𝐓𝐡𝐞 𝐉𝐮𝐝𝐠𝐦𝐞𝐧𝐭 : 가시왕좌

[예레미야] Remánĕ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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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차 by 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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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마네오(remánĕo)

영속하다, 사라지지 않다.

당신에게 애칭을 지어 준다면 레마가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턱없이 다정하고 헌신적인 수호자가 말한다.

그냥 당신의 이름을 줄인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울림이 레마였어요. 불타지 않을 이름 같아서.

예레미야가 웃었을 때,

내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다며 후회할 테고.

레인일라흐트는 이미 후회하리라는 사실을 아는 자였다. 레마네오. 영속하다, 사라지지 않는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부름.

“이제 너는 두려움을 알라.”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턱없이 이질적이고, 듣기 싫게 들리는 까닭에, 예레미야는 똑같은 형상으로 서 있는 반대편을 보면서 목소리부터 귀 기울였다. 잘 듣는 귀로는 온갖 소리 다 듣고, 외우고, 살피기 마련이라 낯을 바라본 건 다음 일이었다. 예레미야는 손 내미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번에는 엑스, 예레미야가 신으로 삼아 기도 올리기로 언약한 자에게 전날 돌려주었던 대답이 떠오른다.

그러나, 엑스. 마키나. 이제 네 말대로 하마. 내게 진정으로 약함이 있기를 바란다. 죽음은 빠짐없이 평등한 것이어야 하니. 내 약함을 공포로 삼아 피하겠다.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자신의 신에게 맹세하고도 아직 이르지 못한 자였으되, 이따금 도무지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약속이 있다. 삶에 관한 것. 그러나 어쩌랴.

내가 아끼는 것을 망쳐라.

아리엘, 예레미야의 주인이자 기적이 말하지 않았나. 자신이 아끼는 것 망치라고. 그 속에 자기 자신마저 포함되어 있음을 예레미야는 잘 안다. 아리엘이 그 모두를 아끼더라도, 아끼므로 어쩔 수 없이 포함된 채.

예레미야 카일루스, 신께서 이르시고 주인께서 이르신 바 낱낱이 거역할 수 없나니.

예레미야는 생이 들끓으려는 구역질을 참는다.

***

스스로 맺고 싶으신가요?

예레미야가 번제에 자신을 올리겠다는 말을 하자 엑스가 되물었다. 예레미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고상한 감각이고, 그보다는. 예레미야는 그렇게만 대꾸하고 한참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것은 예레미야 자신이 오래 곱씹고 궁리해서 도달한 차이였으되 낱낱이 설명하자니 멋쩍은 데가 있었다. 저주받은 자, 기적이며 계시 따위 없이 오직 저주로 평생을 채워 산 자는 마땅히 자기 자신의 삶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삶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예레미야 자신을 향한 살의보다는 예레미야 본인의 삶 대부분이 더 부조리하게 무겁고 까다로웠던 탓이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스스로 벌주기 위해 살아 있었고, 그런 것치고는 생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누리는 자였다.

이 모든 설명은 굳이 억지는 아니었다. 삶을 기꺼이 누리는 것과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것, 두 가지는 모두 호화로운 구석이 있었다. 예레미야 카일루스, 한사코 번영 아래에서 벗어난 적 없는 자는 잡아 죽일 자신과, 그 살의를 결코 타인보다 앞에 둘 수 없는 성긴 성미를 배부르게 쥔 채 끝없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으므로 한동안 계속. 그 얄팍한 속을 어떻게 헤집어 꺼낼까? 아끼며 사랑하는 이에게 나는 나의 죽음을 모든 것보다 더 우선으로 삼아 간구한다고 어떻게 토로할 수 있을까. 내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줄 알면서 그리 가정하고, 간직하고, 소망한다고 어떻게 토로할 수 있단 말인가? 과욕으로 포만한 자 간신히 염치가 있어 말하지 않은 것.

내가 끔찍해서 나를 죽이고자 함이 내 살의의 전부야. 이것도 욕망이지 않나. 나는 아직 내 숨을 붙들어 쥐고 있으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엑스, 마키나의 군집으로 존재하되 분리해서 부를 예레미야의 신 앞에서 거짓을 고하지 않을지니.

그렇다면 예레미야 님은 엑스를 부정하시는 거군요.

어김없이 살았으면 하고 돌아오는 말. 예레미야는, 할 수 있는 말이 적다. 자기 자신을 향해 살의를 품은 자의 속이란 복잡하게 꼬였으되 그것 광인의 몫인 줄 단단히 아는 머리로는 솔직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으니 그저 지금 당장의 안위를 확인시킬 뿐.

나는 지금 살아 있으니, 너를 부정하지 않는단다. 앞으로도, 오래.

그러나,

그럼 그것도 마키나의 욕망으로 삼을게요.

이때조차 예레미야, 비로소 기도하는 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받들 수 있는 탁선인지 알지 못했다. 예레미야 카일루스, 그는 오직 자신을 향한 살의를 궁리하며 움직인 자였으므로. 그것을 빼면, 무엇으로 남지? 예레미야의 가정은 텅 비어 있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백이 까마득했다. 살아야 한다, 고 생각하는 것. 자신을 해하지 않겠다고 타인과 똑같은 감각으로 실감하는 것. 그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그 순간 느낀 텅 빈 자국은……

***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삶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

자살이라는 단어에는 타인을 죽일 때와 동일한 의미가 붙는다. 스스로의 죽음을 결정할진대, 왜 타인에게 쓰이는 것과 같은 말이 동원되는가? 별것 없다. 자살은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인 탓이다.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지닌 재능의 본질은 그것이다.

폭력에 주저 없음이 네 첫 번째 재능이다. 너는 사람을 잡아 죽일 자로구나. 네가 진정으로 거룩함을 받은 것이 맞느냐? 네 불길은 너무 거세다. 감히 기적을 입은 자가 백정이 되지 않게 주의해라.

노력하는 건 단 하나, 자신의 목숨을 붙들어 잡고 짓누르지 않는 것뿐. 자기 자신조차 죽일 수 있는 자는 살의에 거리낌 없기 마련이었다. 자신을 향한 것이든, 타인에게 향하는 것이든. 예레미야는 머릿속으로 수없이 자신을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살아 있는 것의 두려움에 무뎠으며 생도 시절 끝난 다음 처음 올라선 전장에서는 도리어 살아 있는 것에게 그 생의 이유를 추궁할 욕망마저 느꼈다.

기왕 죽여도 되는 것, 으로 매겨져 있으니 묻겠다. 왜 살아 있느냐? 왜 당연하게 살아 있느냐? 왜 생이 당연한가? 입으로 묻는 일 번거롭고, 예레미야 자신이 의아하게 여긴 숨은 그저 꺼질 뿐. 예레미야가 자신의 진짜 자질을 들키지 않는 건 손쉬웠다. 삶도 어쨌든 손쉬웠으며 살아 있는 것 모두 살고자 하는 까닭에 이해받지 못할 원리 상상으로조차 추론되지 않았으므로. 단지,

죽어야 할 것, 자신이 살아 있거든 부아가 치밀 뿐이다. 왜 나를 용인하나? 예레미야는 이따금 고개 들이미는 호기심을, 살의를 도대체 참지 못한다. 불신자의 삶, 죽어 마땅한 더럽고 추잡한 것의 삶이 나 스스로 끝내지 않거든 계속 이어진다니. 아직은, 아직은 아니지만.

내 오욕으로 연명한 연원, 나 자신에게 살의 가진 채 지내던 삶 알맞게 끝나려거든.

과연 내가 나를 죽여야 한다. 삶을 끝내는 것, 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일로.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헷갈리지 않는 인물이다.

***

그러나 이제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떨 자였다. 번제를 위해 쌓아 올린 장작에 진정으로 불 붙일 것이라 그 순간 상상하며 손 벌벌 떨며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울 인간. 손을 맞잡은 순간, 예레미야는 수치조차 잊게 될 터였다. 유일하게, 혹은 가장 결정적으로 거머쥐었던 굳건함을 잃었으니 전락한 자, 마침내 자신의 신의 뜻대로 죽음을 피하고자 옹송그릴 자.

그러나, 예레미야 카일루스. 그 광인에게 가장 평범한 두려움이 가당한가? 태어나 숨 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생물의 권리가, 가당한가? 예레미야는 자기 자신에게도 주어지는 순간 역겨워서 머리가 아팠고 구토하고 싶었으나 다행히 더 누추한 꼴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다만 일직선으로 자신의 내부에 꽂혀 있던 살의가 텅, 비어 사라진 건……

도대체 삶을 다시 시작하는 일처럼 느껴져서.

예레미야는 별안간 한참 미욱하고 우스운 채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

언젠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확언할 수 없는데도 이 난잡한 삶 견디며 기어이 두려움에 떨 권리까지 취하고 만 사정이 그만 아득하여서.

저주에게 인간 대우로 허락되는 것이 너무 많아져서……

“이제 내가 두려움을 아는구나.”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내어졌던 바와 똑 닮은 내용으로 말을 맺는다. 그 순간, 예레미야는 진실로 두려움을 아는 자로 나자빠져 있었으므로.

까마득히 취약할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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