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케이크 샘플] 파르페가 녹아내리면

24년 1월 작업물

3D 나페스 : D X S / 5000자

#선수와_팬을_넘어 #친구이상_연인미만 #첫데이트?

고개를 들어 서로의 눈을 마주친 순간, 이건 잘못된 만남이라고 느꼈다.

오늘은 팀 T와 팀 H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중반까지는 2:2의 상황을 유지하며 경기는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었으나, 8회 말에 팀 T로부터 극적인 안타가 터지고 선수들의 연계 플레이가 이어지면서 2점을 더 따낼 수 있었다. 최종적인 스코어는 4:2, 팀 T의 멋진 우승이었다. 오늘의 D 선수는 팀 H의 공세 속에서도 멋진 수비를 보여주며 큰 실책 없이 경기를 마무리했다. 비록 오늘의 MVP 선수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S는 간만에 시간을 내 직관한 경기가 이런 명경기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아무튼, 요점은 오늘 S을 포함한 팀 T의 팬들은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경기장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S가 타야 하는 버스가 오기까지는 13분이 남아있었다. 시간이 애매한데... 시간을 때울 곳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에잇, 기분이다! 다음 버스 타고 가지 뭐! S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편의점에 입성했다. 그리고는 평소 좋아하는 맥주 한 캔과 안주로 먹을 과자를 계산한 뒤, 가게 외부에 위치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고 있던 야구 하이라이트를 다시금 재생시킨 뒤 맥주를 한 모금 삼키자, 거의 동시에 유튜브에서 들려오는 해설위원의 목소리.

"아아-, D 선수! 멀리도 날아온 안타를 깔끔하게 처리합니다. 오늘도 멋진 수비를 보여주네요!"

하아아, 이거지, 이거지, 이거지!!! 맥주의 시원한 감각과 함께 그를 향한 무한한 애정이 솟아나고, 엔돌핀이 팡팡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해~♥ 마치 맥주로 만들어진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S는,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경기 하이라이트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먹고 있던 과자가 동이 났다. 영상에 푹 빠져있던 S가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과자 봉지를 잠시동안 뒤적거렸던 건, 넘어가도록 하자. 이미 떨어져 버린 과자와는 달리 맥주는 몇 모금 정도 더 남아있었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남은 맥주를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더니 트레이닝복을 입은 키가 큰 남자가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그 키에 압도당해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살펴보니, 남자는 운동을 열심히 한 듯 근육이 잘 붙어있는 체격이었다. 왠지 가까이서 본 D 선수님이랑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남자가 고개를 돌려 S를 바라보았다.

"아?"

"...어?"

아... 망했다. 이 사람은 팀 T의 D 선수가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매일매일 그의 경기 영상을 돌려보는 S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그를 너무나 사랑하는 야빠라는 사실이 후회스러웠다. 아니, 왜 하필 이럴 때 만나는 건데?! 편의점에서 과자에 맥주 까는 추레한 모습 같은 건 안 들켜도 된단 말이야!!! 굳어있는 몸과는 달리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얼굴은 빠르게 달아올랐다. 누가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정적을 먼저 깬 건 D 쪽이었다.

"아, 그, 저...! 두고 온 게 있어서, 이만...!"

그 말을 남긴 채, D가 전력을 다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붙잡을 새도 없이 그가 멀어져가고, S는 그저 멀어지는 D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경기장 밖에서는 느릿느릿해서 둔한 편이라더니, 지금도 엄청 빠르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D에 대한 TMI를 생각하는 자신에게 참, 여러 감정이 들었다. 마침내 D가 검은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을 때, S는 그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러자 어쩐지 힘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하..."

어른들이 술이 원수라고들 하던데, 역시 어른들 하시는 말은 틀린 게 없다니까... 언젠가의 격언을 되새기며, S는 다 마신 맥주 캔을 사정없이 구겼다. 아무튼 확실한 건... '다음에 만날 때 진짜 엄청 어색하겠다!'라는, 쓸데없는 확신뿐이었다.


고개를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그야,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오늘은 전세계인들이 공통적으로 싫어하고 특히나 야구팬들은 혐오하는 요일인 월요일. 그리고 S는 지금, 그녀의 최근 행복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D 선수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잘 차려입은 사복을 입은 채 SNS에서 인기몰이 중인 카페에 앉아 2인용 파르페를 나눠 먹고 있다니. 이건, 마치... 데, 데데, 데이트 같잖아~!!! 아아, 안 돼! 이런 연애에 미친 사람 같은 생각을 하면 안 돼! 얼굴이 달아오르는 감각에 다시금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S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던 D가 쭈뼛거리며 한 마디 건넸다.

"역시 저랑 이런 곳은... 좀 불편하신가요?"

"전혀요?!?"

D의 질문에 S는 큰 목소리로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그 답변에 스며든 어색한 감각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하하..."

"아하하..."

어느새 웃음으로 무마하는 흐름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S는 감정이라고는 1g조차 실리지 않은 웃음을 흘리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3일 전, 언제나처럼 S가 D에게 사인을 받는 순간이었다. 거의 매번 경기가 끝날 때마다 그에게 사인을 받곤 했지만, 사인을 받는 순간은 언제나 설렜다! 사인 한 글자 한 글자에도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귀엽고도 멋있어 보였다. 사인이 끝나고 S가 뒤를 돌려던 순간, D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S씨만 괜찮으시다면, 그... 월요일에 언제 한 번 만나지 않으실래요?"

"...네?"

D가 꺼낸 말에, S는 순간적으로 자기 뺨을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그럼, 이게 현실...?! 꿈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다니! 충격적인 수준의 행복감에, S의 이성이 얼른 브레이크를 걸었다. 아니지, 아니야. 선수랑 팬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 ...아니아니, 잘 생각해 보니 야구 선수는 딱히 아이돌이 아니니까 이래도 문제 될 건 없지만...! 아니, 그보다!

"선수님의 귀한 휴일을 저한테 쓰셔도 되는 거예요?!"

"네...?!"

S에 답변에 D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그는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물론이죠. 오히려 저야말로 야구 안 하는 날에도 야구 선수를 보시게 만들어서 죄송한걸요."

우와... 진짜 잘생겼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내 걱정을 해주네. 혹시 이 땅에 잘못 내려온 천사인건가...? 머릿속으로 오타쿠 같은 감상을 늘어놓던 S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깔끔한 답변을 내놓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D 선수님을 야구 안 하는 날에도 뵐 수 있어서 기쁜걸요."

"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언제쯤 시간이 되실까요?"

"저는 다음 주 월요일도 괜찮은데, 선수님은요?"

"저도 그때 괜찮습니다. 그럼, 장소는... 혹시 나중에 핸드폰으로 문자 보내드려도 될까요?"

"해, 핸드폰이요?!"

"...역시 불편하실까요?"

"아니요, 너무 좋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얼떨결에 핸드폰 번호까지 주고받게 되었다. 그 이후 S는 토요일 저녁에 D에게 문자를 받고, 일요일에는 온종일 난리를 피우며 옷장 정리를 한 다음, 월요일인 지금에 이른다.


아무튼, 월요일에도 선수님을 만날 수 있는 건 좋았다. 좋지만, 좋긴 했지만...!! 설마 선수님과 이런 커플들이나 올 법한 카페에 오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꾸밀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평소에는 화려하다며 절대 입지 않는 치마를 꺼내입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물론, 오늘도 엄청 꾸미긴 했지만! 조금 더 꾸미고 올 걸!!! 혹시나 선수님께서 부담스럽게 여기실까 봐 최선을 다해 꾸안꾸를 노력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S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D는 아까부터 S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S씨, 파르페 맛은 어떠신가요?"

"앗, 맛있어요! 평범하게 달달하다는 느낌?"

그 답변에 어딘가 초조해 보이던 D의 얼굴이 살짝 차분해졌다.

"역시 여기로 하기 잘했네요."

"어? 여기 말고 다른 곳도 후보에 있었나요?"

"다, 당연하죠... 이 동네 카페 중에 어디가 제일 맛있는지 엄청 열심히 알아봤다고요."

"오오, 뭔가 약간... 의외예요!"

"S씨는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한바탕 두 사람 사이에서 즐거운 웃음이 터졌다. 파르페가 녹아내리기 전까지는 둘 다 무슨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어색했는데, 파르페가 녹아내리기 시작하니 오히려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사소한 대화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 나갔다. 주로 D쪽에서 S의 일상을 질문하고, S가 그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질문받기만 하는 게 조금 억울하기도 했지만, "S씨는 이미 저를 잘 알고 있잖아요. 이건 뭔가 불공평하지 않아요?"라고 투덜거리는 D를 보고 있으니... 그의 투정에 어울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야, S는 이미 D를 정말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산처럼 높이 쌓여있던 파르페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아, 배부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똑같은 말을 내뱉고는,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쉬워 실없는 농담을 오래도록 주고받던 도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S는 이 약속의 의의가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왜 저랑 약속을 잡으실 생각을 하신 거예요?"

"...좀 쪽팔린 이야기인데, 다른 이야기 하면 안 될까요?"

"안돼요! 선수님의 창피한 이야기라니, 꼭 듣고 싶어요."

S가 눈을 반짝이며 D를 쳐다보자, D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S씨의 기억 속에서, 제가 사복으로는 트레이닝복이나 입고 다니는 녀석으로 남기 싫었어요."

"..."

"저를 좋아해 주는 분에게는 계속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다고요."

비록 D의 얼굴이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D의 귀가 평소보다 달아올라 있었다는 것을, 그를 잘 알고 있는 S는 알 수 있었다. 아아, 상대를 잘 알고 있다는 건, 이렇게나 좋은 일이구나.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말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었다.

"선수님이 오늘 트레이닝복을 입고 저를 만나러 나오셨다고 해도, 선수님은 제 안에서 쭉 멋있으실 텐데도요?"

D가 놀란 얼굴로 S를 바라보았다. 엄청나게 부끄러워하는 선수님의 얼굴은 이런 얼굴이구나! S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게 D는 새빨개진 얼굴인 채로 잠시 굳어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그게 뭐예요! 야구 선수도 사람이라고요! 평범하게 봐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미 다 먹고 없어져 버린 파르페의 달콤한 맛이, 다시금 입안에 퍼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자신은 분명 이 달콤함을 분명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라고, S는 남몰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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