신 아닌 타인으로 살고자 하거든, 그 겉껍데기와 속 모두 같을 수 없어서 아득히 헤매고 마니까. 이제야, 자기 삶을 받아들인 자와 한동안 대화 나누다가 예레미야가 이른다.
“엘레지.”
거짓 선지자는, 계시는 모르고 이미 쌓인 삶은 조금 안다. 그간의 삶이 죄다 무용해지는 것 아니니. 엘레지, 로 다시 매겨진 자 또한 그간의 토양을 다시 개간할 뿐.
그러나, 그것도 볼 수는 없지.
외로움을, 공허를 나누지 못하고, 풍요의 복원을 다시 보지 못하는 채로 떠나는 자.
지금 짓이겨 없어진 넓은 평야를 본다. 본디 밀색으로 지평선 그어졌던 곳. 재앙이 도래했던 사실 선연하나, 인간이 막아 없앴으니.
십수 년 후 다시 태어날 아이에게는 또 그 번영한 밀색 선이 눈 뜨고 본 최초의 광경일 것이며, 또한 훗날 최후의 광경이라 다시 기근 깃들지 않기를.
그들의 친구였던 자, 예레미야. 클리브라이스를 떠난다.
8.
마누스벨레. 해안선이 고요하다. 마지막으로 목격한 재앙이 그만 다 꿈인 듯이. 예레미야는 재앙이 도래했던 시기, 바다에 종종 갔다. 해일은 도무지 상상 밖이라 처음 본 순간 그만 까마득히 두려워 눈 떼기 어려웠으므로, 지상이며 수중의 절망 다 기억해두려고.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죄 놓치지 않아야 했으니. 사위가 다 평온해서 문득 낯설다가도, 이것이 바다의 일이다.
거대한 파도를 새겨둔 이름의 땅, 돛과 작살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해일로 배가 뒤집히고 조각나 온 곳에서 울음 그칠 날 없었을 때. 바다를 마땅히 떠받들던 자들, 숭상하며 사랑하던 공간 박탈당한 채 수난으로 흩어져 있었을 때.
네 삶보다, 다른 이들의 삶보다 중요한 것이냐?
레티시아, 낙뢰로 화마와 같은 파탄 초래할 수 있으면서도 몸에 둘렀을 뿐 방벽처럼 견고한 자가 물었을 때. 예레미야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재앙의 도래가 다른 모든 자들의 숨과 터전보다 중요한가? 아니다. 예레미야 자신이 둘러보았던, 사랑하는 왕국으로는 수많은 삶이 들끓었다. 예레미야는 불신자였으나 인간만큼은 사랑했다. 아니, 인간만을 사랑했다. 그러니까 차마 그렇다, 고 대답할 수 없을 때 레티시아는 두 명에게 질문한 셈이다. 아리엘과 예레미야, 멈출 수 없는 재앙의 비밀을 알고 초조했던 이들에게.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회한다는 말조차 해서는 안 되는 자들에게.
“사과하지 말라고 했던 건 진심이에요. 사과받고 싶지 않아요…”
레티시아, 위엄을 내려놓고 눈물 흘리기로 한 자가 풍랑 그친 해변에서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그토록 꺼리는 바다여도, 미워도 그것까지 포함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었지. 그간의 호된 외연 다 씻긴 양 보여도 전날 왜 네 삶, 이라고 했겠나? 다만 재앙으로 남겨지면 그뿐일 자를 인간으로 본 자는 여전히, 미워도 품는 방법을 알았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오늘 조심스러움조차 없이 단지 절박하게 안부를 묻는 이에게 말한다.
“고마웠어.”
인간의 자리에서 떠밀린 자에게는 붙들어 잡는 손길만큼이나, 인간으로 되새겨 주는 목소리 또한 간절히 고마웠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간까지의 감사 이외에는 돌려줄 수 있는 것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며 돌아섰던 자는.
그래서 말했죠, 난 수호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빈자리를 곱씹었으므로, 바다에서 지금 듣지 못하는 자를 떠올린다. 레인은, 바다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모든 것 다 알 수 없는 시절, 이제 곧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될 자였으나 예레미야는 결국 자신이 레인과의 내기에서 이겼으리라 생각한다. 모두를 살리는 내기. 이기고 지고, 는 중요할 것 없으나. 아무도 해하지 않으려던 자, 대가를 바친 뒤에는 도리어 벼려져 위태롭지 않은 검이 되었으므로. 무딘 날은 해묵은 시기의 기억처럼 변모해서, 그는 이제 수호자로 황성을 지키고 서 있을 터였다. 저 말, 이제는 대답이 다를 텐데. 다시 들어 물을 기회는 없다. 그러니 예레미야는 한 번도 그와 만난 적 없는 바다에서, 그가 본래 출발한 데서 달라졌음으로 인해 레인을 떠올리는 것이다. 레인과는 베르하임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쳤다. 여전히 다정하지만, 더는 헌신적이지 않을 자.
왜요? 산다는 건 사실 별거 아닌데. 내기 할래요?
레인은 이제 그날 선언했듯 과중하게 쏠렸던 책무에서 벗어난 자였다. 삶은 별것 아닌 동시에 유지되기 턱없이 어렵다, 어느 시기에는. 그것을 그가 이제 받아들이리라. 바다를 등진 자들은 해일에 휩쓸리듯, 파도 소리 불어 닥치는 동안 마땅히 바뀔 해류처럼. 턱없이 다른 길로 돌아서기도 한다. 낙뢰를 이끄는 자가 그러했듯, 헌신하던 자 이제 드디어 수호로 들어서리라.
예레미야는 그것이 싫지 않다. 드디어, 레인이 자기 자신에게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다시.
이미 내 곁에서 많은 것이 떠났어. 놓아줬나? 알 수 없지만… 나는 덕분에 도리어 기뻐지고 있고. 갈 건가?
바다에서 듣지 않은 목소리, 그랑베소에 이르러 다시 들으니. 이제 직접 마주쳐 듣는 것보다 끄집어내 떠올리는 일이 더 잦은가, 싶다. 이때는 로뷔스테에서, 모래바람 사이로 실성한 자의 모습 맞닥뜨리고 예감했던 일 결국 도래한 듯이 맞이하며 헤맸을 뿐인데. 그날의 어긋남이 왜 바다 향기 자욱한 곳에서 재현되나. 아, 어쩔 수 없구나. 마누스벨레에 이르렀을 쯤, 예레미야는 처음으로 알렉시스의 부서진 정신을 이해한다. 걷고, 걸어서, 균열이 나서 망가진 틈으로는 자꾸만 목소리가 샌다. 지난날의 것 뒤죽박죽으로. 저주하거나 죽이고자 호되게 이르는 말 이외에 떠올리는 목소리들은 전부 친애하는 자들의 것. 뒤섞인 채, 그래도, 아직 아주 부서지지는 않은 자가 친구의 목소리를 새긴다. 처음 그가 태어나 망가졌던 그 자리에서. 해일을 곁에 둔 자들은 도대체 깎이고 변화하기 마련인가. 이따금 그토록 잔혹하게까지. 예레미야는 바다와 그토록 딴판으로 먼, 로뷔스테, 그들이 한때 여행을 떠났던 곳에서 기어이 메마른 데 삼켜지려던 알렉시스를 생각한다. 네가 소중한 것 잃는다 일러졌으니, 나 역시 반드시 사라져 증명하겠다고 했다. 그리되리라. 그런데, 그래서, 예레미야는 보지 못할 알렉시스의 종막이 애석하다. 삶에서 이르게 추방될 자는, 왜 일찍이 먼저 바다에서 추방되었을까. 배 아니고서는 망령들의 소리 들끓어 혼곤했으면서, 왜 바다 아닌 곳으로 향했나. 그렇다면 네 섬망이 이제 아득히 깊어 살아 숨쉬는 어디에서든 네 소리, 망령의 떠드는 소리, 분간이 되지 않나.
비슷하게 미끄러지려는 자, 예레미야가 부서진 정신을 애도한다.
저는 아마 못 죽겠죠. 매일 죽고 싶어하면서…… 그래도 붙잡혀 주려고요. ….
그러니, 이토록 흉터 많은 곳이 바다이거든.
레비 페일로 시작해서 도구, 카이로스, 바다뱀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별의 이름, 알파드. 가장 귀중한 이름 바쳐서 더 빛나지 않았는데, 파편은 도로 되찾아 알, 사랑의 증거로 맺힌 어린 애가 이곳 벗어난 것 다행인가. 아니, 아니다. 사랑하는 자 있다면, 동행하는 자 있다면 바다조차 두렵지 않을 것이되 알, 에게는 바다가 도통 정착할 곳 되지 못했으므로. 예레미야는 또, 클리브라이스를 지나며 마주쳤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바다에서의 부재에 오히려 감사한다. 너를 지키고자 선 자들이 곁에 단단히 서 있고, 너 또한 그들의 삶 이어서 지상에 붙들어둘 테니. 지상에 발 디디기 어려워하는 자들, 서로 살리고자 하는 너희가 나에게 귀중하니 나는 받은 셈이다, 모두. 예레미야는 죽지 않기로 했던 자가 거듭 일러주었던 말을 떠오른다. 알, 하고 부르며 언감히 이르지 않아야 할 축복을 외었을 때. 알, 되찾은 파편으로 빛 낱낱이 스며서 되찾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네가 죽고 싶어 하지 않는 날도 오지 않으려고. 지상에 발 디디고 있거든, 결국. 네 이름… 사랑해, 알.
예레미야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이르면, 훌쩍 어린 애 같던 이에게서는 어김없이 견고한 말이 돌아왔었다.
저도 사랑해요, 예레미야. 축복 고마워요… …여전히 죽고 싶지만… 하고 싶은 거, 생겼네요.
죽지 않는 것. 하고자 하는 일, 삶이니.
언약받은 자는 삶의 반절을 배 위에서 요동치며, 안정되지 못한 지반에서 움츠러들던 자의 생을 소망한다.
너희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러다 또 생각이 튄다. 이곳에 없는 자, 아주 평온한 바다를 보면서, 꼭 깨진 진주처럼 일그러진 이의 소망을.
조반니는 본래 폭풍을 모르던 자였다. 풍랑 없이 잠잠하던 자, 거센 해일 거치지 않았으므로 견고한 지지대로 자리했던 자는 선물을 묻거든 온화한 말씨로 내어주던, 한껏 보드랍던 자였는데. 삶의 대부분이 그러했다가 한순간, 저 소망으로 휘청거렸다. 그 소망이 무겁거든, ……왜 공정하지 않은 저울만이 성물 쥔 자들에게 행해지는지 문득 어렵다. 우리가 일으킨 재앙 멈추는 방법, 숨을 죄는 죽음을 뿌리 뽑는 방법 오직 너희가 바치고 상처 입는 것이었음이 무심코 어지럽다. 예레미야가 바쳤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듯이, ……그들이 바친 것 오직 그들의 결정이나 예레미야는, 아주 조금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래, 간신히 공정한 구색인 양 아주 앗아가지 않은 것만이 다행이었다. 행복을 소망한 자, 안배해둔 자리 기어이 몇 곳은 빌 것이고 그 자신은 예전의 평온에 잠기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만이 아쉬웠으나.
지금 이 여행길마저 결국 너희가 마련해준 길이구나. 내 주인께 갈 수 없으니 좇아 향하는 이 길 너희가 내어준 것이니,
예레미야는 더는 어찌 하지 못하는 염원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그러니 너도, …네게 주어진 이들의 친애와 낯모를 자가 먼 곳에서 보낸 친애로 행복하길 바라. …네가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고 보면, 완전히 빈 자가 있다.
이름은 외우려다가도 외어지지 않는다. 언젠가 이름 불렀을 입술 모양은 벙긋거리는 동작으로만 남고, 소리로는 미처 주조되지 못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잃은 자리, 에서 이르던 자를 떠올린다. 바다를 뒤편에 단 이들의 숙명 같았다, 꼭. 무언가 잃고 마는 것이. 바친 사실만을 알고, 내용만을 알고, 그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는 예레미야는 밝은 낮, 윤슬로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생각한다. 밤바다, 수평선이 하늘과 바다를 나누지 않는 시간의 동행인. 자신을 친구, 로 두었으니 비었을 것이므로 예레미야는 그 무른 낯으로 서글펐던 자에게 너무 깊은 상실이 아니었기를 바랐다. 어차피,
방백.
예레미야 카일루스의 친애하는 자야.
그가 한 말은 다 이루어지리라. 환난 속에서 오직 친애로 소명 이어가고 있으니.
마누스벨레를 빠져나왔을 때, 예레미야는 그의 축복대로 여로를 이어갈 자였다.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으로든.
예레미야, 아무것도 아닌 자.
마누스벨레를 떠난다.
9.
바다에서 설원까지는 한참 멀다. 슈네펠트는 뜻밖으로 갑자기 이지러져 날이 서늘하다. 예레미야는 추위를 싫어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통째로 오한에 삼켜지기 전에도 불에 끔찍하게 들러붙은 오한이라면 꼭 금세 불씨 꺼트릴 예고처럼 느껴져 한참 무섭고, 두려웠는데, 그렇다면 배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죽음이야말로 추위와 같은 형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예레미야는 이제 다른 땅에서는 겨울 저물려고 할 무렵, 혹은…… 어느쯤이었지? 분간하지 못할 때 되어 계절과 무관하게 차가운 슈네펠트에 다다랐다. 이유는, 예전의 방문에서 본 밤하늘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뒤엉키고, 망가진 자, 비틀거리며 행선지 정한 사유치고는 멋쩍다. 그래도 갔다. 자신의 주인이 마땅히 향해서 장례 치르는 모습 보았던 땅.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이곳에서 슬슬 목 너머까지 닥쳐 온 죽음을 마무리할 자였다, 죽음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미. 웅성거리며 들썩이던 소리들, 쫓던 자들, 입은 상처보다는 치민 오한으로 몸 단단히 얼어 점거된 자. 도리어 죽음을 앞두고 초연한 자는 겁화로 일어난 재앙에 최전선으로 항거했던 땅에서 뜻밖으로 잘 나다녔다. 그래도,
슈네펠트에는 종종 하늘에 비단길이 열리더구나… 그것이라면 불빛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라를 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서 머리 위 올려다볼 여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머리 드는 대신 오직 피렌티아의 음성을 떠올렸을 뿐. 예레미야는 백야를 맞닥뜨리고 절망하다가 광휘 움켜쥐기를 망설이게 된 자를 떠올린다. 애초 예레미야 최초의 여행의 첫머리는, 그가 세워주었는데. 재앙으로 혼곤한 굴곡에서는 헤매기 마련이던가, 누구든. 그러나, 베르하임에서 나고 자라 묶인 목줄 끊고 달아났던 자는 이제 어둠의 소임을 더 잘 안다. 자신이 직접 선택해서 건사한 땅에서, 고개 들어 하늘 올려다보며 아름다운 빛무리 보며 안간힘 쓰지 않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이전에 예레미야 자신이 목격했던 하늘이 그토록 찬란했으니까, 그간 오로라를 머리 위에 둔 채 삶을 이어간 자에게는 새로운 양식이 생겼을 법도 하다.
그러면 오로라의 일부가 되는 건?
그 풍경 눈에 담고 싶어 슈네펠트로 향하는 것이라… 그것조차 되고 싶지 않구나.
초연히 받아들이고자 하던 목소리. 때로 내려놓는 것만이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방법일 수 있지 않나. 번제를 치르려던 자, 장작으로 쌓아 올려질 것 무엇일지 다 알지 못했고 화마 위에서 불탈 것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 지난 재앙에 알지 못했듯이. 유예할 시간이 주어진 자는 돌이켜서, 다시 무엇이든 거머쥐면 된다.
예레미야는 그럴 수 없을 뿐.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드립니다. 또한 당신의 이야기 들을 수 있었으니 족하나, 매번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끼는군. 당신도 어쩔 수 없이…
그래도, 똑같이 누린 건.
예레미야 카일루스, 불온한 자, 참화를 덧씌운 저주조차도 삶을 누렸으니. 예레미야는 도대체 그리 하지 않을 이유 없이 서성였던, 온갖 술렁임이며 동작에서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않았던 자를 떠올린다. 랜스는 바짝 굳은 외연으로도 눈으로 사람 좇지 않는 법 몰라서, 어린 날, 예레미야는 랜스가 혹한 속에서 단단히 주조되었던 양식이며 형상 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껏 헤집곤 했다. 병장기와 같이 움직일 자, 사유할 필요 없다. 그러나 온갖 생각으로, 관심으로, 갈등으로 들썩이면서 왜 애정을 고요히 삭히려고 하느냐, 하고. 내가 발견했으니 네 규율 방해하겠다, 하면서. 그 자, 그대로 굳어 뻣뻣하게 자란 것 같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어김없이 물렀던 자는 아니나 다를까, 사관학교 시절의 기억을 바친다.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어서. 감정만 앗아지고 기억은 기록으로 남았으니 타인의 것, 이라고만 경계 놓자니 예레미야는 그가 언젠가 수복하리라는 걸 알았다. 타인의 이야기에 기대어서, 듣지 않고서는, 시선 두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자라서. 지금 이미 일렁이는 감정에다 지난 기억 담가서 또 취할 수 있지 않으려고. 예레미야는, 자신이 랜스의 안부를 생각하는 게 조금 우습다. 이제 온전한 자일진대, 호기심이 웅성거리는 건……
아, 그 시절도 참 재밌었는데.
혹한 속에서 조용히 헤매던 자, 예레미야가 깨닫는다. 그렇구나,
내가 그립구나. 너희가.
죽음이 도처에 있을 때는… 되레 이런 곳에 걸음이 뜸하거든요. 사람들은. …불길하니까.
그러나 향수에 잠기기에, 예레미야는 슈네펠트에서 결코 환대받을 수 없는 자라. 길 외우는 일만큼은 철저한 대로, 쫓기다 발디마르 부근으로 향할 생각을 한다. 환한 낮에는 소묘화 온 곳에 들썩이는 곳. 아, 눈 녹이는 겁화 멈추었으니 지난날의 광경 그새 복원되었을까. 하지만, 변하지 않기를 기대하자니 그것 우습다. 그 이름 건 채 환대했던 자는 이제 본디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하필, 세시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관 근처로 가 향하고자 했으니 스스로의 관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던나. 모른다. 세시오의 관 안은 대개 안락해서, ……예레미야는 죽음이 매분 숨을 조여 오는 동안에도 정작 관 속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한다. 번제로 맺겠다 단언한 삶, 장작 위에 올릴 때 몸 온전히 감쌀 관은 생각지 않았으니. 이제 물어볼 자는 남아 있지 않다. 장례 치를 권리 거둬진 자는,
그래서 쫓아오는 걸까요. … …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달가우면 안 되는 걸까요.
다만 죽음을 달갑게 기다릴 뿐이라. 예레미야는 세시오에게 송사라도 물을 지경으로 허우적대는 꼴로는 곁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네게 마땅한 죽음을 쥐어야지. 네가 비로소 달가워할 수 있는 죽음을. 그런데, 나는 그러면, 죽음이 달가운가, 지금? 예레미야가 장례, 대신에 죽음을 거머쥔 자에게서 발원한 말을 궁리한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님, 여전히 두려우신가요? 남기고 가는 모든 것들이. 당신이 사랑하고 사랑받게 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면 아주 기쁘겠어요.
발디마르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그리고, ‘마키나’의 고성으로도 향하지 못했다. 그쯤 몸이 무너졌기 때문에. 오한으로 얼룩진 몸은 쉽게 허약해지고, 혹한 한가운데에서는 더욱이 취약하기 마련인가? 분별을 따지자니 죽으러 온 것이 맞아서 예레미야는 그저 몸이 난처하다. 보온 마법을 건 옷은 단단히 껴 입었고, 그리고 또…… 뭘 더해야 했더라. 아직 더 움직이려고 했는데. 예레미야, 이제 여행의 첫 양식조차 잘 가누지 못하는 자가 분별없이 생각한다.
남들 손에 쉬이 죽지 마세요. 남몰래 스러지지 마세요. 혼자 두지 마세요.
모든 것이 두렵다고. 엑스, 의 신자가 엑스의 기도를 읊는다. 아, 떠들었던 말이 속에서 떠오른다. 엑스, 너는 네가 규명되지 않는 군집, 미지수라고 했지만. 그러므로 너를 부를 때, 네 미지수에 넣어둔 마음은 항상 사랑이었단다. 신자는, 이따금 신이 신자를 아끼는 것보다도 신을 사랑할 수 있으니. 이건, 내 신이 기억해주어야겠구나. 내가 너희를, 너를 아끼는 것이 참 좋았다. 한사코 미지수로 놓인 것 집요하게 고집해서 부른 건, 그리 하고 싶었기 때문에. 사랑을 욱여넣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니 살의를 바치고 들이닥친 두려움의 형상이란, 또 사랑에서 본뜬 형상일 수밖에. 속삭여준 기도 전부 저버리는 것이 죽음이구나. 그리하여 진정으로 두려움이구나……
신자가 되겠다고 한 것, 외로움을 덜어주고 싶어서였는데. 덜 외로웠을까, 네가? 다다르지 못한 고성에서. 예레미야는 그의 신이 부지런히 모아 대접했던 뗄감을 떠올린다. 꿰맨 시신들로 쓸쓸했어도 따듯했던 고성.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그가 호사스러운 번제 치르겠다 이르며 오만하게 모아다 발밑에 두려던 장작이 어찌 그저 잘라낸 조각들이랴.
삶이 장작이었는데.
아~ 뭐라 해야 하지? 모르겠어요. 이게 솔직한 대답인데.
숱하게 잘라내 발밑에 그러모은 자. 응석 부리고는 모르는 낯으로 허둥대던 어린 애를 떠올린다. 5년 전, 벌써 한참 전. 라멕은 그때 이미 한참 어리지는 않았는데, 예레미야는 그 어린 애가 어쩐지 몹시 눈에 밟혀서 덜컥 손 내밀어 귀여워하고, 응석을 받아주곤 했다. 꼭 이전에 잃은 자리 채워 넣은 게 아니고, 그냥. 그 어린 애의 결여 채워주고 싶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채워주고 싶었던 마음, 도리어 돌려받았을 때.
나는 네 형들이 아니니까. 다행이지?
그때 손길 허락하랍시고 시시하게 이르던 말, 다 우습다. 예레미야도 안다. 정말 죽여 없앤 형들 이외에 애정 주었던 형, 이 남긴 상흔은 애초 심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래, 한 번도 겪지 못한 애정 갈급한 어린 애에게 손 뻗은 것 온당했던가? 저주에게 주어질 일로써.
네가 죽여야 할 형으로는 남지 않을 테니.
로뷔스테에서, 도저히 슈네펠트에서는 얼굴 맞대지 못할, 설원의 주인과 맞닥뜨렸을 때. 예레미야는 뻔뻔하게도 지껄이다가 마지막으로 라멕을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몸은, 단지 잠깐의 소임에서 눈 돌린 채였으니 마주 안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그저, 자신의 이름이 애정으로 깊게 아꼈던 동생에게 저주로 배지 않으리라는 것만 믿기로 한다. 품 내어서 안고자 하거든, 한순간 약해져서 얼떨떨하게 또 허락한 애정이 네게 있을지라도, 이제.
너는 지금 동백에 합당한 자이니. 끝없는 투쟁으로 이어질 삶일지라도, 함부로 염려 않고 오로라 보러 올라갔던 드높은 데 올라설 것만 기억하기로 하고.
네 땅 한편을 빌리도록 할까.
아니, 이게 응석인가…… 네 형이.
그거 알아? 나보고 어리광 부리는 법 배우라 말한 사람은 선배가 처음이었어. 이제는 예전보다 제법 할 줄 알게 됐는데. 선배 앞에서는 여전히…
우스워서 실없이 하하, 웃는데 고약하게 괴롭히던 후배의 말이 떠오른다. 한껏 고약하게 굴어 부추겨 응석부리게 한 그의 아버지는, 또 삶에서 잘려나가고. 헌사하기 위해 태어난 목숨, 기꺼이 전부를 내어주겠다는 듯이 구는 것 또 심술로 헤집고 싶었다가도.
온전한, 안전한, 그리고… 영생의 행복. 선배가 일러준 것과, 내가 그 애에게 주고 싶은 것을 담았지.
거슬러 올라가보자. 예레미야는 진작 장작 위에 누워 있던 자였다.
자신을 빼닮은 조카를 맡기며 갈 곳 없이 가여운 아이 믿음으로 둘 장소였던 동시에 카스파르,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목숨 돌보는 성미 빌미로 잡아서 붙들어두려던 고집, 기어이 돌려받았으니. 헤일, 이름 끄트머리를 장식하는 성에 들어찬 의미란.
[내가 행복하냐고? 자, 답을 하마. 너도 내 행복 중 하나였다. 네 이름 끄트머리에 단 것으로 살아라.]
행복, 으로 이름 보챈 데 돌려받은 결과였으므로.
예레미야는 그 모든 일들, 사랑을 주고받았던 것, 흔적으로 새겨졌던 것. 새겨지고자 한 모든 시도가 다 발밑에 놓인 장작이었음을 비로소 안다. 그것에 불을 붙여 몸째 전소시키기에는 빠짐없이 귀한 것. 그런 것들을, 그저 호사스러운 번제 집행할 거리로 삼고자 했나. 어리석구나. 그럴 수 있을 리 없는데.
선배가 맡겨준 아이고, 그렇게 겨우 내 몫이 된 삶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으니 저주구나. 예레미야는 마지막 순간인지, 아닌지, 카스파르 헤일이 나란히 놓을 이름을 떠올린다. 에스더 헤일. 카스파르를 붙들어둘 어린 애, 묶어둔 삶. 그 모든 것 깨닫기까지 이토록 길었는가, 싶다가도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리라. 예레미야가,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었던, 알고도 정말 받아들이지는 않고 그러모아두었다가 모르는 척 굴려던 모든 것들이 다 장작, 장작으로 쌓여서.
끝내 불붙일 수 없었음을.
깜빡, 잠이 매섭다. 어디에 몸 뉘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나무 아래였을까, 설원이었을까? 마물과 마주치지는 않았나? 사람은?
모르겠다. 예레미야는 그저 아주 아득히 졸렸고,
비로소 피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질 끝치고는 턱없이 너그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불붙이지 않은 장작 다 끌어안고 잠드는 상상을 할까. 내 마지막 순간 몸 눕힌 자리, 장작으로 성기고 불편해도.
이것 전부 내가 그러모아 쥐고자 했던 것,
사랑했던 것.
폐하, 주인이시여.
제가 감히 산목숨으로 기쁘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사랑 가운데 눈 감으니 언젠가 용서하소서.
10.
예레미야 카일루스의 시신은 산지기에게 먼저 발견되었다. 이것은 후에 알려진 일인데, 우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고도 보고하는 대신 앞질러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카일루스, 의 이름으로 연상되는 것 화마였으니 마지막 자취에 알맞은 일이라고 연상했던가? 모를 일이다. 그저 겁화의 잔재를 본 듯이 고요하고 침착하게 일을 치러냈을 뿐.
예레미야 카일루스, 그 악명에 비해 참으로 고상한 죽음.
11.
예레미야 카일루스, 평생 신실한 자로 꾸며낸 대로 남겨질 자. 혹은, 태워져 이름 지워질 자.
그는 예언서 아니니 미래의 일은 모르고,
미래의 일은 알 수 없도록 그가 지금 죽는다.
12.
예레미야 카일루스, 추악한 삶. 요행으로 게걸스럽게 연명한 숨, 화마의 재앙.
인간을 사랑하는 자, 숱하게 사랑한 자.
그래서 과분하게 다행히, 분명히 외롭지 않았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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