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 번즈 레드

[헤번레 / 이노히사] 누구나 꿈꾸는 결혼식

sn by 송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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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4일에 썼던 프세터 백업

※ 헤븐 번즈 레드 세라프 검도 무술제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두운 식장, 오로지 단상까지 이어진 길과, 길 끝에 놓인 단상만이 밝았다.

나지막한 시라카와 부대장의 목소리가 식장을 울렸다.

"신부 입장."

스가와라 씨가 정성껏 만든 귀여운 웨딩드레스, 길게 늘어뜨려진 끝자락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츠키시로 씨의 손을 잡는다. 든든한 체형의 츠키시로 씨에게 검은 양복은 무척이나 어울린다. 그 옆에 자신도 어울리는 걸까를 생각하면 오가사하라는 자신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한 발 한 발 사뿐히 내디디며, 양렬의 불빛이 밝히는 웨딩 로드를 걷는다. 마이크를 들고 둘을 바라보는 키류 씨의 눈이 따스하다. 넘치도록 축복받고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단상 앞에 이르러 츠키시로 씨가 잡았던 손을 살며시 놓고 퇴장한다. 이제 옆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결혼 상대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가사하라는 긴장되는 마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신랑과 신부는 맹세의 키스를."

엄숙한 선언과 함께 신랑이 오가사하라의 베일을 벗겨냈다. 오가사하라도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들었다.

"역시 나의 신부는 귀엽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귀여워? 이런 말을 할 사람은 분명....오가사하라가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자, 그 앞에는 31F의 하나무라 씨가 입술을 쭉 내밀고―

"으아아악! 이건 아니에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오가사하라가 비명을 질렀다. 조용한 새벽을 깨는 오가사하라의 비명에 30G 부대원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오가사하라, 무슨 일이지?"

"정말, 새벽부터 무슨 소란인가요? 피로는 미용의 적인데."

"어라,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나요?"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부대원들에게 오가사하라가 당황해서 말했다.

"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가사하라가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다. 하지만 고민이 있으면 꼭 말해주길 바라."

"앞으로는 조용히 깨주시겠어요? 별일 아니라니 저는 다시 자겠어요."

"음. 잠에서 깬 김에 단련을 해야겠군."

"시라카와 씨, 저희도 이참에 일어나볼까요?"

"그럴까. 훈련에 어울려준다면 고맙겠다, 키류."

"부대장을 보조하는 자로서 당연한 걸요."

아직 기상나팔도 울리지 않은 새벽, 오가사하라 탓에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부대원들을 보며 오가사하라는 가슴이 콕콕 쑤시는 것 같았다. 왜 하필 그런 꿈을 꿔서…! 끔찍한 악몽을 털어내듯 오가사하라가 눈을 꼭 감고 도리질을 쳤다. 차마 부대원들을 보고 있을 낯이 없어서 결국 오가사하라도 기숙사 방을 나섰다.

타박타박 길을 걷던 오가사하라는 어느새 나비 광장에 이르렀다. 지금 시간이라면 분명 제자님도 있겠지요. 그런 예상이 빗나가지 않고, 광장에서 검을 든 나츠메 이노리가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제자님~ 이라고 시끄럽게 부르면서 참견했겠지만, 새벽의 소동으로 기분이 가라앉은 오가사하라는 이노리가 연습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며시 검에 손을 얹고, 소리 없이 검을 뽑는다. 스치는 소리도 없이 검을 집어넣었을 때는 이미 수십 개의 궤적이 표적을 꿰뚫은 뒤였다.

언제 보아도 깔끔한 검술. 살해당하는 이의 고통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검의 움직임. 과연 오가사하라가 제자님이라고 부를 만큼의 실력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들려온 이노리의 한 마디에 오가사하라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용건이지?"

평소에 제자의 앞에서는 한껏 여유를 부렸던 오가사하라가 입만을 뻐끔거렸다. 글쎄요, 제자님을 보러온 것뿐이지 다른 일은 없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 평소대로의 멋있는 스승님인 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말을 못 하는 오가사하라 앞에 검을 집어넣은 이노리가 다가왔다.

말없이 오가사하라 앞에 선 이노리는 침묵이 길어져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거린다. 이노리의 다리 중간까지 오는 검은 옷자락을 바라보던 오가사하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자님은 결혼식을 꿈꾸나요?"

단 한 마디에 단단한 무표정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변한다. 아~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기왕 말을 꺼낸 김에 오늘의 멋진 스승님은 휴업이에요! 마음을 정한 오가사하라가 말을 쏟아냈다.

"저라고 말이죠? 결혼식 따위 꿈도 꾸지 않았다고요! 검술에 모든 걸 바친 천재, 그렇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는데! 오늘 밤 꿈에 이상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제가 나오더라고요! 게다가 상대는 귀, 귀, 귀엽다느니 어쩌느니 이상한 말이나 해대는 하나무라 씨이고! 정말, 뭐냐고요! 기분만 뒤숭숭하게! 왜 하필 그런 꿈이 나와서! 아아~!"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던 오가사하라가 랩처럼 쏟아내던 말을 멈추고 숨을 헐떡였다. 고개를 들어보면 여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노리가 있었다. 그제야 올라오는 창피함에 오가사하라가 헛기침했다.

"어, 어쨌든, 이상한 꿈을 꿨더니 마음이 더럽혀졌네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저도 수련을 해야겠어요."

이노리를 지나쳐 걸어가 검을 뽑으려던 오가사하라의 뒤에 대고 이노리가 말했다.

"나도 검에 모든 것을 바친 검사나,"

생각을 말로 하는 것이 드문 제자님이 꺼낸 말에 오가사하라가 뒤를 돌아봤다. 오가사하라의 주의가 자신에게 쏠린 것을 확인한 이노리가 말을 이었다.

"검사가 결혼식을 꿈꾸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뜻밖의 말에 오가사하라의 눈이 커진다. 검사의 길에는 어울리지 않을 결혼식. 평범한 수련을 해온 검사라면 모르겠으나, 오가사하라나 이노리나 이미 그 인생에 피를 묻혔다. 그리고 그 과거마저도 끌어안고 검사로서 살아가기를 택했다.

피로 더럽혀진 여정에 꿈꾸기에는 과분한 것을 긍정하는 이노리가 낯설어서 오가사하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이윽고 이노리가 옅게 미소 지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오가사하라는 분명 귀여울 테니까."

입을 작게 벌리고 이노리를 바라보던 오가사하라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마침내 귀 끝까지 붉어진 오가사하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제자님! 이거 저 놀리는 거죠?! 귀, 귀엽다고 하면서 저 바보 취급하는 거죠?! 네?! 맞죠, 제자님! 제자니이임!"

홍당무가 되어서 팔팔 뛰는 오가사하라를 뒤에 남겨두고 이노리는 잔잔한 미소를 띤 채로 걸어갔다. 오늘은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만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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