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X농장주] Mimesis
소설가라는 존재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문학이 가진 무형의 힘이 인간을 어떻게 휘둘렀는가. 한 소설은 젊은이들의 공감을 얻어내어 그들을 자살에까지 인도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소설은 테러범들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며 금서로 정해지기도 했다.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 사건. 그럼에도 군중들은 허구의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했고, 지표로 삼았다. 그렇다면 그러한 소설을 창조한 사람은 얼마나 지고한 존재인가. 동경이 목표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또한 글로써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글에 휘둘리고, 끌려다니는 존재가 되었다.
“엘리엇. 꿈을 포기하란 게 아니야. 현실을 보라는 거지.”
“글을 쓰더라도 사람 구실은 해야지. 언제까지 꿈만 쫓을 거야?”
나를 위하는 척 깎아내리는 말과.
“내 이력서 좀 봐줄래? 넌 글 잘 쓰잖아. 부탁할게.”
“나 전 애인한테 편지 쓰는 중인데, 네가 이런 거 잘하잖아. 도와줘.”
내 자존심을 도려내는 말들.
아무도 내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이해해주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파먹는 사람들 속에서 신경은 나날이 예민해졌지만 드러낼 순 없었다. 그러는 순간 그들의 말을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친절을 가면삼아 버텼지만 결국 이곳으로 도망치듯 와버렸다.
바닷가의 낡은 오두막에서 작문에 몰두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작문과 퇴고. 이 둘을 반복 할수록 내 글에선 무언가가 결핍되어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과 포기가 턱끝까지 차올랐고, 수중에 있던 돈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벼랑 끝에 몰린 상태. 이런 시기에 등장한 __란 존재는 극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히로인처럼 느껴졌다.
__는 한마디로 차갑게 생긴 여자였다. 하지만 그런 외모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어투와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온도 차는 나의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저릿저릿한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녀는 나의 꿈과 글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았다. 형식상의 아부도 없는 밋밋한 반응이었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은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응원과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연’과 ‘우연을 가장한 의도’로 마주치며 빠르게 친해졌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나의 글에 부족했던 것은 타인이라는 존재와,
“나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해.”
사랑이란 감정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을 너로서 채울 수 있겠구나 하며 .
“으음.”
나는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땀이 식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뿌옇게 보이는 눈에 힘을 주자 아른거리는 눈앞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엘리엇은 작은 등 하나만 켜둔 채 나를 등지고 책상에 앉아있었다.
사각사각. 파도소리와 함께 펜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빈 옆자리에 손을 뻗었다.
나와 엘리엇이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취향에 들어맞는 외향과 더불어, 그의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에 빠르게 마음이 기울었다.
나중에야 그 가면 같은 미소 속에 감추고자 했던 치기 어린 감정들을 알아챘지만, 이미 마음을 준 이상 발을 빼기엔 늦어버린 상태였다. 다행히도 그는 나를 통해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보며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그 말을 확인 시키듯이 그는 수시로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고, 나는 그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즐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가끔 그가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평소라면 할 리 없는 행동과 상황을 만들고는 눈에 이채를 띠며 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화가 나야 정상이겠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언제나 초조했다. 네가 원하는 답이 무엇일지, 내 반응에 실망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시험은 계속해서 어렵고 집요하게 변해갔다.
“아, 엘리엇. 잠깐만.”
“조금만……. 하아, 금방. 끝낼 테니까.”
“아파…!”
“……안 되겠어?”
잠들기 전 관계를 회상하며 쓰라린 손목을 더듬었다. 아랫도리도 아려왔다. 만약 거절했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나는 그의 날 선 마음을 보듬고 싶었지만 도리어 상처만 늘어갔다. 그리고 그 상처를 시작으로, 나는 올 풀린 스웨터처럼 그가 잡아당기는 대로 한없이 풀려나가 형태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 그렇다. 전제 자체가 잘못된 거였다. 애초에 그는 치료받을 생각이 없었고, 나에겐 어떠한 권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찌꺼기처럼 남은 미련 때문이었다.
척추를 따라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이불을 끌어모으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식어버린 몸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눈앞이 일렁이며 흐려졌다, 선명해지길 반복할수록 베갯잇이 축축해졌다.
엘리엇. 그 소설이 완성될 즈음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나는 그와의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어렴풋이 했던 예감대로, __를 만나며 엘리엇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가 주는 애정은 물론이고, 작업 중이던 소설도 매끄럽게 풀려나갔다. __와 깊은 관계를 맺을수록 그는 펜을 빠르게 휘갈겼다.
하지만 소재가 풍족하다고 해도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작품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그는 한껏 예민해지고 있었고, __을 배려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소재를 위해 그녀에게 무리한 관계를 요구했다는 사실마저 까먹고 있었다.
엘리엇은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문득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__를 본 게 언제였지? 뿐만 아니라 그는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갔던 게 언젠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집중했던 건가 싶던 그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뿌듯한 마음이 더 컸다. __이 라면 이해해 줄 테니까.
소설을 완성하면 만나러 가자.
작품을 보여주면 __는 언제나처럼 진지하게 읽어주고 힘이 되어줄 것이다. 엘리엇은 그리운 마음을 누르며 책상에 앉았다. 그러나 바로 일어나야했다.
쿵쿵쿵.
“__?”
엘리엇은 의심 없이 __를 부르며 문을 열었다.
“…….”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다.
“…하비? 어쩐 일 입니까?”
엘리엇은 생각지도 못한 이의 방문에 당황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말에 더욱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3일 뒤. 저와 __이 결혼합니다.”
“…….”
하비의 손에 들린 청첩장이 보였다. 엘리엇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눈빛에는 적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솔직히 당신이 안 왔음 싶지만.”
하비는 그의 손을 거칠게 당겨 청첩장을 쥐여줬다. 그러고는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이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아냈다.
“__은 상냥하니 소외되는 이웃이 없길 바랄 테죠.”
엘리엇이 손에 쥐어진 청첩장을 보고 있을 때, 앞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뭐, 사실. 저는 당신이 오길 기대하고 있기도 합니다.”
“…….”
“고작 너 따위가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준건지.”
하비는 한마디 한마디를 짓씹듯이 말했다.
“직접 보고 후회하는 꼴이 궁금하기도 하거든요.”
“…….”
“뭐. 그 덕에 제게 기회가 온 것이니 감사해야 할까요.”
쿵. 그는 마지막 말을 중얼거리곤 떠났다. 엘리엇은 멍하니 서서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__가 하비와 결혼을 한다고?
내가 상처를 줬다고?
엘리엇은 혼란 속에서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 울 것 같은 __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죄책감이 버거웠던 그는 자기방어를 하며 스스로에게 당위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단어로 자신을 아무리 포장했어도, 그는 그저 자신밖에 챙길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방황하던 눈동자가 가라앉으며 머릿속은 더 없이 차분해졌다. 엘리엇은 책상으로 돌아가 펜을 집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지금의 감정을 적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는 펜을 미친 듯이 움직이며 생각했다.
__, 너는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한 거다. 하지만 너도 사람이기에 실수 할 때도 있는 거겠지. 돌이킬 순 없겠지만 널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도 너는 나와 함께할 테니까.
불완전한 너를 내 펜끝에서 완전하게 만들고,
유한한 너를 내 문장 안에서 무한히 살아 숨 쉬게 하여,
계속 변해갈 너를 영원히 이 순간에 묶어둘 것이다.
나만을 사랑하던 모습으로.
-넌 미친 거야. 엘리엇.
어디선가 __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게 나란 인간이고.
“사랑해, __.”
내 사랑의 방식이었다.
-END-
소장용 구매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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