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 번즈 레드

[헤번레 / 루카아오] 밤하늘에 거는 감사

sn by 송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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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븐 번즈 레드 2장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칭찬하는 것이 좋았어요.

저는 스스로 자신을 갖지 못해서, 누군가가 저를 옳다고 말해주어야만 확신을 할 수 있었어요. 어린 시절에는 그 누군가가 부모님이었죠. 아니, 어쩌면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부모님에게 거슬러본 기억 따위 없으니까요.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싶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 그 수단이 저에게는 시험 성적이었어요. 교사였기에 교육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부모님을 위해 저는 어릴 때부터 공부에 전념했어요.

백 점인 시험지를 들고 오면 부모님은 반드시 기뻐해 주셨어요. 가족이 모인 저녁 시간, 제가 조심스럽게 시험지를 내밀면 부모님이 그것을 받아서 들었죠. 처음 백 점인 시험지를 보여주었을 때, 부모님은 밝은 미소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그것이 한 번, 두 번, 이윽고 한 해, 두 해가 되고, 어느 날 부모님은 저의 손을 잡고 병원에 가셨어요.

하이퍼사이메시아. 초기억증후군.

제가 받은 진단명이었어요. 무엇이든 기억한다니,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일이었을 거예요.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겠죠.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는 기쁨도, 슬픔도 없었어요. 그저 부모님이 기뻐하셨기에, 저는 좋은 일이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그때 부모님을 따라 웃었던 일이 지금처럼 쓰리게 와 닿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죠.

하이퍼사이메시아인 걸 알고 나서도 제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공부를 하고, 백 점을 맞고, 부모님께 칭찬받는 하루하루. 가끔은 지루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어요.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제 보았던 동영상이나 만화의 이야기를 하고, 어디론가 놀러 가자고 웃으며 떠들었죠.

저에게도 가끔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저는 기뻤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며 전부 거절해 왔어요. 미안하다며 고개를 저을 때는 가슴이 꼭 죄어오는 것 같았어도, 부모님의 미소를 떠올리며 참았어요. 그렇게 견디고 견디다 보면 제 주위에 놀자고 찾아오는 친구들은 없어졌어요. 딱히 따돌림을 당하지도 않았고, 쉬는 시간에 말을 걸어주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가슴 어딘가에 깃드는 시린 바람은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어요. 반 친구 중 한 명이 저에게 다가오기 전까지는요. 그 친구는 제게 말했어요.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 라고. 언제나처럼 저는 공부를 해야 해서 갈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그 친구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어요. 항상 공부, 공부. 너는 우리를 바보 취급하는 거냐고. 그리고 저의 책상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쓸어버렸어요. 필통도, 교과서도, 공책도, 샤프도, 전부 떨어져 바닥 위를 구르고, 친구는 제 교과서 위에서 발을 굴렀어요.

당연하게도 학교에서는 저와 친구와 양쪽 부모님을 불렀어요. 말 한마디도 무겁게 느껴지는 자리에서 친구는 단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말했어요.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 속에서 그 말이 메아리처럼 제 안에서 울려 퍼졌어요. 친구가 외쳤던 목소리도, 친구가 벌였던 행동도, 제게는 석판에 새긴 금처럼 깊게 남아있는데.

그 순간에 친구가 거짓말을 했건, 하지 않았건, 그에게는 점점 잊혀 사라질 일이 되겠지요.

그날, 처음으로 잊히지 않는 기억을 원망했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저는 조금 달라져 버린 것 같아요. 여전히 친구들을 좋아했지만,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오는 친구들에게서 조용히 멀어지는 습관이 생겼죠. 거북이가 목을 움츠리듯, 단단한 껍데기에 들어가는 연습을 했어요.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더라도 상처받지 않는 기억을, 그렇게 바라면서.

캔서가 지구에 나타나고 일상이 무너졌을 때, 그런 저도 조금은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세라프 부대원이 되어 저는 비로소 저의 힘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는 마음에 기뻤어요. 그동안 공부를 해오면서 그 지식이 누군가를 위해 사용되는 일이 없었지만, 그때부터는 달랐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로 사람들을, 동료를 위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에게도 해내야 할 역할을 줘서 기뻐했죠.

처음으로 부대장이 되어, 기대받는 29A의 일원이 되어, 저를 바라보는 부대원들을 보았을 때, 저는 이 사람들을 지키자고 생각했어요.

부대장이니까, 학생 때처럼 움츠러들어서 살아갈 수는 없었어요. 그동안 움츠리고 살아왔던 저라도 그런 다짐이 있어, 조금은 두려웠어도 모두에게 먼저 다가가 서로 돕고 친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처음으로 29A의 기숙사 방에 모였을 때, 초면이라 어색한 분위기에서도 먼저 자기소개를 하자고 말을 걸었죠. 저에게도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어요.

다행히 29A는 제 말을 들어주었어요.

한 명, 한 명 자기소개를 마쳤을 때, 우리는 왠지 새 학기를 맞이한 학생들처럼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호기심과 친근함이 뒤섞여, 앞으로 서로를 더 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같이 생활하고, 훈련하고, 자유시간에는 모여서 친구처럼 어울려 바보처럼 떠들고 웃고. 그 생활이 즐거워서, 저는 뒤늦게 학창 시절을 지내는 기분이 들었어요. 물론 작전은 힘들고 때로 목숨을 걸기도 했지만, 29A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어요.

모두가 저를 받아들여 주어서, 저는 서서히 두려움을 잊고 조금은 기댈 수 있는 부대장이 되었다, 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모두가 사라진 그날의 광경을 기억해요. 한없이 넓고 황량한 풍경 속에서 오직 저만이 서 있는 광경을.

29기의 모두가 사라진 지 얼마 안 될 무렵의 저는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어요. 세라프 부대원이 되기도 전의 기억과 세라프 부대원이 되고 행복했던 기억, 마지막에는 꼭 황량한 그날의 광경으로 끝나는 회상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되었어요. 며칠이나 지났을까. 목이 마르다고 생각했어요. 모두가 사라졌어도 목은 마르고, 배가 고프고, 생리적인 욕구는 계속되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저는 다시 부대장이 되었어요. 이번에는 31B였어요. 29A와는 제법 다른 분위기의 사람들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29A의 추억이 떠오르고, 결국에는 모래바람처럼 따가운 그날의 광경에 이르러, 저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31B의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멍청한 부대장이어서였을까. 31B의 부대원들은 저를 잘 따라주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 그런 마음은 남아있어서―아니, 오히려 다시 잃어버리는 기억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더욱 절박해졌는지도 몰라요― 더는 사람들과 친해질 용기는 없어도, 사람들을 지킬 수 있도록 훈련만은 꾸준히 했어요. 아레나에서 몇 시간이고 연습하면, 내가 모두를 지킬 만큼 강해졌다는 확신은 얻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사라진 모두에 대한 생각은 안 할 수 있으니까.

하루는 나나세 교관님이 정말 괜찮으냐고 물었던 적도 있었죠.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직전에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하고 물어보셨어요. 나나세 교관님은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분인데, 어쩐지 그날은 조금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답했어요. 거짓말을 꾸미기에 나는 너무 지쳐있었으니까. 교관님은 더 묻지 않고 훈련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주었어요. 그러면 저는 다시 기억을 멈출 수 있었죠.

그렇게 보내던 어느 봄날, 카야모리 씨, 당신을 만났어요.

헬스장에서 단련하던 중 뱌코를 따라 31A와 카야모리 씨가 나타났어요. 처음에는 뱌코를 둘러싸고 31A 분들이 엉뚱한 대화를 나누셨죠. 그 아이는 뱌코라고 해요. 그렇게 제가 말을 걸었을 때 카야모리 씨는 타깃 발견이라며 저에게 대화의 화살을 돌리셨죠. 첫 만남부터 카야모리 씨는 이상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 대화는 뭐였던 거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 무렵에는 거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 일만으로도 벅찬 시기였으니까요.

그날의 만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31A와 31B는 합동 훈련을 하게 되었어요. 오퍼레이션 플레이아데스. 저와 뱌코는 이전에 몇 번인가 대규모 작전을 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나머지 31A와 31B 분들은 그런 경험이 없었죠.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첫 합동 훈련 때 전투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는 나나세 교관님의 말에 연계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 카야모리 씨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 진심을 전해달라고 하셨죠. 그때는 훈련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훈련중에 제대로 정보 교환을 할 수 있도록 힘내야겠다, 그렇게만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카야모리 씨는 훈련 시간뿐만 아니라 자유 시간에도 저와 함께 어울려주셨어요. 합동훈련 둘째 날 밤에 저에게 말을 걸어주셨죠. 카야모리 씨는 부대장으로서 보람을 느끼고 있었어요. 저는 그렇게 될 수 없었어요. 처참한 실패의 기억이, 황량한 그날의 광경이 그때까지도 남아있었어요.

그런 저를 카야모리 씨는 격려해 주셨어요. 더 이상 힘이 나지 않는다는 제 말에 카야모리 씨가 저를 믿어주겠다고 하셨어요. 저의 힘을 믿어주겠다고, 그러면 조금은 힘이 솟아나지 않냐며, 아오이를 필요로 해주었어요. 기뻤어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같이 축배를 들자고 말해주어서.

그래도 갑자기 자신이 생긴 건 아니었어요. 카야모리 씨는 입대 첫날부터 캔서를 퇴치했다고 들었어요. 과연 나랑은 다른 사람이구나 생각했죠. 그런 저에게 카야모리 씨는 같이 아레나에 가자고 해주셨어요. 함께 싸우고 나서도 자신 없어 하는 제게 카야모리 씨는 웃긴 표정을 하셨죠. 솔직히 많이 웃겼어요. 그 정도면 정말 특기라고 해도 좋을 거예요. 그렇게나 예쁜 얼굴인데. 서슴없이 엉뚱한 행동을 하셔서, 저를 웃게 해주셨죠. 조금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되었어요.

카야모리 씨는 저를 오염시켜 주겠다고 하셨죠. 그리고 또 만나러 와주신다고도요. 

그때부터 카야모리 씨는 제게 힘을 주는 사람이 되었어요.

카야모리 씨가 제게 밴드도 같이 하자고 해주신 것도 기억해요. 제가 다뤄본 악기는 그전까지는 바이올린밖에 없었어요. 그나마도 부모님이 권유해서 시작한 것뿐, 제 의지가 아니었죠. 기타도 카야모리 씨가 정해준 역할이었지만,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즐거움이 있었어요. 그동안의 중압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잠깐이나마 해방감을 느꼈어요.

처음으로 라이브를 해본 경험도 좋았어요. 라이브를 위해서 다 같이 고민해서 신곡을 만들었던 것부터, 신곡을 연습하고, 각자의 가사를 모아서 작사했던 경험, 전부 즐거웠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이브를 할 때의 그 두근거림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 되었어요. 악기를 연주하는 게 이렇게 즐겁구나,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이렇게 기쁜 일이었지. 새로운 경험과 예전의 기억이 뒤섞여서, 그럼에도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라이브를 하기 직전에는 로터리 몰의 소탕 작전이 있었죠. 카야모리 씨가 저를 향해 지원을 요청하셨어요. 사령관님께서 제게 지휘를 맡기셨죠. 그때는 당황했지만, 저의 도움으로 캔서를 물리칠 수 있어서 기뻤어요. 저라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다시 한 가지 찾을 수 있어서, 저는 조금이나마 가슴을 펼 수 있었어요.

그렇게 조금씩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카야모리 씨 덕분에.

카야모리 씨가 말해주셨죠. 전혀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 답답해질 때는 "무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그렇게 하나하나 저에게 힘이 되는 말과 행동을 해주셔서, 카야모리 씨와 함께 있는 기억으로 저는 더욱 강해질 수 있었어요.

카야모리 씨가 해주신 말들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하이퍼사이메시아니까, 당연한 일이겠죠. 하지만 하이퍼사이메시아가 아니었더라도 카야모리 씨가 하신 말은 전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물론 평범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말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할 순 없으니까,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겠죠.

그렇다면 저는 하이퍼사이메시아인 자신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와 함께한 카야모리 씨의 모습을 전부 기억할 수 있어서. 카야모리 씨가 제게 준 희망을 남김없이 가져갈 수 있어서. 한때는 부모님의 말씀만 듣고 좋은 일이구나 생각했던 일을 지나, 기억에 상처받고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던 시기가 있었더라도, 이제는 저를 스스로 긍정할 수 있어요.

전부 카야모리 씨 덕분이에요.

지금 제 눈앞의 카야모리 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어요. 눈부신 은하수, 그 강을 사이에 두고 견우와 직녀가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하죠. 건널 수 없는 강을 두고 헤어져야만 했던 연인을 생각하면, 지금 이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만남은 어찌 보면 기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카야모리 씨와 만날 수 있었던 기적 같은 일을, 저는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요. 무척이나 설레고 두근거리고 카야모리 씨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이 따뜻해지는 이 감정을, 저는 아직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지금은 단지 이 말만을 전할게요.

고맙다는 말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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