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쿠라] 벼알이 익는 계절
※ 헤븐 번즈 레드 3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수확의 계절이다.
츠키시로 모나카가 양말을 벗고 장화를 신었다. 그리고 팔을 걷어붙인 츠키시로가 낫을 쥐었다. 부쩍 쌀쌀해진 바람이 벼 이삭을 흔든다. 사각거리며 벼가 살랑이는 소리가 그늘진 숲 사이를 헤쳤다. 좁은 논이라 귀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실제로 경작하는 넓은 논에서는 굉장한 소리가 들리겠지. 츠키시로는 눈을 감고 쿠라의 논이 내는 소리에서 드넓은 이상 속의 소리를 상상했다. 쿠라가 바라던, 어디까지나 황금색으로 펼쳐진 풍경 속에서라면.
이윽고 츠키시로는 논으로 들어가 벼 이삭을 걷기 시작했다. 벼 베이는 소리와 철벅거리는 논의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인기척, 이따금 지저귀는 새의 울음만이 공기 중을 떠돈다. 어디선가 백합의 향이 느껴졌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아스라이 스쳐 가는 감각들 속에서 츠키시로가 허리를 숙이고 벼를 쥐어 낫으로 잘라낸다. 그렇게 츠키시로는 묵묵히 벼를 걷었다.
쿠라는 츠키시로가 이 작은 논을 구해준 뒤부터 종종 츠키시로에게 자신의 논을 보여주었다. 쿠라가 손으로 꼭꼭 눌러싼 주먹밥과, 쿠라의 바람으로 츠키시로가 끓인 된장국을 논 옆에 함께 앉아 먹었다. 쿠라가 누구에게도 논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츠키시로가 논이 없어지지 않도록 해준 이후로 쿠라의 안에서 자신도 이 논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받아들인 것인가, 츠키시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쿠라가 만든 주먹밥은 언제나 맛있었다. 그런 감상을 솔직하게 전하면 쿠라는 흐뭇해하면서도 무언가 부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쿠라는 항상 무엇을 부족하다고 느끼는가 말해주지 않고, 그저 다리까지 닿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렇게 쿠라는 채워지지 않는 미소를 짓고 논을 바라보았다.
올해 농사는 잘될 것 같아. 따스한 눈으로 쿠라는 나지막이 말했다. 잡초도 벌레도 전부 손봐주었으니까, 남은 건 벼가 익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네. 그렇게 말하는 쿠라는 행복해 보였다. 아련한 희망의 빛으로 채워진 벚꽃색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츠키시로에게 봄볕과 같은 따스함을 전해주었다.
여기 벼가 다 익으면 츠키시로 쨩에게 밥을 해줄게. 쿠라가 츠키시로를 돌아보며 웃었다. 물론 시라카와나, 다른 30G 부대원들에게도 대접해야지. 쿠라의 따스한 눈동자가 다정한 색으로 츠키시로를 담는다. 하지만 제일 첫 번째는 츠키시로 쨩에게 줄게. 포근한 목소리로 쿠라는 츠키시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츠키시로를 볼 때면 쿠라의 눈은 부드러운 빛을 띤다. 츠키시로도 언제나 그것을 느껴왔다. 그러나 츠키시로는 단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쿠라의 밥은 항상 맛있으니까, 기대하고 있지. 그런 말만을 전할 뿐이었다.
벼 그루터기만이 남은 논 옆에 츠키시로가 마지막 볏단을 쌓았다. 사츠키에게는 미리 말해두었다. 상점에 가서 츠키시로는 물었다. 벼를 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묻자, 사츠키는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운 이를 보는 듯한 시선을 하는 사츠키를 츠키시로는 묵묵히 서서 마주 보았다.
도정이라면 제가 아는 업자가 있어서요. 제게 맡겨주시면 바로 밥을 지을 수 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말하지 않아도 이유를 아는 사츠키에게 더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고맙다, 사츠키. 그저 쿠라의 바람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사츠키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수확한 벼 이삭을 들고 걷는 동안 시선이 모여드는 것을 츠키시로는 느낄 수 있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오가는 것을 알면서도 츠키시로는 묵묵히 볏단을 이고 상점으로 갔다. 어쩌면 논의 위치가 들킬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쿠라에게 미안했지만, 숨기는 법을 츠키시로는 잘 몰랐다. 논은 으슥한 곳에 있으니, 거기까지 시선이 닿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곳은 쿠라의 소중한 장소니까. 지금에 와서도 계속 소중한 곳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사츠키가 벼알을 도정해서 먹을 수 있는 쌀로 만들어주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츠키가 전해준 쌀을 들고 츠키시로는 카페테리아로 갔다. 밥을 짓고 주먹밥을 만드는 방법은 쿠라에게 배웠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쿠라의 맛은 나지 않았다. 요리도 결국 스킬이니까. 쿠라는 자부심이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곧 다정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되어 츠키시로에게 말했다. 그래도 츠키시로 쨩이라면 금방 만들 수 있게 될 거야. 츠키시로 쨩이 끓인 된장국은 이렇게나 맛있는걸.
"츠키시로가 저녁을 만들어 준다니 왠지 오랜만인걸."
"츠키시로 씨도 꽤나 요리를 잘하니까 기대되네요."
"잘 먹겠습니다, 츠키시로 씨!"
시라카와가 자리에 앉고 차례로 30G 부대원들이 카페테리아의 식탁에 앉았다. 갓 지은 밥으로 만든 주먹밥에서 따스한 기운이 올라오고 좋은 냄새를 풍기는 된장국에는 김이 피어오른다. 30G 부대원들은 너도나도 손을 뻗어 주먹밥을 집어 들었다.
"이 맛은…! 훈제 연어군요!"
"날치알이 씹혀요! 맛있네요."
"이건 매실장아찌인가. 왠지 그리운 맛인걸."
각자의 감상을 쏟아내며 30G는 식사를 계속했다. 츠키시로도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입안에 씹히는 고소한 감칠맛. 밥알의 식감이 독특한 풍미를 준다. 맛있다. 그러나 쿠라의 맛에는 이르지 못했다. 츠키시로는 턱을 움직여 으깨지는 밥알을 꼭꼭 씹었다. 단단히 뭉쳐 독특하게 느껴지는 식감을 음미하며 주먹밥을 삼켜갔다.
쿠라는 곧 츠키시로가 쿠라를 따라잡을 거라고 말했지만 츠키시로는 그런 날은 언제까지고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쿠라의 레시피는 자주 옆에서 봐왔고 쿠라도 직접 가르쳐주곤 했지만, 츠키시로는 쿠라가 해주는 요리를 자기 손으로 만들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쿠라가 없어진 뒤로 30G는 대화가 끊기는 일이 잦았다. 지금도 처음의 감상이 잦아들자,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30G와 마주 앉아 츠키시로는 묵묵히 주먹밥을 씹었다. 씹고 으깨서 목구멍으로 넘겨 삼켰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턱 아래로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가을이 지나 겨울을 건너 다시 봄이 되면, 말랐던 논에 다시 물을 채우자.
물이 넘실거리는 논에 모를 심자.
그리고 다시 벼를 걷자.
쿠라는 더 이상 없어도 쿠라의 논에는 다시 모가 자라고 벼가 익어 이삭이 넘실거릴 수 있도록.
영원히 황금색 물결이 쿠라의 소중한 장소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츠키시로는 그것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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