𝐓𝐡𝐞 𝐉𝐮𝐝𝐠𝐦𝐞𝐧𝐭 : 가시왕좌

[예레미야] 재회를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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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차 by 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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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드물게 진지하게 고민했다. 농담이 아닌 건가?

“왜 멀쩡히 졸업하는 사람더러 졸업하지 말래?”

이라즈가 종일 읊던 말을 새삼스럽게 인용하는 동안에는 슬쩍 헛웃음이 섞이기도 했으나 이라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급하시라고 했잖습니까. 교내에서 참지 마시라고 몇 번이나……”

평소 이라즈와는 길게 말을 주고받는 게 습관인 까닭에 도중에 잘 끊지 않는 예레미야도 이번만큼은 한마디 끼워넣고 말았다.

“진심이었냐?”

그리고, 참으라며? 말 많은 둘이 서로 차근히 기다려주던 틈이 한 번 삐걱거리자 마저 따지려던 말이 다음 말로 삼켜진다. 이라즈가 평소보다 표가 나게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밴 고저가 다채롭다.

“예에. 제 말을 여태까지 뭐라고 들으신 겁니까? 유급하신다면 기쁠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기뻐할 일은 안 들어주시는군요. 전부 줄 것처럼 했으면서.”

“말 이상하게 하지 마라…….”

“선배는 항상 그런 식이죠. 다 해준다고 해놓고 말끝마다 미안하다, 다음에는 더 잘하겠다, 날 믿어달라, ……”

“그만 지어내고.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짓은 안 했다.”

솔직히 아니지만 둘의 대화란 게 그렇다.

“진짜요?”

“대충.”

“제가 지금 예민한 거 알면서 대충 대답하시네요?”

“미안하게 됐다.”

“방금 한 말이랑 다른데요?”

“그래, 내가 미안해.”

“그런데 왜 졸업하는데요.”

예레미야는 이 밑도 끝도 없는 논쟁을 앞두고 피로감보다는 난처함을 느꼈다. 졸업식을 앞두고 대뜸 유급을 논하는 건 경우에 없는 악담이었으되 핵심은 서운한 마음인 것 아닌가. 예레미야는 모두가 내심 의심하다가 간신히 일정하게 예상이 가능한 인물인 줄 안심하고 기꺼이 환대로 떠나보내려는 장면에서 우기고, 투정부리는 후배를 놓고 잠시간 또 고민했다. 이걸 뿌듯하다고 해야 하나……

“제가 선물한 귀걸이도 1년밖에 안 차셨고요.”

예레미야는 마침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봤다.

“네가 1년 전에 줬잖아?”

“선배만 1년 더 계시면 제가 1년 더 볼 수 있잖아요.”

분별없거나 마구 행세한다고 듣던 미친개,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졸업하지 않는다, 말고 이쯤에서 할 일이 무엇인지 순순히 수긍하기로 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슬그머니 올라오고도 아직 낮은 눈높이를 두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팔을 벌려 보였다. 이라즈는 여전히 새침하다.

“안아주셔야죠. 안기라고 시키기만 하고.”

“그것 참 까다롭군……”

예레미야는 이라즈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생각한다. 예민함, 이 더 불거진 참인가. 그래도 한 걸음 다가서서 안은 후에는 말이 없었다. 오늘 종일 졸업하지 말라고 옆에서 속삭여서, 정말 하루 내내 경전 읊듯이 해서 농담이거나 괴롭힘의 일종이라고만 오해하고 넘겼던 것이 진심이기는 했는지. 요컨대 달래진 셈이다.

“뭘 졸업하면 영원히 못 볼 사람처럼 굴어, 너는.”

“당분간 못 보는 건 맞습니다만.”

“보고 싶으면 편지를 해. 답신은 꼬박 보낼 테니.”

대화에 사이가 밴 틈에 예레미야는 등을 몇 번 더 토닥이고 물러섰다. 이제야 보인다. 약간 억울하면서도 잠잠한 표정. 곱게 자란 잡초, 뭐 그런 이름으로 설명하면서 아무렇게나 이라즈를 긁어대는 동안 짐작대로 긁히지 않는 것이 기꺼웠는데 어느 순간 무른 데가 생긴 건지, 아니면 자신이 긁히게 된 건지. 예레미야는 이 어린 애의 투정에 종종 약했고, 다행히 자주 약할 필요는 없었다. 매번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오늘은 어쩔 수가 없나.

“내년에 배지나 보여줘. 안 버리고 잘 가지고 있는지 보게.”

“그전에는 안 만나겠다는 건가요?”

뭔 말을 못 하겠다.

“어차피 종착지는 같잖아.”

예레미야가 정해진 진로를 이르자 한 번 김이 샌, 얌전한 목소리로도 응석이 곧잘 내어졌다.

“말은 쉽네요.”

“불만이면 1년 더 일찍 태어났어야지.”

그사이 무언가 언쟁인지 다툼인지 모를 말이 이어지려던 것 같기도 하지만, 뒤이어 졸업식이 시작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말려도 가기는 해야 하는 시간. 예레미야는 짐짓 의젓한 체 굴며 몸을 돌렸다. 예레미야는 반만 돌아선 채로 멀뚱히 서 있는, 키만 자란 어린 애한테 웃었다.

“가야지, 이라즈. 마중 안 해줄 건가?”

이라즈는 힘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에, 가야죠…….”

익숙한 숨소리였으므로 예레미야는 좀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비로소 아쉬움이 밀려들었지만. 이별은 상호의 일이었으므로. 이별이었다, 정말로.

***

그러나, 마무리하지 않은 틈.

불신자는 그의 모독적인 값을 알려주지 않은 까닭에, 이 기도하는 자에게는 비밀을 계속 미뤘는데. 기어이 미루고 미뤄서 진실에 여백을 남긴 채 고해를 고스란히 듣던 자,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그것이 신경 쓰였지만,

정말로, 그들은 재회할 것이라서. 나중에, 언젠가…… 그렇게만 생각할 뿐이었다. 배지를 건네주던 그 순간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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