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 번즈 레드

[헤번레 / 이치아오] 칠석

sn by 송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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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과 "Requiem for the Blue"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른한 몸을 누군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흔든다. 이치고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가 자신을 흔드는 손길의 주인을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모르는 척 침대에 늘어져 있고 싶은 마음을 죽이고 눈을 뜬다. 이치고의 눈에는 최고로 귀여운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곧 눈앞의 얼굴이 활짝 웃었다.

"이치고 씨. 좋은 아침이에요!"

"응, 그렇네. 아오이는 잘 잤어?"

"네, 덕분에 잘 잤어요."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 이치고에게 아오이가 다정하게 답했다. 단순히 안부 인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하는 말이라는 걸 이치고는 안다. 아오이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불러오는 악몽으로 잠을 설치곤 했다. 그러나 제대로 잠들 수 없는 밤마다 이치고가 곁에서 손을 잡아준 뒤로 아오이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포근한 미소로 바라보는 아오이에게 씨익 웃어 보인 이치고가 작은 하품을 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 정말 일어나야지. 빨리 일어나라며 뾰로통해지는 아오이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얼굴이 하나도 무섭진 않지만,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건 어린애나 할 짓 아닌가. 자신의 체면을 깎아 먹고 싶지 않았던 이치고는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졸린 눈을 비비며 침실을 나서는 이치고 옆에 나란히 따라붙으며 아오이가 말했다.

"오늘 아침은 베이컨과 에그샌드위치예요."

"간단한 거라 실패하진 않았겠네."

"다른 요리도 맛있게 만들 수 있게 되어야 할 텐데요…."

"걱정하지 마, 나는 아오이가 만들어준 음식은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저번에는 제가 만든 된장국을 소금 진흙탕이냐! 라고 했잖아요."

"그, 그건 얼떨결에 나온 거야. 어쨌든 다 먹었잖아."

"저도 빨리 요리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래, 맨날 맛없는 요리만 먹어서 미각이 마비되고 싶진 않아."

이치고의 매정한 평가에 결국 아오이가 새치름하게 이치고를 노려봤다. 부루퉁해져서 볼을 부풀린 모습에 이치고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모습도 귀엽다니까.

"정말, 이치고 씨는 바보."

이치고가 전혀 미안해하지 않자, 아오이가 한층 토라져 버렸다. 자신을 흘겨보는 아오이에게 마침내 이치고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밥이나 먹자고."

"또 그런 식으로 넘어가요?"

"우와, 진짜 맛있어 보인다. 잘 먹겠습니다!"

이치고가 과장되게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덥석 집어 들어 먹기 시작했다. 아오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이번에는 정말 실패하지 않았네. 맛있게 먹는 이치고를 아오이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두 사람 다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전직 킬러라는 과거는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막 만났을 무렵 이치고의 태도는 무척이나 매몰차서, 아오이는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이치고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이제 아오이는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이치고를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귀엽다고 하면 이치고 씨는 질색할 테니까 속으로만 생각하지만. 지금만 해도 싱글벙글한 이치고를 아오이는 따스한 눈길로 바라봤다.

"뭔가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거야?"

"제가요?"

"그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잖아."

"이치고 씨가 제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으니까요."

"겨우 그걸로 그렇게 행복해하냐고."

이해가 안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치고를 아오이는 그저 웃어넘겼다. 이치고 씨에게는 비밀이에요. 이치고는 짐작도 못할 감정을 속으로 삼키며 아오이가 이치고에게 자신의 베이컨을 덜어주었다.

"너무 안 먹는 거 아니야?"

"저는 배불러요. 그리고 이치고 씨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저도 배불러지니까요."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사양은 안 할 건데. 나중에 배고프다고 후회하지 마."

"그럼요."

이치고가 아오이가 준 베이컨까지 남김없이 해치웠다. 포크를 내려놓은 이치고가 아오이의 접시까지 한 번에 들어 싱크대로 옮겼다.

식사가 끝나면 두 사람의 설거지 시간이었다. 이치고가 수세미질을 한 그릇을 넘겨주면 아오이가 물로 뽀득뽀득 헹구어냈다. 솨아아,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배경으로 이치고와 아오이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눈다. 스모모, 뱌코, 히이라기와 히구치, 신경이 쓰였던 머리끈, 부쩍 더워진 날씨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 분의 설거짓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서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설거지는 끝나버린다. 손의 물기를 털며 달력을 본 아오이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칠석이네요."

그 말에 이치고가 뜨끔 어깨를 움츠렸다. 곤란한 표정의 이치고를 아오이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이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깜짝선물을 하려고 했는데, 아오이가 눈치채는 것이 더 빨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일어나서 아오이가 깰 때를 맞춰서 주었어야 하나. 아침이 빠른 아오이에게는 절대 고를 수 없는 선택지를 아쉬워하며 이치고가 머리를 긁적였다. 머쓱한 얼굴로 이치고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아오이."

"와아, 고마워요, 이치고 씨."

이치고의 축하한다는 말에 아오이가 바로 기뻐했다. 아직 선물도 안 줬는데, 말 한 마디에 이렇게 좋아하기냐. 미리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치고는 양심이 아파서 아오이를 똑바로 마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사랑하는 아오이의 생일에 선물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이치고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정작 무엇을 주어야 좋을지 고민하느라 생일 전날까지 끙끙 앓았던 건 아오이에게는 비밀이었다. 이치고가 애써 고른 선물을 꺼내 아오이에게 건네주었다. 두 손안에 담기는 작은 선물 꾸러미를 아오이가 기대에 찬 눈으로 흔들어보았다.

"선물은 뭔가요?"

"그런 걸 먼저 말해버리겠냐. 직접 열어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오이가 꾸러미를 풀었다. 귀여운 토끼가 그려진 파란색 선물 포장지 안에서 나비(Narvy) 장식이 달린 머리끈이 나왔다. 선물의 정체를 확인한 아오이가 바로 탄성을 질렀다.

"나비 머리끈! 귀여워요."

"너라면 귀여운 것도 어울리겠지 싶어서 골랐어. 이제 여름이잖아. 그걸로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 시원하게 묶고 다녀."

"고마워요. 잘 쓸게요."

망설이지 않고 아오이가 머리끈을 손목에 껴서 목덜미에 닿는 머리카락을 모았다. 이치고는 드러나는 아오이의 목선을 훑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저 머리를 묶는 것뿐인데 얼굴이 홧홧해졌다. 뭐 하는 짓이냐, 미나세 이치고. 고작 이런 거 가지고 부끄러워해? 이상한 생각을 털어낸 이치고가 다시 아오이를 쳐다봤다. 머리를 묶은 아오이가 이치고를 향해 밝게 웃었다.

"어울려요?"

"어, 어…."

진심으로 잘 어울린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치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멍청한 표정 지은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치고가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치고의 시도가 무색하게, 눈에 보이는 이치고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워서 아오이는 웃음부터 터뜨리고 말았다. 그만 웃어. 완전히 새빨개져서 툴툴거리는 이치고 때문에 아오이는 웃음이 새는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훔쳤다.

"이치고 씨는 정말…."

"엉? 뭐가?"

"아니에요. 감사해요. 이번 생일도 좋은 기억이 될 것 같아요."

모든 기억을 새기고 살아갈 아오이에게 그런 감상이라니, 나름 선방한 것 같다. 쑥스러움을 숨기듯 이치고가 아오이의 어깨를 주먹으로 살짝 쳤다. 아오이가 이치고의 주먹이 닿았던 어깨를 문질렀다. 이런 행복을 항상 주고 싶었는데. 서로를 신뢰하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유대를, 지금이라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치고는 흐릿한 과거의 후회를 마음속에 가라앉히며 아오이의 손을 잡았다.

-

베란다의 전면 창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이친다. 이치고와 아오이는 소파에 앉아 서로에게 기대어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느긋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바닥에 쏟아진 빛이 물살처럼 일렁였다. 따가운 햇빛에도 실내는 시원했다. 날이 눈부시도록 맑았다. 기분도 덩달아 밝았다. 아오이가 나른한 목소리로 이치고에게 속삭였다.

"칠석인데도 날이 이렇게 맑네요."

소리가 주는 진동이 아오이가 기댄 어깨를 타고 이치고에게로 전달된다. 편안한 울림이 깜박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을 잘라 액자 속에 가둔 것처럼,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요람 같은 볕에 싸여, 이치고는 아무런 의식 없이 느슨한 사고로 대답했다.

"글쎄. 이제 견우와 직녀도 재회가 울만큼 감동적이지 않은 거 아냐."

이치고의 말에 어깨에 닿아있던 아오이의 고개가 가볍게 뒤척였다. 부드러운 흑발이 이치고의 목을 간질였다. 이치고가 간지럼을 타고 목을 움츠리는 사이 아오이가 느리게 말했다.

"그게 정말이라면, 조금은 슬프네요. 전설에서는 그렇게 애틋했는데."

"시간은 못 이기는 거겠지."

"역시 그런 걸까요…."

아오이의 목소리가 어쩐지 우울하게 들려서, 이치고가 몸을 곧추세웠다. 이런, 잘못 말했나? 아오이가 신경 쓰는 것 같자, 그제야 이치고는 아차 싶었다. 허리를 바로 편 이치고 옆에서 아오이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이치고를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이치고가 애써 밝은 티를 내며 아오이에게 제안했다.

"그보다 축제 가보지 않을래? 가서 소원도 적고. 어때?"

이번에는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는지, 이치고가 꺼낸 화제를 듣고 아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재밌을 것 같아요."

"그치? 어서 가보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이치고가 아오이의 양손을 붙잡고 일으켰다. 늘어져 있던 아오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이치고가 끌어올리는 대로 몸을 세웠다.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갈 텐데."

"너 부지런해도 졸릴 때는 기운이 없잖아. 일어나는 거 도와주는 것뿐이야."

이치고가 흐느적거리는 아오이의 양팔을 붙잡아 들어 올리니 아오이가 그대로 이치고의 품에 안겼다. 이치고의 몸에 폭 기대자마자 아오이가 이치고를 와락 끌어안았다. 뭐야, 나한테 기대서 자지 마. 자는 거 아니에요. 그런 것치곤 몸에 힘이 없는데.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마루에 울려 퍼진다. 그 뒤로도 한참 실랑이하고서야 둘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

"여기 있는 거 종류별로 다 주세요."

아오이를 이끌고 축제를 보러 나온 이치고는 제일 먼저 노점상에게로 가 지갑부터 꺼냈다. 아오이는 소녀니까 단 걸 좋아하겠지. 단순한 마음으로 이치고가 첫 타깃으로 삼은 것은 과일사탕 가게였다. 무리한 주문을 하는 이치고를 아오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다 먹을 수 있을까요?"

"못 먹겠으면 한입씩만 먹고 남겨.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이치고 씨 살쪄요!"

깜짝 놀라 소리치는 아오이를 무시하고 노점상이 건네준 과일사탕을 이치고가 받아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오이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치고가 아오이를 향해 고르라는 시늉으로 과일사탕을 내밀었다.

"뭐부터 먹을래?"

"그럼…, 역시 사과일까요."

"사과 잘 어울리네. 미인은 사과를 좋아한다잖아."

"미인까지야…. 그럼 잘 먹겠습니다."

아오이가 작게 사과 사탕을 베어 물었다. 앙증맞은 잇자국이 동그란 사탕 위에 남겨졌다. 얜 왜 이렇게 토끼 같냐. 겁 많은 것도 그렇고.

"이치고 씨는요?"

"아, 그럼 나도 먹을까?"

이치고도 과일사탕을 한입 베어 물었다. 딱딱한 사탕이 이에 눌어붙었다. 겨우 이를 떼어낸 이치고가 화를 냈다.

"뭐야, 이거?! 완전 딱딱하잖아! 이걸 먹으라고 만든 거야?"

"조금 딱딱하긴 하죠. 조심해서 드셔야 해요."

"이게 조금 딱딱한 거야? 너 이가 진짜 튼튼하네."

"하루에 세 번 잊지 않고 양치했으니까요. 이치고 씨도 신경 써주세요."

"젠장, 이런 걸로 질 줄은 몰랐는데."

투덜거리는 이치고 옆에서 아오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치고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 취급하고 있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요.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럼 다행이네."

탐탁지 않아 하던 이치고가 아오이의 한마디에 인상을 풀었다. 이치고로서는 나름대로 딱딱한 머리를 굴려서 여기까지 온 거였는데, 즐기고 있다니 정말 한시름 놓았다. 아오이는 그런 이치고의 모습에도 미소를 지었다. 예전이라면 보기 힘들 얼굴을 이치고는 마음속 깊이 감사했다.

-

소원을 건 조릿대가 바람에 하느작거린다. 색색의 바람들이 녹색으로 푸른 가지에 걸려 나부꼈다. 아오이가 손을 등 뒤에 가지런히 모으고 그 소원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그 뒤를 이치고가 따라가고 있었다.

아오이는 다른 사람들이 적은 소원들을 유심히 읽으며 지나갔다. 남이 빈 소원 같은 게 궁금한가. 타인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생존을 먼저 추구해 왔던 이치고에게는 생소한 시선이었다. 킬러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죽이거나, 죽을 타인을 궁금해하고 알아가는 것은 불필요하고, 어떤 면에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거기서 밴 습관은 그러한 삶의 방식을 택할 필요가 없어진 지금도 남아있었다. 아오이와 동생 스모모, 그 외 몇몇 사람들은 예외였지만.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소원 종이를 들여다보는 아오이가 낯설었다.

이치고가 아오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치고 씨는 무슨 소원을 빌 건가요?"

"나?"

이제야 아오이의 호기심이 이치고에 이르렀나 보다. 말을 건네면서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죽 나아가며, 조릿대의 잎을 손가락으로 스치는 아오이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이치고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당연히 스모모가 친구도 사귀고 평범한 생활을 하기를 바라지. 제일 친한 친구가 호랑이인 뱌코인 건 너무하잖아."

"그러는 이치고 씨도 친구, 별로 없잖아요."

"너, 시비 거는 거냐?"

그제야 아오이가 쿡쿡거리며 이치고를 돌아보았다. 아오이의 만면이 활짝 펴져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아스라함에 이치고가 우뚝 멈춰 섰다.

"장난이에요. 그치만 이치고 씨에게도 좋은 친구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언젠가 눈을 감을 때, 아, 행복한 삶이었구나,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거, 한참 뒤의 일이잖아.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고."

"그럼 다행이네요."

아오이의 푸른 눈에 이치고가 어린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눈에도 깊은 바다가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이치고는 멈춰 서 있었다.

"제 소원은요, 모두를 지키는 거예요."

그 한마디가 방아쇠가 된 것처럼, 이치고 안에서 잊고 있었던 기억이 의식으로 부상한다. 모두를 지키고 싶었던 소녀. 그래서 최후에서야 그 소원을 이룬 소녀. 그래, 이제 아오이 에리카는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저 환상이었다. 환상이라서 이렇게 눈부신 꿈이 될 수 있었던 거였다. 과거에는 후회만 남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꿈을 꿨다.

두 손을 뒤로 감추고, 환상 속의 소녀답게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아오이는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지킬 수 없었지만, 넓은 황야에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이 서 있었지만, 이번에는 지킬 수 있었어요."

알고 있어. 이치고가 눈살을 찌푸렸다.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 작은 몸으로 무리해 가며, 부대장이라는 책임을 혼자서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버텨왔다. 그러니까 더는 말하지 마. 이치고는 소리치고 싶었다. 다 알고 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고, 그저 뜨거운 눈물만이 흘렀다. 뺨이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를 거칠게 문질러서 이치고는 필사적으로 아오이를 눈에 담았다. 이제는 더는 볼 수 없을 테니까.

"아까, 시간이 흘러서 더는 애틋해지지 않아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죠."

바보 같은 말로 아오이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그런 말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 감정도 가벼워진다. 미나세 이치고는 그걸 인생으로 느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치고는 뜨거운 감정을 삼켰다. 너는 잊지 못할 거야. 낙인처럼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서,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담아 이치고는 힘껏 외쳤다.

"바보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뿐만 아니라, 뱌코도, 스모모도, 히이라기도, 히구치도, 널 절대 잊지 않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갈 거야."

"그럼 다행이에요."

아오이의 두 눈이 감긴다. 내려가는 눈꺼풀의 움직임도 마음에 새겨졌다. 이윽고 긴 속눈썹이 드리운 눈이 초승달 같은 호선을 그렸다.

"그래도 이제는 너무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다들 행복해지길 바랄게요."

이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솟아오르는 눈물이 시야를 흐려도 이치고는 필사적으로 아오이를 눈에 새겼다.

첫눈에 반했던 모습, 자신이 일으켜주고 싶었던 사람, 자신과 모두를 지키고 떠나간 과거.

아무리 붙잡아두려고 해도 시간은 눈앞을 일그러뜨리고, 헤어짐을 불러왔다. 아오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치고는 그 모습을 계속 마음속에 새겼다.

-

눈을 떴을 때, 이치고는 기숙사 방에 있었다. 아직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이치고는 아오이의 침대를 눈으로 훑었다. 주인을 잃은 자리는 비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치고는 텅 빈 이부자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안녕, 아오이. 이제 네가 없어도 내가 너를 이을게. 모두가 다치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지킬게. 그러니까 너는 부디 편안히 잠들기를.

서늘한 이불에서 문득 온기가 느껴진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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