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교환] 끝나지 않을 짝사랑

22년 12월 작업물

3D 알페스 : S X N / 6000자

#같은_꿈을_꾸고_있으니까 #당신이_그곳에_있으니까 #능글공 #다정수

학교는 아침부터 분주하다. 오늘 졸업을 하는 3학년들은 기대와 아쉬움으로 들떠있고, 그들을 배웅하는 선생님들과 후배들은 시원섭섭한 기분에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 감성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딘가 무서운 오오라를 풍기고 있는 건 아마 나뿐일지도 모르겠다. 뚱한 표정으로 성우연구부 부실 앞에 섰다. 'D+'라는 부실의 명패가 눈에 들어온다. 고등학생 신분으로서는 아마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될 부실을 이런 기분으로 들어가게 되다니... 아무것도 모른 채 부실 안에 있을 네가 더더욱 밉게 느껴졌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부실의 문을 열었다. 

신성한 졸업식 날인 오늘, 내가 굳이 이런 가라앉은 기분으로 부실을 방문한 이유는...

"...S쨩, 있지?"

이 녀석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다.


미야하라 S. 나보다 한 살 아래의 건방지고 버릇없는 후배. 소탈한 성격인 주제에 한 번 목표를 정하면 포기하지 않는 독불장군 같은 면이 있고, 사람을 대하는 데에 스스럼이 없어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조금 치사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센스가 좋은 사람.

그런 S쨩을 처음 만난 건 중학교 3학년, 학교에서 주최하던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였다. 거기서 만난 S쨩은 공부에 영 흥미가 없는, 다루기 어려운 후배였다. 진전이 없는 멘토링을 몇 번이고 반복한 뒤 멘토링 프로그램 일정에 따라 앞으로의 진로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S쨩의 장래희망 역시 '성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S쨩, H 고등학교라는 곳 알아?"

"꽤 유명한 성우연구부가 있는 곳이잖아요. 알고는 있어요. ...N씨는 성적도 좋으니까 갈 수 있겠네요. 혹시 노리고 있어요?"

"응, 목표로 하고 있어. S쨩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고등학교 입시는 중학교 3학년 때의 성적이 가장 중요하니까."

"헤에..."

꿈을 향한 동기부여가 S쨩 안의 무언가를 움직이게 만든 걸까. 그때부터 S쨩은 눈에 불을 켜고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눈에 다크써클을 달고 있는 주제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라는 식으로, 언제나와 같은 건방진 태도를 고수하던 모습은. 멘토링을 하는 날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비록 장래희망이 같다고는 하지만, 멘토링이 끝난 이후에는 만날 일이 없었다. 당연히 S쨩과의 인연도 그렇게 끝이 나는 줄 알았으나...

"1학년 미야하라 S입니다. 성우연구부 면접을 보러 왔는데요... 아."

"...S쨩?!"

어찌어찌 무사히 H 고등학교에 입학한 S쨩이 성우연구부에 가입하면서, 우리의 인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S쨩과 함께한 2년간의 동아리 생활은... 즐거웠다. 비록 S쨩은 중학교 때부터 변함없이 버릇없는 후배였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는 S쨩의 태도 덕택에 나는 많은 희망을 받을 수 있었다. 같은 중학교 출신이자 멘토링을 하며 쌓은 인연이 있기 때문인지 S쨩 역시 나에게 많이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선배로서도 이끌어줄 만한 후배를 만나 뿌듯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이 단순히 사이좋은 선후배에서 그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 특유의 건방지고 태연자약한 태도가 얄미우면서도, 나를 보면 지어주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면서. 나에게는 S쨩을 향한 새로운 감정이 싹텄다. 

이 감정을 전할 생각은 없다. S쨩은 언제나 성우라는 꿈 하나만을 보고 달려가는 멋진 사람이고, 나 역시도 연애 때문에 꿈을 소홀히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절대로 내가 고백해봤자 차일 것 같고, 그렇게 되면 평범한 연락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고백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러고보니 이제 곧 3학년 선배들은 졸업이네요~."

"...S쨩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선배들 졸업하니까 아주 기쁜가 보지?"

"에이~, 그럴 리가요. 이렇게 보여도 아쉽긴 하다고요?"

"...그게 끝이야?"

"...네, 끝인데요."

"선배들의 졸업에 대한 다른 감상은 없어?"

"? 딱히요."

내가 졸업한다는데! 이제는 매일 못 만난다는데! 그 태연해 보이는 태도는 대체 뭐야?! ...라는 이유로, S쨩을 향한 나의 이유 있는 까칠한 태도는 일주일째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S쨩은 그런 나의 태도에도 여전히 덤덤하게 나를 대했고, 타들어 가는 건 내 속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식 날인 오늘이 찾아왔다. 오늘이야말로 미야하라 S를 만나는 마지막 날! 어떻게든 미야하라 S를 울려서 "N씨가 졸업하는 거 싫어요..."라는 말을 하게 만들고 말겠어!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부실 문을 여니, 과자를 우물거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S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무렇지 않은, 평소와 같은 모습에 어쩐지 화를 낼 의지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엑, N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오늘 졸업식이잖아요. 뭔가 두고 간 거라도 있어요?"

"...잠깐 부실에 볼 일이 좀 있어서. 그나저나, 혼자서 뭐해?"

"오디션 대본 좀 읽고 있었어요. 오디션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아, 그래."

3학년이 졸업하든 말든, 자기는 할 일을 하겠다는 건가... 그런 점이 S쨩답긴 하지만, 얄밉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의를 구하지 않고 S쨩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S쨩은 기껏 내 눈치를 살피다가, 과자 봉지를 슬쩍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드실래요?"

"...아니."

"오늘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요즘 쭉 그런 느낌이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요즘 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해?"

"졸업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사실은, 너 때문이야. 라고 정면으로 말할 용기는 없었다. 내가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 티를 내자 S쨩은 조용히 하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한 건지, 나에게서 시선을 돌린 뒤 다시 대본을 바라보았다. 8명이 함께 쓰며 언제나 북적북적하던 부실에, 단 두 사람이 조용히 앉아있다. 대본을 보는 S쨩을 바라본다. 촘촘한 속눈썹 아래로 미래를 향한 희망이 담긴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내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너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오늘이 마지막이기 때문일까? 언제나와 같은 상황이었는데도, 그 당연함에 가슴이 아팠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이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배, 울어요?"

당황한 듯한 S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꼭 이럴 때만 감이 좋다니까. 그 말을 듣자 괜스레 더 서운해져서, 눈물이 더욱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S쨩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아 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손을 붙잡아온다. 엉망이 된 내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너는 올곧은 눈동자를 나에게 맞춰온다. 

"...역시 제가 뭔가 잘못한 건가요?"

"...눈치 채고 있었으면 빨리 말하란 말이야."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데, 이런 말이나 해봤자 N씨한테 잔소리만 듣잖아요. 잔소리 듣기 싫어서 그랬죠."

"..."

이런 상황에서도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는 점이, 정말 싫다니까... 내가 시선을 피하자 S쨩은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교복 셔츠의 빳빳한 감촉이 얼굴에 닿는다.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주면... 말하지 않을 수 없잖아. 아아, 오늘만큼은 반드시 내가 이기고 싶었는데. 오늘도 이 건방진 후배에게 져버렸다. 정말이지, 예쁜 구석이 없는 녀석이다. 훌쩍임을 멈추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졸업하는데, S쨩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속상해서 그랬어."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졸업하는 걸로 S쨩이 필요 이상으로 섭섭해하기 바라는 건 단순히 내 욕심일 뿐이라는 걸. S쨩에게 있어서 나는 평범한 동아리 선배일 뿐일 테니까. 하지만 S쨩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 너무 커져 버려서, 지금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내가 말을 끝내자 S쨩은 안았던 팔을 풀고는, 어쩐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어쩐지, 만족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표정, 나쁘지 않네.

S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 한마디 던졌다.

"...왜 울다 웃는 거예요? 졸업식 전에 엉덩이에 뿔이라도 달고 갈 생각인가요?"

"...S쨩이야 말로 졸업식 전에 머리에 혹이라도 달고 가볼래?"

"참아주세요. 졸업식 날에 폭행 사건에 연루되고 싶진 않거든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뒤, S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제 머리를 헝클어트린 뒤 "아아~."하는, 큰 소리를 냈다.

"끝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 때문에 N씨가 울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네요. 말해드릴게요."

S쨩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는 나와 눈을 똑바로 맞추고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N씨가 졸업한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건... N씨가 졸업하더라도 제가 쭉 N씨를 따라갈 생각이어서 그랬던 거예요."

"하...?"

"왜, 멘토링 끝날 때도 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잖아요. 그것도 어차피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날 거니까 그랬던 거예요. "

"그럼, 설마 이 고등학교에 온 이유도...?"

"아니에요. ...N씨가 간다는 이유 만으로 지원한 건, 아니에요."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눈이 커졌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S쨩은 나를 소중히 여겨주고 있었던 거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소중히 여겨준다는 말을 듣자,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차마 더 이상 S쨩과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자 S쨩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N씨가 그런 반응일 것 같아서 말하기 싫었다구요."

S쨩의 볼 역시 평소보다 빨개진 것처럼 느껴졌다. 부끄러운 말을 건넨 채 혼자서 툴툴대는 모습이 마치 초등학생처럼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소리를 들은 S쨩은 이쪽을 힐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웃음이 진정되자, 순수한 마음으로 S쨩을 바라볼 수 있었다.

"S쨩."

"네?"

"따라와준다고 해서 고마워. 나,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게."

나의 말에 S쨩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윽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고, 는 필요 없어요. N씨가 기다렸다고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곧바로 따라갈 테니까요."

"...오늘도 변함없이 건방지네, S쨩은~."

"건방진 후배야 말로 미야하라 S의 진정한 포지션이니까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S쨩을 바라본다. 정말이지, 나는 왜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걸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짝사랑은 이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언젠가 내 뒤를 따라온 S쨩을 또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도 분명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껴버릴 테니까.


"가버렸네..."

N씨가 가버린 부실. 홀로 남은 나는 테이블 위에 엎어진 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잎이 사람 마음도 모르고 하늘하늘 예쁘게도 떨어져 내린다. 괜히 제 옆에 놔둔 대본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설마 계속 기분이 안 좋았던 이유가 정말 나 때문이었을 줄이야. 짐작은 했지만 본인에게 확실하게 그렇다는 답변을 받은 건 상당한 충격이었다. 나 때문에 N씨의 마지막 학창시절이 안 좋은 기억으로 자리잡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아, 역시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미리 고백해둘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래도...

"...고백은 멋지게 하고 싶단 말이야."

지금의 나는 N씨에게 있어서 그냥 후배 중 한 사람일 뿐이니까. 언젠가 후배가 아닌, 나란히 설 수 있는 대등한 입장이 되면... 그때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테니까. 만지작거리던 대본을 힘주어 잡았다. N씨에게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무엇보다도 성우 공부에 힘을 써야 할 때였다. 성우가 되지 않으면 N씨를 따라갈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N씨를 좋아하는 마음은. 조금 뒤로 미뤄두도록 하자.

졸업식의 시작을 예고하는 예비 종소리와 함께, 오늘도 두 사람의 짝사랑은 무르익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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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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