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 번즈 레드

[루카유키] 세라프 기지에서 잘 자요

sn by 송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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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온다.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며 이즈미 유키는 되뇌었다. 잠이 안 와. 억지로 눈을 감아도 생각은 끊이지 않고, 다시 전선에 서야 하는 내일에 대한 걱정과, 오늘 먹었던 점심 맛있었지, 같은 사소한 회상과,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상념을 차례로 떠올리다 보면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 잠들지 않는 밤이 흘러갔다.

큰일인데. 내일도 정찰 임무에 나가야 하니까. 유키가 다시 눈을 꾹 감았다. 유키가 소속된 31A는 최전선에 서는 돌격 부대였고, 캔서와 싸우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았다. 까딱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전장에 피곤한 상태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니 얼른 자야 해.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유키는 자세를 편하게 하기 위해 뒤척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잠이 안 오는 거지.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점호 후 방을 정리하고, 카페테리아에 가서 아침을 먹는 건 평범한 일과였다. 이어지는 오전 훈련 뒤에 점심시간, 그리고 오후에 사령관실로 불려 가 돔 주변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캔서 무리를 정찰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캔서를 토벌한 뒤 기지로 돌아와서는 보고서를 써야 했고, 부대장인 루카가 도저히 못 쓰겠다며 우는소리를 해서 어쩔 수 없이 보고서 작성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루카가 답례로 고카페인 에너지 드링크를 줘서….

“루카 탓이었잖아!!!”

유키는 억울함에 큰 소리로 외쳤다.

“윳키, 시끄러워.”

아까까지만 해도 코를 골며 자던 루카가 푸념하듯 말했다. 남은 잠도 못 자게 만들어놓고 쿨쿨 잘만 자던 녀석이 말은 잘한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더 시끄럽게 했다간 자고 있는 다른 부대원들한테 민폐일 테니 결국 입을 다물었다.

루카 탓이긴 하지만, 어쨌든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화를 삼키며 유키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억울했지만 어쩌랴. 갈수록 인내만 늘어가는 유키한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유키의 침대로 타박타박 누군가가 걸어왔다.

“잠이 안 와?”

차분한 목소리로 루카가 물었다. 유키가 눈을 떠보면, 침대 옆에 쭈그려 앉아서 유키와 시선을 맞추는 루카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둑한 실루엣을 가늘게 노려보며 유키가 답했다.

“그래, 아무래도 네가 준 에너지 드링크 때문인 것 같아.”

“그거 큰일이네.”

말로는 큰일이라고 하지만 어쩐지 태평하게 들렸다. 시야가 흐려서인지, 얄미운 누군가 때문인지, 유키는 미간을 좁혔다. 험악한 표정이 된 유키의 손을, 루카가 옅은 미소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피곤한 유키의 의식이 따라오기 전에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나 때문이니까, 그럼 내가 잠이 오게 해줄게.”

귀에 감겨오는 나긋한 목소리가 달큰했다. 유키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한때의 팬으로서 받아들이자면 환호할 일이었지만, 이미 카야모리 루카의 본색을 실컷 겪은 유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잠이 오게 해준다면서 왜 침대 밖으로 나오게 하는 건데?”

“내가 침대보다 더 좋은 곳을 아니까. 아니면 침대에 같이 누워서 자장가를 불러주는 게 더 좋아?”

“나는 네 팬인데, 그러면 잠이 오겠어?!”

“그렇지? 그러니까 밖으로 가자.”

어둠 속에서 루카의 환한 미소가 빛났다. 불안하다. 루카가 하는 짓이니 또 엉뚱하게 흘러가겠지. 하지만 마음먹으면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힘으로 약하게 잡아당기는 손길에 이끌려 결국 유키는 걸음을 떼었다. 늘 휘둘리는 것은 유키 자신이라는 자각만이 한숨처럼 샜다.

하지만 이미 이끌린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고요한 숨소리를 지나 어둠을 걸어, 둘은 기숙사를 나왔다. 이어지는 기숙사 앞길에는 따스한 가로등 빛과 맑은 풀벌레 소리가 잔잔하게 깔렸다. 그 위로 힘차게 발을 내딛는 뒷모습을 유키는 따라갔다.

그렇게 루카가 유키를 데려간 곳은 자판기 앞이었다. 루카는 유키를 벤치에 앉히고 따뜻한 우유를 뽑아서 유키에게 건넸다.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 한 컵을 마시면 잠이 잘 온대.”

“너치곤 상식적인 방법이네.”

“그런 실례되는 말을! 자꾸 그러면 침대로 데려가서 자장가를 불러줄 거야.”

“그것도 상식적인 방법이고, 오히려 나한테 좋은 거 아니야? 물론 잠은 안 오겠지만.”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우유를 조심스럽게 불어서 마셨다. 루카는 얌전히 앉아 그런 유키의 곁을 지켰다. 편하게 다리를 뻗고 가만히 유키를 들여다본다. 그런 시선을 의식하며 유키는 천천히 우유를 마셨다. 가을이 되어서 밤공기는 다소 서늘해졌지만, 따뜻한 우유가 몸을 데워주었다.

아무런 대화 없이 작은 홀짝임만이 들리고, 고요함 속에서 천천히 불안이 가라앉는 평온한 시간. 천천히 속을 채우는 푸근한 감정에 유키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좀 진정됐어?”

들었던 종이컵을 내려놓고, 사근사근하게 묻는 루카를 향해 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약간 풀린 것 같아.”

“잘됐네.”

“근데 우유 마셨으니까 양치 다시 해야 하는 건 알지?”

“양치 다시 하면 잠 깨잖아! 그냥 자자.”

“나는 치과 가고 싶지 않으니까 양치할게.”

“루카쨩~ 쇼크!”

소란스러운 루카에도 유키는 화장실로 가서 양치했다. 어째 효과는 있었는 듯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루카는 다시 유키의 손을 잡아끌었다. 기숙사를 나와서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걷는 루카를 보고 유키가 물었다.

“또 어디를 가려고.”

“기대해! 내가 진짜 잠이 잘 오는 곳을 아니까!”

의기양양하게 말한 루카는 유키를 계속 이끌었다. 도착지도 모르고, 안내인도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유키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루카를 쫓아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카가 이끌어준 곳에 나쁜 기억은 없었으니까.

“짜잔! 도착!”

이윽고 아카데미에 도착한 루카가 문을 밀었다. 그 모습도 위풍당당했다. 유키가 불안한 표정으로 루카를 바라보았다. 루카의 표정만큼은 비장의 기술을 선보이는 마술사였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어라? 안 열려.”

당황해서 문을 잡아당겨보는 루카에게 유키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시간에 아카데미를 열어놓겠어?”

“이럴 수가! 그럼 이 작전은 실패잖아. 역시 수업 시간에 가장 잠이 잘 오는데.”

“선생님들에 대한 예의는 아무리 봐도 없구나.”

“그치만 지루하단 말야~.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봐. 그리고 아카데미에 들어갔어도 가르쳐줄 교관이 없는데 어쩔 생각이었어?”

“선생님은 바로 나, 카야모리 루카였습니다!”

“네가 뭘 가르칠 수나 있겠어?”

“음악이라면 자신 있어.”

“그렇긴 하겠네. 그럼, 일단 벤치에 앉아서 설명해 주던가.”

“그럴까.”

둘은 아카데미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얕은 연못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수면 위로 달과 별과 하늘이 비쳐서 희미한 빛알갱이를 뿌리고 있었다. 이 광경을 위해 연못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에 박히는 정경이었다. 유키의 옆에서 벤치에 편안하게 기댄 루카가 말했다.

“이럴 땐 역시 캔 커피와 담배 초콜릿인데.”

“그랬다간 카페인을 더 섭취하게 되잖아. 가뜩이나 잠도 안 오는데.”

“그랬지. 아쉽네, 윳키랑도 커피 브레이크 해보고 싶었는데.”

“기왕이면 낮에 해줘.”

“그치만 이런 깊은 밤에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있잖아.”

“맞는 말이긴 하네. 그럼, 휴일 전날 밤에 하던가. 그럼 늦게 자도 괜찮겠지.”

“야호! 약속한 거다?”

기분 좋게 외치는 루카에게 유키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자기가 재워준다고 할 땐 언제고 자기 사심만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타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유키도 루카와 같이 보낼 시간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가을바람에 약하게 일렁이는 수면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루카가 생각해 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악은 도레미파솔라시도, 8개의 음으로 구성되는 건 알지?”

“당연히 알지. 초등학교만 나와도 배우는 거잖아.”

“기타의 코드도 8음 음계의 기본음으로부터 화음을 만들어내는 거야. 도가 C, 레가 D, 그렇게 나아가다가 라가 A, 시가 B.”

“그것도 알고 있어.”

“코드는 거기서 보통 기본음과 3도 음, 5도 음을 붙여서 만드는 거야. 만약에 C코드라고 한다면 C, E, G. 2칸씩 움직여서 도미솔. 쉽지?”

“거기까진 이해하겠어.”

“기본 코드에서 샾이나 플랫이 붙으면 한 프렛을 움직이면 되고.”

“잠깐만, 갑자기 건너뛰는 거 아니야?”

“그런가. 윳키는 기타를 칠 건 아니니까. 느긋하게 들으면 돼.”

그 뒤로도 기타의 코드에 관해 설명하는 루카에게 귀 기울이며 유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좋아하는 음악에 관해서 설명하는 루카의 목소리에는 열기가 서려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음악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이제는 잠들기가 아까웠다.

한때 관중을 열광시켰던 미성을 듣고 있으면, 서서히 깃드는 나른함을 느끼며 유키가 말했다.

“왠지 우주와 같네.”

갑자기 들려온 유키의 말에 설명을 멈춘 루카가 되물었다.

“우주?”

평소의 강단 없이 힘이 풀린 목소리로 유키가 대답했다.

“우주도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물질이 있고, 그 기본 물질의 조합에 따라 무수한 물질이 만들어지잖아. 코드도 기본음으로부터 여러 화성이 만들어지고, 그런 화성을 엮어서 곡을 만드니까, 그런 원리가 근본적으로 같다는 생각을 한 거야.”

잠시 말없이 바라보는 루카의 시선에 유키가 작게 헛기침했다. 밤이라서 감상에라도 젖은 걸까. 지금 침대에 누우면 이불을 세차게 차버리고 말 소리를 했다. 겸연쩍게 발끝을 내려다보는 유키의 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음악은 우주구나.”

“부끄러우니까 다시 말하지 마.”

“그치만, 그러면 우리의 만남도 최고의 곡이라고 생각하게 되는걸.”

뜻밖의 말에 유키가 고개를 들었다. 루카의 눈에 비치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는 걸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유키를 두고 루카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모든 음악은 정해진 몇 개의 화성으로 이루어지지만, 수천, 수만, 어쩌면 수억 개의 곡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의 만남도 무수한 가능성 중에 한 개겠지.”

그리고 루카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얼굴 가득히 웃음 지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곡이란 걸 나는 알 수 있어. 그렇게 느껴.”

멍하니 루카의 환한 미소를 눈에 담던 유키가 마침내 말했다.

“잠이 전혀 안 오잖아!”

“응?”

“그런 말을 하는데 그러면 두근거려서 잠이 오겠냐고! 카페인보다도 각성 효과가 더 심하잖아!”

“그럼, 역시 옆에 누워서 자장가를 불러줄까?”

“그것도 잠이 안 온다고!”

고요한 기지에 쩌렁쩌렁한 유키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거기에 대고 루카는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다가 환히 웃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유키도 이끌리듯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잠이 오게 한다는 처음의 목적은 실패한 채로 루카와 유키는 기숙사 방에 돌아왔다.

“정말 자장가 안 불러줘도 돼?”

“그래. 너한테 소리치느라 진이 다 빠져서 오히려 잠이 잘 올 것 같네.”

“그런가. 그럼 잘 자, 윳키.”

“너도 잘 자.”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는데도 아무 망설임도 없이 사다리를 올라 이불을 덮는 소리를 들으며 유키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애써준 루카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지금도 루카가 해준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아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었는데 잠이 오지 않으면 어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유키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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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사려깊은 비버

    잠이 오지 않아 글리프를 돌아다니다가 이 연성을 보고 잠이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성의 루카유키 연성이에요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칭찬하는 산양

    제일 잠 잘 온다고 냅다 아카데미로 윳키 데려가는 루카가 너무 루카다워서 하찮고 웃겼어요 ㅋㅋ큐ㅠㅠㅠ 밤하늘 아래에서 대화하는 뤀윸도 너무 아름다워요 윳키가 루카 덕분에 잠이 깬 것처럼 저는 이 글 덕분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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