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 번즈 레드

[헤번레 / 이치아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쓰자

sn by 송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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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븐 번즈 레드 2장 및 이벤트 스토리 Requiem for blue 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스토리 본 지 한참 되어서 설정 충돌 있을 수 있습니다.

어슴푸레한 숲 사이로 비가 내렸다. 봄이건만 봄비 같은 보슬보슬한 비가 아니라 채찍처럼 내려치는 장대비였다. 빗줄기에 시야가 흐리다. 젠장. 이치고는 작게 푸념 같은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31B 부대원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지금과 같은 행군 속도라면 헬기 합류 시각은 가볍게 넘을 듯했다.

"주변 경계를 늦추지 말고 계속 전진하세요. 너무 늦으면 어두워져서 행군이 힘들어질 수 있어요."

"그딴 건 우리도 알고 있다고, 부대장."

습관적으로 날카롭게 반응했지만 이치고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번 임무가 길어진 원인은 명백히 자신의 판단 착오 때문이었다. 원래 이번 31B의 경계 임무는 이렇게 숲 깊숙이까지 탐색할 예정이 아니었다. 일상적인 2시간 가량의 소탕 작전이었지만, 고작 이 정도로 몸이 풀리겠느냐며 큰소리친 이치고가 더 깊숙이 가보자고 도발한 것이 1시간 전. 아오이는 이치고의 자만에 원래 임무는 거기까지 가는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평소처럼 스모모와 이치고의 비웃음에 움츠러들어 모든 것은 이치고의 뜻대로 되었다.

거기서 미나세 자매의 일탈 정도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정해진 루트를 벗어나자마자 하늘은 세찬 비를 쏟아냈다. 빗물에 젖어 체온은 빠르게 떨어지고, 체력 또한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비에 가려진 사각에서 언제 캔서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31B는 힘겨운 행군을 해야 했다.

평소라면 맨 뒤에서 서서 부대원들을 지켜봤을 아오이가 앞장서서 길을 만들었다. 이치고는 모처럼 보이는 아오이의 부대장다운 모습에 감탄하기도 어려웠다. 이때껏 일상적으로 해왔던 반항도 이번엔 지나쳤다. 아오이를 부대장답게 해서 31B를 부대로 결속시킨다는 뜻도 여기서 개죽음당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을 테다. 이치고는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자책을 애써 삼켰다.

"8시 방향, 캔서 발견! 엄호 부탁합니다!"

이치고가 반응하기도 전에 아오이가 재빠르게 세라프를 날렸다. 방어막 위로 스파크가 튀었다. 원거리 특화 캔서였다. 이치고가 세라프를 겨눴다.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고. 욕하고 싶어도 자신을 탓하는 수밖에 없어서, 이치고는 입술만을 깨물며 캔서를 공격했다. 시야가 어둡고 집중력이 흐려진 상태라서, 자칫 잘못 조준하지 않도록 이치고는 바짝 긴장했다.

"이거나 먹어랏!"

이치고가 악에 받쳐 캔서를 마구잡이로 쐈다. 거센 공격에 캔서가 몸을 뒤틀다가 쓰러졌다. 쓰러뜨렸나? 이치고는 세라프를 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치고 씨! 아직이에요!"

아오이의 다급한 외침에 반응할 새도 없이 캔서의 공격이 이치고를 정통으로 향했다. 이런, 디플렉터 잔량이 얼마나 남았지? 그런 생각이 스치기 무섭게 디플렉터가 깨지면서 뜨거운 고통이 이치고의 팔을 파고들었다.

"이치고 씨!"

"언니!"

"크르릉!"

당했다는 낭패감이 들기도 전에 이치고의 의식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으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이치고가 천장을 바라봤다. 여기는…, 병실인가? 싸늘한 병원의 냄새를 맡으며 이치고가 몸을 일으켰다.

"언니! 일어났냥?"

"크릉!"

"안타깝게도 죽지는 않았어. 사고가 일어났어도 좋았을 텐데."

"다쳐서 겨우 일어난 사람한테 그런 뒤숭숭한 말 하지 마세요! 이치고 씨, 괜찮으세요?"

이치고가 둔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가. 캔서한테 공격을 받고원으로 이송된 건가. 이치고가 자유롭지 않은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왼팔에는 깁스가 되어 있었다. 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왼팔 말고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몸을 살피는 이치고에게 스모모가 말했다.

"다행히 공격을 직접 받은 왼팔 외에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고 의사가 말했다냥. 2주 정도면 왼팔도 다 나을 거라고 했다냥."

"2주면 너무 긴 거 아냐?"

"캔서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2주면 다행인 거죠."

"크르르릉."

"아쉬우면 의식불명까지 가도 나는 좋은데. "

"그러니까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시라니까요!"

왁왁하며 투닥거리기 시작한 코즈에와 세이카에게서 눈을 돌린 이치고가 스모모에게 물었다.

"아오이는?"

아오이의 행방을 묻는 이치고를 바라보는 스모모의 낯빛이 흐려졌다. 알만하다는 듯이 이치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긴, 매일 반항하고 비웃고, 오늘만 해도 부대 전원을 죽일 뻔한 머저리한테 병문안 올 만한 의리 따위, 아오이에겐 없겠지."

바랄 걸 바라야지, 미나세 이치고. 이치고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치고가 일탈행위를 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런 부대원에게 애써 얼굴을 비추려고 하는 것도 아오이에겐 힘겨운 일일 테다.

물론 이치고도 좋아서 그런 괴롭힘을 하는 건 아니었다. 아오이 에리카는 31기 부대가 재편성된 뒤로도 죽은 29기 부대원들에 대한 기억으로 어둠 속에서 떨고, 악몽에 제대로 잠들지조차 못했다.

하지만 아오이는 이제 새로운 31B의 부대장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고는 아오이가 지난 기억에만 붙들려 있지 않도록, 31B를 제대로 이끌 수 있는 부대장이 될 수 있도록 아오이를 채찍질했다. 그것이 아오이에 대한 반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내막을 모르는 아오이에게는 단지 괴롭힘으로밖에 느껴지지 않겠지.

애초부터 이치고는 아오이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단지 의연해진 아오이의 뒷모습을 받쳐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병실에 있을 때조차 와주지 않는 건 조금 쓸쓸하네. 아오이의 심정을 이해하는 한편으로, 그래도 조금은 자신을 봐주길 바랐다는 이기적인 감정을 이치고는 내리눌렀다. 킬러로 살아왔으면서 무슨 정을 바라는 거냐, 나는. 이치고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이치고를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스모모가 말했다.

"그게 아니다냥…."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오이는… 지금 밖에 있다냥.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면서…."

"뭐?! 어째서?!"

"아오이는 언니가 다친 게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냥. 언니를 볼 낯이 없다고, 자기에 대한 벌이라고 하면서…, 계속 혼자서 비를 맞고 있다냥."

"무슨 그런…, 멍청이가!"

스모모에게 사정을 들은 이치고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단순히 화가 났다기보단, 자책과 안쓰러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고의 삶은 분노로 가득했고, 상대에게 호소하기보다 노성을 지르는 것이 더 편했다. 그러니 이치고는 자신이 아오이의 바보 같음에 화가 나서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바보에게 한 소리 해주기 위해 이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앗, 이치고 씨!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해요!"

"지금 그럴 때냐고! 당장 그 녀석을 따끔하게 혼내주겠어!"

"그러다가 쓰러지면 나를 부르라고. 임사체험에는 흥미가 있거든."

"지금 그럴 때가 아니고 이치고 씨를 말려야 한다니까요! 아, 가지 마세요, 이치고 씨!"

말리는 코즈에를 뿌리치고 이치고가 달려 나갔다. 하얀 복도를 나와 기지 내를 달린다. 아오이가 갈만한 곳은 잘 모른다. 아오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싫어하는 건 뭔지, 무엇을 즐기고 무얼 꺼리는지, 그런 기호는 하나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친해지기에 우리는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하지만 동료를 잃은 아오이가 무엇에 집착하는지는 알았다. 하이퍼사이메시아인 아오이는 조금이라도 동료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부터 피해 왔다. 그런 한편으로 더는 동료를 잃지 않도록 강해지는 것에 집착했다.

이치고는 아레나 정문 앞 벤치에서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오이에게 다가갔다. 손에는 아무렇게나 집어 온 우산을 들었다. 하지만 펼치지 않은 채로 이치고 또한 세차게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비는 그 아래 서 있는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린다. 축축하게 비에 젖어 이치고는 아오이를 바라봤다. 아오이는 고개를 들고 빗방울을 얼굴에 그대로 맞고 있다가, 이치고의 발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내려 이치고를 마주 보았다.

"이치고 씨."

이치고가 멀쩡한 오른손으로 아오이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비에 젖은 몸은 차가운데 이상하게 머리가 뜨거웠다. 이치고가 아오이를 매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그렇게 비나 맞고 있으니까, 꼴이 아주 보기 좋은데, 부대장 씨."

"아오이의 탓이에요."

물에 젖은 것처럼 눅눅한 목소리가 아오이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다 죽어가는 듯이 가냘픈 목소리에 이치고의 얼굴이 무참하게 찡그려졌다. 아오이는 눈을 내리깔고 고해성사를 하듯 나지막이 계속했다.

"아오이가 좀 더 잘 지휘했다면, 아오이가 제대로 모두를 지켰더라면…."

곧 아오이의 푸른 눈이 흐려졌다. 아오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또 그때를 떠올리고 있는 거다. 하이퍼사이메시아인 아오이는 곧잘 예전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가 끝나지 않는 고통을 재생시켰다. 빠드득 이를 간 이치고가 우산을 내팽개치고 오른손으로 아오이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아오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윽!"

"적당히 하라고, 아오이!"

이치고가 따갑게 일갈했다. 이치고의 손가락이 아오이의 어깨를 아프게 짓눌렀다. 파고드는 고통으로 아오이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야 제대로 이치고를 바라보는 푸른 눈에 대고 이치고가 소리쳤다.

"그래,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모든 걸 혼자 책임지려고 하니까! 부대원들을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우리를 지휘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거센 빗소리 속에서 이치고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 외침이 아오이에게 닿기를 바라며.

"그러니까 뭐든지 혼자서 떠맡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도 의지하라고, 아오이!"

초점이 돌아온 푸른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이치고를 담았다.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이치고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우리를 보는구나. 이치고가 서서히 아오이의 어깨를 놓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리고, 빗줄기에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이치고와 아오이는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물에 젖은 발소리가 이치고에게로 점점 다가왔다. 느리게, 하지만 꾸준히 거리를 좁힌 아오이가 내팽개쳐진 우산을 주워 들고 활짝 펼쳤다. 아오이가 이치고에게로 우산을 기울였다.

"이치고 씨, 다쳤는데 이렇게 비까지 맞으면 안 돼요."

"그럼 내가 비 맞을 일 없게 하라고. 아아, 어떤 바보 같은 부대장 때문에 쫄딱 젖었네."

"병원까지 데려다줄게요."

아오이가 이치고 옆에 서서 우산을 들었다. 찰박이며 비에 젖은 거리를 두 사람이 걸어간다. 이미 비를 한참 뒤집어써서 우산은 아마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쪽도 그것을 지적하진 않았다. 나란히 스치는 어깨가 어쩐지 뜨거웠다. 진짜 심하게 앓을 것 같네. 이치고는 언뜻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온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빗줄기는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야위어간다. 언제쯤, 이 비가 그칠지를 가늠해 보는 이치고에게 아오이가 말했다.

"노력해 볼게요."

"응?"

"자신은 없지만, 다시 부대장이 되었으니까, 최선을 다할게요."

돌아본 아오이는 그저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뺨이 창백했다. 그럼에도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치고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하게 웃는 것은 이치고에겐 어려워서, 비웃음이나 헛웃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래, 잘 부탁한다고, 아오이."

이 비가 그치면 31B는 좀 더 부대다운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이치고에게는 아직 멀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비가 그치는 때에는 무지개가 뜰 것 같다고 이치고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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