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Everything I Have
예레미야는 어느 날 불쑥 사랑을 느꼈다.
그전까지는 사랑하지 않았다, 는 뜻이 아니다.
우리 결혼할 거잖아요.
네, 나도 사랑해요.
……이제 결혼하는 거죠?
……당장 부정하지 않았을 뿐, 정말 수락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던 언약을 처음 들은 이후 꼬박 5년. 매일 아침 같은 공간, 한 침대에서 눈 뜬 후 가장 처음 마주 보는 상대의 바람을 마다할 어떤 명분도 더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레미야는 꽤 끈질기게 이라즈를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이라즈의 진심을 확언으로는 삼지 않으려 했던 모든 나날이 다 자신의 옹색한 고집에 지나지 않았음을 간단히 수긍했다. 5년 전 검토했던 낱낱, 이라즈가 갓 스물이라든지 자신이 지반을 갖추지 못했다든지 최초에 떠올렸던 사유마다 그새 마모된 지 오래였다.
아집을 풍화시킨 것의 이름은 사랑, 사랑, 번번이 다 사랑이었다. 애초 아집이 맞서지 못할 것의 이름도 사랑이었다. 사랑, 사랑, 사랑……. 존립이 가능하다는 듯이 오만하게도 으스대던 방벽으로는 오늘 종언이 고해졌으나, 오늘 갑자기 벼락이 내리꽂힌 결과는 아니었으므로 예레미야는 그동안 자신이 일부러 보수하지 않았던 자국들을 새삼 선연하게 되짚었다. 이라즈의 사랑이, 자신의 사랑이 넘쳐 흘러 부딪혀서는 예레미야 자신이 세웠던 최초의 논리는 진작 초라하게 녹슨 뼈대로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저 아둔한 눈인 척 깨닫지 않기로 했을 뿐.
이라즈를 위한답시고 지루하게 질질 끌었던 시간치고 인정은 손쉬웠지만, 애초 예레미야는 5년간 단 한 번도 이라즈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라즈를 위해 선택지로 남겨두겠다던, 그들이 결혼하지 않은 미래란 사실상 내용물을 채워두지 않은 빈껍데기였을뿐. 예레미야는 여태 이라즈의 사랑을 당연하게 누렸고, 이라즈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상상한 적조차 없다. 예레미야는 안 된다, 고 막연히 느꼈던 것이 손바닥 뒤집듯 반드시, 로 바뀐 때 이르러 작게 웃었다. 그토록 숙고해서 고르려던 과정은, 이제 변명으로도 댈 수 없고.
그리하여 예레미야가 해야만 했던 말이란 애매한 행색으로 등장하고 만다.
“티란다즈, 우리 결혼할까?”
“네. ……네?”
예레미야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뜨는 이라즈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토록 인내를 요구해 놓고, 게다가 번듯한 절차도 없이, 이렇게 툭 던지듯, …….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좀 더 번듯한 절차로, 근사한 장소와 반지를 더해서…….
“티란다즈, 나와 결혼해줘.”
예레미야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내용이 다만 확신으로 변모했다는 이유만으로 울 것 같이 젖은 눈을 보며, 더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
“너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왜냐하면,
앞으로 할 일이 아득하게 많았으므로.
***
어느 날 예레미야가 말했다.
눈사람, 추울 것 같아.
이라즈 티란다즈, 예레미야 프리에르의 연인이 동화 삽화로 들어갈 눈사람을 그리다 말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라즈가 미처 이름 붙이지 않은 눈사람 한 쌍과 멈춘 펜 끝. 무심코 뱉어 놓고 어, 하고 사이가 붕 뜬다. 애초 난데없이 솟구친 발화였으니까 예레미야 자신에게도 뜬금없이 끼어든 발상일 뿐, 이유랄 게 없었기 때문에 해명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눈사람의 숙명이란, 볕이 순조롭게 스미도록 공중에서 한기가 웬만큼 달아난 시기에는 마땅히 녹아 사라지는 것이며 이 서글픈 연원 탓에 숱하게 많은 아이가 울고 이별을 아쉬워하느라 이따금 냉장고를 그들 삶의 연장 수단으로 삼기 마련이었는데. 어린아이들 곁의 선생님, 예레미야 프리에르는 눈사람이 본디 타고난 성질과는 완전히 다른 감상을 상상으로 덧입히고 말았다.
상상치고도 엉뚱한 발상이었다. 눈사람에 목도리를 둘러 주고 모자를 씌우는 행위는 사람에 더 가까운 형상으로 두려는 사랑스러움인 것이지, 눈사람이 정말 추위를 호소하기 때문은 아닌데. 도리어 눈사람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 순간 즉시 존재 자체가 소멸멸 위기일 뿐. 그러나 아찔한 발상치고도 사소한 이야기인데도, 예레미야는 제법 위험한 발상이 입술 새로 흘러나간 듯이 순간 흠칫, 굳고 만다.
대단한 의도를 갖고 한 말도, 뜻을 갖고 한 말도 아닌 말. 꼭 자신에게서 비롯한 것 같지 않은 말이 유난스럽게 섬뜩해서, 왜, 도 그만 밝게 규명되지는 않고 다음 말은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던 데 반해 예레미야 자신이 진실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해서, 왈칵 두려움을 느꼈던 까닭이다.
그럼, 따듯하게…… 모자랑 목도리를 입혀줄까요?
하지만 이라즈 티란다즈, 예레미야의 연인은 어느새 예레미야의 말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추가한다. 꾸미기 위해서, 가 아니라 진실로 추위에 떨까 염려하는 의도로. 그렇게 빚어진 눈사람은 꼭 체온이 있는 존재 같다. 내막을 모르는 채로는 겨울날 여느 눈사람과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도, 예레미야는 눈사람의 행색이 축일을 기념하듯, 붉은색으로 덧씌워지는 데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라고는 아주 잠깐이었을 뿐. 예레미야는 심지어 그새 들뜬 채 이라즈의 구상에 몰두했다. 그러면 이라즈는 단 한 명의 독자의 즐거움을 기민하게 포착해서 다음을 이어갔다. 그저 횅하던 눈사람 한 쌍, 이름 없는…… 그 눈사람 하나의 머리로 별안간 이목구비가 덧그려진다. 안경이며 눈 아래 점까지, 누구인지 뻔히 연상 가능한 모양새. 예레미야는 조금 전의 선뜩한 심상은 금세 잊어버린 듯이 짧게 웃었다.
이어서, 손끝으로 아직 빈 얼굴을 가리키자 이라즈가 마땅히 자신을 닮은 이목구비를 그려 넣는다. 눈사람이 이렇게 억울하게 생길 수도 있나, 싶게 처진 눈꼬리. 간단한 선으로도 풍성한 줄 알아볼 수 있는 속눈썹.
응. 따듯하게…… 그리고, 사막에도 갔으면 좋겠어. 로뷔스테의 밤이 아름다우니까.
그런데 다음 발상은 또 왜일까? 예레미야는 그 순간 자신의 감상이 시시한 소망에 그치지 않고 또렷한 피력에 가깝다고 느꼈다. 마치 동화의 집필에 간여하려는 듯이. 자신은 그간 이라즈가 출간한 동화 서른 편, 한 권 한 권마다 성실하게 감상을 늘어놓던 독자였지만…… 그건 완성된 작품이었을 때 이야기였고, 이번은 아직 이야기의 몸집이 굳지 않아서 얕은 입김에도 모양이 바뀔 만큼 말랑한 지점이었는데 요구할 수 있는 빌미인 양 원하는 바를 꾸역꾸역 말하다니.
예레미야는 선연한 악몽을 여분의 삶인 온몸으로 감내하느라 따로 더 상상력을 안배할 틈은 없었는지, 아니면 애초 상상력은 적성이 아니었던 건지. 창작하는 행위에 흥미 둔 적 없었는데, 어쩐지 끼어드는 형식으로 굴고 있었다. 하필 눈사람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식으로.
네에, 마누스벨레에도 가고요. 바닷바람이 차가울 테니 마누스벨레에서도 옷을 따듯하게 입을까요.
정작 이라즈는 선뜻 예레미야의 구상을 덥석 받아들여, 옷 입은 눈사람 양옆으로는 삽화처럼 배경 두 개가 끼워 넣어졌다. 눈사람의 발자취를 되짚는 것 같은 구도로 사막이 반절, 해변이 반절. 둘 다 눈사람이 서 있는 지점에서는 한참 멀리 떨어져, 행선지의 일부인 것처럼. 예레미야는 단번에 연출된 구도를 보며 곰곰, 입을 열었다.
그리고 클리브라이스의 황금 평야도. 근사한 지평선을 보고 와야겠군.
눈사람이 있을 법한 배경은 아닐진대 작가는 한없이 너그럽게 답한다.
베르하임에 도착하는 건 가을로 할까요?
……단풍이 예쁠 테니까?
예레미야는 어느새 동화 내용을 구상하는 투로 이어진 대화에 작게 웃었다. 눈사람 한 쌍의 스케치에 지역이며, 계절이며, 단숨에 입혀진 게 즐거웠다. 녹는 성질은 슬그머니 건너뛰고.
티란다즈. 눈사람은 오로라도 볼 수 있겠지.
이제 사라진 이전 시대의 광경을 덧입히고자 했을 때.
그 순간 예레미야 프리에르, 한때 예언서 아니니 미래를 알지 못하고 죽었던 자는 기실 상상력을 발휘한 것조차 아닌 채 그저 자신이 이미 아는 시간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안다, 고 하자니 일어난 적조차 없었던 갈망.
그래서 여전히 동화를 환상으로 성립하게 하는 연원.
그렇게 아주 오래 여행하는 거야.
예레미야 프리에르, 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러나,
다 아주 예전의 일.
“춥지는 않아?”
“훌쩍, ……네에. 아니, 진짜로요.”
“내 눈사람, 춥지 않게 안아줘야겠네……. 하하.”
예레미야는 객실을 벗어나자마자 확 들이닥친 찬 공기에 이라즈의 점퍼 지퍼를 내려 안쪽의 목도리를 더 단단히 메주고는 다시 지퍼를 올렸다. 이라즈는 고분고분하게 손길을 받다가도 약간 부족한 눈으로 예레미야를 봤다. 마찬가지로 추위에는 도무지 익숙하지 않아서 촌스러운 털모자까지 단단히 쓴 예레미야는, 마찬가지로 나눠 쓴 이라즈를 보며 무얼 더 원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 알림음이 마치 시간제한씩이나 되는 것처럼 잽싸게 이라즈에게 붙었다가 떨어져 나왔다. 그사이 뺨에 얕게 밴 체온이란 애석하게도 미약할 뿐이었지만, 슬그머니 놀리는 투에 뾰로통해지려던 눈은 도로 온순하게 예레미야를 봤다. 예레미야는 장갑째라, 손가락이 맞닿은 감각이라고는 실상 희미한 채로도 이라즈와 손을 잡은 채 엘리베이터에 탔다. 연인끼리의 알 만한 애정 표현이란, 문이 열리기 전에 다 치러졌어도 엘리베이터 탑승객들에게 진작 폭로된 것 같았으나 행복한 연인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이 두꺼워서 잘 맞물리지도 않는 손을 억지로 깍지껴 잡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오로라를 보러 가는 중이다.
오로라를 보러 가자.
멋없는 청혼 이후.
예레미야는 결혼하자는 선언의 형식이 썩 시원찮았던 것과는 영 딴판으로, 신혼여행을 떠날 장소만큼은 바로 제시해냈다. 두 사람 모두 ‘기억’하는 슈네펠트의 오로라란, 이제 사라졌고. 비행기를 타고 아주 멀리까지 나가야만 하는, 요컨대 예레미야가 늘 걱정하던 경비 부담이 큰 선택지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대뜸 그리 청했다. 둘이서는 함께 보지 못했던 지난날이 몹시 후회되는 투였는가, 하면…… 그저 이전에 간섭하며 같이 완성시켰던 눈사람 동화의 연장인 양, 순수히 들뜬 낯으로.
그럼, 춥지 않게…… 단단히 껴입고요. 모자까지도.
그래서 이라즈가 대뜸 수락한 내력을 거쳐, 두 사람은 지금 기필코 추위를 호소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인 양 두꺼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참, 호텔 밖으로 나서자 대번에 몰아치는 한기 앞에서는 여린 입술 살에 연하게 배는 열기도 그만 아쉽게 서늘해졌을 뿐. 두 사람은 피차 말수 많은 성정치고 드물게도, 추워서 말이 없었다. 혹은……
“……아름답다.”
예레미야는 한참 위를 보다가 하얀 김을 내뿜으며 속삭였다. 아주 조용한 목소리였으되, 이라즈와 같은 감상을 공유할 정도로는 충분한 높낮이. 예레미야가 이라즈의 옆얼굴을 보러 고개를 돌렸을 때, 이라즈의 눈은 본래의 연둣빛과는 또 다른 녹색으로 반짝였다. 예레미야는 그 순간 또 참지 못하고 이라즈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비로소 고개 들어 마주한 광경이 턱없이 아름다워서, 잠깐은 그저 몰두했던 것치고 그새 집중력에 균열이 발생한 셈이었다.
두 사람은 이 압도적인 빛무리를 앞둔 채로도 그들이 서로와 함께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데 더 주목했다. 그러니까 입술이 떨어질 쯤 되어서는, 단단히 두꺼운 두께로 채비하지 않고서는 쉽게 다가갈 수조차 없는 광경에 새삼 아쉬움을 느끼고 마는 것이었다. 이때는, 서로 끌어안는 것도 좀 우습게 버둥거리는 모양이 되고, 살갗에도 한기가 그득 배서 체온끼리 맞댄 것 같지도 않았다. 살도 좀 얼었나. 그래도……
“앞으로는 또, 뭘 보러 갈까?”
예레미야는 금방 다음을 이야기했다. 다시 잠자코 오로라를 주시하면서도, 머릿속은 산만하게 헤집어진 양. 그러면 마찬가지로 꼭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이라즈의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요. 밤바다도 보고 싶고요. 그냥, 전부 다 보러 가면 안 돼요?”
“차라리 보러 가지 않을 곳, 을 정하는 게 빠를 수도 있겠구나.”
“하하…… 네에. 난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가고 싶을 테니까.”
“소거법으로.”
“응. 그래도, 별로 안 추려질 걸요. 당신이 떠올린 곳은 다 가고 싶어질 거라서.”
“이만큼 추워도?”
“이만큼 추운 곳까지도 왔잖아요. 당신과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프리에르.”
순 달콤한 말만 주고받고 있자면…… 그것이 진실이라서, 예레미야는 구태여 과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어디 가자고 하면 이라즈는 정말 다 수락할 테니까. 그러니까 신혼여행지가 오로라가 보이는 땅, 이 아니었어도 이라즈는 비슷하게 선뜻 수락했으리라. 그럼에도,
“응. ……그리고 비로소 우리가 오로라를 함께 보러 왔어, 티란다즈.”
서로 끌어안기에는 한없이 두꺼운 눈사람 한 쌍, 이제.
……눈사람 부부가 어느새 서로 마주보며 느리게 웃었다. 흔적 같은 슬픔 위에 차곡차곡, 환희를 얹은 채.
“티란다즈, 우리는 앞으로도 그동안 그러했듯 계속 같이 집필하겠구나. 우리의 이야기를.”
잠깐의 적막. 그저 기다려주듯, 이라즈가 가만히 예레미야를 본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눈을 바라보며 이전의 대화를 떠올린다.
이미 결말까지 쓰여 뒤로 갈수록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쉬워지는 책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채워질지 기대되는 빈 원고지와도 같겠군요.
그것의 이름을 알겠다. '삶'이라고 하지 않나.
좀 더 길게 말하면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삶이겠군요.
맥락 없이 툭, 뱉어도 언제든 서로가 알아들을, 강렬한 언약. 그것이 그들이 함께 저술할 책, 삶의 문법이었으되…… ‘삶’은 단지 함께 채워나가는 것 이상이어야 했다. 예레미야가 말을 잇는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가 어떤 내용으로 적힐지는, 내가 알지.”
“……당신은 정말 예언서가 되려고요?”
문득 웃음기 섞인 목소리. 예레미야는 하하, 웃다가 이라즈의 손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눈사람이 버둥거리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두꺼운 채로, 그러나.
“하지만,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예레미야는 영락없이 연인의 수작, 인 것을 일렀다.
“우리가 최후에도 다음 순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재회를 기대하리라는 것.”
“이번 삶은 이제 시작인데도요.”
“이른 이야기 같아?”
“아뇨. 수십 번을 살았어도, 우리가 이미 반드시 그렇게 했겠죠.”
“그래. 그걸 우리가 확언하기로 하자. 아주 예전에 했어도, 지금 다시.”
예레미야는 보지 못했던, 본 기억 없는 오로라 아래서 새로이 맹세한다.
“우리가 반드시 다음에 만나 행복해지리라.”
그리고.
***
예레미야의 악몽이 자주 호되었으므로, 이라즈가 겪는 원인 불명의 통증이 수시로 섬뜩했으므로 정체 모를 초대장은 냉큼 달갑게 거두어졌다. 경계보다는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단둘이 주고받던 비밀이 정말 영원한 미지는 아니어서 규명될 수 있다면.
두 사람은 막상 아주 두려운 마음은 없이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순간에는 맞잡은 손이 유난히, 처음부터 한 덩어리였던 것처럼 단단히 얽혀서…… 예레미야는 바다 위에 덜렁 떠 있더라도 도무지 조난을 치르는 것처럼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예레미야는 그저 해묵은 감각이 덜어지고, 환대로 기꺼워서, 속에 빠듯하게 들어찬 슬픔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를 들어, 상황은 살갗에 와 닿는 감각이었지만 슬픔은 예레미야가 애초 태어났을 때 이미 뼈대로 심긴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400년 전 일을 기억해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슬픔을 자신과 분리된 형태로 느꼈다.
나와 영원히 살아줘.
예레미야는 자신이 거듭 반복했을 이별을 생각했다. 맹세했던 영원으로부터는 숱하게 미끄러진 채. 죽음으로 묶어두었던 고백, 네가 들어 이루어주었으니 그사이 수십 번의 삶, 기억해내지 못할지라도 이 약속이 계속 유효했으리라는 것 알지. 그러나, 나는 아직 한 번의 삶조차 너에게 제대로 건네지 못했으니.
그러니까 너를 먼저 달래야겠구나. 혹은, 나를.
우리가 다다를 기쁨 앞에,
내가 환희에 앞서 해야 할 일을 알겠다.
죽어 너를 남겨두지 않을 나를,
죽지 않을 나를, 너에게 주자.
***
이번의 삶을,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이번 생을 살아갈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형태로 묶기로 하자. 내가 나를 너에게, 네가 너를 나에게 주는 일인 동시에. 우리가 이 흔한 언약에 다다르기까지 아주 오래, 한참 돌고 돌았어도.
“우리는 하기로 한 일이 아주 많아. 그리고, 전부 해낼 수 있어. 오로라를 지금 함께 보는 것처럼.”
“…….”
“아주 오래전 내가 너를 거두어 갔으니까. 티란다즈,”
드디어, 실로 예언서.
예레미야 프리에르, 사랑을 기술하는 손으로 낱낱이 적혀, 진실이 될 내용의 이름이 사랑하는 이름, 이라즈 티란다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예언을 고한다.
“너와 영원히 살게. 내가 가진 전부로. 모든 삶에 이르러, 이제.”
어긋나지 않을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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