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말라비틀어진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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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 투스. ……”
예레미야는 유벤투스의 흰 팔이 천장으로 솟구치는 광경을 보며 이름을 부르다가 우뚝 멈춰 섰다. 굳은 몸은 악몽에서 좀처럼 헤매는 자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예레미야가 생각한다.
말라비틀어진 형상은 왜 다 같은가?
심지어 풍요로 적신 지반 위에서조차.
왜 저토록 앙상히 처참한가.
***
사관학교 시절은 손쉽게 지나갔다. 좋은 시절이 대개 그러하듯.
이후로 예레미야가 본 첫 번째 앙상한 팔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예레미야 카일루스, 기적을 입에 받아 문 거짓 선지자는 짓씹어 죽이고 싶을 만큼 가족이 밉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필요한 절차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미뤄두었던 서로 간의 약속이라고 해야 할까. 예레미야는 신을 부르짖으며 거룩하게 덧대어진 손끝으로 육친의 식사에 독을 탔다. 어차피 지독한 독은 아니었고, 그저 몸이나 굼뜨게 만들 만한 것들. 예레미야는 오래도록 그들을 중독시킬 예정이었다. 죽이려거든 독만으로는 안 되고, 요란하게 피 흘리거나 살 태우며 죽이려 했으니 그저 시시한 장난이나 안배했을 뿐인데.
아버지의 낙마 사고 때부터 그 앙상한 팔은 예견되어 있었던 셈이다. 예레미야는 나이 든 아버지가 대뜸 말에서 떨어져 이송되었다는 소식에 어처구니없어했다. 약 기운 탓에 몸이 둔해져서? 의도한 바 아니었으나 아주 영향 없지는 않았으리라. 아쉬운 짓을 했다. 예레미야는 실려 온 노쇠한 자가 기어이 숨 흩어낼 때 되어 비로소 무용한 짓을 저질렀음을 시인했다. 이렇게 간단히 보내지 않았어야 했는데 재미없었다. 그러나 나머지 남은 자의 처지라고 예레미야의 바람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진정으로 흔한 사연 속에 살았다. 온갖 거짓과 아집 중 연인의 사랑만큼은 진실로 거머쥐었던 여자는 남자가 죽자 울며 앓기 시작했다.
예레미야가 생각한다. 도대체 내 손으로는 다 실없는 짓뿐이구나. 내가 깃들게 한 독이 혀뿌리 꿈틀거리며 울부짖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어머니는 오래도록 침상에서 허우적댔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울다가, 힘 빠진 후에는 수시로 무거운 가위에 눌려 잠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다행이지, 새 주인이 들어서 계시니. 고작 어린 애일지라도. 예레미야는 저택에서 감히 말로는 오르내리지 심사를 허공에서 종종 기민하게 짚어냈다. 이 넓은 저택에 딸린 자들 판단이 다 옳다. 대체할 자 없이 병상에서 우악스러운 소리만 들리는 처지였더라면 예레미야 자신 역시 덩달아 휘청거리는 지반 감내해야 했을 테니. 그러나,
어머니. 예레미야입니다. 프리에르예요. 어머니, 저예요. 어머니.
예레미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부름을 세심한 배려인 양 늘어놓다가 온통 어두운 방에서 희게 솟구치는 팔을 본다. 사위가 다 어둑한데 저 팔, 말라비틀어진 팔 우뚝 솟는 것만큼은 환히 보이니 의아하다. 예레미야는 침상에서 벌벌 떨며 천장을 향해 뻗은 팔을 어쩌지는 않고 말을 이어간다. 그때, 잘리지 않은 불신자의 손은 손깍지를 낀 채 기도하는 모양새로 한참 경건하다.
어머니. 당신 아들은 그간 숱하게 자주 거짓을 일렀습니다. 당신께서 품어 태어나게 하신 형상 아직 알고 계시지요. 어머니의 말씀이 진실입니다. 제가 저주였습니다. 저는 당신 뱃속에서 당신 자식들을 죽여 당신으로 하여금 또 다시 당신이 고통스럽게끔 배태된 저주였습니다. 제게 기적이 있었겠습니까, 어찌? 두 번 묻지 않고 믿으셨던 그 기적 다 거짓입니다. 계시를 듣지 못했습니다. 꾸민 얼굴로 있거든 숨 붙여 두시기에 당신의 신실함 모사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식과 당신과 당신의 남편 몫 모든 불행은 다 저로 인함입니다. 제가 당신의 저주입니다. 당신이 눈 뜨고 모두 당하셨습니다.
병중의 어머니가 자식이 아르는 말을 다 알아들었을 리는 없으되 침상에서 팔이 자꾸만 꿈틀거린다. 소리조차 통각으로 피부에 번질 때 예레미야가 연거푸 이른다.
불신자가 신실한 내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 죽으십시오. 이제 제가 제를 집행하여 당신의 끝을 떳떳하게 외부로 내어드리겠습니다. 죽으십시오. 어머니, 죽어요. 프리에르의 뜻대로 살펴주세요. 어머니, 죽으세요. 죽으십시오. 죽으십시오. 죽으십시오.
예레미야는 나머지 말은 더 기억해두지 않는다. 이후로는 줄곧 죽으라 간청했으므로. 예레미야는 손으로 숩통 짓누르면 간단히 죽을 몸에다 대고 끝없이 말소리만을 퍼부었다. 그렇다면, 그때 하필 솟구친 팔이 밑으로 꺼트려진 것은 예레미야의 음성에 언령 깃든 까닭인가? 예레미야는 침상에서 더는 팔 솟구치지 않은 때 되어서도 송사를 읊듯 오래 오래 기도, 로 이름 지은 것 속삭였다. 하지만 이것도 예레미야가 어머니를 죽인 게 되지는 못한다. 예레미야는 단지 그 순간을 흘려보냈을 뿐, 진정 원했던 것은 방임조차 아니고 직접 죽이는 것이었으며 토로하는 일이었을 텐데 방을 밝게 비출 무렵 병상의 어머니 얼굴은 그만 잠든 듯이 죽어 있었던 까닭이다. 오직 예레미야만이 무용히 저주를 이른 자였다, 그때. 저주로도 구실 제대로 하지 못하는 머저리.
하지만 기껍게도, 또.
최초에 저주로 명명되었던 기회와 같이, 다음 순간이 찾아왔다. 카일루스, 같은 이름으로 묶여 온통 죽이고자 애틋했던 가족 사이 남은 한 명의 변사 소식을 들었다. 언제 누가 죽여도 이상하지 않게 패악 부리던 작자였는데 뜻밖으로 순탄히 발 헛디뎌 죽었으니 애석할 자가 많을 터였다. 그 자, 벤야민의 시신을 치우러 갔다가 예레미야는 덮인 천 위로 불룩 선 팔을 본다. 팔이 미처 아래로 얌전히 내려지지 못하고 기댈 벽이 있어, 별안간 따로 떼어놓고 꺾어 접붙인 양 기이하게 솟구친 팔이 어두운 한가운데 불뚝 서 있었다. 예레미야는 형의 시신을 가리다가 문득 어머니를 생각한다. 저것,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죽음들. 어머니, 제가 고한 대로 되었습니다. 카일루스의 자식 셋이 요절했으니 어머니가 이르시던 대로 가히 저주입니다. 어머니께서 미처 보지 못하셨으니 안타깝습니다. 저만이 홀로 살아남아 저주를 완성했습니다. 애도조차 않고 시체 치우던 동생은 문득 눈앞이 어지러웠다. 아,
미처 시신 수습하지 못한 틈에 먼 발치서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붉은 눈.
저기 어린 애가 있었으므로.
***
카일루스家의 장자, 나자빠진 명예와 신실한 토대의 첫 번째 소생은 아버지를 똑 닮은 천성으로 태어났다. 조부와 아버지에 이어 장자까지 3대를 다 본 사람들끼리는 장자의 어린 시절부터 벌써 말을 얹어대곤 했다. 빼닮았으니 영락한 꼴 청산하지 못하렷다.
카일루스의 장자가 호사가들 떠드는 소리대로 장성한 것이 정말 피 탓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장자, 벤야민 카일루스는 어려서부터 승마를 꼬박 배우고서도 말에 좀처럼 제대로 오르지 못했고, 대신 조마조마하게 보조하던 하인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난폭 따위나 저지르기 일쑤였다. 말은 몸체가 커서 발길질하지 못하는 채로. 벤야민은 더 자라서는 한참 어린 동생에게 손찌검 따위를 해댔고 동생이 비로소 두각을 드러낼 무렵에는 사관학교에 자퇴 신청서를 냈다. 무위는 쌓이지 않고 머리는 아둔하며 식견이 좁아 성정이 확장되질 않으니 누구도 벤야민의 졸업시험 낙제를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셋째, 기적과 계시를 누린 아이에게는 한껏 엄정한 카일루스 내외도 얼치기 장자에게는 너그러웠다. 단 한 가지, 힘을 쥐여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엄격히 했을 뿐. 벤야민은 아주 분개하지는 않았으나 납작 몸 숙이자니 천성이 옹졸하고, 동생에게 부아도 치밀어서, 넉넉하게 쥐여진 시간과 돈으로 슬금슬금 교만을 부려댔다. 예를 들어 벤야민 카일루스, 29세는 혼인을 치르지 않고도 벌써 아이가 하나 있었다. 검은 머리, 붉은 눈, 하필 동생을 고스란히 닮은 아이가.
어느 날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그 애를 알게 되었다. 내팽개쳐진 처지가 가여웠으므로 예레미야는 그 애의 존재를 안 시점부터 가끔 아이를 보러 갔다. 그러자 아이는 나날이 안전해졌다.
***
그러나 연약한 것이 불티 근처에 있거든, 영원히 안온할 수 없겠구나. 저주 근처에 있으니 안온할 수 없다.
예레미야는 그 어린 애가 솟구친 팔을 보았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다만 저주로 탄로난 순간에 예레미야는 그 어린 애에게서 자신까지 포함한 형상을 숨기고 싶었다, 저주의 형상을. 그것이 잘 안 되었다. 그러니까 솟구친 팔을 들켰다.
아니, 사실 아이는 팔을 보지 못했다. 팔을 똑똑히 되새긴 건 어두운 와중에 천으로 덮인 시신 다 못 보았을 아이가 아니라 예레미야, 저주 자신이었다.
***
그런데 다시,
……신이 네게 기적을 선사하여, 네가 살아났다면. 나는 신을 지독하게 증오하면서도, 그 신이 네게나마 손을 뻗었으니 오롯이 증오할 수만은 없으리라……
예레미야는 지난날 불신자의 기만에 끌어안으며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 선언하던 목소리를 복기한다. 어르던 말소리. 송곳처럼 두려운 아픔을 목 안에 삼켜 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뼈저리게 아플 줄 알고도 내어주던 목소리. 그의 손을 왜 잡아주지 않을 것인가. 왜 그를 꿈에서 깨워주지 않을 것인가? 예레미야는 불면 위로 숨소리 배게끔 천천히 호흡 새기던 순간과 같이, 유벤투스의 경직된 어깨와 쇄골, 팔을 차근히 손바닥의 온기로 눌렀다. 악몽에 사로잡혀 있거든 너무 빠르게 깨어나게 해서도 안 된다. 꿈이 미처 다 씻기지 못한 채 눈 뜬 자는 꿈 밖에서도 한참 헤매기 마련이니. 유벤투스, 유벤투스, 조용하고 끈질기게 이름 부르며 체온으로 잠을 덜어내고, 악몽을 흩어낸다. 그사이에도 유벤투스의 잠든 입술 사이로 물린 발음은 한결같다.
“미안. 미안해, 주디스. ……”
예레미야는 자신이 단호하게 배제하려던 이름을 기억한다. 주디스 클리브라이스. 유벤투스가 대신 차지한 자리의 이름, 차라리 장례 치르는 게 나았을 이름을. 그 이름이 잠식한 꿈, 몸으로는, 도대체 곁을 자처한 자신이 파고들 틈이 없다. 그러나 너는 끌어안아주었는데. 신이 있거든 이 모습 왜 그냥 두었을까. 네게 이토록 견고한 고통은 없었어야지. 너는 부채감으로 뭉친 채 헌신하려던 형, 다정한 가족. 사리 문 집념, 부정하려는 마음조차 내려놓고 친구를 용인하던 자. 그러나 돌보는 신은 없고 다만 몽중에 허덕이는 자만 있으니 예레미야는, 저 잡히지 않는 손, 솟구치는 팔, 앓는 목소리, 주디스, 이 모든 흐름에서 다시 처박히는 기분을 느낀다. 아, 나도 정상이 아니군. 침착하게 유벤투스의 상반신을 앉혀 잠을 덜어내려고, 비척거리며 뒤미처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를 토닥이는 손길이 우습다. 예레미야는 이어진 저주와 저주 같은 자신과, 저주가 기만한 자를 새삼 열거한다. 풍요를 적시는 손끝으로는 마땅히 부풀었어야 할 행복이 메말라 자, 허공을 자꾸만 붙들어 잡으며 병상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그 자 살아 있기는 한가? 산 사람을 이토록 오래 붙들어 쥐고 시체같은 모양새로 만드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면.
예레미야, 저주는 생각을 멈췄다. 비로소 유벤투스가 눈을 떴기 때문이다. 보석처럼 매끄럽게 온화하던 녹색 눈은 아직 잠결에 취해 공허했고, 밀밭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은 그새 시트에 짓눌려 흐트러졌다. 예레미야는 잠에 또 빠져들 것 같은 몸을 얼른 살살 두드리며 계속 이름을 불렀다. 유벤투스, 유벤투스. 그제야 한참 뜨인 채로도 아무것도 보지 않던 눈이 시선으로 맞닿는다. 녹색 눈으로 붉은색 눈이 섞인다. 그러나 여전히 마주 보지 못하는 자끼리는, 그저 팔만이.
가로지르는 저주처럼 경계로, 예레미야의 어깨에 얹혀 있었고.
예레미야는 풍요의 증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한참 꺼진, 파리한 안색을 보며 차근차근 말을 곱씹었다.
“유벤투스, 괜찮아?”
괜찮을 리 없다. 이 방 안에 괜찮은 자는 누구도 없었으나, 예레미야는 단지 자신이 아는 방법대로 유벤투스를 깨우며 달랠 뿐이었다. 네 꿈이 어떠했는지 묻고 따지리라. 상처를 후벼 파고 환부를 뒤적거려야지. 네게 또 모진 말을 해야겠다. 주디스, 그 이름 틀어막히게끔 수선을 부려야겠다. 너는 최근에 관 이야기마저 꺼냈으니 어쩌면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면, 꺼지지 않는 불빛, 가장 번성한 저택에서 왜 너만이 이토록 앙상한 몰골인가. 호화로운 천으로 몸 감싸고도 네 악몽이 너를 좀먹은 것 이제야 보인다. 네가,
이렇게 고통스러워서는 안 되는데.
예레미야는 분이 치솟으려는 것 머릿속으로만 넘기고 한사코 다정한 손길로 유벤투스의 짓눌린 몸을 토닥이다가 자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너를 달랠 수 없는 자다, 사실은. 나는 네가 도려내어 건네준 일부를 아직도 실토하지 않고 품고 있는 자, 기만하는 자. 들춰지거든 네게 도리어 악몽으로 씌워질 자. 그 자가 네 곁을 지키며 악몽을 쫓거든,
지금 이 순간의 악몽조차 과연 흩어낸 게 맞나?
“유벤투스, 일어나.”
예레미야는 아직 멍한 시선에, 유벤투스의 볼을 잡아 감싸고 한참을 더 속삭였다.
“괜찮아. 꿈 밖에서는 괜찮아……”
말라비틀어진 팔,
그것을 네게 겹쳐보며 누가 또 네게 덧입힐 수 있는지,
그 자신인 줄 알면서도.
“괜찮아. 내가 옆에 있었어, 유벤투스.”
예레미야는 비로소 평온히 가라앉은 숨을 들었다. 녹색 눈이 마침내 곁에 있는 자를 본다. 예레미야는 유벤투스의 곁을 지킨, 그의 친구다.
***
그러나 네가 진실 모르는 한 나는 영원히 언제든 너를 뒤덮을 저주로 도사리고 있겠구나, 진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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