𝐓𝐡𝐞 𝐉𝐮𝐝𝐠𝐦𝐞𝐧𝐭 : 가시왕좌

유대를 봉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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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차 by 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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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학년 1학기

망령이 주최한 무도회에는 치부를 들춰서 전시하는 칵테일이 나돌았다. 저마다 헤집어진 양상 대개 나란하게 적나라했을 것이되 신실한 자, 기적의 증거함으로써 이름난 예레미야 카일루스에게는 그 우스운 이름이 특히 난제가 되었다. 자기 안의 환부가 긁힌 이들끼리는 타인에게 명명된 이름을 우스갯소리로 취급하지 못하고, 그 스스로도 친밀감으로 경계를 누그러뜨린 터라 실상 제대로 감출 틈 없이 순순히 헤집어진 안쪽 다 시인하기 마련이었으니…… 예레미야는 자신이 공들여 모사해낸 거짓이 폭로된 순간, 이미 들춰진 것을 전복시켜 다시 거짓으로 메울 구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피며 먼저 묻지 않거든 함구할 수는 있었으나, 예를 들어.

너는 거짓을 용서할 수 있나?

오벨에게, 칵테일에 명명된 이름이 어떤 방식으로 오벨의 속을 긁었는지 질문했을 때 예레미야는 이미 치부를 시인할 준비가 된 자였다. 삶을 걸어서, 평판이며 지반이며 갖추려고 애썼던 사실 한순간에 내던지듯, 그러니까 다음 순간 어떤 것도 거짓이었던 적 없다고 도리어 완고하게 부정하는 게 차라리 자연스러울 만큼…… 예레미야가 뜻밖으로 속을 선뜻 꺼내거든 오벨의 시종 조심스러웠던 입술 사이로 단단히 말소리가 물린다. 엄정하지도, 지독한 위증을 질책하지도 않는, 그저 진중한 음성.

제 대답 이전에 묻고 싶습니다. 용서받고 싶으십니까?

예레미야는 고민 없이 말한다. 그것은 쏟아냈다기에는 열없었고, 비장하자니 뻔뻔했다.

용서받고 싶어.

진심이었고, 소원이었지만. 예레미야는 자신이 돌려받을 대답이 무엇인지 입으로 청했을 때 벌써 알고 있었다. 거짓 신성으로 이어 온 삶에 별안간 진정으로 거룩한 예언이 깃들어 안 것 아니고, 그저 그간의 애정과 친밀감이 속에 새겨 놓은 관성과 믿음으로 미리 오만하게 답을 알았다.

선배가 제게 용서받으실 것은 없습니다. 이게 제 대답입니다. 하나 소원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오벨 도노반에게 약속했던 확증에, 더는 끼어들 거짓을 두지 않기로 한다.

내 거짓은 뿌리부터 시작하여 거짓과 진실을 구별로 분리하기에는 한참 늦었으나, 네게 보증하는 마음은 네가 믿어주리라. 진실로. 그러므로 영원히 네 몫이다. 고마워. 오벨.

마땅히 인사하는 말 뒤편으로는 신뢰가 맞물렸다.

친우의 이름으로 보여주신 매 순간이 진정 진실이라 믿습니다. 선명히 밝히지 못하는 칠흑이시더라도요. 그러니, 예레미야 선배, 제 신뢰는 영원히 당신의 몫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그쯤, 생각했었다.

이미 영원은 고했으니, 불변으로 고를게요.

영원을 먼저 앞세운 후 불변으로 외연을 건네받은 자로서, 지난날의 약속을 먼저 실현할 방안을.

***

5학년 1학기를 마친 방학, 한창 겨울인 시기.

예레미야는 오벨 편으로 보낸 마차가 언제쯤 카일루스 저택에 도착할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사이 짤막한 편지를 쓰고자 펜을 들기도 했다. 펜끝을 적시자니 곧 얼굴 맞댈 상대에게 꼭 뒤늦은 초대장처럼 아주 짧은 문장 나열이 될 것이었으나, 이것조차 반갑게 여겨주리라. 그리 생각하면서. 아직 자격 없는 처지로 이르게 카일루스 저택의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예레미야가 실없는 줄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름 끄트머리에 크란츠벨룸, 이 붙을 때 쓰는 경건한 문장 아닌, 시시하고 소박한 형식으로.

예전에 생각하기를,

삶은 결국 자신이 구할 수밖에 없지만, 보증으로는 이름을 올리고 싶군. 무가치하지 않을 거야, 반드시.

오벨 바네사 도노반은 꼿꼿하다. 심지어 부당할 만큼 엄정하게 보이는 외연 탓은 아니고, 그 다정한 성미에 반하는 설명도 아니다. 단지 구부러지기 어렵다는 뜻이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하고 받은 애정에 거역하거든 어김없이 배반으로만, 자신에게 한없이 가혹한 처사로 이름 매기니 속이 곪고 닳은 것 익히 안다. 아는데, 그마저 어리광으로 표출하려거든 방안 궁리하는 머릿속이 법이 서툰 까닭에 한참 헤매고도 기댈 곳 찾지 못하는 성정. 그러니 예레미야는, 확신하는 오만 외에는 더 장점 없는 자신의 성미를 내미는 것이었다. 오벨의 그 모든 배회 끝에 무가치할 뿐인 결말은 없으리라고.

제가 냉큼 그러면 예레미야 프리에르 카일루스의 이름을 달라 부탁하면 어쩌시려고요.

마침 돌아온 대답이 오벨치고 퍽 장난스러웠으므로, 그새 똑같이 장난기가 동한 예레미야가 묻는다.

왜, 어디에다 쓰게?

오벨이 대답한다.

성함 지니고 있으면 언젠가는 쓰이지 않겠습니까? 가령 돌려줄 때에라도요.

돌려줄 때, 라. 예레미야는 이름이 주고받는 것이 될 수 있는가, 를 생각했으나,

다시 거짓을 용서받던 때로 돌아가면.

……보증이 아닌 유대로 약속하여 선배의 이름을 맡아두겠습니다. 돌려주시기 전까지 오벨 바네사 도노반의 이름 또한 선배에게 드리겠습니다. 이걸로 나눠가진 것이 벌써 두 개군요. 어느 쪽도 쉽게 잊긴 힘들겠어요.

예레미야는 이제 그저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붙들어 쥐어서, 종일 단단히 움켜잡는 형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관계가 있음을. 예레미야 프리에르 카일루스, 자신의 이름은 친구이자 확증으로 내어졌고 똑같이 오벨 바네사 도노반, 자신의 친구로부터 확증을 받는다. 이때 관계에 붙일 이름은 유대였다. 그렇다면 익숙하게 유대를 약속받은 자가 마땅히 할 일이란 무엇인가?

[오벨 바네사 도노반에게.]

예레미야는 달필로 펜대를 놀린 후 잠깐 창밖을 내다봤다. 슈네펠트의 겨울을 알게 된 처지이기는 하나, 지금 베르하임의 계절이 새삼 시시해지는 건 아니다. 이 겨울이야말로 예레미야가 평생 보고 자란 것이었다. 이렇게 눈이 퍼붓는 날이 아주 흔한 건 아니었지만. 신입생 시절, 엑스는 카일루스 저택에 머무른 기간을 갖고도 눈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었는데 하필 손님이 오는 날에 눈이 퍼부었다. 눈의 방문 시기로는 대개 얄궂을 텐데도, 예레미야는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선물인 양 굴 수 있겠다, 싶어서.

본가의 정원은 아버지가 어머니께 드린 장소여서요. 주인 없는 겨울에는 굳이 단장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만…… 네, 저는, 폭설 내린 겨울의 정원을 창 너머로 바라보는 걸 무척 좋아해서……. 카일루스는 어땠습니까?

한없이 보드라운 색으로 짜였으면서도 서늘한 겨울을 듬뿍 머금은 외연. 오벨은, 그 점을 아쉬워하기도 했지만…… 사관학교의 조경에 감탄하며 산책하던 어느 날, 폭설을 집어 이르던 말소리에는 어김없이 대답하고 떠올리고 말았다. 네 인상에서 어김없이 겨울이 호명될지라도 가파르고 메마른 것 아닌 한없이 쌓이는 심상이지 않겠느냐고. 그것도 또 똑같이 차가울 뿐이라고 서운하거든 애석하겠으나, 폭설 내리는 모양만큼은 본인이 썩 기꺼워하는 장면인 줄 그때 알았으므로.

네가 오거든 보도록 카일루스의 정경을 준비할 테니, 다음 방학에는 어때. 와줄 건가?

오늘의 폭설은 나란히 즐거이 누릴 광경이 될 터였다. 편안히 집 안에서 관망만 하는 건 예레미야의 몫이었고, 이제 한참 끙끙 고생하며 올 손님의 고초를 알기는 하나 역시, 넓게 트인 창이 액자의 틀처럼 거머잡은 광경은 한참 근사하다. 카일루스는 어땠느냐고? 예레미야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다시 펜대를 놀렸다. 어땠는지, 예레미야는 진실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 마리안느가 꼴사나운 가족들에게 인사할 겸 부수려던, 입구의 대단히 고아한 동상의 코까지도, 예레미야의 마음속에 남은 적은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기억해서 알고 있으니 마음, 이라고 하는 게 옳다. 외워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되새기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태어나 자란 이곳에서 예레미야는 썩 불행하지 않았으면서도 대체로 부외자였다. 기적을 누린 자, 가 아니고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저주. 그러므로 거짓으로 꾸역꾸역 채워 세워둔 외연만이 발붙일 근거이며 영원히 속이는 자. 그러한 처지로는 애정 깊을 수 없는 곳, 발붙일 곳으로 기어이 잡아 삼키려 벼른 이력만 선연할 뿐이었는데,

[돌려받지 않을 이름을 봉한다.]

아직 다 거머쥐지는 못한 자,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환대의 장소를 잠자코 안배한다. 이제 이곳이 내 것이며 내가 마땅히 환대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면, 그 이후로는 내 친애하는 자들이 보고자 했던 광경, 들려준 감상으로 가장 익숙한 이곳을 마음에 새로 담으리라. 온갖 고귀하고 우아한 것으로 빼곡하게 채워둔 이 벽이, 창이, 창 너머 눈으로 고요한 정경이 내게 새삼 의미가 생기거든 모두 너희가 읽어준 탓이니.

예레미야는 그 한 가지 유대를 환대할 수 있는 오늘, 눈 맞아 한껏 달아올랐을 오벨의 뺨이 이번에는 기쁨으로 또 달아오를 것 상상하자 기꺼웠다.

[예레미야 프리에르 카일루스가.]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배반하지 못할 이름을 끄트머리에 적는다. 배반하지 않을 이름으로도, 오벨에게 다시금 내어주며.

예레미야 카일루스, 유대를 건네받은 자가 마찬가지로 돌려준 유대를 영구히 봉하는 형태로.

폭설을 곁에 낀 기다림은 도착까지 당분간도 즐거울 터였다, 친구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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