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유

#0000FF 클리셰

한여름의 청춘

자놀 by 김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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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었다.


“이거, 대출이요.”

“어, 잠깐만. …응? 여름아, 연체된 책 있는데? 8월 말까지 대출 정지야.”

“…연체요? 얼마나요?”

“2달 좀 안 된다. 반납 연장도 많이 했었네… 잃어버린 건 아니지?”

“…네.”

“꼭 반납하러 와?”

“네…”

“야, 장선을. 내 학생증으로 빌린 책은 연체시키지 말라고 했지.”

“미안, 열아… 아직, 다 못 읽어서…”

“무슨 소리야… 너 맨날 그것만 붙잡고 있잖아. 수업도 안 듣고 그것만 계속 읽으면서 아직도 다 못 읽었다고?”

“으응…”

“얼마나 남았는데? 도서관 가서 읽어, 쉬는 시간에.”

“그게, 아직… 아직도 무척 많이 남아서…”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면 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어려운 내용은 아니야, 열아. 그냥…”

“그냥 뭐.”

“…아니야. 빨리 읽을게.”

“됐어, 어차피 2달이나 연체됐는데. 방학 안에만 다 읽어라.”

“알겠어, 열아…”


여름이었다. 곧 숨 막힐 정도로 더워질 것만 같은 날씨가 신경에 거슬리지만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탓에 밖이 더 덥다는 것을 알면서도 창문을 열게 되는. 한열음은 장선을에게 이제 다시는 학생증을 빌려주지 않겠다 다짐하고서 교실을 나섰다. 어차피 오늘은 일찍 집에 갈 생각이었으니 야자 대신 멀리 떨어진 도서관에 들르든 집에 늦게 들어가든 아무래도 좋다 생각하며. 보통 그런 다짐을 네다섯 번 정도 하면 한 학년이 끝난다. 곧 여름방학식이 오고 그다음에는 눈 깜짝할 새에 개학식과 추석이 지나갈 것이고 다소 조급한 감이 있는 중간고사가 끝날 즈음에는 또다시 선을이 다가와 학생증을 빌려 달라고 할 것이었다. 열아… 학생증 좀 빌려줘. 나, 저번에 빌렸던 책이 연체돼서 못 빌린대…

여름아, 너 너무 착한 거 아니야? 선을이, 맨날 네 학생증 빌려놓고 연체시켜서 준다며.

한열음이 장선을의 뻔뻔한, 혹은 난처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답을 듣고서 교실을 나설 때면 함께 교실을 나서는 것은 언제나 가을이다.

호구도 아니고 언제까지 빌려주려구. 걔, 너 착한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차라리 책을 사라고 하는 게 낫지 않아?

머릿속 선을의 목소리를 끊고 들어오는 양가을의 질문에 한열음은 언제나 이렇게 답했다. 됐어, 난 다른 도서관 가면 되잖아. 도서관 회원증도 만들 줄 모르는 멍청한 애한테 신경 쓰기 싫어. 하지만 그 답변에 언제나 양가을은 의문을 가졌다. 지금 그러는 게 신경 쓰는 거 아냐?

“신경…”

한열음은 무심코 그 단어를 발음한다. 양가을의 마지막 질문을 항상 거짓말이라 넘기면서.


한봄이 사라진 후로 이상하게 한열음의 곁에는 계절로 만들어진 이름을 가진 친구가 많아졌고 고등학교에서의 첫 학년을 함께 보내며 친해진 양가을도 그중 하나였지만 그것을 알아차릴 만큼 한열음의 마음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제 딴에는, 자기가 여름인 것도 모르고서, 그저 온통 언니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 투성이라는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 친구들은 장선을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실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다. 수업엔 집중도 않고서 내내 책만 읽다가 생각에 잠긴 듯이 창밖을 바라보고 가끔은 옆자리에 앉은 한열음의 어깨에 기대어 깜박 졸다가 어느새 일어나서는 그에게 소곤소곤 말을 걸어대곤 하는 행동이 평소라면 어떨지 몰라도 시험 기간에는 무척이나 거슬렸으므로. 열아, 내일 같이 등교하자. 열아, 수업 끝나면 햇볕 쬐러 나가자… 시끄럽다 하기엔 조용하고 배경음으로 취급하기엔 거슬리는, 딱 그런 정도의 목소리로 열음에게 말을 건네는 선을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할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고 가끔 누군가가 조용히 하라고 하면 대체 어디서 사와서 가지고 다니는 건지 모를 새카만 8B 연필을 쥐고서 열음의 책에 뭔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는 선을이었으므로 사실상 선을은 조용히 하라고 하면 더 시끄러워지는 꼴이었다. 수업 중에는 열음이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만 반응한다는 점이 반 친구들에게는 다행스러웠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서 여름에게 다가가 선을이가 말 거는 거 안 귀찮아? 하고 동정하려면 여름은 이미 선을의 손을 잡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뒤라 지금까지도 장선을은 자신의 험담을 들은 적이 없었다.

양가을은 그 점이 못내 아니꼬웠다. 반 전체에 피해를 주면서 고작 여름이랑 좀 친하다는 거 하나로 계속 그렇게 마음 편하게 살다니. 여름이도 너무 과하게 착한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애, 데리고 다녀서 좋을 게 뭐람. 심지어 둘이 그렇게 친해 보이지도 않았다. 장선을, 분명 여름이가 착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저러는 걸 거야. 여름이도 별로 안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장선을 저 음침한 애가 우리 여름이 약점이라도 잡아둔 거 아니야? 양가을은 한여름이 안타까웠다.

교사의 입장에서도 수업을 도통 듣지 않는 데다 진로 희망도 매번 빈칸으로 제출하는 장선을은 큰 골칫거리였으나 모두가 이름만 대면 아는 사세고 만년 1등에 전교회장이기까지 한 한여름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를 데리고 다니니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매사 열정적인 여름이 선을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혼을 내도 듣지 않고 진로 상담을 해도 늘 자신은 학업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말하니 사실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학년말을 맞아 열음과 꼭 같은 반이 되고 싶다는 선을과 여름과 같은 반이 되고 싶지만 선을과는 절대로 같은 반이 되고 싶지 않다는 학생들 사이에서 갈등하던 교사들이 떠올린 것이 있었다. 상담 때마다 눈썹과 미간을 찡그리고서 어딘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여름을 얘기하던 선을.

작년에, 선을이 우연히 주에 딱 1시간 열음과 다른 수업을 듣게 된 적이 있었고 그때 선을은 수업 내내 반 안을 관찰했다. 교사와 학생과 벽과 바닥과 천장과 조명과 창문과 블라인드와 문과 칠판과 교탁과 의자와 책상을. 가만히 수업을 듣고 있나 싶다가도 어느새 고개를 돌려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데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교사와 학생을 쳐다보았고 화장실을 가나 싶었더니 말도 없이 교정 밖으로 뛰쳐나가서는 운동장 벤치에서 발견된 적도 있었다. 자주 그랬다. 그 수업 시간에만. 그 수업의 담당 교사는 매시간 선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유심히 관찰해야 했고 아이들에게 감시를 맡기고 싶어도 선을이 맨 뒷자리에 앉았으며 그의 옆에는 사람이 없었기에 수업 내내 선을을 보고 있어야 했다.

선을이 여름과 같은 수업을 들을 때는 적어도 얌전히 교실에 있긴 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로는 더욱 착잡해졌다. 같은 반이라고 시간표가 똑같은 것은 1학년 때만 잠깐 가능했으니 말이다. 반 배정으로 골머리를 앓던 교사들은 수업 중 교실을 벗어나려는 선을을 잡으러 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름과 선을의 시간표를 완전히 똑같게 만들어버리는—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여름에게 선을을 완전히 떠맡기는—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고 선을이 이미 열음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선택과목을 골랐기 때문에 열음과 선을은 모든 시간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

시간표를 받은 후 열음은 신기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선을 대신 다른 사람이 옆자리에 앉았던 작년의 그 수업이 더 당황스러웠으므로. 수업 내내 열음은 자신 없는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선을을 떠올렸으나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할지는 좀처럼 알 수 없었기에 잡생각이 길어졌고 그해 학기 말 한열음은 기어코 그 과목에 유일무이한 성취도 B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런.

열음은 선을이 곁에 있을 때 집중이 더 잘 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선을이 옆에 있을 때면 열음은 몇 분에 한 번씩 자신도 모르게 그쪽에 눈길을 주었다. 그럴 때마다 선을은 멍한 얼굴을 하고서 핏기 없는 손에 들린 책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고 하얀 손을 따라 시선이 올라가면 닿는, 손과 똑같이 새하얀 얼굴은 반 이상이 칠흑 같은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지만 간간이 숨소리가 나며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렸다.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열중한 보랏빛 눈을 마주한 다음에야 열음은 다시 샤프 끝으로 시선을 돌려 하던 것을 마저 했다. 선풍기 소리와 함께 이따금씩 들려오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선을은 매우 규칙적으로, 어찌 보면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비슷한 간격을 두고 책장을 넘겼기 때문에 열음은 굳이 시계를 보지 않고 그가 책장을 얼마나 넘겼는지 같은 것으로 남은 시간을 가늠하며 문제에 집중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나 옆에서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려오면 4초쯤 뒤 선을이 열음의 어깨에 부스스한 머리를 기댔고 열음은 눈도 한 번 돌리지 않고서 어깨를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인 채 샤프를 바꿔 잡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선을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어깨에 닿는 약간의 무게와 팔을 타고 떨어지는 검고 긴 머리카락, 얼음을 댄 것처럼 번져오는 한기, 전보다 더 가까이에서 들리는 느린 숨소리. 잠자는 사람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열음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잘 쓰지도 못하는 왼손으로 공부하면서까지 너를 참아주는 건 내가 널 이용할 수 있어서라고. 한열음은 그냥 그렇게 믿었다.

한열음 뒷자리의 백겨울은 처음엔 그 모습을 보고 장선을에게 과연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지 의심했으나 학기 말이 된 지금에서는 너무 많이 봐서 놀랍지도 않았다. 가을에게 물어보니 원래 장선을이 자주 그런다고 하기도 했고. 백겨울은 여름 같은 사람이 대체 왜 장선을의 행동을 참아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름 같은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겠지만, 겨울이 생각하기로는 모든 일을 예상한 것보다 더 잘 해내는 대신 무척 까탈스럽고 비위를 맞추기도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여름과는 조별 과제를 딱 한 번 해보긴 했지만 정말 죽을 맛이었으니까. 여름이 생각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같은 조원이라도 그의 떨떠름한 시선과 가끔씩은 정말 심한 질책을 들어야 했고 백겨울은 그때 진심으로 한여름과 같은 조가 되겠다고 자처한 것을 후회했으므로.

그래서 더욱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 항상 흐트러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모습에, 성적까지 언제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한여름과 쇳소리 같이 음침하고 불쾌한 목소리, 후줄근한 담요를 두른 부스스한 겉모습, 공부하는 것이라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선을이 그렇게 친하다니. 둘이 정반대라서 그런 걸까? 원래 사람은 자신과 반대인 사람에게 끌린다고들 하니까. 백겨울에게 둘의 사이는 그저 시험 기간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책상의 정리 상태나 아침에 확인하는 것을 깜박한 오늘의 운세 정도의 궁금함이었다. 그러니까 가을의 손을 잡고 있을 때라던가 가을과 함께 있을 때는 일부러 생각하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는. 평소엔 굳이 떠올리지 않으나 무언가 관련된 것이라도 하나 봤다 하면 순식간에 깊이 파고들게 되는.

특히 지금처럼 여름이 고개를 돌려 선을을 바라볼 때가 그랬다. 여름이, 공부하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장선을을 보고 있었던 거지. 장선을은 또 저 두꺼운 담요를 두르고 여름이의 어깨에 기대 있으니 아마 자고 있을 것이다. 오른쪽 어깨에 기대면 공부하기도 힘들 텐데, 여름이가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설마 사귀나?

아무리 모범적인 전교회장이라도 에어컨 제어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설령 더위를 너무 많이 타 다른 친구들은 다 멀쩡할 때 혼자서만 땀을 흘리고 있더라도. 여름은 방학식이 다가오며 백겨울을 포함한 다른 친구들과는 접촉하는 것 자체를 꺼렸으나 이상하게도 담요로 몸을 꽁꽁 싸맨 장선을이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거나 손을 잡으면, 심지어 갑자기 다가와 그를 끌어안고서 목덜미며 어깨에 머리를 부벼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하지만 장선을을 바라보는 여름의 얼굴은 귀찮다면 귀찮았지 절대로 사랑에 빠진 얼굴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누군갈 좋아하면 티가 나게 되어 있는데 여름만 예외일 리도 없었고. 애초에 여름이가 장선을에게 뭔가 말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짜증 난 말투였으니 싫어한다는 설명이 더 일리 있어 보였다.

기말고사가 끝나고서는 가을까지 해서 셋이 같이 노래방도 갔고 맛있는 것도 먹었으니 나름 여름과 친해졌다고 생각하던 겨울이었지만 말이라도 좀 붙여 보려고 하면 여름의 학생답지 않게 매서운 눈빛이나 어딘지 날 서 있는 듯한 목소리 같은 것들이 그를 긴장하게 했다. 누구에게나 칼 같지만 매력 있는 사람. 그것이 겨울이 바라보는 한여름이었다. 그래서 겨울은 여름이 오히려 자신보다 더 겨울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왜, 겨울같이 차가운 여름이는 저 장선을에게만은 한없이 너그러워지시는 건지.

한열음은 놀라울 정도로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열음이 명문 여대에 갔으면 좋겠다고 했으나 열음에겐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혹시나 선을이 정신을 차려 공부를 한다던가 했을 때를 위해서였다. 그런다고 해서 선을이 열음과 같은 대학에 붙을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저 그렇게 믿었다. 선을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 연도에도 수업 시간 내내 열음의 학생증으로 빌린 책만 읽었지만.

열음은 항상 의문스러웠다. 그냥 빨리 읽고 제때 반납하면 안 되는 건지, 선을의 학생증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대체 무슨 책이기에 그렇게 연체까지 해 가며 읽는 것인지. 하지만 이상하게 열음이 그 책을 읽어보려 야자를 빠지고 멀리 떨어진 도서관에만 가면 선을이 들고 있던 책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았다. 단어 하나도. 그렇게 잊어버린 것이 몇 번을 넘어가자 열음은 책 제목을 봐 두었다가 메모해 간 적도 있었으나 그럴 때마다 메모가 사라지거나 도착해서 보니 글씨가 번져 있었고 선을이 책을 반납하기 거의 직전에만 도서관을 찾는 열음이었으므로 책 제목을 물어보려 하면 선을은 이미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열음은 한 번 적어본 단어나 문장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린 것이 처음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애를 써서 제목을 기억하려 했으나 그럴수록 잊어버린 단어의 집합은 점점 더 머릿속에서 멀어져만 갔다. 기묘한 경험이었다. 이상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니 꼭 그 부분만을 누군가 도려낸 것처럼 제목은 기억 속에서 깔끔하게 사라졌고 노력한다고 해서 돌아오지도 않았다.

한열음은 그 상황을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장선을의 학생증에 대해 물었다. 대체 왜 넌 항상 연체된 상태인 거야? 너, 이번에도 네 이름으로 빌렸던 게 연체돼서 내 학생증 빌린 거잖아. 열아, 그게… 실은, 연체가 풀리기 전까지 할 게 없어서… 그런데 읽다 보면 항상 시간이 너무 빨리 가, 그래서… 미안, 열아… 대충 말을 들어보니 선을은 자신의 연체가 끝날 때까지 열음의 학생증을 쓰고 다시 열음의 연체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학생증을 쓰는 것 같았다. 열음은 선을의 말이 웃기지도 않았다. 대출 기간이 너무 짧은 거면, 그냥 연체 안 되게 빨리빨리 반납하면서 번갈아 쓰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물으면 선을은 우물쭈물하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한열음은 그런 장선을이 너무나 답답해 확 여대로 가버릴까 생각했다가 금세 접고서 선을의 차가운 손을 이끌고 교실로 돌아갔다.

한열음은 가끔 한봄이 보고 싶었다. 특히 성적표가 나왔을 때. 지금은 집에 돌아가면 불 꺼진 거실과 잠든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열음을 맞아주지 않는다. 아, 성적이 잘 나오면 언니가 나보다 더 기뻐해 줬었는데. 하지만 그런 얘기는 누구에게도, 특히 선을에게만큼은, 절대 할 수 없었고 실수로라도 언니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가을과 겨울이 귀찮게도 질문을 퍼부어 댈 것이었기에 열음은 학교에서만큼은 의식적으로 한봄을 망각하려 했다. 그런다고 될 리가 없었지만.

이미 열음은 가을과 겨울에게 언니에 대한 얘기—딱 한 가지를 제외하면—를 몇 번 한 적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선을이 나타나 자신도 듣겠다며 열음을 끌어안는 탓에 말이 끊어져 자세히 하지는 않았으나 둘은 언젠가 여름의 집에 가면 여름의 언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대학이나 진로 얘기를 하다 보면 둘이 언니에 대해 물었고 열음은 차마 그가 죽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 말을 하는 순간 한봄이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였다. 사실 이미 죽은 게 맞기는 하지만, 벌써 몇 년이나 지났지만, 그래도…

열음은 한봄이 바랐던 미래를 이룬 양 말하곤 했다. 한국대… 갔어. 우리 언니도 공부 잘하거든. 와, 진짜? 무슨 과야?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봄이 그날 사고를 당하지만 않았으면 실제로 이루어졌을 일이니까. 영문과. 교환학생 가서 나도 못 본 지 좀 됐어. 그럼 우리도 못 만나겠네, 그래도 진짜 멋있다… 말을 지어내는 것은 쉬웠다. 사진이 없는 것쯤이야 그런 이유로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었다. 부모님도 이제 많이 회복한 상태니 이제 열음만 좀 더 용기를 낸다면 언젠가는 언니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럴 것이다…

장선을은 열음이 친구들과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오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열아… 어째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거야? 봄은, 우리 중에서도 가장 먼저 구원받았으니 축복 속에 있지만, 그게 또 다른 곳에서 죄를 짓고 있다는 뜻은 아닌걸. 무엇보다 너는… 너는 내가 봄을 말하는 걸 싫어하잖아. 너는 언제부터 봄을 말하기 시작했어? 열음이 봄을 떠올리는 것을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렇게 열음이 다른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선을의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도 함께 피어올랐다. 기분이 나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선을은 얼른 생각하던 것을 지워버리고 다시 열음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붉은 기가 도는 검은색의 머리칼, 광채가 도는 짙은 주홍빛 눈. 그 눈 안에 가을과 겨울이 비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선을이 반사되었다. 그것을 본 선을은 생각했다. 언젠가 당신과 함께 꼭 봄을 맞으러 가겠다고, 그러고 말 거라고.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서 열음은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한봄이 자리를 비운 후로 자주 있는 일이었다. 무언가 집중하던 것이 사라지거나 끝나고 나면 온 힘이 다 빠져버린 것처럼 아무런 의지도 생기지 않는. 그래도 열음은 꼬박꼬박 시간 맞춰 학교에 갔으며 선을이 함께 등교하자고 한 날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일어나라는 말부터 하고서 하루를 시작했다. 평소의 일과까지 완전히 깨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기력한 상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열음은 그 기간이 되면 스스로에게 적응하기가 어려워 제발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랐으나 선을은 그 기간의 열음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는 모습이라며. 물론 그런 말을 한 다음에는 열음의 못마땅한 눈과 자신을 외면하려는 듯한 얼굴을 감당해야 했으나 이때만 볼 수 있는 열음의 모습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으므로 상관은 없었다.

둘의 집은 모두 통학버스가 가지 않는 곳이라 함께 일반 버스를 타야 했고 13개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열음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 납작한 가방을 메고서 옆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선을의 눈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통 알 수 없는 그 얼굴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보랏빛의 눈이었다. 무척이나 탁하고 가끔은 검은색으로도 보이는 그 보라색 눈. 선을의 눈은 머리카락에 덮여 있어 다른 무언가가 비치는 일이 없었고 애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데 왜 넌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니.

선을의 눈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고 반대로 무언가 가득 차서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를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선을은 어느 계절에나 버스 창문을 열지 못했지만 운 좋게 해가 그 서늘한 낯에 닿으면 얼굴이 자연스레 이완되었고 그럴 때면 기분이 좋아지기라도 했다는 듯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가만히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열음의 손을 잡았다. 그 흰 두 손에 자신의 손을 맡긴 열음은 생각했다. 아직 여름이라 다행이라고.

선을은 버스가 움직이는 내내 열음의 쪽으로 팔을 뻗고서 그 따듯한 손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그러면 선을의 찬 손에도 아주 조금이지만 따스한 기운이 돌았고 손에 냉기가 묻는 동안 열음은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덜컹거리는 이 오래된 버스가 우연히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버리는 상상을 했다. 코너를 돌고 나면, 학교 대신에 다른 곳으로, 아주 멀리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영영 눌러앉아 버리자. 내린 곳이 어디일지는 몰라도. 선을이 열음의 손에 있는 모든 관절의 움직임과 손등에 불거진 핏줄, 둥근 손톱과 손뼈를 하나하나 손끝으로 훑고 난 다음엔 버스가 멈췄고 하차입니다, 하는 소리를 들은 뒤의 열음은 선을이 내내 붙잡고 있던 손이 사물사물 간지럽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런 버스를 타고서는 만족스러울 만큼 멀리 갈 수 없다는 것도.

여름이 아니었다면 교문을 지날 때까지도 선을의 손을 잡아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없다. 그렇게 생각한 열음은 햇살이 따스하다며 히죽 웃음 짓는 선을의 그림자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교문을 지나 걸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정말 세상이 타들어 갈 듯 덥겠지. 건물 입구를 통과해 계단을 두 층 올라가면 복도 끝에 둘의 반이 있었다. 열음은 사람 없이 조용한 복도를 걷는 것이 좋았다. 신난 웃음소리나 말소리는 평일 내내 언제든 들을 수 있지만 둘의 발이 적막한 복도를 울리는 소리는 등교할 때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선을의 긴 머리카락이 교복 셔츠를 이리저리 스치면서 나는 소리와 아아, 하고 선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의미도 의도도 없는 조그만 감탄사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 넌 무언가 예찬하는 걸 좋아하니까. 혹은 계단을 다 올라가고 나면 들리는 선을의 가쁘거나 거친 숨소리까지. 그런 조그만 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는 건 지금처럼 교사에 아무도 없을 때였다. 그래서 열음은 교무실 문도 열려 있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선을과 일반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그러고 보니 여름이라 좋은 점이 또 있다. 여름엔 해가 빨리 뜨니까 지금 오더라도 선을이가 햇빛을 받을 수 있지. 겨울엔, 특히 방학이 가까워오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꼭 새벽에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긴 하지만 선을이 워낙 버티기 힘들어하니 겨울엔 어쩔 수 없이 등교가 늦어지게 된다. 선을에겐 겨울이 과하게 춥기도 하고. 곧 방학이니 이렇게 등교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열음은 교실 문 앞에 섰다.

잠가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제의 냄새가 난다. 반 친구 누가 점심시간에 먹은 그거, 석식 시간에 걔가 마셨던 음료수, 야자 시작 전에 매점에 달려갔던 누군가 사 왔던 것. 그건 일종의 파편이나 잔해라 보는 편이 맞았다. 아직 다 날아가지 않은 전날의 잔해. 열음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연다. 그러면 선을도 가방을 벗어 놓고서 함께 블라인드를 올리지만 선을의 경우에는 그저 따뜻해지기 위해서라 창문은 좀처럼 열지 않는다. 열음은 늘 선을을 위해 자신이 앉는 쪽의 창문은 열지 않은 채 두었고 그래서 둘의 자리 위에는 지난날들이 쌓여만 가고 날아가지 않았다.

창문을 다 열고 난 다음에는 자리에 앉는데, 고작 3층까지 계단으로 올라왔다고 선을의 머리카락은 이곳저곳이 부스스하게 떠 있고 열음은 멀쩡하다. 그런 열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점이라면 조금 많이 덥다는 것. 열음은 언젠가 자신이 아무렇지 않아진다면 머리카락을 다시 잘라버릴 것이라 생각하며 선을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고 그러고 나면 선을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두었던 담요를 주섬주섬 어깨에 걸쳐 덮는다. 반 친구들이 등교할 때까지는, 그러니까 첫 통학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는 30분이 넘게 남고 별다른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담임이 출근하자마자 반에 들어오는 일도 없기에 둘은 그 시간만은 온전히 자유였다. 열음은 그 시간에 선을의 머리를 잘 정리해 양 갈래로 묶어주기를 즐겼고 선을은 그 시간을 위해 머리를 단정히 빗기만 하고서 머리끈 두 개를 챙겨 밖으로 나온 지가 꽤 되었다.

물론 그런 것으로도 시간은 다 가지 않아 열음과 선을은 함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내용은 대부분 전날 집에 돌아가서 있었던 일이나 선을의 일방적인 말 쏟아내기였다. 열아, 개학 날이 오지 않으면 좋겠어. 그렇게 되면 곧 날이 추워질 테니까. 이 여름이 끝도 없이 영원하기를 바라게 되었는데 어쩌지, 열아. 그렇게 되면 영영 구원이나 축복은 꿈도 못 꾸고 살아가야 할 텐데… 조잘거리는 선을의 목소리는 교실 안에서만 울렸고 복도까지 나가는 법이 없었으나 열음은 언제나 그 소리가 학교 전체에 들릴 것이라는 착각을 느꼈다. 장선을의 목소리가, 이 교실을 넘어서 복도와 다른 층과 저 바깥의 교문에서도 들리는 것 같다는. 선을이 그런 열음의 머릿속을 알 턱이 없었으나 열음은 그런 생각을 했단 사실을 들키게 될까봐 조마조마했고 말을 맺은 선을이 헤헤, 하는 맥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나서야 열음은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열음은 최근 들어 다른 친구들의 시선을 조금 의식하고 있었고 선을이 자신에게 이렇게 익숙하게 접촉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고민도 있었다. 그게 싫다거나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뭐랄까, 충분히 이상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친하다고 해서 이런 행동을 안 하나? 양가을하고 백겨울은… 됐다, 걔넨 이런 일엔 도움이 안 되잖아. 답을 알 수 없었기에 열음은 통학 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진 선을에게 자신을 충분히 허락해 주었다.

당장 내일이 방학식이라 수업은 대부분 하지 않았고 가끔 진도를 나가는 시간에는 학생들이 교사를 재미있는 얘기 자판기쯤으로 쓰고 남는 시간엔 다 함께 놀기 바빴다. 열음은 한 번씩 그 자리에 함께했으나 같이 하자고 해도 혼자 자리에 앉아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선을이 너무나 거슬려 나중에는 선을과 함께 자리에 앉아 2학기 진도를 나갔다. 선을은 언제나 그랬듯이 담요를 두르고 책을 읽었다.

열음의 학생증으로 빌렸던 것은 반납했는지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종이가 빛을 잘 반사해서 교실 조명 아래에서 보면 어떤 부분은 하얗게 덮인 채 보이지 않는, 두꺼운 광택지로 된 커다란 나비 도감. 화려한 대칭의 사진과 그림으로 채워진 그 책은 책등에 도서 분류 기호 스티커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너, 이제 빌릴 학생증도 없구나? 그건 아니야, 열아… 단지, 오랜만에 나비가 보고 싶어졌거든… 선을이 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열음은 그닥 믿지 않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다시 샤프를 쥐었다. 아, 그래. 나비가 그렇게 좋니? 넌. 그럼, 열아… 나비는 무척 아름답잖아, 그리고… 그리고? …모르겠네. 그냥 좋은 것 같아. 무슨 나비가 좋은데? 음… 열이를 닮은 나비. 여기, 봐봐…

“여름어리표범나비. 이거야?”

“응, 맞아… 열이랑 많이 닮았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어디가?“

“날개가, 열이하고 비슷해. 검은 부분도 있고 주황색인 부분도 있고…”

“넌 이거 닮았네, 암먹부전나비. …근데 그렇게 따지면 다른 것도 나랑 닮은 거 아냐? 표범나비가 다 이렇게 생겼지 뭘.”

“아냐, 열아… 제일 중요한 게 있잖아.”

“뭔데?”

“여기…”

봄어리표범나비.

“…다른 종 아니야? 둘이.”

“다르지, 하지만… 둘이 이렇게 닮았는걸, 열아. 이 나비 말야, 이름도 그렇고… 또, 이 날개도 봄이랑—”

“그만해. 밖에서… 아니, 다른 사람들 있을 때 그 얘기 하지 마.”

“하지만, 열아…”

한열음은 조용히 하라는 말로 장선을의 입을 다물어 버리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열음은, 선을의 말을 그저 거짓말로 치부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이런 나비가 진짜로 있을 게 뭐람. 부정하고 싶었다. 여름어리표범나비보다 덜한 채도의, 갈색과 연주황이 섞인 날개를 가진 봄어리표범나비. 장선을은 분명 저 나비를 내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최근엔 들고 다니는 걸 본 적도 없는 나비 도감을 펼쳐다 놓고서 내가 말을 걸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고작 저 얘기를 하기 위해서.

그런 생각이 들자 선을이 한없이 싫어졌다. 멍청하긴. 하여간, 너는, 어렸을 때랑 달라진 거라곤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이런 애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같이 다녀주는 게, 정말, 바보 같다고. 실은 한열음 스스로도 자신이 이상하다 생각했기에 억지로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 입으로 언니에 대한 거짓말을 지어내는 건 좋고, 네가 언니에 대해 말하는 건 그게 무슨 내용이든 안 된다니. 제멋대로에, 이기적이고, 무엇보다, 그냥 나 편한 대로 하자는 거잖아…

선을은 예상과 단 하나도 다르지 않은 열음의 반응에 조금 놀랐다. 약간은, 아주 약간은 생각이 바뀌게 되어서 다른 친구들에게 봄의 이야기를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열음은 아직 봄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봄이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왜? 아까, 다른 친구들에게는 분명 즐겁다는 듯이 봄에 대해 말하곤 했잖아, 너는. 그런데 왜 내 입에서 봄이 나오는 것은 견딜 수 없어 하는 거야? 열아, 나는 너와 함께 봄을 보냈는걸… 그 자리에서, 너와 함께 있었던 것도, 울고 있던 네가 편하게 잠들 때까지 옆에 있었던 것도, 전부 나였는데… 그럼에도 선을은 원하던 것을 이뤄내 마음이 놓였다. 봄을 맞을 수 있을지 몰라.

한열음은 기분이 꽤 많이 상했다. 선을이 한봄의 얘기를 해서인지 자신의 이중적인 태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전자여야만 한다고 믿고서 그 수업 내내 선을에게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선을은 그러거나 말거나 책상에 나비 도감을 올려두고서 열음이 말했던 나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열이가 생각하기에 나를 닮은, 암먹부전나비… 함께 나비 도감을 본 적은 많았지만 열음이 그런 얘기를 해준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열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선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되자 열음은 평소처럼 선을의 손을 잡고서 급식실로 향했다. 수업 몇 개가 지나는 동안 기분이 그대로였을까 궁금해하던 선을의 생각이 무색하게 열음은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했다.

“너… 다음부턴 다른 사람들 있을 때 언니 얘기 하지 좀 마. 제발. 나도 노력하고 있잖아. 근데 안 되는 걸 어떡하라는 거야, 나보고…”

“열아…”

한열음은 울적해 보였고 그건 정말이지 열음답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선을은 말의 내용과 상반되는 표정 탓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미안, 미안해…”

“…됐으니까 다음부턴 정신이나 똑바로 차리고 말해.”

“알겠어, 열아…”

선을이 느긋하게도 식사를 하는 동안 식판을 깨끗하게 비운 열음은 못마땅하단 얼굴로 얼룩진 선을의 입가를 대충 닦아주고서 다시 함께 교실로 향했다. 내일이면 방학식인데 오늘은 야자 하지 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생각을 비집고 들어온 나비를 찾으러 가자는 선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열음은 선을과 양치를 하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까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으니까, 오늘만. 이번에만 같이 가주는 거야…


여름. 사실 나비보다는 나무에 붙어 하루 웬종일 노래하는 매미나 할 짓 없이 날아다니는 말벌 찾기가 더 쉬운 계절이다. 장마도 다 지나가서 하늘은 온통 새파랗고 햇빛 아래 서 있으면 금세 머리가 따끈따끈 뜨거워지는. 그럼에도 선을은 여름 나비가 더 선명하고 크다며 열음을 재촉했다. 나비를 잡거나 할 것도 아니고, 그저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가녀린 날갯짓이 좋다고 바라보기만 할 거면서. 만약에, 세상을 누구보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나비를 기절시켜 가슴에 핀을 꽂아 죽이고 상자 안에 가둬둔 표본을 선물한다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유를 뺏기고 ‘구원받은’ 나비를 말이야.

열음은 그런 짓궃은 생각은 머릿속에만 남겨두기로 하고 선을을 따라 천천히 운동장을 걸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려 하면 곧바로 바람이 불어 그리 덥지는 않았다. 따뜻한 날씨에 다채로운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까지 봐 잔뜩 신난 선을을 보며 열음은 생각했다. 역시 그런 괜한 짓은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나비는 그냥, 가끔 날씨가 좋으면 선을과 함께 운동장을 산책할 명분 정도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오후 수업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실제로 시간이 빨라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아까의 말다툼 같은 것은 이미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여름의 시간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그 더위 때문에 기억이 조금 흘러가 녹아버리기라도 한 듯이. 이래서 여름이 싫다니까. 덥기만 하고 좋을 건 하나도 없는데, 돌아보면 꼭 무슨 좋은 일이 하나씩은 있었던 척이나 하고. 열음은 말없이 불평하다가 또다시 급식실로 내려가 함께 석식을 먹은 다음 선을에게 말했다. 우리 야자 째고 바다 보러 가자.

“바다… 좋아, 열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무의식적으로, 그것도 무척이나 작게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선을은 그것을 듣고서 열음을 향해 환히 웃었다. 한열음은 그날 처음으로 담임에게 말도 없이 야간자율학습을 빠졌다.


바다. 열음은 바다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고 아마 선을도 그럴 것이었다. 해변가에 널려 있어서 발을 떼면 뗄수록 신발 안으로 조금씩 숨어드는 연갈색의 모래나 색색의 돗자리와 알록달록한 광고로 덮인 파라솔은 열음이 좋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것쯤은 바다가 아니라 관광지의 기념품으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까.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을 꼽으라면 넓고 푸른 물 하나였다. 끝이 없어 보이는 저 바다,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만 보이는 수평선. 그런데 이상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석식을 다 먹고 다시 교실로 향하려는 그 순간에, 선을과 함께 맨발로 모래를 밟고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 풍경을 재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는 스스로의 뒷모습을 볼 수 없음에도.

의외로 흔쾌히 승낙한 선을 덕에 열음은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양치를 끝내고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선을의 가방은 그저 나비 도감만 넣으면 끝이었고 실은 열음 또한 특별히 챙길 만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무작정 교문을 나온 둘은 바다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바다에 가장 빨리 도착하려면 경전철을 타고 20분을 가다가 내려서 또 몇 분을 걸어야 했고 열음은 선을이 경전철은 처음 타 본다고 말하자마자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한 것을 조금 후회했으나 이미 역까지 20분 넘게 걸어온 마당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 그저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서 도심지 반대로 향하는, 한산한 열차에 올랐다.

이번 역은 사세, 사세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클래식 음악이 깔리며 나오는 안내 방송을 경청하던 선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해가 질 텐데도 하늘이 무척이나 밝았다. 영영 이 시간에 머무를 수 있을 것만 같이. 선을이 바깥의 풍경에 감탄하며 열음에게 말을 걸면 열음은 다른 사람도 있으니 조용히 하라는 말을 하고서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는 구름이 빠르게도 지나갔고 곧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한쪽부터 주홍빛으로 물들더니 곧 푸른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붉은색과 붉은색에 가까운 보라색만 남았다. 해가 꼭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열차 안에도 창으로 빛이 스며서, 눈앞에 셀로판지라도 댄 것처럼 보였다.

“열아, 저기 봐… 노을이 참 예쁘다.”

“그러네. 이 시간에 사진 찍으면 엄청 예쁘게 나온다던데…”

“그럼 우리 같이 사진 찍자, 열아…!”

선을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 예상한 말이 아니라 열음은 약간 당황스러웠으나 생각해 보니 선을과 함께 찍은 사진도 얼마 없는 것 같아 떨리는 팔로 핸드폰을 잡은 선을 대신에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었다. 둘의 등 뒤로 난 창문 너머로 푸른 산과 붉은 하늘이 함께 찍혀 있었다.

“진짜네. 무척 예뻐, 열아…”

기쁜 듯 웃는 선을의 얼굴을 본 열음은, 지금까지 선을의 함께 사진 찍자는 말에 괜히 핑계를 댔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 싶을 만큼 사진이 잘 나오기도 했고. 선을은 그 사진이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열차가 움직이는 내내 말없이 열음의 사진을 찍었고 곧바로 열음은 아까의 생각을 취소했다.

이번 역은 매림, 매림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다 왔다. 내리자, 장선을.

선을의 손을 이끌고서 내리자 한적한 마을이 펼쳐졌다. 여기 처음 와 봐, 열아… 나도. 열음은 학교에서 찾아봤던 지도를 떠올리며 걷기 시작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여유롭게. 노을이 다 지지 않아서 하늘은 아직 붉었고 길 위도 그렇게 보였다. 심지어는 선을의 얼굴마저 혈색이 돈다 착각할 만큼 발갛게 보였다. 들뜬 목소리로 곧 밤이 올 것이라 말하는 선을을 데리고 걷는 낯선 길은 나쁘지 않았다.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름 저녁, 둘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좁은 길. 열음은 바다에 도착하고 나서는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았으나 선을과 함께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것이라 되뇌며 발을 움직였다. 선을은 열음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면서도 계속 말을 걸었다. 열아, 바다에 우리 이름을 쓰고 오자… 그리고 파도에 다 쓸려갈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러면 우리도 바다처럼 영원하겠지…

도착한 바다는 작았다. 정확히 말하면 해수욕장이 작은 것이었지만. 파라솔은커녕 산책 중인 사람도 없는 것 같은 모습에 열음은 괜히 마음이 놓였다. 혹시 모르지, 이런 곳까지 와서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 매림 해수욕장 입구에는 허름한 슈퍼가 하나 있었고 열음은 모래를 밟기 전 그곳에 들렀다. 해도 졌고 사람도 없는데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저기요, 혹시 폭죽 있나요?”

“폭죽? 그럼, 있지. 여기서 터트리면 안 되긴 하는데 말이야… 학생이 이번 여름 첫 손님이니까 내가 특별히 줄게. 몰래 가져가.”

그 말과 함께 나이 든 가게 주인이 꺼내온 것은 오래되어 보이는 스파클러와 빛바랜 라이터였으나 열음은 그걸 원하고 있었으므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구겨진 지폐 몇 장과 그것을 바꿔 슈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해수욕장 바깥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과 양말도 벗었다. 그리고 선을과 함께 바다로 향했다. 사그락거리는 모래가 발가락을 스쳤다가 발목까지도 닿았다. 사람도 없는 곳인데 설마 유리 조각 같은 건 없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둘은 발이 젖을 때까지 앞으로 걸어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 어느새 해가 다 져서 바다는 이제 검은색으로 보였고 부서진 파도만이 하얗게 빛났다. 지금, 지금이 바로 학교에서 떠올랐던 그 장면일 것이다. 함께 맨발로 서서 저 먼바다를 바라보는 우리. 모래를 스치며 올라온 바닷물이 복사뼈에 닿았다 밀려나면 선을은 발이 조금 시렵다며 열음의 어깨에 기댔고 열음은 시원하기만 하단 말을 하고선 웃었다. 파도 소리만 들려오는 곳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자니 어쩐지 낯부끄러웠다. 볼 사람도 없는데.

선을이 말했던 대로 축축한 모래 위에 둘의 이름을 쓴 열음은 접착력이 약해진 비닐 포장지에서 스파클러를 꺼내 선을에게 건넸다. 하나 더 꺼내 왼손에 들어 선을의 것과 끝을 맞대고, 오른손에는 라이터를 들었다. 지금은 사라진 가게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을 것만 같은 반투명한 형광색의 라이터. 햇빛에 바랜 듯한 플라스틱 안에는 다행히 내용물이 남아 있었다. 착,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고 열음은 스파클러에 불을 붙였다. 꽃과 닮은 모양을 내며 타들어 가는 회색 막대에서는 화약 냄새가 났다. 둘은 자꾸만 서로의 이름을 지워내는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서 한없이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화약이 다 타버리고 꺼져 손에 구부러진 쇠막대만 남을 때까지. 밝은 것을 봐서 그런지 주변은 조금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이미 둘의 이름은 파도에 다 쓸려 가버린 듯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열음은 남은 스파클러도 꺼내 들어 불을 붙이고 다시 선을과 그것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타오르는, 어쩌면 타들어가는 그 불빛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선을아.”

“왜, 열아?”

“…아니야, 그냥.”

한열음은, 차분해진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게 무엇일지는 몰랐으나, 분명히 무언가가…

“왜, 열아. 말 해줘…”

나긋한 목소리. 선을의 목소리는 나른하다는 편이 맞을지도 몰랐다. 한껏 풀어진 그 목소리와 미소를 바라보던 열음은,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스파클러를 놓쳐 버렸고 바닷물에 닿은 불꽃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열음의 입술이 선을의 입에 닿았다 떨어졌다. 잠깐의 서늘함과 달콤함.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다음 순간 선을 또한 스파클러를 놓쳐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고 모래에 떨어진 쇠막대에서 불이 꺼지는 소리가 나고서 둘은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각자의 집으로 향했고 다음날에는 방학식을 맞았다.


양가을은 드디어 한여름이 장선을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여름이, 장선을과 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지금쯤 장선을이 여름의 손이든 팔이든 아무튼 한 곳을 붙잡고 만지작거리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장선을이, 그 장선을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책상에 엎드려서는 여름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뭔진 모르겠지만 드디어 성공했구나, 여름아. 방학식이 되어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니 안타깝기도 하지만 빠져나온 게 어디야…

백겨울 또한 양가을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하루 만에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는. 청소가 끝나 다들 자기 자리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을 때도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그저 서로의 반대 방향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서로를 무시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는 말이 맞을 것 같기도 했다. 와, 둘이 진짜 싸우기라도 했나. 가을아, 근데… 그래서 여름이랑 장선을은 대체 무슨 사이야?

“어? 글쎄… 같은 중학교 나왔다는 것까진 여름이가 말해줬었는데.”

“야, 나도 너한테 저 정도로 추근대진 않았다. 넌 다른 애가 나한테 저러면 참을 수 있어?”

“절대 아니지! 근데 여름이가 장선을 좋아하는 것 같진 않잖아.”

“그건… 그래. 약간 그런 건가? 보호 심리.”

“여름이가 장선을한테? 왜?”

“…그러게. 그냥 여름이한테 물어볼까?”

“됐어, 여름이 별로 기분도 안 좋은 것 같은데. 둘이 진짜로 싸운 거면 어떡해…”

별일 없이 방학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하나둘 학교를 나섰고 열음은 선을이 제발 방학 내내 집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기를 바랐다.


여름이었다. 춥다고 느껴질 만큼 세게 냉방 중인 교실 문을 열면 숨이 막힐 듯 몸을 덮쳐오는 습기와 너무 가까워서 아득한 매미 소리에 순간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마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안전안내문자가 날아왔지만 선을은 여전히 추웠다. 반소매와 반바지가 가득한 교실에 홀로 두툼한 동복을 입고서 담요까지 두른 선을은 계절을 착각한 여행자 같았다. 물론 선을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추웠지만 여름엔 냉방 때문에, 겨울엔 난방을 해도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는 교실 때문에 사실상 선을은 언제나 같은 온도의 공간에 머무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학교들과 거의 다를 것 없는 개학일이었음에도 날씨는 온 세상을 녹이겠단 결심이라도 한 듯 더웠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실상 재난에 가까웠다. 곧 있으면 가을이 와야 하는데 아직도 덥다니. 사라진 듯한 방학이 놓여 있었을 터인 여름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만 같았다.

한열음은, 방학 내내 성실히 학교에 와 자습도 하고 점심도 먹고 교실도 치웠지만, 어떤 것도 정리하지 못했다. 그걸 바꾸지 못한 이상 이 여름은 실제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날 이후로 선을과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단 한 마디도. 열음은 선을과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것이 처음이었다. 열음의 바람대로 선을이 학교는커녕 집 밖으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 좋게 마주치지 않았다기엔 30일 내내, 그것도 오늘 아침까지 열음은 선을과 마주치지 못했다. 매번 버스를 탈 때면 졸린 얼굴을 하고서 창가에 머리를 댔다가 머리가 너무 흔들려 어지럽다며 제 어깨에 기대던 선을이었는데 오늘 열음과 같은 역에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함께 올 사람이 없다면 그렇게 일찍 등교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런데 교문을 지나 긴 복도의 끝에 다다랐을 때, 2학년 2반의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있지 않았다. 한열음은 무의식적으로 교실 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선을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열음은 눈 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의 맨 앞, 교탁과 가장 가까운 책상 두 개. 그중 하나에 팔을 베고서 엎드린 선을이 있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네가 나보다 빨리 학교에 와서 책상에서 자고 있는 건데. 블라인드가 전부 올라가 있는 교실은 해가 비쳐 들어와 무척이나 밝았고 열린 창문이 없어 공기가 갑갑했다. 눈을 감고 있는 선을의 턱 위로 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열음은 그것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넘겨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얼마나 그 얼굴을 바라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열음은 어깨가 저리며 팔을 가누기가 힘들어지고 나서야 가방을 벗어놓고 자리에 앉았다. 창문을 하나라도 열거나 선풍기를 켜면 선을이 깨어날 것 같아 이마를 타고 땀이 흘러 볼을 따라 내려가도 그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방학식 전날이 떠올랐다. 그날, 밤바다, 바닷바람, 다 타 버린 스파클러와 싸구려 플라스틱 라이터, 레몬 맛. 몰래 사탕이라도 먹었나 착각했을 만큼 답지 않게 산뜻한 맛이 나서 조금 놀랐었다. 그렇게 잊어버리려고 했었는데 네 얼굴 한 번만 보면 다시 떠오르고 마는 기억이라니, 짓궂은 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도 네게선 레몬 맛이 날까, 아니면 방학이 지나고 왔으니 조금 달라졌을까. 아니, 생각하기 싫어서 방학 내도록 피해 다녔으면서 이제 와서는 이런 생각을 하다니. 번갈아 떠오르는 바다에서의 풍경과 방학 동안의 감정 탓에 열음은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넌 그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여름아~ 방학 때 뭐 했어?”

가을이었다. 이 시간에 둘 말고 다른 사람이 교실에 들어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 그냥… 공부했지. 학교 와서. 넌?”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진짜 오기 싫더라… 자습 쨌다고 혼나진 않겠지?”

“설마. 근데 겨울이는? 같이 안 왔어?”

“어, 겨울이 아프대. 어제 몸 상태 안 좋다더니 아침부터 병원 갔다더라. 나 진짜 걱정돼서 미치겠다니까…”

“겨울이가? 걔 잘 안 아프잖아.”

“그니까!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갑자기 막 아프다 그러고… 근데 선을이는 자?”

“어, 일찍 왔더라. 학교에서 잘 거면 왜 일찍 온 거지…”

“글쎄, 그냥 요즘 너무 더워서 그런 거 아니야? 안 더울 때 등교하려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얘 지금도 겨울옷 입고 있잖아.”

“헐. 나 정도면 가짜 광기였네…”

오늘은 가을도 일찍 왔다. 8월 막바지인데도 날씨가 이렇게까지 더워도 되나, 싶을 만큼 더워서였다. 다른 친구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고 나서도 열음은 선을을 깨울 수가 없었다. 그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웠고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마음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보라색 눈을. 선을의 눈에는 분명 아무런 의도도 없겠지만 열음은 유독 그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있을 때 선을의 눈이 두려워지곤 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얼마든지 말해도 좋다는 것처럼 말하는 그 두 눈…

다행히 선을은 수업이 시작하자 깨어났고 열음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메모지에 뭔가 사각사각 쓰더니 건네주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열음은 속내를 다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이 홧홧했다. 알고 있으면 그렇게 혼자 자고 있지를 말던가, 괜찮단 말이라도 하지 말던가…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치자 열음은 도망치듯 도서관으로 향했다. 선을과 조금 더 오래 있으면 그날이 계속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실은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지금도 그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여름밤, 시원했던 바다, 불꽃과 레몬 맛. 어지러웠다. 그만 생각하고 싶은데,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채워버리고 싶은데… 그러나 머릿속에선 좀처럼 여름이 달아나지 않았다.

도서관은 조용했고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개학 첫날이라도 그렇지, 사서까지 없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열음은 그렇게 생각하며 도서 검색용 컴퓨터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온 김에 선을이 방학 내도록 읽은 책이나 찾아볼까 싶어서. 물론 지금도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표지라도 기억나면 어떻게 찾아볼 텐데, 이렇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니. 열음은 무작정 도서 검색 페이지에 들어가 선을이 읽을 것 같은 키워드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비, 영원, 죽음, 여름…

도서 대출 기록.

별다른 소득이 없던 열음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선을은 열음의 학생증으로 책을 빌렸으니 대출 기록이 남았을 것 아닌가. 그게 이제야 떠올랐다니, 열음은 가끔은 내가 선을보다 머리가 더 안 좋은 것 같다 생각하며 도서 대출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20□□.03.□□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3.□□ 지리의 힘

20□□.03.□□ 팩트풀니스

20□□.03.□□ 본능의 과학

20□□.03.□□ 포노 사피엔스

20□□.03.□□ 코드 브레이커

20□□.03.□□ 쓸모있는 음악책

20□□.03.□□ 원소의 이름

20□□.03.□□ 사피엔스

20□□.03.□□ 호모데우스

20□□.03.□□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학기 초부터 많이도 빌렸었네. 선을에게 학생증을 빌려주기 시작한 것은 작년 4월부터였으므로 3월이 붙은 기록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우선은 선을이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궁금했기에 열음은 작년부터 이어지는 길고 긴 기록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눌렀다. 그곳엔 단 한 권의 책이 있었다.

20□□.06.□□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어가 되고 싶었다

제목이 왜 이래. 소설인가?

기간 안에 반납되지 않았다는 의미인지 대출일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반납일이 언제인지는 나오지 않았으나 검색해 보니 대출 가능 상태.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선을이 언제 반납을 했든 열음은 방학식 전날에도 두 달 이상은 확정적으로 대출 불가 예정였고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이라고 해봤자 아무것도 대출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열음은 그 책을 찾아 도서관에서 읽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검색해 봤을 때 나온 청구 기호가 811.7이었으니 시집일 것이었고 그런 거라면 쉬는 시간 안에도 전부 읽어버릴 수 있었다. 열음은 서고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선을이 두 달이나 읽고서야 반납한 그 책을 찾아 해도 들지 않는 도서관 곳곳을.

역시나 금방 찾을 수 있었던 그 책은 그리 두껍지 않은 두께에 무게도 무척이나 가벼웠다. 표지에 옅은 보랏빛이 도는 게 마치 선을을 닮은 것처럼 보이는 책이었다. 열음은 텅 빈 도서관 안의 의자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앉고서 책을 펼쳤다. 대체 무슨 시가 실려있기에 너는 그렇게 오랜 시간 이 책을 읽었을까, 대체 누구의 주어가 되고 싶어서.

그런데, 열음은, 책의 표지를 넘기자마자 이 책을 쉬는 시간 안에는 절대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열아, 눈을 떠.’

선을의 필체로 쓰인 쪽지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짤막한 문장에 이어지는 의미 불명의 단어와 숫자.

빈 곳 3-2-1-1 3-1-1-1, 그럴 수만 있다면 3-1-1 Shift+Delete 1-5-1 그곳 6-2-4 망각 1-3-6 Shift+Delete 1-5-1 취향의 화석 2-2-2 2-2-3 나비 1-2-1 모르겠다 1-1-5 사랑해 2-4-1 홍옥 1-1-4. 너 없이 여름 1-2-2 희1-2-3 할 수 없는 일 3-4-3 3-4-4 찬란 1-1-2-1 1-1-2-2 망각 1-7-4.

규칙도 없이 정성스럽게 늘어놓인 글자를, 열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책을 빌려 갈 수 없다는 사실도 답답했고. 가을에게 학생증을 빌려볼까? 아니면 선을에게? 애초에 사서가 없으니 책을 빌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열음은 알지 못했다. 열음은 한숨을 내쉬고서 쪽지만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고서 반으로 돌아왔다. 가을이나 겨울에게 학생증을 빌릴 생각으로.

“학생증? 잃어버린지 좀 됐는데… 지금 필요해?”

“찾아볼게, 근데 나 오늘 지갑을 놓고 와서…“

학교 도서관에 잘 가지 않는 친구들에게 물어봤자 헛수고란 것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직시하고 나면 더 비참해지는 것은 왜일까. 열음은 그 길로 다시 도서관에 돌아가려 했으나 종이 쳐 버렸다.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나면 사서도 퇴근할 것이다. 아니, 아예 오늘 출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2반은 복도에 줄지어 있는 교실 중 도서관까지의 수평 거리가 두번째로 먼 데다 도서관에 가려면 계단도 두 층이나 오르내려야 하니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가 책을 훑어보기에도 시간은 촉박했다. 열음은 어쩔 수 없이 내일 다른 사람의 학생증으로 책을 빌릴 생각으로 수업에 집중했다.

하루가 참 빠르게도 갔다.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열음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정리했다. 원래라면 한시간만이라도 자율학습을 하고 돌아갔을 테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을이 책 속에 남겨둔 쪽지며, 거기에 쓰인 암호문 같은 것과 자신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선을까지. 전부. 열음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신경을 거스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열음은 집에 가서 좀 더 자세히 찾아봐야겠단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때 하루 내내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선을이 열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열음은 얼굴과 귀와 선을의 차가운 손이 닿은 오른손에 피가 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태연한 척 말했다.

“뭐야, 장선을. 할 말이라도 있어?”

“…열아.”

선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밝았다. 아, 그런데 네 목소리가 밝아서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이 없었단 말이지.

“열아, 오늘… 오늘은 안 가면 안 될까.”

“무슨 소리야, 네가 써 놓은 것 때문에 가려고 하는 건데.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인데?”

“아……”

그 말을 들은 선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열음의 눈만 바라보았다.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선을은 차분한—떨리는—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건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열아, 오늘만이라도… 같이 있어 줬으면 해.”

“어차피 내일도 볼 건데 무슨… 나 간다?”

“열아… 안녕.”

장선을은 멀어지는 한열음의 뒷모습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름이었다.


“이거, 대출이요.”

“어, 잠깐만. …응? 여름아, 연체된 책 있는데? 8월 말까지 대출 정지야.”

“…연체요? 얼마나요?”

“2달 좀 안 된다. 반납 연장도 많이 했었네… 잃어버린 건 아니지?”

“…네.”

“꼭 반납하러 와?”

“네…”

“야, 장선을. 내 학생증으로 빌린 책은 연체시키지 말라고 했지.”

“…미안, 열아. 아직 다 못 읽었거든.”

“무슨 소리야… 너 맨날 그것만 붙잡고 있잖아. 수업도 안 듣고 그것만 계속 읽으면서 아직도 다 못 읽었다고?”

“으응…”

“얼마나 남았는데? 도서관 가서 읽어, 쉬는 시간에.”

“아직… 아직도 많이 남았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면 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런 건 아니야, 열아. 그냥…”

“그냥 뭐.”

“…아냐. 빨리 읽고 반납할게.”

“됐어, 어차피 2달이나 연체됐는데. 방학 안에만 다 읽어라.”

“알겠어, 열아…”


여름이었다. 곧 숨 막힐 정도로 더워질 것만 같은 날씨가 신경에 거슬리지만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탓에 밖이 더 덥다는 것을 알면서도 창문을 열게 되는. 한열음은 장선을에게 이제 다시는 학생증을 빌려주지 않겠다 다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 그런 다짐을 네다섯 번 정도 하면 한 학년이 끝나고 이제 열음에게 남은 여름방학은 이틀 뒤에 있을 것까지 포함해 단 두 번뿐이다. 그중 하나가—어쩌면 둘 다—끝나고 나면 선을이 다가와 학생증을 빌려 달라 할 것이었다. 열아… 학생증 좀 빌려줘. 나, 저번에 빌렸던 책이 연체돼서 못 빌린대…

여름아, 너 너무 착한 거 아니야? 선을이, 맨날 네 학생증 빌려놓고 연체시켜서 준다며.

한열음이 장선을의 뻔한 대답을 듣고서 교실을 나설 때면 함께 교실을 나서는 것은 언제나 가을이다.

호구도 아니고 언제까지 빌려주려구. 걔, 너 착한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차라리 책을 사라고 하는 게 낫지 않아?

머릿속 선을의 목소리를 끊고 들어오는 양가을의 질문에 한열음은 언제나 이렇게 답했다. 됐어, 난 다른 도서관 가면 되잖아. 도서관 회원증도 만들 줄 모르는 멍청한 애한테 신경 쓰기 싫어. 하지만 그 답변에 언제나 양가을은 의문을 가졌다. 지금 그러는 게 신경 쓰는 거 아냐?

“신경……”

한열음은 무심코 그 단어를 발음한다. 양가을의 마지막 질문을 또다시 거짓말이라 넘기면서.


아, 그래. 도서관에 가려고 했었지. 노란색 통학 버스 쪽으로 향하는 양가을에게 손을 흔들어준 한열음은 문득 오늘 아침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하여간 장선을은, 빌린 것에 대한 예의가 없다. 빌려간 학생증을 돌려주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남의 학생증으로 빌린 책을 며칠도 아니고 몇 달씩이나 연체시켜 놓으면 빌려준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난 책도 못 빌리게 하겠다는 거야, 뭐야? 열음은 그런 선을과 자신이 답답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세도서관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거리가 같았는데, 따지고 보면 그 셋은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까 집에 들렀다 가는 것이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훨씬 손해였다. 열음은 당장이라도 뻣뻣한 교복 대신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이 곧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집이나 학교 방향이 아닌 버스를 탔다는 점에서 약간의 새로움 같은 것은 있을 수 있었으나 사실 재미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길이었다. 옆에서 계속 말을 걸거나 귀찮게 할 상대가 없었기에. 열음은 버스의 딱딱한 안내 음성에서 사세도서관이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창밖을 보며 기다렸다. 도로 위로 펼쳐진 회색 건물과 파란 하늘. 그 한구석에서부터 곧 노을이 붉어올 듯했다. 열음은 자꾸만 눈 위로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며 하차 벨을 누를 수 있을 때까지 그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세도서관은 멀리 떨어진 번화가의 언저리에 있는 만큼 규모가 꽤 컸다. 없는 책도 신청하면 금세 들어오지만 유일한 단점이라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절대 아닌데도 도서관으로 향하는 버스 노선이 이리저리 꼬여 있어 오고 가는 데 심히 오래 걸린다는 것. 어느새 하늘에서는 붉은 기운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열음은 빌리려던 책의 제목을 메모해 둔 쪽지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뭐야.”

손에 잡힌 것이 너무나 예상 밖의 것이라 열음은 순간 당황을 입 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주머니에서 꺼내든 쪽지 위엔 책 제목은커녕 무슨 뜻일지 모를 숫자와 단어만 한가득이었다. 그것도 선을의 글씨체로 쓰인. 이젠 하다 하다 다른 도서관에 가는 것까지 방해하다니, 열음은 그 행동이 이젠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 학생증으로 두 달씩이나 연체를 시킨 게 다 일부러 한 짓이었다고? 기분이 나빠지려 하던 차에 열음은 쪽지의 뒷면을 보았다.

‘열아, 나는 네가 정말 좋아. 그래서 미안해.’

이게… 진짜 뭐지. 크게 쓰인 글씨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그 위에 적힌 조그만 글씨는 더 그랬다. 내가 가진 것의 주어가 되고 싶다고. 네가. 아무리 봐도 그건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거울을 봤으면 분명 얼굴이 볼썽사납게 빨개져 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되고 싶다‘가 아닌 ‘되고 싶었다‘일까. 어투는 또 왜 이렇고.

열음은 뭔가 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 있던 무언가를 깔끔하게도 도려내 빼내어 버린 것 같은 불쾌감. 열음은 그 원본을 알 수 없었으나 우선 도서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름밤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므로.

오늘 빌리려던 책의 제목 정도야 쪽지 없이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선을이 그것을 모를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분명 선을이 나에게 쓴 이 쪽지는, 선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주머니에 넣었다는 게 되는데. 하지만 누가? 열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을이라면 그냥 내게 전해줘도 됐을 일인데 왜 내가 모르게 했을까. 쪽지의 앞면과 뒷면을 번갈아 보던 열음은, 돌연, 그것이 책 제목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20□□.06.□□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어가 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 문장을 도서 대출 기록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열음은 그 문장을 도서관 컴퓨터의 검색창에 입력했고 그러자 청구 기호와 함께 대출 현황이 나왔다. 대출 가능. 연보라색의 표지가 꼭 선을을 닮은 시집이었고 넓은 도서관 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 책을 빌린 열음은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쪽지와 함께 펼쳐 놓았다. 둘을 비교해 보던 열음은 무언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여름의 초상 1. 2-1 거짓말 1-1 1-2-1 1-2-2.

빈 곳 3-2-1-1 3-1-1-1, 그럴 수만 있다면 3-1-1 Shift+Delete 1-5-1 그곳 6-2-4 망각 1-3-6 Shift+Delete 1-5-1 취향의 화석 2-2-2 2-2-3 나비 1-2-1 모르겠다 1-1-5 사랑해 2-4-1 홍옥 1-1-4. 너 없이 여름 1-2-2 희1-2-3 할 수 없는 일 3-4-3 3-4-4 찬란 1-1-2-1 1-1-2-2 망각 1-7-4.

백야 1-1-8 어리광 1-2-3 실로 1-6-3 결-별-혼 1-3-1 1-3-2 1-3-3-1. 청 1-2 너 떠난 후에 1-1-1 1-1-2 희 1-2-3 할 수 없는 일 3-4-3 망각 1-4-2. 아니었네 1-2-3 장마 1-2-3 1-5-3 실로 1-1-5 마지막 날 1-1-4.

나열된 단어가 전부 목차에 있었다.

열음은 가장 마음에 든 단어인 ‘여름의 초상’부터 펼쳐 보았다. 내용은, 대충… 화자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영원한 여름에 빗댄 것 같았다. 하지만 여름은 영원하다고 할 수 없지. 끝이 있기도 하고, 다른 계절이 오고 나서야 다시 시작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단어는 아마도 다시는 오지 못할 어떤 한 때를 너무나도 그리워한 나머지 나온 단어일 것이다.

열음은 화자를 향한 일말의 안쓰러움을 느꼈으나 그럴 새가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저 뒤의 숫자들이 문제였으므로. 저 점과 쉼표는 대체 무슨 기준으로 놓인 것이며 하이픈은 또 뭐고, 숫자는 대체 무슨 뜻인지… 열음은 한참 시집 이곳저곳을 뒤적였으나 별다른 답을 찾지 못한 채 책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장선을이 만든 것이니 자신은 무조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통학 버스가 오지 않는 곳에서부터 13개 정거장을 지나 학교에 도착한 열음은 선을이 남겨둔 메시지가 대체 무슨 뜻인지 해석하기 바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여름만이 남았고 세상엔 진실도 없다고. 우리가 여기에 오래 있었는데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 젠장. 이런 거면 그냥 직접 말하지, 왜 이런 암호 같은 걸 만들어서는.

집으로 돌아갔던 열음은 간단한 간식을 옆에 두고서 선을의 글씨와 시집을 한참 번갈아 봤었다. 어떻게 보아도 그것은 일종의 암호문 같았고 열음은 선을이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말할 이유 따윈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선을은 불필요할 정도로 자신의 말을 열음에게 많이 했다. 맥락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꺼내거나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만든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암호문을 전달해줬던 적은 없었단 말이다. 열음은 선을이 답답했으나 목차와 시 하나하나를 뜯어본 다음에는 선을이 자신에게 하려던 말을 알 수 있었다.

문장은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호응이 잘 맞지 않았고 애초에 무슨 뜻인지 감도 잘 잡히지 않았다. 말투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선을이가 남긴 건데, 분명. 그런데도 그 내용만큼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열음은 쪽지를 해석해 만들어진 문구를 다른 종이에 적어 아침부터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을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따금씩 열음을 바라보기만 했고.

가을과 겨울은 심각한 얼굴로 손바닥만한 쪽지만 쳐다보고 있는 열음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둘의 걱정은 내용이 조금 달랐다. 양가을은 장선을이 그에게 어떠한 경고장 같은 것을 보낸 것이라 생각했고 백겨울은 장선을이 정말로 한여름에게 고백이라도 한 건지 뭔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둘 다 작성자가 선을일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치 않아 대화가 통했을 뿐. 둘은 함께 오늘 여름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고 되도록이면 자신들이 상상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궁금증은 멈추질 않았다. 물어볼까? 별일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럼 내가 물어볼까? 아냐, 내가 말할래.

겨울이 다가와 그게 뭐냐고 물었지만 열음은 답할 수가 없었다. 장선을이 내 학생증으로 빌렸던 책에 남겨둔 암호문을 해석했더니 이런 말이 나왔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라고 사실대로 말하기엔 겨울이 선을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으므로. 그건 아까까지 겨울과 뭔가를 한참 이야기하던 가을도 마찬가지였다. 본인도 가끔은—그래, 바로 지금—알 수 없는 선을의 속마음을 겨울이나 가을처럼 순수하고 사이비라고는 뉴스와 다큐멘터리에서만 본 아이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열음은 그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선 말했다. 어제 책에서 본 문장인데 마음에 들어서 적어 왔어.

어쩌면 이것도 항상 말하던 죽음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의 연장선은 아니었을지, 괜한 시간 낭비를 한 것은 아닐지, 열음은 점점 더 걱정되기만 했다. 당장 내일의 여름방학식이 끝나고 나면 저 녀석은 한 달 내도록 학교는커녕 그 불 꺼진 자기 방 밖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따질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야, 장선을.”

“왜 그래, 열아…”

“너 오늘 나랑 어디 좀 가자. 사람 없는 곳으로.”

“…왜?”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넌 내 말은 뭐든 들었는데?

“…왜냐니? 할 말이 좀 있어.”

“학교에서 해도 되는데…”

“사람 없는 데로 가자는 말 못 들었어? 학교에서 하기 싫다니까.”

“하지만 열아, 난… 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 여기에 있어 주면 안 될까…”

“너…”

이상하게도 한열음은 그 말이 너무나 가증스러웠다. 너라면, 너라면 아무런 반항 없이 내 말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내 말을 거절하지, 네가…

“…됐다, 장선을. 왜 고집을 부려? 알겠으니까 나중에 얘기해. 저녁 다 먹으면 뒤뜰로 나와.”

“알았어…”


여름이 막 시작되어 가는지라 해가 어느새 지고 있었다. 노을 진 하늘. 한열음은 학교 뒤뜰의 벤치에 앉아 그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을은 열음의 시야 한구석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한참 전에 봤는데 언제까지 저기 있을 셈이지.

“거기서 뭐 해, 장선을.”

한열음이 기어코 입 밖으로 내어 그를 부르자 그제서야 선을은 열음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열음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 뭐야? 네가 내 주머니에 넣어 놨어?”

“아니, 그게 왜… 열아, 그런, 그런 게 아니라…”

주머니에서 나왔던 쪽지를 건네자 선을은 허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그렇지.

“이거 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좀 하면 될 거 아냐. 왜 그렇게 내가 책 빌리는 걸 못 막아서 안달이야?”

“열아, 말했잖아. 나는, 그걸 너한테 말할 수가 없어서…”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대체. 네가 뭘 말 못 하고 무슨 진실이 거짓말이라는 건데?”

“…말할 수 없다니까, 열아.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지, 나도 이제 모르겠어…”

선을의 창백한 볼에 노을이 묻어 꼭 생기를 띤 것처럼 보였다. 이내 붉은색 노을은 둘을 뒤덮었고 선을의 볼을 타고 흐른 투명한 액체까지 타오르는 빛을 반사해 댔다.

“장선을, 너…”

“말… 말할 수 없어, 열아. 나는… 하지만 확실한 건 말이야, 우리는… 우리는 그날부터 저주받았단 거야, 누군가에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갈피를 잃고 떨리는 선을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안 그래도 조그만 목소리에 흐느낌까지 더해져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아, 역시 괜히 말을 꺼냈어. 내일 물어보거나 좀 더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어도 됐을 텐데. 한열음은 자신의 말을 들은 선을이 이렇게 반응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치만 도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건데? 나에게, 아니면 우리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대체 어떤 종류의? 그게 우리 둘만의 힘으로 고칠 수 없을 만큼 심각한가? 한열음은 혼란스러웠다.

“열아, 난… 난 말야, 네가 정말 좋아. 그러니까… 너도 그렇다면, 난… 영영 너와 함께 구원받지 못한대도 좋아.”

“선을아…”

그 상황에서 얼굴의 혈류가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열음은 분명하게 그것을 느꼈고 선을에게 다가가 닿음으로써 그 말에 답했다. 열음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선을은 그 순간 흐르던 눈물 탓에 반은 감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감아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알면서도.

서로의 입술에 닿고 시작한 한여름 밤의 꿈.

열음은 애써 잊어두고 있던 것이 떠올랐으나 다시 모른척하기로 하고서 입안을 감도는 레몬 향과 함께 눈을 감아버렸다.


여름이었다. 춥다고 느껴질 만큼 세게 냉방 중인 교실 문을 열면 숨이 막힐 듯 몸을 덮쳐오는 습기와 너무 가까워서 아득한 매미 소리에 순간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마는. 개학식 날까지 이렇게 더우면 어쩌자는 거야. 열음은 그저 교실에 가만히 앉아 복도에서 묻어온 습기가 날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애초에 방학식을 하기는 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한열음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난 방학 내내 방학식 전날 선을과 했던 대화를 생각했으나 오히려 그 대화 때문에 모든 게 꼬여버린 것 같았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니, 그런 낡아빠진 문장을 선을이 갖다 썼을 줄이야. 암호문을 만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방학도 끝난 지금까지 열음이 선을을 떠올릴 때 드는 생각은 그저 붉은 노을과 레몬 맛뿐이었다. 그때 그랬던 건, 그냥 분위기를 타서 그랬던 거고, 네가 우니까 당황하기도 했어서, 그러니까, 나는,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열아.”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한열음은 언제나처럼 얼굴 옆에서 들린 낮은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학원에 가기 싫어 백겨울과 조잘거리던 양가을은 생각했다. 저 자식, 진짜로 여름이의 약점을 잡아뒀을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다 무섭다던 공포 영화를 볼 때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여름이가 저렇게 놀랄 리가 없다고. 백겨울은 방학식 전날 여름이 하루 종일 들고 있던 쪽지가 고백 편지가 맞았을 것이라 굳게 믿으며 둘을 관찰했다. 자신이 양가을에게 하는 행동과 비교해 보았을 때 선을과 여름이 사귀지 않는다고 판단할 이유도 없다 생각했으므로. 그런데 방금은 왜 저렇게 놀란 거지. 역시 선을이 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겨울은 때를 봐서 가을의 손을 잡고 교실 밖으로 내달렸다. 이건 우리가 피해줘야 할 상황이라고.

“어? 아… 어, 왜.”

“수업, 다 끝났는데 안 일어나길래…”

“아… 종 언제 쳤어?”

“…아까 전에.”

“그럼 슬슬 일어나야겠네.”

“그럼 같이 가자. 우리, 같이 집 가는 거 오랜만이네…”

한열음은 평소처럼 선을의 손을 잡고 걸으려다 문득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아 뻗던 팔을 다시 원래 자리로 어색하게 되돌려 놓았다. 장선을은 열음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 팔을 뻗어 그 따스한 손을 그러쥐었고 시린 피부에 열음의 손이 닿자 그제야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사르르 미소 지었다. 장선을, 너, 진짜 갑자기 이런다고. 머리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의미 없이 한 행동이라는 걸 모를 사람은 없었으나 열음은 선을의 손짓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앞으로 있을 마지막 여름방학도 너와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다면 좋을 것도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짧디짧은 복도를 걸었고 열음은 그 길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랐다.

버스에 올라 13개 정류장을 지나는 동안 선을은 자리에 앉아 창문부터 닫았고 다른 승객들이 창문 쪽으로 손을 뻗건 말건 열음의 한쪽 어깨에 기대어 복도를 걷는 내내 잡고 있던 지금이 아니면 더는 볼 수 없을 손을 더 섬세히 훑었다. 모든 관절의 움직임과 손등에 불거진 핏줄, 둥근 손톱과 손뼈 하나하나를. 열음은 선을의 손끝이 스쳐 간 자리에 흰 자국이 남는 것 같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선을을 닮은 희고 차가운 가느다란 자국. 그게 덮이고 덮이다 보면 내 손도 너처럼 차가워지는 날이 올까. 아마 없을 것이다. 주홍빛 버스 안에서 하늘이 검게 물드는 것을 응시하며, 열음은 어깨에 내려앉은 가냘픈 무게가 흔들려 떨어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기울였다.

여름이었다.


“이거, 대출이요.”

“어, 잠깐만. …응? 여름아, 연체된 책 있는데? 8월 말까지 대출 정지야.”

“…연체요?”

“어, 2달 정도. 연장을 여러 번 했었는데… 잃어버린 건 아니지?”

“제목…”

“응?”

“그, 연체된 책 제목이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어가 되고 싶었다, 맞죠?”

“어, 맞아. 기억하고 있구나? 방학식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전에 꼭 반납해.”

“…네. 안녕히 계세요.”

“야, 장선을. 너, 너…”

“…왜 그래, 열아?”

“…왜 모르는 척해? 너 다 알잖아.”

“열아… 뭘 말하는 거야? 나는, 어떤 것도 알고 있지 않은데…”

“우리에게는 여름만이 남았다.”

“……”

“네가 쓴 거잖아. 정확히는 내가 그 시집을 읽게 만든 거겠지, 네가.”

“열아, 그게 무슨…”

“대체 뭔데? 너,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잖아. 방학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애초에 그 전이 있기는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다 없었던 일 같단 말이야, 그 모든 게, 전부 다…”

“무슨 소리야, 열아. 너, 오늘 너무 무리한 것 같은데… 집에 일찍 갈래? 같이 가 줄게.”

한열음은 선을의 무구한 답변에 당황했다. 열음이 하는 모든 말을, 그저, 처음 듣는 것처럼 답하는 그 모습에. 그럴 리 없었다. 이건,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무슨 방법을 써도 단 한 번도 기억난 적 없었던 그 책이 표지까지 선명히 머릿속에 그려질 리 없었다. 아니, 잠깐. 그게 무슨 책이길래 기억하려 노력한 적이 있었던 거지. 게다가 그 일들은 언제 있었던 걸까? 분명, 그건 모두, 여름방학식 전날이었는데 그건 내일이다. 열음의 머리가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한산한 점심시간의 교실에는 잔잔한 햇살과 바람이 간간이 드나들 뿐이었고 둘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결국 한열음은 선을의 손을 잡고 함께 조퇴했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다는 열음의 말에 담임은 흔쾌히 허가서에 날인해 주었고 열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선을의 말에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으나 곧 똑같은 종잇조각에 서명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러 바쁘게 갔다. 열음은, 물론 아직까지는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하게 강압적인 선을의 태도에 이질감을 느꼈고 선을이 무언가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이른 오후의 버스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아침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지만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단 점에서는 조금 낯설었다. 옆에 앉은 선을이 제 어깨에 기대거나 손을 만지작거리는 대신 본인의 손을 마주 잡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열아, 미안. 말 못 해줘서…”

“…아까는 모르는 척하더니 왜 이제 와서 그래? 사람 바보로 만들기나 하고.”

교실에서의 일을 떠올리곤 쏘아붙이는 열음에도 선을은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그게, 학교엔 사람이 너무 많았어서…”

“교실엔 얼마 없었잖아. 그렇게 따지면 밖이 더 많을걸?”

“…그런 게 아냐, 열아. 내가 써둔 쪽지, 봤잖아. 지금은… 네게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어.”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여름에 갇혔다, 말고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데.”

“……”

선을은 아무 말 없이 버스 뒷문 앞의 카드 리더기를 가리켰다.

“…그럼 넌 알고 있어?”

“실은… 아니. 아직은 잘 몰라, 열아. 그렇지만… 말했잖아, 나는… 나는 너와 함께라면 구원 따위는 버리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난…”

“망설일 것 없어, 열아… 우리는 이미 저주받은 거야. 영원히 죽음을 맞을 수 없는 저주.”

“저주…”

선을의 입에서 곧잘 나오던 단어였으나 오늘 들은 그 말은 어쩐지 평소에 듣던 것과는 무게부터 달랐다.

“어차피 돌아가려면, 우리는 또다시 수없이 많은 여름방학을 보내야 할 테니까…”

한열음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버려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너와 무얼 하며 이 긴긴 여름을 보낼지. 집에 도착한 한열음은 곧 숨 막힐 정도로 더워질 것만 같은 날씨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탓에 밖이 더 덥다는 것을 알면서도 창문을 열었다. 여름이었다.


이른 아침 눈을 뜬 열음은 습관적으로 씻고 등교 준비를 하려다가 선을에게 전화만 걸고서 조용한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선을아.”

전화기 너머는 한참 말이 없더니 선을의 약간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아… 일어났어?“

“너희 집, 사람 없지.”

“어? 으응… 문, 열어 놓을까?”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허둥거리는 목소리에 열음의 입술 새로 웃음이 약간 새었다.

“됐어, 비밀번호도 아는데 왜. 옷만 갈아입고 갈게. 기다리고 있어.”

“알겠어, 열아…”

헤실거리는 선을의 웃음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분명 자다 깨서는 허둥지둥 방을 치우고 있겠지. 열음은 뻣뻣한 교복 대신 편한 옷을 걸쳐 입고 가방—든 것이라고는 없어서 사실상 선을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을 멘 다음 집을 나섰다. 선을의 집까지는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마 둘과 나이가 비슷할 선을의 아파트는 난간이나 엘리베이터 구석 같은 곳에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녹과 먼지와 거미줄 같은 것으로. 하지만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입주민도 많아 그런 것들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흐릿한 거울 아래는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되어 보이는 원색의 학원과 부동산과 치과의 광고로 채워져 있다. 엘리베이터는 조금 느려서 도착하기까지 열음은 ‘기대지 마시오’라 적힌 엘리베이터의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있었다. 계단 창문에서부터 들어오는 그 빛은 층과 층 사이를 지날 때마다 바닥에 가려지며 깜박였고 그렇게 13번을 깜박인 후에는 선을의 집 앞에 도착했다. 사세아파트 1404호. 오랜만이었다. 부모님이 선을이네 집엔 가지 말라고 해서, 못 온 지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광택이 도는 와인색 커버를 올린 다음 새파란 불이 들어오는 투명한 숫자 버튼을 눌러야 하는 옛날 도어락부터 문 앞에 붙은 빛바랜 경전의 뜻 모를 구절까지, 선을의 집은 예전과 다른 게 없었다.

“열아…!”

신발을 벗고 반투명한 중문을 밀자 선을이 뛰쳐나와 열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답답해…”

열음은 선을의 몸을 밀치는 대신 그 얇은 몸을 팔에 안았다. 곧 있으면 무더위가 찾아올 텐데, 선을에게서는 언제나 그랬듯 변함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는 기계음이 났다.

“무슨 연유로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한 거야, 열아?”

선을은 떠듬떠듬 몇 없는 고급 어휘로 열음에게 물었다. 열음은, 그마저도 너무나 선을이라, 무심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맨날 일찍 등교한다고 잠도 못 잤는데 늦잠이나 좀 자게. 우리, 어차피 학교 안 가도 되는 거 아냐?”

“응, 아마도…”

“그럼 됐네. 학교 간 척 하려고 너네 집 온 거니까, 뭐…”

선을의 얇은 등을 쓸어내리며 거실에 발을 들이자 암막 커튼으로 둘러싸인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긴 안이나 밖이나 달라진 게 없구나, 싶었다. 선을을 따라 들어간 그의 방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몇 년은 쓰지 않았을 전등과 스위치는 완공 때처럼 깨끗한 채 색만 바래져 있었고 손때 묻은 곳이나 벌레들의 무덤도 없었다.

무심코 책상 위에 놓인 과일 사탕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분명히 작년 3월에 줬던 것 같은데 왜 아직도 다 안 먹었지. 환기를 시키지 않아 방 안 공기가 갑갑했지만 그마저 마음에 들어 열음은 선을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근데 여기 둘 다 누울 수 있는 거 맞아? 잘 모르겠어, 열아… 학교에서 연락이 올까 싶었던 열음은 핸드폰을 껐고 선을의 것도 함께 꺼버렸다. 어차피 이제는 무의미한 것이므로. 선을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열아, 나, 무척 기뻐… 내가 바라던 여름이야…

함께 누운 침대는 좁았다. 선을의 방답게 온도가 높았기 때문에 선을과 피부가 맞닿지 않으면 금세 더워졌고 열음은 어쩔 수 없이 선을의 몸을 끌어안고서 잠을 청했다. 팔 안에 감긴 허리와 등에서 기다란 척추뼈가 손에 닿았다. 이렇게 두꺼운 옷을 입고도 뼈가 만져지면 안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선을이 간지럽다며 열음의 귀에 속삭이는 탓에 뼈를 쓸어내리는 것은 그만두고 유일하게 드러난 피부인 목과 얼굴에 이마를 댔다. 몸을 뒤덮던 열기가 가시는 기분.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왠지 미지근해진 듯한 선을의 피부 위에서 얼굴 위치를 조금씩 옮기자 선을은 몸이 따뜻해진 것 같다며 배시시 웃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가만히 있으니 조금씩 눈이 감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방학 때도 네 집에 눌러앉을 걸 그랬어. 열음에게 안긴 선을이 먼저 잠에 들었고 열음 또한 곧 숨이 고르게 드나들었다. 헐렁한 반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열음과 완전히 대비되는 긴 겨울 잠옷을 입은 선을이 서로 껴안고 자던 그 모습을 누군가 보고 있었다면 계절을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닫힌 창 너머로 들려온 요란한 매미 소리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몇 시간이 지나 막 정오에 가까워졌을 무렵 열음은 눈을 떴다. 그렇게 더운 방 안에서 잤는데도 전혀 덥지 않았다. 아마 선을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열음은 10c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선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매끄러운, 눈이나 얼음을 닮은 얼굴. 선을의 살결이 조금만 더 투명했더라면 그 아래의 혈관이 모두 비쳐 보였을지도 몰랐다. 그랬더라도 정맥만 눈에 띄어 푸른빛이었겠지만. 선을의 허리에 올려놓았던 손을 얼굴에 가져가 그 흰 살결을 따라 천천히 뺨을 쓸어내렸다. 빽빽하고 새까만 머리카락 안에는 아마 창백한 두 뺨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해를 전혀 받지 않아 더 옅은 색을 띠고 있을 눈꺼풀과 이마와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썹과 속눈썹이 있을 것이었다.

열음은 선을의 머리카락 너머가 보이지 않을 때, 그러니까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 안을 상상하곤 했다. 빛도 없는 짙은 검정 머리칼 안에서 홀로 빛나고 있을 보랏빛 눈. 무엇이 들어있는지, 무언가 들어 있는 것은 맞는지 알 수 없는 그 탁한 눈… 그런 생각을 하며 선을의 광대뼈를 엄지로 약하게 문질렀다. 이 거리라면 그 눈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보일 것 같아서.

“열아…”

그 손길에 잠이 깼는지 선을은 열음의 어깨며 목덜미에 느릿느릿 파고들면서 두 눈을 끔벅거렸다.

“몇 시야…?”

“12시 좀 안 됐어. 더 잘래?”

“아니… 열이가 깼으니까… 나도, 일어나야지…”

그렇게 말하는 선을의 목소리에 여전히 잠이 묻어 있었다. 어깨를 파고든 선을의 검은 머리칼 사이로 새하얀 목이 드러나 보였다. 열음은 그 틈에 손끝을 대었다가 찬찬히 손가락과 손바닥을 붙여 선을의 목덜미를 감싸 쥐고서 말했다. 선을의 살결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몸을 더 가까이 붙이며.

“왜, 더 자도 되는데.”

“아냐, 열아… 이번 여름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무슨 좋은 일.”

“아직은 모르지, 그렇지만… 확신할 수 있어.”

“그럼 다행이고.”

말을 맺고 다른 얘기를 꺼내려 했는데, 소리가 날 정도로 위가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필이면 선을과 가슴부터 배까지 틈도 없이 붙어있는 지금. 귓가에서 선을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음은 자신이 홍조가 생겨도 티가 잘 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선을의 목덜미를 세게 움켜쥐었다. 숨이 급하게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목젖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왜 까부는 거지, 대체. 열음은 손의 힘을 풀고서 물었다.

“…점심 뭐 먹을래?”

“헤헤… 열이가 먹고 싶은 거면, 다 좋아…”

“결정을 하라고, 결정을. 집에 뭐 있는데?”

“그게, 잘 모르는데…”

“됐다.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볶음밥이라도 해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선을의 얇은 등을 몇 번 토닥여주고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을도 뒤따라 일어나며 열음의 옷자락을 잡았다.

“같이 가, 열아…”

갑자기 일어나 어지러운 듯 가는 팔이 맥없이 흔들렸다. 열음은 옷을 잡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도 펼치며 말했다.

“네 방에서 부엌까지 얼마나 된다고.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거기 있어.”

열음이 손가락을 펴는 족족 선을이 다시 접어 옷을 쥐어버리긴 했지만.

“하지만 혼자 있으면 너무 춥단 말이야, 열아… 얌전히 있을게.”

열음은 빠르게도 포기하고서 일어나라는 듯 선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던가. 그럼 가서 냉장고나 좀 열어봐.”

내민 손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난 선을의 얼굴이 우울했다. 하여간 생각하는 게 뻔하다니까, 너는. 네 얼굴은 언제나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표정에서는 즐거운 티가 너무 많이 난다.

“알겠어…”

열음은 여전히 머리가 아픈지 비틀거리는 선을과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선을은 대부분 학교에서 식사를 하고 선을의 부모님 또한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냉장실 안에 특별히 먹을만한 반찬 같은 것은 없었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달걀이나 소스류만 있을 뿐이었다. 냉동실에는 당장 먹을 수 있을 만한 것도 있었으나 왠지 열음은 오늘따라 잘 하지 않는 요리가 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선을의 집에 정말 오랜만에 와서 그렇겠지. 혼자선 밥도 잘 안 챙겨 먹는 게 방학 동안 대체 뭘 먹고 살았는지 모르겠네.

가끔 선을 부모님의 부탁으로 그의 집에 가게 될 때면 열음은 선을과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고서 더 이상 재미있는 것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거실에서 이불을 덮고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예외 없이 자신의 방에서 깨어났었다.

“후라이팬 어딨냐? 오랜만에 와서 기억이 잘 안 나네.”

자신을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은 아마도, 99% 이상의 확률로, 부모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거면 애초에 왜 선을의 집에 가서 놀아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는지 모르겠다. 선을과 그의 부모님을 열음의 부모가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것쯤이야 진작 알고 있었으므로. 그렇기에 오히려 더 어리광을 부리며 선을의 집에 가게 해달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그런 것도 통하지 않게 되었지만. 아무튼 옛날 기억을 떠올리니 괜히 요리가 하고 싶을 것이다.

“그게, 나도 잘…”

“그럼 계란 네 개만 꺼내 와. 밥도 두 공기 정도. 너도 지금 배고프지?”

“으응…”

익숙한 화구와 조리대와 주방가전. 열음은 선을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동안 그가 꺼내 온 재료로 간단한 볶음밥을 만들었고 식탁 위에 냄비 받침과 코팅이 벗겨진 후라이팬과 숟가락 두 개만 놓아 완성한 음식은 어렸을 때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 짧게 말하자면 싱거웠단 뜻이다. 열음은 익숙한 동작으로 그 위에 소금을 뿌리는 선을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쪽지에 적어놨던 건 다 사실이야?”

“…전부.”

“얼마나 오랫동안 이랬는지도 모르는 거고?”

“내 생각보다, 더 길었을 수도 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정확한 작동 방식이라던가, 그런 건 알아?”

“……”

선을은 한참 말없이 연노랑 볶음밥을 떠다 우물거리기만 했다. 금속끼리 부딪히고 긁히는 소리가 났다.

“왜 말 안 해. 몰라?”

“책으로 말했던 것처럼… 그때가 시작이었어. 아마, 한 번의 여름방학 동안에 우리가 그… 그걸, 하면…”

우물쭈물하던 선을의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왜 저러지.

아.

그 이유를 알아채자 열음 또한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젠장, 그럼 내가 대체 몇 번이나…

“…그래서 그걸 하면 다시 방학이 시작되는 거라고?”

“아마도.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기로는, 안 했던 적이 없으니까…”

열음은, 대학과 취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선을과 함께 학교를 무단결석할 용기는 있었지만 진실을 마주할 용기는 없었다. 그게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도 모를 자신의 첫키스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열음은 솔직히 말해서 그때 선을을 어떻게든 기절시킨 다음 그의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쩐지 머뭇거리질 않더라, 미친놈… 무엇보다 선을은 그랬던 때마다 자신과 비슷한 감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매번, 그렇게 나와 다름없는 표정의 얼굴을 하고서, 해서는 안 될 짓이라도 해 버린 것처럼…

열음은 눈을 피하는 선을의 말에 한참이나 침묵하다 물었다.

“…확실한 거야?”

“거의. 내가 기억하는 한,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네가—”

“그 얘긴 그 정도면 됐어. …그럼 안 하면 나갈 수 있는 거 아냐?“

“그게… 그걸 모르겠어, 열아. 그랬던 적이 없기도 하고, 또…”

“또?”

“그럴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던 적이, 꽤 있었어서…”

이를테면 직전—이라고 기억나는 때—의 상황을 말하는 것 같았다.

“여름방학식 전에, 어떻게 해서든 하게 되는 것 같아…”

“그럼 얘기가 쉬워지네.”

선을은 기대했다. 함께 봄을 보러 갈 수 있기를.

“너, 나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못 죽어도 상관없다며.”

열음은 기대했다. 함께 영원한 여름이 될 수 있기를.

“…맞아.”

너무나 안일하게도.

“계속 여기 있자. 난… 난 네가 죽는 거 보기 싫어.”

“열아…”

선을은 오묘한 표정을 하고서 열음을 바라보았다. 기쁘다는 것인지 슬프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여기서 평생 살자는 건 결국 영영 죽을 수 없다는 거니까, 어쩔 수 없이 양가감정이 들겠지. 열음은 그것이 선을의 최선일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에 없을 이유도 모르겠고. 생각해 봐, 우린 뭐든 할 수 있을걸. 뭐, 복권을 산다던가… 아직 못 사네. 아님 같이 여행을 갈 수도 있고. 한다고 해서 잘못될 것도 없잖아. 아니야?”

“그것도… 언젠가 질릴 날이 오잖아, 열아. 나는… 나는 그게 두려워. 우리가, 영원히 이 죄를 이어가게 될 수도 있는 건데…”

“끝내고 싶으면 그것만 안 하면 되잖아.”

그 말에 선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텅 비어버린 숟가락과 후라이팬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맞은편의 네게는 전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주변시로 물컵에 손을 뻗었다 내려놓는 열음의 손이 보였다.

“나랑 같이 있으면 상관없다며, 구원 같은 거 못 받아도.”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면 안 될까, 열아. 나는… 잘 모르겠어, 그렇게 존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너는… 죽음이 두려워?”

“…영영 구원받을 수 없어도 좋다며.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맞아. 하지만…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단 말이야… 내가, 아무리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더라도, 그 모든 걸 다 기억한 채라면, 나는…”

“그래서 어떡하게? 나, 지금 너랑 되게 가까이 있는데. 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아닌 것 같아? 막 다시 죽고 싶어지고 그래?”

“열아, 나, 나는… 나는 언제나, 그랬을 뿐이야… 난, 네가—”

”너, 구원받고 싶다면서. 나가고 싶다면서 왜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가만히 있었는데? 이미 상황도 다 알고 있었잖아.“

“그건… 그건 네가 너무 좋아서였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도 사람인걸, 열아.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선을아… 이제 다 기억났는데 무슨 그런 허술한 거짓말을 해. 넌 그냥 죽고 싶은 거잖아, 내가 좋은 게 아니라. 내 말이 틀려? 날 좋아해서 여기 남고 싶은 마음보다 죽지 못할 거란 두려움이 더 크면 나를 좋아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잠깐, 잠깐만 나갔다 올게, 열아. 머리가 아파… 조금, 산책이라도—”

“무슨 소리야.”

몸을 일으키던 선을은 피부에 닿는 온기가 불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게 열음의 것이었을지라도.

“왜 이래, 열아… 나, 나 정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조금만…”

“싫어. 네가 지금 나갔다가 죽기라도 하면? 그대로 방학이 끝날지도 모르잖아. 왜 내가 죽을 때까지 너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해?”

“그런… 그런 뜻이 아냐, 열아… 내가, 너한테 그 쪽지를 남겼던 건…”

“함께 영원하자는 거였잖아, 이 안에서. 내 말이 틀려?”

“…응. 난… 난 우리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어, 봄을 맞을 수 있게. 그래서—”

“그럼 내가 좋다던가 구원도 필요 없다던가 그런 말은 대체 왜 했는데?”

“그런, 그런 줄 알았어, 나도…”

“근데 생각해 보니까 아니었다고. 나랑 영원히 있을 생각을 하니까 다시 죽고 싶어졌다고.”

“그렇게, 말할 것까진…”

“장선을. 사람 갖고 노니까 재밌냐? 네가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았어? 웃기지 마. 너, 너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아침에도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보나 마나—”

“일어나 있었어.”

“…뭐?”

“열아… 우리가 이 안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도 눈이 떠져, 네가 전화를 걸기 직전에. 꼭 그게 아니더라도, 방학 내내 너와 함께 지냈던 적도 몇 번 있었으니까…”

한열음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내가 한 말에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라던가, 그런 건… 대충 예상이 가. 무슨 의미인지도. 그래서 나비 얘기도 했었어. 그렇게 하면, 네가 나를 싫어하게 돼서… 여기 머무르지 않을 수 있을까봐. 하지만… 네가 매번 똑같이 행동하진 않았어. 네 행동이 점점 달라지곤 해서, 그래서… 너한테 메시지를 남기면 분명 언젠가는 네가 확인할 거라고 생각했어.”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누구도 아닌 선을에게 내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자신이 선을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게, 너무나 바보 같아서. 열음은 절대로 속내를 들킬 리 없다 생각하던 상대에게 자신의 가장 추한 밑바닥을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저… 네가 여기 남겠다고 대답할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어서…”

열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너라면, 너라면 이런 여름에서 나갈 거라고… 내가 머무르고 싶어 하더라도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에는, 이번에는 열음이 안일했던 게 맞았다. 선을이, 그것도 혼자서 이 정도로 지금 상황에 대해 알아냈다면, 셀 수 없이 많은 여름방학을 반복해 왔을 텐데…

“다시 봄을 만나고 싶지 않은 거야, 열아?”

다음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열음은 선을의 멱살을 움켜쥐고 레몬 맛이 날 그 입안을 헤집었으나 불쾌한 기름 맛만 날 뿐이었다. 역했다.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분명. 선을의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개학식까지 정해. 여름에 남을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건지.”


여름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숨이 막힐 듯 몸을 덮쳐오는 습기와 너무 가까워서 아득한 매미 소리에 순간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마는. 그날 집으로 돌아간 후부터 열음은 선을과 만나기 위해—절대 만나지 않기 위해, 라 써도 의미는 통할 것이다—내내 여름 하늘 아래를 돌아다녔고 선을은 첫 여름방학처럼, 첫 여름방학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집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열음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방학 동안 선을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던 것을 반성하고 있었다. 나를 여기서 구해 함께 나가기 위해 몇 번이고 여름방학을 보낸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것으로 모자라 위협까지 하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심했고 극단적으로 보자면 동료나 반려자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박탈한 셈이었다. 그래서 열음은 선을이 뭐라 말하든 그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한 달이나 고심한 끝에 나온 결론이 틀릴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아주 적을 거라고. 너도, 결국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선을은 열음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 감정에 치우쳐서 열음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언제 올지도 모를 구원 대신에 당장 눈앞에 있는 열음을 선택했다면… 그리고 열음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상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전부 자신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방학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선을은 열음과 수없이 바다로 향하고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무수히 첫키스를 나눌 게 아니라 상황을 전달했어야 했다. 어떻게든 알렸어야 했다. 방법을 찾는 데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을 뿐이라 아무리 변명해도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끌고 온 것은 결국 자신이었기에 선을은 더 이상 탓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 너무 늦었어.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선을은 여전히 삶이 두려웠으나 열음이 바라던 대로 하기로 했다. 그것이 열음의 선택이었기에.

결론적으로 둘은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은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은 열음과 선을은 상당히 서먹한 상태였고 누구도 서로의 손을 선뜻 잡지 못해 그저 그런 상태로 13개 정류장을 지났다. 열음은, 그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고 언제 얘기를 꺼내는 것이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선을도 마찬가지였다. 창문으로 아침 해가 드는 길고 긴 복도를 지나 교실에 도착해 선을의 머리를 묶어준 다음에야 열음은 그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바다로 가자.

선을이 머뭇거리자 다시 한번 말했다. 처음 시작됐던 곳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얘기해. 선을은 이어진 열음의 말을 들은 다음에야 마음이 놓였고 배시시 웃은 뒤에는 열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2학기의 첫 교시를 앞둔 시간 동안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시 방학 전처럼 서로에게 기대 눈을 감았다.

방학을 보내고 돌아온 양가을은 처음으로 백겨울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방학식 전에도 함께 조퇴를 하질 않나, 무단결석을 하질 않나, 그러면서 방학식과 개학식 당일엔 함께 멀쩡히 등교하다니. 여름과 선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했고 또 그 전과 다를 바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기댔다가 멀어졌고 다시 가까이, 그걸 반복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 둘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여름과 선을이 다른 사람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평소 같았으면 여름에게 방학을 어떻게 보냈냐고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도무지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고립이었다.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알 수 없는.

양가을은 지금껏 궁금한 적도 없었던 여름과 선을의 관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겨울의 말대로 정말 사귀기라도 하는 걸까, 둘이. 하지만 여름과 선을이 싸우는 모습이라면 작년부터 수도 없이 봐 왔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둘은 사소한 말다툼을 할 때도 어딘가 맞닿은 채였고 무엇보다 여름이 선을을 정말로 싫어하거나 약점이 잡힌 게 맞다면, 지금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여름은 분명 지금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그것에 뛰어들고 싶다는 듯 들뜬 표정을 하고서. 그러면 그게 대체 뭐냔 말이야. 가을은 겨울에게 물었다. 여름과 선을 사이에 정말 무언가가 있었냐고.

백겨울은 오히려 둘 사이에 진짜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흥미를 거의 잃었지만 가을이 여전히 궁금해하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봤던 것이나 여름과 선을이 하던 말을 옮겨 주었다. 아까 둘이 방학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더라, 함께 어딘가로 가더라, 하며. 물론 믿기지 않았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상상일 뿐이라고, 가을의 말 쪽이 더 일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름과 선을은, 어쩌면 정말로… 겨울은 가을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하고 하루 내내 둘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둘의 행동을 완전히 외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름의 태도는 묘하게 세상을 달관하기라도 한 듯 어떤 망설임도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 더 이상 싸늘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겨울은 그렇게 다정한 여름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너그러워 보였다. 지금이라면 내가 어떤 실수를 해도 웃으며 넘어가겠지. 선을 또한, 왠지 그 허여멀건한 얼굴에 알 수 없는 생기라도 도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눈은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입꼬리만 히죽 올라가 있는 그 미소가 보기에도 기분 좋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겨울은 아침부터 그 얼굴을 보고 자신이 선을에게 무언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지 2시간 내내 고민했을 정도니까. 가을의 말로는 그가 하루 내내 그런 표정이었다고 했으니 선을에게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글쎄. 저렇게 무표정 같은 웃음은 처음 봤다. 눈이 보이지 않아 그런 걸까. 이제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여름이 같은 애가 저런 애랑 사귈 리가 없지. 겨울은 이제 둘의 얘기는 그만하고 데이트 날 사진을 덜 보내줬다며 가을의 손을 잡았다.


개학식이라 석식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해가 지려면 두 시간은 남아 있었고 하늘은 꿈결에 본 것처럼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둘은 다른 모든 학생들과 동떨어진 채 뜨거운 햇빛 아래서 역을 향해 걸었다. 이제 저들은 저마다 집이나 학원이나 자습실로 향해 가겠지만 오늘, 24시를 지나면 다시 방학 전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것도 모른 채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기 위해 열중하는 그들이 불쌍해지기도 했으나 열음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제는.

“선을아. …매림 처음 가 봤다는 거, 거짓말이었어? 경전철 처음 타 봤단 것도?”

“그건 사실이야, 열아. 지금까지는 계속, 기차를 타고 멀리까지 갔었거든…”

“방학식 전날마다?”

“으응…”

“내가 그렇게 멀리 갔을 줄은 몰랐네. 그럼 오늘은 그때 갔던 곳으로 가 볼래?”

“아냐, 매림해변으로 가자. 거긴, 낮에도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까…”

이번 역은 사세, 사세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해가 훤할 때 탄 열차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햇살이 밝아 하늘에 붉은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커다란 건물 몇 개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창문 너머 저 멀리의 이름 모를 산과—아마 사세산이거나 매림산이겠지—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것 같은 흰 구름이 산 뒤에 숨어 꼬리만 드러냈다 사라질 뿐이었다.

에어컨이 켜진 조그만 열차 칸 안에서 선을은 춥다는 말 대신 열음의 손을 쥐고서 조심스레 매만졌고 열음은 뜨거운 해 아래서 걸어온 만큼 그런 선을의 손길이 달가웠다. 열차를 타고 가다가 그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만 같이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 느리게 깜박인 열음의 주홍빛 눈에 선을과 창문 밖 하늘과 구름이 비쳤다. 하복 셔츠를 반듯이 입은 열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흰 셔츠가 사각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선을은 열음의 눈에 비친 것들을 찬찬히 자신의 검보라색 눈에 다시 담으며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한 번의 여름방학이 더 남아있었지만, 그게 올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다고.

이번 역은 매림, 매림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열음과 선을의 공상은 우아한 클래식 음악과 뒤를 따른 기계적인 목소리에 끊기고 말았지만 열음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즐겁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열차에서 내려도 하늘은 아직 파란색이었다. 이미 입추도 지났으니 이 정도면 가을이라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봤자 한번은 다시 그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만. 열음은 선을이 역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서 구름의 모양을 눈에 새겼다. 아무리 똑같은 날이 반복되어도 구름의 모양마저 같을 수는 없을 테니.

열음은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선을과 함께 걸었다. 방금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 날씨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더웠기에 어쩔 수 없이 열음은 선을의 그림자에 몸을 구겨 넣고서 걸었다. 선을의 긴소매 셔츠가 햇빛을 반사해 눈이 조금 부셨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었으니. 둘은 손을 잡고서 빛바랜 원색의 사각형 간판이 보일 때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선을은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바다. 선을의 피부처럼 흰 모래가 처음 봤던 것보다 밝은색으로 반짝였고 그 빛에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으나 하늘은 곧 어두워질 것이었다. 언뜻 보면 꼭 휴양지처럼 투명하고 맑은 바닷물에 햇살이 이리저리 반사되어 꺾이며 물비늘을 만들어냈다. 그런 모습을 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선을 또한 마찬가지였다. 늘 열음과 해가 다 져 어두운 수평선을 바라보았기에.

하얀 모래, 새파란 바다, 푸르른 하늘. 열음은 그 풍경이 거짓말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순간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물론 다음 방학이 남아 있었지만 그때 바닷가에 돌아왔다가 분위기를 타 버려서는 안 되니까 실제로도 볼 수 없을 거였다. 하지만 내년에 볼 수 있을 테니 괜찮아.

모래사장 밖에 가방과 신발과 양말을 벗어둔 둘은 맨발로 바다 앞으로 향했다. 파도가 치며 흰 거품이 일었다 사그라들었고 열음과 선을은 한참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름 중 해가 떠 있는 마지막 시간의 바다는 정말이지 아름답고도 눈부셨다. 따사로운 햇볕이 몸을 데워도 네 개의 발은 바닷물에 잠겼다가 다시 나오기를 반복했으므로 덥지 않았다.

다음 방학에는 또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돌아간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결정은 했어?”

선을은 웃고 있었다.

“물론이지, 열아…”

열이 네가 우리의 영원을 원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스를 수 있겠어, 감히…

열음이 기억하기로, 선을의 대답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목소리였다. 불안한 마음속에선 잠이 덜 깬 채 품에 안겨 이번 여름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고 말했던 그 말간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우리는—

“영원해지자. 이곳에서. 네가 없으면, 축복 같은 것도 의미 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열아. 네가 죽고 나면, 내가 억지로 살아갈 이유도 없을 테니까… 우리, 함께 살아가면서 죽음을 파헤치자. 그러면, 언젠가는…”

선을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열음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아니야. 내가 괜한 말을 했네… 지금, 지금부터가 진정 아름다운 삶일 거야. 열아, 우리, 구원이 없는 곳에서 영원히…”

환히 웃는 얼굴의 선을은, 이제는 반납할 필요가 없어진 시집의 마지막 장을 펼쳐 열음에게 건넸다.

“우리만의 안식을 찾자.”

실로 둘의 여름에 걸맞는 종말이었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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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키스는 레몬 맛이라던데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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