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구유키] 해피 버스데이
※ 프세터에 올렸던 히구유키. 이즈미 유키의 생일은 9월 17일입니다.
기다림은 시간의 낭비다. 더러는 설렘이나 낭만으로 포장하는 한가한 녀석들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 방만이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람을 상대할 가치가 있을까. 그러한 녀석들은 되돌아오지 않는 재화를 무참히 소모하는 벌레와도 같다. 그러니 무슨 이유에서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대를 존중할 필요 따위 조금도 없다. 그렇게 생각해 왔건만.
시계를 보면 어느새 이즈미 유키와의 약속 시간이 10분 정도 지나고 있었다. 평소라면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하는 이즈미였기에 더욱 의아한 일이었다.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으면 적어도 늦는다는 연락 정도는 줄 수 있을 텐데. 이즈미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나 드문 일이었기에 불의의 사고에 잠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그 이즈미가 부주의하게 굴어 사고를 일으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은 마찬가지였다.
한 번 더 정각을 지나고 있는 시계를 힐끗 보고, 열리지 않는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만약 자신이 늦게 되면 먼저 작업에 착수해도 좋다고 말했으니, 이즈미 없이 목표 작업에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즈미를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묘한 일이었으나 신기하게도 불쾌감은 들지 않았다.
곧 오겠지. 애매하게 작업을 진행해서 나중에 설명하는 것보다 동시에 일을 시작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갔다. 이즈미가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테니. 흘러가는 시간에 느긋함마저 느낀다. 그럼 남는 시간에 커피라도 끓여둘까.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을 때였다.
"미안…! 내가 늦었지?"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는 이즈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니. 아직 작업은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커피라도 끓일 테니 먼저 자리에 앉아."
"정말 미안…! 갑자기 31A 부대원들이…, 아니 그런 건 변명이겠지. 미안해."
초조한 기색으로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이즈미를 쳐다보았다. 이즈미답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약속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은 모습이 보기 나쁘진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이즈미를 빤히 쳐다보면, 생크림과 빵가루로 보이는 무언가가 이즈미의 뺨에 묻었고, 색색의 종이 조각이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 얘기를 듣고 나니 이즈미의 뺨이 상기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인가, 31A는 역시 쓸데없이 사이가 좋군. 거기에 휘말린 이즈미도 썩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약속 시간을 넘겨버린 것을 자책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딱히 이즈미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됐어. 일단은 작업이 중요하니까."
"그래, 바로 시작하지."
커피를 내리려던 것을 그만두고 이즈미에게로 다가갔다. 이즈미는 순식간에 집중해서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역시 사적인 부분과 일 사이에 전환이 빠르다. 그 부분도 이즈미를 좋게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빠르게 이어지는 타자 소리를 듣고 있다가 물었다.
"즐거웠나?"
"응?"
당황해서 이쪽을 쳐다보는 이즈미에게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생일 파티, 즐거웠는지 묻는 거다."
"아, 그 일은 정말 미안해."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순수하게 묻는 거지."
"음…. 솔직히 즐거웠어. 약속만 아니었으면 좀 더 즐기고 싶었을 정도야. 그건 왜 묻지? 31B도 그런 파티를 해보려고?"
"나머지 녀석들이 알아서 하겠지. 난 주최할 마음은 없어."
"그래, 그게 너답네."
이즈미가 작게 웃었다. 평소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 모습에 동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분명 이즈미가 보는 내가 타당할 테니까.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깐 카페테리아에 다녀오지. 먼저 진행하고 있어."
"알았어."
잠깐 의아해하는 듯했지만, 이즈미는 늦게 왔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보내주었다. 물어봤다면 솔직히 대답해 주었겠지. 하지만 묻지 않는 편이 나한테는 더 편한 일이었다.
카페테리아에 온 나는 몇 가지를 주문해서 다시 연구소로 돌아왔다. 이즈미는 다시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이즈미를 두고 커피포트에 꽃잎을 넣고 차를 끓였다. 그리고 우러나온 찻물을 찻잔에 따른다. 히이라기가 기왕이면 예쁜 잔에 마시자며 칭얼거리며 가져온 찻잔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다음에 세라프라도 봐줘야겠군.
짙푸른 차 빛에 잘 어울리는 잔과 레몬을 쟁반 위에 올려 이즈미의 앞에 놓았다. 그제야 이즈미의 시선이 내게로 따라온다. 어째선지 기꺼운 감정이 솟았다. 그런 건 기대, 라고 해도 좋을까.
"차까지 일부러 고마워."
겸연쩍어하는 이즈미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이 입에 닿기 전에 나는 이즈미에게 얇게 썬 레몬을 건넸다.
"아직이야. 이 차는 마법이 있는 차거든."
"마법?"
"레몬즙을 차에 뿌려봐."
"어디."
이즈미가 찻잔 안에 레몬즙을 짜서 떨어뜨렸다.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분홍빛 안개가 찻잔 속에 퍼져나간다. 레몬즙을 뿌리는 것으로 남색에서 분홍색으로 색이 변하는 차다. 그 변화를 바라보는 이즈미의 얼굴에도 밝은 놀라움이 퍼져나갔다. 자연스레 내 입꼬리도 솟는다.
"대단한걸. 이런 것도 화학반응의 일종인가?"
"그래. 산·염기 반응을 응용한 거지."
"화학에 있어서는 일반인에 불과하니까 신기하게 보이네."
즐거운 표정으로 차를 들여다보는 이즈미에게 말했다.
"내가 주는 생일 선물이야."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이즈미가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지?"
"아니, 네게 축하받을 줄은 몰라서."
차를 조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이즈미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고마워,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이야."
고작 그 한마디에 작은 동요와 함께 가슴이 간지러워지는 감각이 올라온다. 나는 감정의 움직임을 숨기려 안경을 치켜올렸다. 잠깐의 변덕이라고 해도 좋을 상황에 훌륭한 반응이었으나 이런 감정까지 느낄 일인가. 답지 않은 수런거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소리죽여 심호흡했다.
"별거 아니야. 생일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체면이 서지 않으니까."
"그래, 내 잘못이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즈미는 잔잔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따뜻한 꽃차의 향기가 공기 중에 퍼져나간다.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이즈미가 말했다.
"그럼 이제 네 생일을 알려줘. 그때는 나도 전공을 살려서 축하해줄 테니까."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즈미의 얼굴에 들뜬 열기가 서린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작은 마술쇼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즈미를 보며 이번에는 내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참 기대되는걸."
이미 이즈미의 반응만으로 충분했지만, 진심을 담아 그렇게 전했다. 생일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는 않았지만, 올해는 조금 특별할지도. 그런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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