𝐓𝐡𝐞 𝐉𝐮𝐝𝐠𝐦𝐞𝐧𝐭 : 가시왕좌

[예레미야] 말의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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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차 by 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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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는 없다. 꾸며내어야 했다면 꾸며냈겠지만,

구태여 손 쓰지 않아도 될, 고작 작은 일.

이하는 모두 예레미야 카일루스의 뜻으로 저질러진 폭거다.

어느 날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시빌라 에피그라프의 해방을 원했다.

***

허나 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으며 나의 용인으로 이루어진 처벌이니 이후 필히 보고해야 할 것이다.

유벤투스가 말한다.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가시 울타리 바깥, 가장 광대한 풍요 앞에서 고개 숙였다. 친애를 알고 벌써 반절 멋대로 휘저었으나 지금 구한 대답만큼은 어김없이 언명인 까닭이다. 예레미야는 언감히 풍요의 증거에게 의구심 생기게 둘 까닭이 없다. 이제 일어날 일은 필요하되 아주 사소하니 불신으로 균열 배게 하지 않으리라. 유벤투스의 허락에 이르러 예레미야는 비로소 준비를 모두 끝낸 참이었다.

그 자가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대보겠나?

지난날의 물음을 마무리할 때가.

***

시빌라 에피그라프는 생도 시절 포로 심문 따위의 섬뜩한 마법으로 입학한 까닭에 재학 내내 고초가 잦았다. 시종 가볍게 가장한들 바라보는 시선의 반절은 썩 보드랍지 않았고, 또 반절은 순전 이용할 궁리뿐이라 시빌라는 언제 엎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부표 같았다. 그러나 클리브라이스, 밀밭을 곁에 두고 태어난 자는 대양에서 헤매는 일 없었으니 그저 붙박여 해를 보냈을 뿐. 이는 쏟아지는 시선이 첫 번째, 시빌라 자신에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나 도대체 단지 태어나 생긴 모양만으로 무딜 수 있는지는 의문이 생긴다. 눈 맞대거든 죄다 긁어 읽어서 모든 세상이 다 시시하고 지루한 자 공허의 뿌리는 알 만하되 권태도 짜증도 없이 공손하게 순종함은 왜인가?

누가 시빌라 에피그라프에게 순응을 가르쳤나?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자신의 졸업 이후 시빌라 에피그라프의 세세한 이력은 알지 못했으나 시빌라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일을 곱씹어 헤매지 않고도 충분히 짐작은 했다. 시빌라의 뒤편에 서 있다던 클리브라이스의 영주는 사실, 누구든 동의하듯이 과분한 도구를 거머쥐었다. 거짓으로 분별 못 하는 일 없게 단단히 틀어잡고 행사하니 본디 풍요로 적신 땅인들 거짓 앞에서 헤매지 않을 이에게는 풍요가 좀 더 주어질 만하다. 그런데, 다시 말하자면 기억을 들춰내는 힘이거든 황제나 제후에게 걸맞은 것이어야 하지 않나. 왜 고작 이름 없는 영주 따위인가……

예레미야는 그쯤, 시빌라의 부자연스럽게 단단한 거취에서 접질린 흔적을 짚는다. 최소 시빌라 자신이 본인의 가치를 가늠하고자 했다면 어디에서든 협상 가능했을 것이며 후원 명목으로 디디고 선 지반이 최초에 신의로 굳혀졌었다고 한들 인간이라 간단히 흔들렸으리라. 그만큼의 교묘한 힘이었다. 그런데, 시빌라는 도대체 단 한 번도 이름 없는 영주 곁을 떠나려 한 적이 없었다. 셈이 부족해서? 소박한 처지에 만족해서? 조용히 삶 구가하려거든 애초 드러나지 않았어야 할 능력을 전면에 배치한 자, 과시한 자, 휘둘러 행사한 자 모두 한 가지 이름 없는 자로 귀결될 뿐.

일련의 과정에 시빌라 에피그라프의 의지는 없다. 예레미야는 그것이 오래도록 불쾌했다, 시빌라와 내키지 않는 선상에서 재회하기 이전에도 계속.

그 자가 죽었을 때 네가 슬플 이유도 없겠구나, 그러면.

그러나 개입해서 참견할 생각도 아니었는데. 예레미야는 시빌라의 삶이 좀처럼 스스로 정해지지 않는 점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시빌라가 말을 매어두었다는 곳 직접 다다르기 전까지는 그저 조용히 언짢았을 뿐이었으나 아니지, 옹송그린 분노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칭제하는 자 둘, 왕국에 두 가지 섬김이 있어 해괴한 시기에 클리브라이스가 주인의 메마르게 갈라진 지반을 메웠으므로 황금들녘 오래도록 들여다볼 때. 한참 분주하다가도 시간이 빌 쯤, 예레미야는 시빌라가 이름 불러 이른 적 없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 영지의 이름은 로웰이었다. 시빌라 에피그라프, 심문관의 이름에 기대어 번창하는 곳으로 향하거든 그저 특징이라고는 없이 클리브라이스의 전형 같기도 했고, 잘라서 클리브라이스 어디에 던져도 그만 그대로 섞일 뿐인 흔한 정경이었지만 그곳 영주는 셈이 빨랐다. 마찬가지로 로웰, 영지 이름과 성이 같은 그 작자는 카일루스 성을 가진 기사단장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 자는 시빌라 에피그라프를 프리트헬름에게 보낸 것치고 크게 거리낌 없이 예레미야를 환대했다. 또는 지나치게 비굴하게.

그게 이상한 일은 못 된다. 슈네펠트와 클리브라이스 각각의 지지가 확고한 것과 별개로 두 황제를 섬겨야 하는 상황이 모호한 것은 여전해서 불온하게 고개 쳐들고 제후와 대척점에 선 이름 입으로 올리는 자 없을 뿐이지 사람 사는 곳마다 조금씩은 엇나가게 엮인 구석이 있기 마련이었다. 내전은 내전이었다. 철저하게 낙인찍자니 살 발라낼 곳도 한 몸뚱이라, 아직은 왕국의 구별이 매섭게 엄격하지는 않았다. 결국, 보전해서 살릴 곳이니까.

그렇게 행운으로 풍요를 입고도 거스르며 겨우 목숨 부지한 것치고 과감하고 아둔한 인물, 로웰, 이라고만 잠깐 기억했다가 잊을 이 자는 예레미야가 흔히 보던 수도 이들과 어림잡기에는 한참 허술했으되 속이 뻔히 보이는 것만큼은 편리했다. 필부가 과분한 힘 발견해서 출세한 사연이 괘씸할 것은 못 되나, 예레미야는 본래 시빌라와 눈 마주치기를 원했던 적 없는 자였다. 머릿속을 긁어서 집어삼키고, 집어삼켜서, 끝없이 추궁하고 심문하거든.

그때 시빌라 개인의 자아라는 게 성립은 하나? 도대체 마모된 삶이 왜 비롯해야 했나? 그 일에 몰아넣은 자라 보자마자 살의가 솟구쳤으되 예레미야는 어차피 천성이 사람의 생사를 쉽게 판가름내는 성미로 주조된 까닭에, 당장 목을 비틀고 싶은 불쾌한 감각도 참을 수는 있었다. 참을 수는. 단지, ……그 저택이 도대체 무방비하다는 사실을 몇 번 둘러보다가 깨닫기 전까지는. 시빌라 에피그라프는 영주에게 예속된 자는 아니었다. 단지 후원은 받았다. 그래도,

그간 이토록 휑하니 서툰 공간에 어떻게 모셔 놓았길래 시빌라가 달아나질 않았을까.

“예에? 사, 사람 부리는 방법을, 예. 저, 저까짓 것이…… 어디, 카일루스 님에게……”

예레미야가 충동적으로 문답법을 시작했을 때 영주는 잠깐 당황한 낯으로 중얼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들떠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예레미야가 이른바 고견을 구하겠답시고 꿀 발린 혀로 굴자, 처음에는 저택의 하인을 부리는 법, 그다음으로는 농사 짓게 부리는 자들에게 고상히 베푸는 자비. 예레미야는 영주의 말끄트머리마다 베르하임 족속의 고아한 치장을 붙여서 한껏 치하했다. 별것 없는 내용, 유능함을 인정받아 혼자 들뜬 얼치기의 연설이 이어진다. 예레미야는 차근히 기다린다.

“흐하, 매로 다스리는 것도, 아주……”

그렇게 매끄럽지 않은 방안이 나왔을 때, 예레미야는 표정 변화 없이 그저 듣는 자였다. 영주, 로웰, 미처 목을 비틀지 않은 것, 떠드는 자의 말소리가 이어진다. 때리지 말라고 우스갯소리처럼 조잘대던 연원은 이제 알 만한데, 알 만해서……

아이 참! 제가 이상하게 태어난 걸 어떻게 하겠어요~!

예레미야가 다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한다. 몇 번의 대화를. 시빌라 에피그라프는 애초 좀처럼 지상에 발 디디기 어려운 모양으로 태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정말 그것뿐이라고 머릿속에 주입한 자는 누구인가?

“이게 말입니다. 클리브라이스는 풍요로 촘촘하니 아쉬운 적은 없었습니다만은, 경작지에서 일하는 농부도 조금 더 좋은 낫을 원하고 비료를 원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건 또 잘 알아보고 사용하지요. 제가 예전에 하나 거두어들인 것이 있는데 제 말을 참 잘 들어서 가끔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뭐, 아시다시피, 사람이 하는 일과 도구가 해야 하는 일이 다른 법인데 둘을 헷갈리지 않게 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밤중, 술이 들어간 작자가 실없는 소리를 어지간히 해댔다. 예레미야는 빠짐없이 듣는다. 매일 문턱을 드나들며 눈 맞대던 인간들이 퍼붓던 찬사, 흘러들어오는 돈, 정보, 값어치, 감히 인간으로 스스로 착각하지 않을 도구의 쓸모. 쓸모, 쓸모 있는 것이 되게끔 완전히 무력하게 주저앉을 때까지 매질한 이력.

예레미야는 몇 년 전 시빌라가 떠나보냈다는 부모의 관도 파내고 싶었다가 생각을 정리한다. 모두 힘 있는 자의 발상이다. 한도 없이 힘없거든 억압인 줄도, 고통인 줄도 낱낱이 알지 못한 채 떠밀려 지하로 관 들어가기까지 아무것도 모르다가 어느 날 덜컥 죽는다. 에피그라프 내외의 삶이 흔하게 널린 사연과 다를 것이 있으려고. 요철로 불거진 건, 그저……

예레미야는 비위 좋은 습성으로 오래도록 환대를 누렸다. 예레미야가 그날 저녁 환대 장소에서 참은 건 아직, 시빌라가 프리트헬름에게서 받았다는 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레미야는 새벽이 저물 쯤 되어 저택으 마구간에 들렀다. 예전, 만대에 번성할 손이 끈을 내어주었던 말이 저 한편에 있었고, 예레미야는 여전히 그것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아직 이름도 못 지어줘가지구……

모든 소리를 다 해대는 시빌라 에피그라프, 안대를 들춰 기억을 들쑤시는 시빌라 에피그라프. 시빌라는 그토록 아낀다는 말의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다. 공허가 몸 안에 밴 채 태어난 자는 심지어 공허하지 않을 이유조차 다 도려졌다. 도구에게 공허하지 않을 이유를 구할 수가 있던가? 오직 도구로만 부름 받아 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한 자에게 사랑이 심기거든 그것이 오히려 기적이다.

예레미야는 말에 붙은 구실을 생각한다. 도무지 사랑이 성립할 당위조차 찾을 수 없는 자가, 그래도 서투르게 사랑을 매달아 붙인 사유. 그러나 여전히 이름 없는 말, 앞으로도 이름 없을 말. 명명되지 않는 까닭은 간명하다. 사랑의 진위를 가늠하기 전에 덜컥 사랑부터 삼킨 자가 말, 사랑에서 발원한 여분에 할애할 나머지 몫이 없는 탓이다. 공허를 달고 태어난 것과 별개로, 철저히 공허하도록 주조되어 영영 이해도 못할 자. 그러고도 사랑하는 자.

예레미야는 그래서, 저택을 나올 때 이미 시빌라가 기거하며 심문관으로 이름 뽐냈던 이곳의 텅 빈 광경을 구상한 후였다. 예레미야는 돌아서서 떠나기 전에 천진하게 웃었다.

“이름 없는 말이 한 필 있다지. 시빌라 에피그라프의 몫으로.”

“예?”

“말 말인데. 슈네펠트의 황성으로 보내는 게 좋겠군. 주인이 그곳에 있으니.”

그 자는 순간 섬뜩하니 얼어붙은 표정을 지었다. 뒤늦은 본론인 양 실토하자 시빌라의 영주가 허둥댄다. 카일루스 성을 단 성혈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클리브라이스의 제후의 충실한 친우인 것, 아리엘 노르니르 크란츠벨룸의 광신자인 것 모르는 자 없었으므로 이것은 이미 예고로 충분했다. 예레미야는 그 자의 행동거지를 보다가 곁에서 대기하던 호위를 불러 먼저 무릎 꿇리게 했다.

“시킨 것 제대로 못 하겠구나, 보아하니.”

예레미야는 그 자의 낯이 파리하게 질리는 것 보며, 포박만 명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후로는, 이제 유벤투스에게 용인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클리브라이스 전역에 도사린 화살이 비켜 지나가는 곳 없어야 하니까.

그래서 제후의 저택을 나섰을 때, 예레미야는 한 가지 파탄을 허락받은 후였다.

***

그 자가 죽었을 때 네가 슬플 이유도 없겠구나, 그러면.

대뜸 묻자 시빌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작 그것뿐이었다. 예레미야가 줄줄 떠든다.

네 경우에는 그것에 이름 붙여지는 게 문제 아닌가? 너를 아끼는 자들은 이름 없다는 사실의 뜻을 인지하지 못하고도 기어이 호명해서 붙들어 잡아두려고 할 테니까. 그러나, 말을 죽게 할 수는 없으니.

예레미야는 시빌라가 자신의 말, 에게 설사 이름이 붙더라도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안다. 그것은 친애하는 자들에게 묶어 놓은 것이지 밖으로 새게 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엇으로 불리든 그뿐인, 말. 그러나 사랑을 도출할 수 없는 공허가 애써서 끌어다 가져둔 당위를 어찌 흔들리게 하랴. 예레미야는 시빌라의 약한 지반을 흔들고 싶지 않다. 시빌라가 애써서 말, 을 매개로 붙여둔 애정은 예레미야 자신 또한 받는 것이라 소멸하게 두지 않으려는 계산이기도 했으나 손익을 따지거든, 역시.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시빌라 에피그라프를 아끼는 몫일 뿐이다.

“심문하겠다. 모두 나가라.”

클리브라이스 제후의 저택을 빠져나온 후, 로웰 저택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예레미야는 먼저 방에서 자신 이외의 인원을 내보내는 것부터 명했다. 본디 카일루스 부대, 로 이름 붙여진 집단에 소속된 자들은 상관의 명을 거역하는 바 없었고, 또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까닭에 말이 어수선하게 길어질 까닭은 없었다.

다만, 예레미야는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쯤 부하들이 떠올렸을 법한 시선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두려움. 예레미야는 대개 휘하로 거느린 자들에게 관대했으나, 폭력에 거리낌 없음은 여전히 섬뜩한 자질이었고, 그 자신이 구태여 과격한 꼴 보이지 않으려 부하들에게 사소한 심문 따위를 도맡긴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 굳이 행하지 않을 상대를 골라 몸소 심문하겠다 하니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짐작하지 못할 자는 이곳에 없었다. 그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구태여 직접 행사하겠다는 폭력.

“매질이 쓸만한가? 쓸만한지 네가 증언하라.”

예레미야는 응접실 탁상에 얹어져 있던 장식품을 로웰, 그래, 이름 알 것 없고 로웰, 두 글자로 잊어버릴 작자에게 던졌다. 두꺼운 천이 깔려 있는 공간에서는 다행히 둔탁한 것 한 차례 바닥에 뒹굴고도 지나치게 껄끄러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 이건 편리하군. 예레미야는 비명 소리를 번거롭게 듣다가 발 아래 흠뻑 사치스러운 천을 신발로 짓이겼다.

누구를 양분으로 삼아 이토록 견고하게 호화스러웠는지는 짐작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예레미야가 충동대로 발로 걷어차고 머리를 밟아 누를 쯤 되어 그 자 스스로 할 수 있는 말이 적었다. 매질이 쓸만한가? 그럴 리 없다. 지금 아픈 소리를 흘리며 애걸하는 자가 증명하듯이.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질문은 처음부터 질문이었던 적 없다. 답을 돌려받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예레미야는 부츠에 밴 붉은 자국을 아쉬워하지는 않기로 한다. 사관학교 시절에는 몇 번인가 흰 구두에 쓸모없이 핏자국이 튀어서 검은 것으로만 신고 다녔는데, 지금은 도리어 환하게 배치되는 이 색이 낫다. 망가트려 부수는 모든 것을 이토록 선연하게 실감할 수 있으니. 예레미야, 가엾게 무릎 꿇린 채로 힘없이 매질 당하는 남성에게 동정심 느끼지 않는 무도한 인간이 생각한다.

취약한 것에 분개함을 빌미로 삼아 또 다른 파탄을 저지르는 건 정당한가? 모순적이다. 그러나 카펫에 뺨 댄 채 비척거리는 머리를 잡아서 테이블에 내리찍을 때, 찧어댄 이마가 피투성이로 잔학스러운 모양 되었을 때도 예레미야는 굳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과정이 이미 다 마법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었듯이.

둔기 노릇하기에 넉넉하도록 거대한 스태프는 정작 피 한 방울 묻지 않았고 직접 뼈부딪힌 주먹 따위가 쓰렸다. 이건, 치료사한테 가면 되고. 아, 우는 소리 지겹다. 예레미야는 증언하지 못하는 남자를 보다가 생전에 눈을 태우고 혀를 태우지는 않기로 한다. 그토록 집요하게 화를 내자니 금세 시빌라의 공허가 옮겨붙은 탓이다. 대가를 치르게 하거든 마땅히 누릴 자가 썩 기뻐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예레미야는 새삼 다시 시간의 귀중함을 아는 자였다.

예레미야는 들어올 때와 달리 직접 문을 열고 나왔다. 문 너머로, 또한 단장인 자의 옷가지에 피가 튀어 있었으므로 대놓고 두려운 모양새였으나 예레미야는 침묵과 인내를 모르는 자들로는 부대를 구성하지 않았다. 이것은 카일루스의 오래된 규율이기도 했다. 주인이 개의 양식을 취하는데, 그 아래 놓인 자들이 외따로 공손하지 못하거든 번거로우니까.

그래서, 예레미야는 잠자코 복도로 돌아 나왔을 뿐이었다. 누구도 먼저 질문하지 않았으며 단지 예레미야의 지시만을 기다렸다.

“이 저택은 태우겠다. 저 자는 쓰러져 타 죽을 테니 구태여 목 자르지는 않으마. 이곳 그을린 자국 자체가 효시의 증거다.”

하인을 다 내보낸 저택, 고요하고 한참 평온하게 번영한 곳에 이제 부귀를 누리던 자만 누워 있는 순간 말은 이미 우습게도, 클리브라이스 이름을 가장 싫어할 곳으로 내보내진 후였다. 황성으로는 잘 도착해야 하리라. 예레미야는 그것만 유의할 뿐, 정작 성혈을 발동시켜 불을 일으킬 때도 쭉 묵묵했다. 오늘 일은 시빌라 에피그라프를 발단으로 하나, 그래. 네 몫으로는 놓이지 않는다.

이 모질게 난폭한 흔적은 첫째, 불로 그을려 다 사라질 것이고, 둘째, 풍요의 증거가 순조롭게 묵인할 것이니. 언뜻 붉은 창으로 보이는, 집요하게 붉고 길쭉한 불길이 허공에 떠오른다. 예레미야는 저택만 정확히 불에 휩싸이도록 요령 있게 굴었다. 저택이 붙어 서 있는 대지부터 일대에 지독하게 커다란 불길이 솟구친다. 그러고도 연기는 밀려오지 않으니 불 일으킨 자는 상상 속 그림처럼 불을 지필 뿐이다.

저 멀리, 급히 보내지고도 차마 발 떨어지지 않아서 남아 있던 몇 명이 황망해서 엎어지고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장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나 이곳은 전장이 아니었다. 저들은 죄는 없다. 그저 저들이 받고 누린 것 한 가지 기둥에 기댄 바가 컸을 뿐. 예레미야는 오늘 저들마저 다 죽어 마땅해서 통째로 묻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번성에 함께하려거든 나란히 책임져 가질 몫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참관인을 둔 채 저택이 불탄다. 오직 저택만이 불로 화한다. 타들어 가는 냄새가 줄곧 이어졌는데, 그사이 저 안쪽에 쓰러진 인간 하나의 몸이 어떻게 검게 그을렸을지 알 방도는 없었다. 고약한 냄새도, 그을음도, 그저 멀리서 볼 뿐. 불시에 불이 꺼진다. 성물이 일으킨 불이란, 애초 일어나고 연소되는 과정 두 가지 모두가 생략되어 더욱이 불길하고 스산했다.

조금 전까지 화마로 이글거리던 세상이 돌연 가라앉았을 때, 그저 매캐한 연기만이 자욱했으나 이마저 성혈의 불길이 마저 치우는 과정으로 밀어내고, 다음 순간에는 불길 차올라 그대로 가득 담던 하늘이 그럭저럭 청명하다. 타들어 간 흔적과는 딴판으로 기이한 형상. 예레미야가 비로소 선언한다. 예레미야는 벌써 로웰, 이라고 짓씹던 이름은 목 안으로 삼켰다.

“이 이름은 덮어 없애겠다. 나머지 다른 것으로 채워지리라.”

풍요의 화살이 다 살피지 못하는 곳은 없다. 이 그을음은 단지 내 것이다. 느긋하게 이어지던 평온은 단번에 도륙되었다.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본래 태어난 방식대로, 고작 일방적인 폭거에 불과한 짓에 후회는 없었다.

다만 생각하기를, 그토록 숱하게 폭력을 감내한 이에게 이 이야기를 굳이 듣게 하지는 않아도 될 거라고. 시빌라는 지워진 로웰, 을 증오하는 법마저 잘 알지 못했고 계속 모를 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이 일은 제후께서 살펴 장차 지워질 뿐이었다.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공허에게서 뿌리를 완전히 없앤 일을 기껍게 생각했다. 최초에 공허로 태어난 자에게 뿌리는 도리어 거추장스럽게 기생했을 뿐이라, 이제야, 이 다음에 간신히 그 사랑이 보답받을 수 있을 것이므로.

이름 없는 말이 떠난 날, 예레미야는 자신의 속이나 과정을 모두 지운 채 이후에 한 가지 안부만을 묻기로 했다.

말은 잘 도착했는지,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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